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Korea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Four Seasons Daddy 2010. 3. 19. 08:26

동인(東人)은 조선 시대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로,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생긴 당파의 하나이다.

 

 

사림파 가운데 기존의 훈구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이다. 선조 초 김효원과 심의겸에서 비롯된 당파로, 그 명칭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에 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동인은 주로 신진 학자로 구성되었고, 이황의 영남학파와도 관계가 있다. 그 중심 인물은 유성룡·이산해 등이며, 1584년(선조 17년) 동인 득세 이후 격렬한 당쟁이 시작되었다. 동인은 또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어 사색당파(四色黨派)를 형성하게 된다.

 

학문적으로는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영남에 기반을 두었으며, 시기적으로는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선조 때 처음 등용된 신진 관료들이 중심 세력이었다. 선조 때에 기존 훈척정치에 대한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하며 서인(西人)과 대립하였다.

 

후에 조식 학파인 북인(北人)과 이황 학파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지게 된다.1573년경 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제수하려 한 세력과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을 제수하려 한 세력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를 계기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대표적 인물로는 김성일, 김효원, 유성룡, 이덕형, 이산해, 정여립 등이 있다



서인(西人)은 조선 시대 붕당정치 초기의 당파로,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생긴 당파의 하나이다. 사림파 가운데 훈구파를 강하게 비판했던 동인(東人)과는 달리 온건파의 입장을 취했던 관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당파이다.

 

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점이 없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서인을 자처하게 된 이이와 성혼을 중심으로 학문적 계통을 형성하였다. 지역적으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의 기호지역 명문가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였고, 시기적으로는 명종 때 심의겸의 도움을 받아 일찍 정계에 진출하여 중앙정계에서 오래 활동한 선배 사림파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든든한 배경은 서인이 조선 후기 정계에서 가장 유력한 당파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학문적으로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학설에 주로 기대면서도 동인 계통의 학문적 본원인 이황의 업적을 인정하는 입장에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십만양병설 등을 주장한 이이의 실용적 기풍을 계승하여 보다 현실적인 정치를 추구하였으나 광해군 이후로는 보수적인 색채로 돌아서 주자학의 명분론과 예론을 철저히 수호하는 입장에 섰다. 이러한 서인의 기풍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573년경 이조 전랑의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제수하려 한 세력과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을 제수하려 한 세력이 서로 대립하면서, 이를 계기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초기의 중심인물은 박순(朴淳)·정철·김계휘(金繼輝)·윤두수 등이다.

 

선조 대에는 동인의 적극적 입장에 밀려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이이(李珥) 생존 시에는 대체로 동인보다 우세한 위치에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한때 동인에게 눌렸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정철을 중심으로 잠시 세력을 만회하였으나 세자 책봉문제로 정철이 파직되면서 동인에게 밀리다가 임진왜란 초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실각하였다.

 

그리고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하였으므로, 광해군의 등극과 함께 중도적인 이항복을 제외하고는 북인(北人)에게 완전히 밀려 위축되었다.이후 30여 년간 동인에게 눌려 오던 중 1623년의 남인과 손잡고 계획한 인조 반정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반정에 가담한 서인을 공서(功西), 가담하지 않은 서인을 청서(淸西)라 하였다.

 

이 때 공서는 김류, 최명길, 신경진, 이서, 구굉 김자점 등이었다. 그 뒤 숙종 대까지 남인과 병존하며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였다.공서는 노서(老西)와 소서(少西), 청서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다시 나누어졌으나, 효종 즉위 직전에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이 나서서 서인을 다시 통일하고, 동인의 일파인 남인을 억압하였다. 효종 때는 김집을 필두로 송시열, 김만중, 남구만 등이 활약을 하였다.

 

현종 때부터 남인이 점점 서인에 박두하여 서인을 위협하더니(제1차 복상문제), 숙종 때는 양파가 치열한 정쟁을 전개하여(제2차 복상문제) 마침내 남인에게 세력을 빼앗기게 되었다.1680년(숙종 6)의 경신대출척으로 세력을 만회한 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와 그 제자 윤증을 비롯한 조지겸(趙持謙)·한태동 등 소장파 사이의 불화로 마침내 서인은 노·소(老少) 양파로 분열·상쟁(相爭)하여, 그 통일적 색체를 잃었다.

 

1694년(숙종 20) 이후에는 남인은 완전히 정치의 권외(圈外)로 제거되고, 이후 조선 말기까지 노·소 양파의 정권 쟁탈을 위한 당쟁이 계속되었다.대표적 인물로는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 이항복, 정철, 송시열, 윤증 등이 있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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