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Korea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군인 이동휘, 기독교 전도사로 변신하다

Four Seasons Daddy 2010. 9. 26. 19:36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군인 이동휘, 기독교 전도사로 변신하다

1909.8.29.~1910.8.29.

대한제국 참령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자신이 직접 매국 오적을 처단한 뒤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고는 고종, 이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모든 벼슬아치), 법관,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 사절,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등에게 보내는 유서 8통을 썼다.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국가를 보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사와 자결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와 관계 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 동포들에게 쓴 유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强)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함남 단천에서 지방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이동휘〈사진〉(뒷줄 왼쪽. 오른쪽은 부인 강정혜, 가운데는 부친 이승교, 나머지는 자녀들)는 10대 후반 상경하여 군인이 되었다. 청렴강직한 군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그는 민영환·이준 등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개혁당이나 대한보안회 활동을 하면서 개혁구국의 뜻을 키웠다. 친위대 장교 시절에는 친기독교적인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에 정식 입교한 것은 1905년 3월 강화부윤과의 마찰로 강화도진위대장직을 사임한 뒤였다.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가로 나선 그는 전도사 김우제의 권유를 받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 없이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길을 발견한 그는 자결하려던 마음을 바꾸고 전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캐나다장로교회의 로버트 그리어슨에게 부탁하여 무보수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강화도와 서북 지역을 순회하면서 기독교 전파와 교육진흥에 온 힘을 쏟았다. 1909년 무렵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함경도의 이동휘'는 '평안도의 안창호'와 쌍벽을 이루는 서북지역 교육지도자로 부상하였다.(서북학회월보, 1909. 10.)

1907년 7월 이동휘는 이갑·노백린 등의 무관들과 함께 고종 양위를 반대하는 무장항쟁을 계획했고, 강화도의 기독교도와 군인들을 동원한 대중집회를 주도하여 군대해산에 항의하도록 했다. 이에 연루된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없어 곧 풀려났다. '한일병합'을 앞둔 1910년 8월 3일 배일운동의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8월 29일 풀려났다. 풀려난 후 그는 기독교 전도사의 신분으로 북간도를 왕래하면서 광복단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안명근 사건에 연루·체포되어 유배처분을 받았지만, 광복단 조직은 발각되지 않았다.

1913년 국외로 탈출한 그는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3·1 운동 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는 가운데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독립투쟁을 계속하다 1935년 러시아에서 병사했다. 전통시대 군인에서 기독교 교육자로, 다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20세기 초 한반도 지식인들의 고뇌가 응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