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Korea

[주환성의 한국역사] ]"좌초한 갑신정변…그때 우린 너무 젊었다"

Four Seasons Daddy 2010. 3. 25. 08:04

2004년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 120주년이 되는 해. 그해 12월 4일 고균 김옥균(古筠 金玉均·1851∼1894)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일단의 개화파 청년 지식인들은 우정국(서울 종로구 견지동) 개국 축하연에서 당시 집권층인 명성황후 측근세력을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여기서 21세기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소설가 복거일씨(59)가 갑신정변의 핵심인물 김옥균을 역사 속에서 불러내 가상대담을 나누었다.》



▽복거일=선생님께선 조선조 말기의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그 정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건에 대해 선생님께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균 김옥균=실패한 혁명이었죠. 그런 평가는 나를 부끄럽게 하지만, 그것을 피할 길은 보이지 않는군요. 갑신년 사건의 중요성은 그것이 이룬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온 역사적 사건들에 있습니다.



▽복=갑신정변이 불러온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조선에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고균=그렇습니다. 갑신년 사건은 일본군과 청군 사이의 충돌을 불렀고, 10년 뒤 청일전쟁을 거의 필연적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복=갑신정변의 직접적 효과는 조선에 대한 청의 통제가 훨씬 강화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청의 종주권은 대체로 명목적이었는데, 갑신정변 뒤 청은 종주권을 실제로 행사했지요. 그래서 조선은 청의 실질적 식민지로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고균=그랬죠. 우리 거사가 실패한 뒤, 청은 갑자기 주인 노릇을 시작했습니다. 정변 주역들의 노력이 당장엔 청의 위협을 불렀고, 결국엔 일본의 합병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복=만일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물론 크게 달라졌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거기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큰 피해를 보았어요. 그런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고균=변혁의 조건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실패의 근본적 이유겠죠. 전통적 사회체제는 이미 시대에 맞지 않았지만 아직 뿌리가 깊었고, 인민들은 그것을 바꿀 힘도 의욕도 아주 작았습니다. 인민혁명 대신 일본의 힘을 빌린 무력정변을 꾀한 것입니다. 인민들의 지지 없이 외국 세력의 힘에 의존해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선 소수 지식인 집단이 바로 우리였고, 그래서 갑신년의 거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갑신정변의 실패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고균=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회변혁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시도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죠. 만일 인민 다수가 지지하지 않으면, 현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방해와 반격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당시 우리는 너무 젊었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내가 서른세 살이었고, 서재필은 겨우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했고 보다 나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만큼 차분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체제 변혁을 시도하는 집단은 열심히 지지기반을 넓혀야 한다는 겁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었으므로, 우리는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의견은 다르지만 인품이 높고 능력과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적들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나선 젊은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지요.



▽복=소수의 젊은 지식인들이 그렇게 과감하게 정변을 일으키게 된 것은 일본의 경험이 모범적 선례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메이지(明治)유신’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을 격려했던 것은 분명하죠?



▽고균=맞습니다. 일본의 ‘왕정복고’와 ‘메이지유신’은 우리에겐 본받을 만한 역사적 경험이었어요. 일본의 개화가 왕당파와 막부파 사이의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피를 흘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없애주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일본과 조선은 사정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놓쳤습니다. 일본은 개항 이전엔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정권을 잡았고, 천황은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개화세력이 왕당파로 변신했을 때, 그들에겐 막부체제에 대한 대안이 있었습니다. 즉 천황에게로 권력을 되돌려서 전통적 체제와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막부를 무너뜨리는 방안이 존재했지요. 그래서 왕정복고와 메이지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엔 그런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 체제와 기득권 세력을 대표한 것은 왕실이었는데, 왕실을 대신할 혁신적 기구나 세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갑신년의 거사에서 우리는 임금을 지도자로 받들었습니다. 성공했더라도, 근본적 변혁은 어려웠을 겁니다. 전통적 체제와 기득권의 상징인 왕실을 떠받들고서 어떻게 근본적 개혁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복=19세기 말엽 조선조 말기의 지정학적 상황과 지금의 그것이 아주 비슷하다는 얘기가 자주 나옵니다. 우리가 지금 19세기 말엽의 경험에서 얻을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고균=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이 그때와 지금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은 약소국이고 둘레엔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세 강대국이 여전히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이번에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신의 역사 속으로 넣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이 사실을 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복=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 안으로 어렵고 밖으로도 어려운데….



▽고균=또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는데, 바로 미국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을 둘러싼 세 강대국의 경쟁에서 조정자는 미국입니다. 미국은 조선에 대해 영토적 욕심을 내지 않을 만큼 멀지만, 조선에 큰 지정학적 관심이나 경제적 이해를 지닐 만큼 가깝지요.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강대국은 약소국엔 늘 우호적 세력이 됩니다. 당시 조선이 독립을 지키는 길은 세 강대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도록 외교를 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안정이 자신에게도 유리한 미국으로 하여금 조정자 역할을 활발히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일은 조선조 왕실에 너무 벅찬 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요즈음 대한민국은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서 실패한 조선조의 경험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선생님은 망명 중 외지에서 암살당하고 다시 ‘대역부도’의 죄를 지었다 해서 양화진에서 참혹한 형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비명(碑銘)으로 삼고 싶은 말이 혹 있다면….



▽고균=언젠가 영국 시인 키츠의 자작 비명을 읽었을 때,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여기 누웠노라, 그의 이름이 물로 쓰인 사람이.’ ‘바로 내 비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높은 이상을 위해 열정적으로 산 사람들만이 그런 비명에 끌리는 것은 아닐까요. 고균 선생님의 이름이 물로 쓰였다고 여길 사람은 드물 터입니다. 좋은 말씀 참으로 감사합니다.

 
자료출처 : 2004/01/12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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