남인(南人)은 조선 붕당정치의 당파로, 조선 중기 이후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면서 발생했다. 남인과 북인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 소론과 함께 사색당파를 형성했다.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서인과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운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1591년(선조 24년) 서인 정철이 건저의 사건으로 파직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중의 일파이다. 남인은 초기에는 우성전(禹性傳),
북인은 선조의 사망과 광해군의 등극으로 집권당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여 소수파가 되었고, 이후 동인의 전통은 인조 반정 때 서인을 지지하여 살아남은 남인이 대부분 잇게 되었다.
남인은 조선 숙종 시대에 예송에 참여하여 서인을 실각시켰으나 서인 배척 문제로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 인현왕후 폐위, 장희빈 중전 옹립, 인현왕후 복위 등으로 서인과 남인 간 대결이 주를 이루는 정국을 주도한 바 있고, 영조와 정조 대에는 이들의 탕평책에 따라 등용되었다. 이 시기 남인의 영수는 채제공이었다. 그러나 정조 사망 이후 세도 정치 아래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재야에 머물면서 17세기 이후 실학파 형성과 천주교 도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북인(北人)은 조선 붕당정치의 당파로, 조선 중기 이후 동인이 분파되면서 발생했다. 동인을 뿌리로 둔 남인과 북인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 소론과 함께붕당 정치 초기부터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었다. 서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전후하여 정여립의 사형을 주장한 서인과의 대결에서 남인은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웠고, 강경파는 북인을 형성했다. 중심 인물은
1602년에 임진왜란 때의 타협적 정책을 빌미로
1606년에는 인목대비가 선조가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치열해졌다. 선조가 1608년에 세자 문제를 결정 짓지 못하고 사망하여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광해군을 적극 지지한 대북이 집권당으로 부상했다. 이이첨과
대북은 다시 육북(肉北)·골북(骨北)·중북(中北)으로 나뉘며, 소북은 청소북(淸小北)·탁소북(濁小北)으로 분열한다.
1623년에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북인은 몰락하였고, 특히 광해군 재위 당시 집권당이었던 대북은 거의 전멸하였다. 이후 동인의 전통은 서인의 보복을 피하여 살아남은 남인과 일부 소북이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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