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Korea

임오군란 (1882년 고종19년)

Four Seasons Daddy 2010. 3. 26. 13:08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 노선은 민씨 정권이 문호 개방 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제국과의 통상관계를 연이어 수립하고 있었다. 이 개국 정책은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이재선 역모사건을 기도, 정권 탈취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말았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화정책에 따른 제도의 개혁으로 정부기구에는 개화파 관료가 대거 기용되었으며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의 5영(營)을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하자 여기에 소속하게 된 옛 영문의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하였다.

 

옛 군영 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이 풍부하였던 흥선대원군 집정 시대와는 달리 13개월 동안 군료(軍料)가 밀려 불만은 고조되었고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군병은 민씨 정권 이후 빈번하게 일어나는 군료 미불 사태의 원인이 궁중 비용의 남용과 척신들의 탐오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군료 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 당상·병조판서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金輔鉉)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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