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Korea

갑신정변(결과와 영향)

Four Seasons Daddy 2010. 3. 25. 13:36

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시켰다.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 천진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의정했다.

 

작게는 일본 병사 150명을 철수함으로써 청나라 병사 3천 명을 철병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크게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 침략을 더욱 가속화하여 1886년 한양에는 외국 상인은 오로지 일본 상인만 남게 되었다.망명한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았다.

 

조선 정부가 갑신정변에 다케조에 공사가 연루된 점을 항의하자, 일본은 갑신정변 주역을 조선으로 송환할 것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갑신정변 주역은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일본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던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를 비롯한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의 살 길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그 와중에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과 임은명(林殷明)은 병사했으며, 살아남은 류혁로를 비롯한 박영효, 신응희, 이규완, 정란교 등은 단순한 개화파에서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