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Korea 23

[주환성의 한국역사]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단상

우리시대의 민감한 이슈인 친일파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지식인 윤치호를 통해 친일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책이 있어 최근에 읽었는데 좋은 책이었습니다. 책값도 비싸지 않고.... 윤치호는 갑신정변 이전에 일본에서 공부했고, 갑신정변 직후에는 개화파로 몰려 중국 상하이로 피신하여 그곳 중서서원에서 4년간 유학했고 1888년에 미국 내쉬빌의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5년간 공부한 후 귀국하여 본격적으로 국내정치 무대에서 활동한 정치인입니다. 그는 19세인 1883년부터 한문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가 다시 한글로 약 1년간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미국유학시절인 1889년부터는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자그마치 5..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군인 이동휘, 기독교 전도사로 변신하다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군인 이동휘, 기독교 전도사로 변신하다 1909.8.29.~1910.8.29. 대한제국 참령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자신이 직접 매국 오적을 처단한 뒤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고는 고종, 이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모든 벼슬아치), 법관,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 사절,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등에게 보내는 유서 8통을 썼다.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국가를 보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사와 자결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와 관계 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 동포들에게 쓴 유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

강화도조약 (1876년 고종13년)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통상 조약이며,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조약이라 한다.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배경 일본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년 1월 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에서는 정한론의 기조에 따라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표면상으로 운요호 사건의 평화적 해결, 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이란 구실..

임오군란(결과 및 평가)

결과 및 평가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과는 7월 17일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청나라는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곧, 원세개(袁世凱)가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임오군란(경과)

경과 7월 19일(음력 6월 5일), 전라도 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옛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庫直)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민겸호의 하인인 군료 지급 담당자가 불손한 언동까지 하자 군병들은 격노하였다. 옛 훈련도감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에게 돌을 던지고 몰매를 때렸으며,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이 당시 군인 월급은 돈이 아니라 쌀로 지급되었다). 군병들은 자..

임오군란 (1882년 고종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 노선은 민씨 정권이 문호 개방 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갑신정변(결과와 영향)

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시켰다.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

갑신정변(전개)

전개1884년(고종 21) 청나라가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당은 청나라가 조선을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몰래 상의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무기와 자금을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시도하여 빌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과 사관생도들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때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김옥균과..

갑신정변 (1884년 고종21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배경 1882년(고종 19)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씨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보수 세력으로 되었으니,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민영익·민승호 등과 정계의 요인(要人)이었던 김홍집·김만식(金晩植)·어윤중등이 이에 속하였으며, 이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씨 일파의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일본 제국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독립당 또는 개화당이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

[주환성의 한국역사] ]"좌초한 갑신정변…그때 우린 너무 젊었다"

2004년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120주년이 되는 해. 그해 12월 4일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1851∼1894)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일단의 개화파 청년 지식인들은 우정국(서울 종로구 견지동) 개국 축하연에서 당시 집권층인 명성황후 측근세력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여기서 21세기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소설가 복거일씨(59)가 갑신정변의 핵심인물 김옥균을 역사 속에서 불러내 가상대담을 나누었다.》 ▽복거일=선생님께선 조선조 말기의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그 정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건에 대해 선생님께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균 김옥균=실패한 혁명이었죠. 그런 ..

기사환국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일명 기사사화라고도 한다.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두 번이나 상소를 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

노론과 소론

노론(老論)은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하여 소론과는 대립하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싹텄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1680년(숙종 6년)의 경신환국 때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적소(謫所)에서 돌아와, 영중추부사로 입조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인 중 소장 측에서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는 자가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金益勳)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그를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경신환국 경신대척출

경신환국(庚申換局)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로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부른다. 1674년(현종 15년)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 사건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남인을 꺼리게 하였다. 유악 사건이란, 허적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연날에 숙종의 허락도 없이 군사 용품인 유악을 빌려가자 숙종이 분노하여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했다. 이때 서인 중 김석주(金錫胄) 등은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는데, 이를《삼복의 변》이라 한다..

예송(禮訟) 논쟁

예송(禮訟)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과 9개월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과 1년설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인조 이래 서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있던 남인은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 자의대비의 복상은 서인의 뜻을 따라 기년..

조선 왕계표

조선 왕계표 1392 태조(太祖), 6년재임, 휘는 성계 위화도 회군,조선왕조건립 1398 정종(定宗), 2년재임, 휘는 방과,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물려줌 1400 태종(太宗), 18년재임, 휘는 방원, 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이됨, 조선왕조기틀을 세움 1410 1418 세종(世宗), 32년재임, 휘는 도, 태종의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장려, 훈민정음창제,측우기 해시계 등 과학기구 창제, 북쪽사군과 육진, 남쪽 삼포를 두어 외치에 힘을 씀 1420 1430 1440 1450 문종(文宗), 2년재임, 휘는 향, 인품이 좋고, 문화발달 1452 단종(端宗), 3년재임, 12살에 왕위에 올라 계유사화로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 숙종이 단종이라 왕위를 복위) 14..

남인과 북인

남인(南人)은 조선 붕당정치의 당파로, 조선 중기 이후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면서 발생했다. 남인과 북인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 소론과 함께 사색당파를 형성했다.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서인과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운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1591년(선조 24년) 서인 정철이 건저의 사건으로 파직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중의 일파이다. 남인은 초기에는 우성전(禹性傳), 이덕형, 유성룡, 김성일, 후기에는 윤휴, 허목(許穆)·허적(許積) 등이 영도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조식을 따르는 선비들은 북인을, 이황의 학파는 남인을 구성했다. 북인은 선조의 사망과 광해군의 등극으로 집권당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심의겸과 김효원

심의겸(沈義謙, 1535년 ~ 1587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척신이다. 자는 방숙, 호는 손암, 본관은 청송이다. 인순왕후(명종의 비)의 동생이며 이황의 제자로, 명종 때 급제하여 병조좌랑·부수찬·교리·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외숙부 이량이 사림들을 탄핵할때 반대로 외숙부 이량을 탄핵하기도 했다. 1572년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은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동인(東人)은 조선 시대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로,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생긴 당파의 하나이다. 사림파 가운데 기존의 훈구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이다. 선조 초 김효원과 심의겸에서 비롯된 당파로, 그 명칭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에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동인은 주로 신진 학자로 구성되었고, 이황의 영남학파와도 관계가 있다. 그 중심 인물은 유성룡·이산해 등이며, 1584년(선조 17년) 동인 득세 이후 격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다. 동인은 또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사색당파(四色黨派)를 형성하게 된다. 학문적으로는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에 기반을 두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