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Leviticus(레위기)

레위기 - 김근주교수

Four Seasons Daddy 2024. 8. 14. 10:32

김근주교수의 레위기,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 1

레위기는 제사관련 내용들이 나오기에 그리고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나 절기 시스템은 오늘날 교회에는 더 이상 안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레위기가 훨씬 더 접근하기가 어려움이 있겠구요 그다음에 또 하나 더 레위기가 잘 않읽히는 까닭은 우리 교회에 내려오는 전설 때문입니다. 가령  구약의 제사는 폐지 되었다. 전 이건 틀린 이야기라 생각된다. 성경은 그런식으로 표현되지 않아요. 가령 제사가 폐지 되었다고 한다면 언제 그렇게 되었느냐?   예수의 탄생부터인가요, 예수의 공생애 시작부터인가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인가요, 그럼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에 성령께서  공동체에게 강림하셨을 때인가요,  히브리서는  제사를 여전히 드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논쟁을 합니다. 구약제사가 폐지 되었다는 것은 시점을 명시할 수 없는 그런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서 제사는 폐지 되었다는 틀린 말이고 부정확한 말이고 잘못된 표현이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를 접근할 때에 유의할 점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구약제사는 폐지되었다라는 생각을 내려 놓으시고 접근했으면 좋겠구요. 두번째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은 겁나 오래된 책입니다.  2000여년 전의 시대의 일에 대하여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을 논의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약성경은 지금 우리들이 보라고 쓰여진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 부터 2000여년전에 살던  그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구속에 은혜 이걸 전하고 싶어서 레위기를 썻다는 것입니다.

근데 레위기가 우리를 위한 물론 우리를 위한 책이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 보라고 애초에 의도되었던 저자가 의도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 그래서 수천년 전에 고대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늘 유념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야 성경의 글자가지고 오늘 우리시대에 바로 적용 해버리는 이런 오류들을 범하지 않게 되요.  고대시대에 과학이나 문학을 가지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이런 말씀은 우리시대의 과학과 문학과 시대에 어떻게 표현되면 좋을지 이게 성서해석자가 해야될 일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생각해야될 건 레위기 독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이 독자들은 누구냐 자급자족하는 자연농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어진 논밭을 농사지어서 자기 식구가 먹고 사는데에는 문제가 없는 자연농이구요, 자연농에게는 몇명의 종이 있습니다. 이 종은 외국인들이에요. 이스라엘 땅에 흘러 들어와 그 땅에 살게된 이방인 종들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기본값이 자급자족하는 자연농이면서 그집에 몇명쯤의 종이 있는 이게 레위기 말하는 딱 표준으로 생각하며 그려가는 전제하면서 레위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읽을 때 전제된 것 3가지,  제사가 폐지되었다는 말을 내려 놓으시라, 레위기 오늘 우리 사회를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라 고대사회 수천년전의 사람을 위해 쓰여진 글이라는 것, 세번째 그래서 레위기는 수천년전에 고대 이스라엘을 살아가던 자급자족하면서 노예를 몇명 거느린 자연농 이 사람들을 염두해두고 쓰여진 글이라는 것 

성경을 읽을 때 단락나누기가 중요함. 1장부터 27장까지 방대한 양의 레위기가 있지만 이것 전체가 내용이 나뉘어 질 수 있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대체로 레위기 연구자들은 1장부터 16,17장부터 27장 이렇게 두 덩어리로 나눈다. 27장은 부록의 형식으로 1장의 내용과 맞아서 레위기는 일종의 반지구조이다.  레위기는 1장에서 16장 17장에서 26장 그리고 27장 이렇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다. 

1-16장의 핵심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런 것을 예배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마음을 제사라는 것으로 표현하도록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1장-7장까지는 제사에 대하여 설명을 해요 그 5대제사는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속건제 이렇게 5가지 제사가 레위기 1장부터 설명되어 있구요 대체로 1장부터 5장까지는 평신도(제사장이 아닌)의 5대 제사 규례입니다. 정확히 1장부터 6장 7절까지, 6장 8절부터 7장 마지막절까지제사장을 위한 5대 제사 규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이렇게 번제나 속죄제를 드리려고 성소에 나아오면 그럼 제사장은 그 절차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관점이 달라지는 거죠   

그럼 누가 제사장이냐, 제사장 직분을 어떻게 누가 수행할 것이냐? 그래서 레위기 8,9,10장에서 3장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첫 제사장 위임식  처음으로 제사장으로 세워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요사람들이 처음 제사장으로 요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제사는 특이하게도 모세가 집전을 해요. 그렇게 해서 처음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 제단 모든 것을 다 태웠더라, 그다음에 그 이후로 제사장들은 제단에 붙은 불, 하나님이 태우셨던 그 불을 꺼지지 않게하는 그런 사명들이 생기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 언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제사할 수 있느냐? 언제든 나아갈 수 있는데, 때로 나아갈 수 없는데, 때로 나아가면 안되는 때가 있습니다. 부정해졌을 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부정하게 되었을 때는 성전에 나아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다음에 나오는 거는, 그럼 언제 부정해 지냐? 그리고 만약에 부정해 졌다면, 어떻게 그 부정을 바로 잡아야 되냐? 하는 내용들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11장부터 15장까지정결 규례 라고 이름을 붙친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가 준비되고 제사장 세워졌고, 예배자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자 16장부터는 속죄일 규례를 16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16장은 속죄일입니다. 일년에 매년에 한번 일곱째달 열흘되는 날, 속죄일에 아론이라는 대제사장이 이끄는 장엄하고 거룩한 의식이 거행이 되는것 이지요.  수 염소 두마리를 끌고 와서는 한마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리고한마리는 아사셀에게 보내는 이러한 의식들이 거행이 되는 것이 있지요. 수염소의 속죄제를 통해 성전이 깨끗하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던 부정들이 깨끗하게 되는 게 있겠구요, 그다음에 또 한마리 수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냄을 통해 이 백성들에게 있던  모든 죄악과 더러운 것들이 치워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마리로는 성소가 정결하게 되고, 또 한마리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공동체의 죄와 부정을 하나님이 그 염소에게 뒤집어 씌워서는, 전가시키는 거죠, 전가시켜서는 하나님은 이 염소를 누군가가 저 먼데로 끌고가서 광야까지 끌고가서 그 염소를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속죄일에 이루어지는 일 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일은 일종의 리셋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죄일은 일종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리셋인거죠  모든 죄가 원점으로 모든 성소의 더러워졌던 것이 원점으로 그점에서 속죄일은 이제 새로 시작이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순결함을 회복했으니 이제 하나님과 함께 걷겠습니다. 요게 속죄일이죠  그럼 17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럼 우리 어떻게 살아갈가요? 그러니 17장에서 26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일상을 거룩하게 살것인가 

그래서 16장까지는 하나님의 은헤로 그 백성이 회복 됨이라는 점에서 레위기 구조는 명확해요 은혜로 시작하는 구나. 하나님이 리셋시켜주시는 그 은혜 때문에 이스라엘이 존재하는구나. 1-16장은 은헤로 시작되는 것을 말해주구요, 17장부터는 합당한 삶입니다. 이거 신약적인 표현으로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 성도의 거룩한 삶이라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바울의 모든 쓴 글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 로마서 같은 경우 1장부터 11장까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로움을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는데 산 제사드려라 너희 몸을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3장까지가 은혜에 대해서 4장1절 부터는 그럼 어떻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바울의 글들이 다그러하죠, 우리 신앙전체가 그러하죠,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되는게, 교회내에 전해져 내려오는게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 이런 헛소리, 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전해져 오면서 구약을 하나님 말씀을 능멸하고 함부로 취급하는 일들이 교회안에서 저질러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당장 레위기 짜임새만 봐도 1-16장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 17-26 그에 합당한 삶 이라는 점에서 이미 레위기 안에 복음과 율법이 다 들어 있구요.  그래서 바울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은 바울이 발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구약안에 있는 글을 A.D.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 맞게 표현을 한것, 그것이 바울의 공인 것입니다.  이신칭의는 결코 바울의 작품이지 않습니다. 은혜로 거듭나는 삶은 결코 신약성경의 작품이지 않습니다.  당연한게 우리 하나님의 성품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을 생각하면 결코 그렇지 않을 거다 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마지막에 제자들을 만나 한말씀 하실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 나를 가르켜 기록된 것' 이렇게 표현하시면서, 그리스도가 와서 고난을 받고 죽은지 3일만에 부활하고 그에 이름으로 말미암는 회개가 유대,예루살렘으로 부터 온 열방까지 이르게 될것이 기록되었더라고,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가 새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이 대단한 두분이 신약성경없이 구약말씀으로 살아가셨다는 거 그거 염두해 둘 일이다입니다.     레위기를 접근하면서  구약자체에 대하여 훨씬 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입니다.

전체적인 레위기 짜임새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었고, 그다음에 각 부분들을 간단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마지막을 정리첫번째로 제사입니다. 1장-7장까지 모든 제사의 공통되는 점은 1장1절레위기 제사법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장2절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모든 예물드림의 원칙은 자원입니다. 지가 하고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절대 예배는 강요될수 없다. 1장2절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 소,양,염소,비둘기, 오로지 이 4가지 동물만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 수 있었어요. 너무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도 지 멋대로 드려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되 하나님이 정하신 것, 이 4가지 예물의 공통점이 가축입니다. 너의 사유재산인 가축으로 드려라. 그래서 가축중에서 드린다는 것은 내 피와 사랑과 눈물과 정성 이 것이 다 들어간게 가축이란 말에 의미일 것다 싶은것이 있습니다. 문화가 달라져서 집에서 가축을 기르지 않아요,  니거 중에 드리라는 것이구나, 니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간거 그것 중에 드리라는 것이구나. 이게 레위기 1장2절이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레위기 제사는 폐지되지 않았다, 형식이 바뀐 겁니다.  예배 형식은 바뀌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소를 드리고 누가 비둘기를 드리는가 입니다. 4장에 가면 평신도들이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릴때 암컷 어린양이 속죄제를 드릴 때 기본 값입니다. (4:32) 혹은 암염소 (4:28) 근데 문제는 5:7절에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비둘기를 드려라 라고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가난하면이겠구나 입니다. 경제형편이겠구나로 발견하게 됩니다.  5:11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비둘기도 어렵냐 그럼 가루해.  이거 참 놀라운 일이지 않습니까? 

속죄제는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이지 않습니까, 번제는 그렇지 않아요  화목제나 소제도 마찬가지지만, 속죄제나 속건죄는 뭔가 문제가 있어서 드리는 제사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 유명한 원칙 있잖아요 레위기에도 나오고,신약에도 나오는게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다. 이거 아주 중요한 제사 원칙이 있고, 이거 히브리서에 가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과 연관되 히브리서 기자가 이 원칙을 천명하면서 주님의 보혈의 권능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라는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그래 가난해 그럼 가루해 라고 하십니다. 가루에는 피가 없어요. 그래서 고운가루 속죄제는 굉장한 제사입니다. 제사의 효력이 피에 있지 않구나,  그럼 사죄의 효력은 어디에서 오는 건가요? 우리 자칫 그렇게 생각해요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는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히브리서에서 얼핏 그렇게 이야기해서, 이거 그렇게 볼일은 아닌 것이지만, 어느시대건 간에 동물피로 용서 받는다라는 말이 않되는,  5장11절이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사죄의 효력은, 속죄제라는 제사를 드리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 효력은 어디에서 오냐, 절대 동물의 피에서 오지 않아요, 어디서 오나요 하나님의 은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속죄제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정결케하는 것이지 동물의 피 따위가 고대 사람들의 죄를 정결케하지 않는다라는 거, 증거는 뭐냐, 고운가루 속죄라는 겁니다.  

이미 구약때에도 은혜로 죄사함을 받아요. 제사드려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구요. 우리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고 하지만, 이미 예수님과 동시대에 않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천년전에 우리는 그분의 피 한방울도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 그거 고백해요 예수의 피가 날 살게 한다고, 보혈찬송을 지금도 우리가 마음 뜨겁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의 보혈을 찬송할때 마다 실제로 우리가 찬송하는 건 무엇인가요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게 수많은 보혈찬송에 본질적인 내용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한가지 더 예배자가 가난하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차이가 있을까요, 번제는 비둘기까지 있구요. 속죄제는 가루까지 있습니다. 아까 제가 제사의 근본은 자원이다 라고 했는데요, 근데 앞에 3가지 번제,소제,화목제는 그야말로 자원이라서 그냥하면 되고요 하기 싫으면, 번제소제화목제 한번도 않드려도 되요. 죄이지도 않고, 완전 자발이니까요, 근데 속죄제 속건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건 죄가 문제가,뭔가 문제가 되어서 잘못이 되어 버렸고요, 잘못을 했고 잘못을 깨달았잖습니까, 회개하지 않겠다면 그럼 아무상관도 없겠지만, 회개를 할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드려야 할 제사가 속죄제와 속건죄입니다.  일종의 의무적인 제사, 기본적으로 자원적인 제사이지만, 입니다. 속죄제 속건제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되는 제사이다 보니 예배자의 경제 형편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돈이 없어서 하나님께 못나가는 일은 없어야 된다는 취지가 있겠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절대 내 형편껏 해야한다. 내 힘에 넘쳐서는 않되는 일이다.  자기 형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우리에게 요청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출처] [2019 주성교회 1박수련회 강론] 레위기의 5대 제사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작성자 불편한 진리

 

김근주교수의 레위기,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 2

번제의 특징이 뭐냐?  1장9절에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가죽 말고는 전부를 태운다는게 번제의 특징입니다.  1장4절에 번제를 드렸는데 속죄가 될 것이라 라고 이렇게 나왔는데,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번제는 속죄기능이 있다 입니다. 그럼 속죄제와는 어떻게 연결되는 거지, 속죄가 된다. 히브리 말로는 '키페르' 는 논쟁은 많지만 저는 '대신하다','대체하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다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번제는 뭔가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 할때, 사실 정말 드려야 할 것은 뭐냐, 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만 나를 죽여버리면 끝이 잖아요 그럼 어떻게, 나를 대신할 존재 그래서 자신을 대신할 적합한 존재가 무엇인가요, 우리집에서 자란 그 소,양은 나를 대신할 만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다음 또하나가 4절에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라고, 안수는 왜 하는 것일까요 , 안수하다는 여기에 히브리어로 쓰인 동사가 기대다, 안수하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뜻으로 쓰인 것도 있습니다. 그의 머리에 기대다라는 동사를 쓴 것입니다. 아마도 고대시대 때에는 소를 끌고와서 눌렀다.  소의 머리를 세게 눌렀다. 왜 그렇게 할까요, 자기 체중을 그 소에게 실어서 이소는 이제 소가 아니라 저예요 저는 그 뜻이라는 거지요, 그럼 결국 자기 형편에 맞게 골라야 하는것, 자기 가축 중에 골라야 하는 것, 자기 몸을 실어 눌러야 하는 것 이 세가지가 일치되게 말하는 건, 이제부터 이 양은 양이 아니라 저예요 저를 찢어 바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열어놓은 길이 너가 키운 양을 이렇게, 예배자가 직접 찔러 죽이고 다 잘라서 쪼개서 그러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뭔가요  예배자의 전적 헌신입니다.  롬12;1  바울이 염두한 것은 무엇이냐, 전 레위기 1장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너의 삶의 전부를 드려라 그래서 구약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건 소가 아니라 예배자라는 걸 이미 구약안에 명료해요 그래서 이사야 1장 보면 너희가 드리는 무수한 번제가 무슨 소용이냐,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다. 내가 언제 너희보고 이런거 가지고 오라했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소가 아닌 예배자입니다. 예배자의 삶입니다.  시편 51에 다윗과 밧세바 사건 이후에 다윗이 드린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제사는 사라지지 않고  형식이 바뀌어 예배로 드려진다. 

속죄제, 4장2절에 여호와의 금령(하지말라고 금하신 것을 하나라도 했다면) 중 하나라도 그릇(부지중에) 범하였으면, 의도적인 죄까지 확장이 됨, 의도적인 죄라 할지라도 깨닫고 인정을 한 죄에 대하여  1장 27~28절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주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레위기는 겁나 이상적이다. 

레위기 전체가 출처가 어디인가, 야훼의 하나님 그래서 비극입니다. 레위기 체계가 작동이 안되는 건, 교회가 전적타락설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각시킨다라기 보단 죄악을 합리화하기 우리교회가 이 모양된 걸 합리화하는 도구가 되는게 그 망할놈의 TUIRP 꽃 이다 싶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이런 것들이 너무 괜찮은 교리인데 실제로 하는 역할은 무엇이냐, 교회의 부패를 당연하것으로 여기고, 교회안에서 온갖 참혹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저도 괜찮아요. 그냥 살아갈수 있겠더라고요. 이게 말이되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게 있습니다.  

5장은 속죄제를 언제드려야 되는 지를 좀더 자세하게 5장 1~4절에서 설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지나왔지만, 번제,소제,화목제 들은 언제 이런 제사를 드려야 할지를 설명을 안해요, 근데 속죄제는 5장 1~6절  겁나 많다. 5장 14절부터 속건제가 나오는데, 6장 1~3절에서 속건제를 언제드리는 지를 나오는데,  왜 번소화는 설명이 없지, 언제드려야 하는지에 설명이 없구요, 속죄제나 속건제는 설명이 길어요, 이거 뻔한 것입니다. 낯설어요, 속죄제 속건제가 너무 낯설다보니 언제 이런게 필요한지 설명서가 필요한거죠.  성경에도 속죄제나 속건제가 나오는 곳이 적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는 속죄제와 속건제는 잘 안드려 진 것 같다라는 짐작들을 해보게 되는게 있습니다. 

4장26절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이 표현이 26절,35절,그리고 5장에도,6장에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속죄제나 속건제를 제사드리면 사함을 받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근데 전 아닐거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5장5절 때문입니다. 속죄제의 기본은 뭐냐 모르고 한겁니다. 내가 부지중에 해서 몰랐구요, 혹은 알았지만, 그냥죄를 저지르고 나중에 자복하는 그래서 5장5절에 자복하는, 하나님 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가 있더라는 거죠, 그러고는 합당하게 제물을 골라서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리더라라는 것입니다.  

11장12장에 가면 정결규례라고 있지 않습니까, 정결규례른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정해야 하는데, 부정한 상태이면 못나가는 것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이랑 닿게 되면 부정이 퍼져요 그래서 이사야 6장에 보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있으면서 여호와를 뵈었도다.  부정한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을 봤다고 생각하니 이사야가 딱 말하기를 나는 죽었구나. 이런 것이 구약적인 딱 구약제사방식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부정하면 그것을 회복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죠. 그러면 5장5절에 제사드려서 정해진다면,  이사람이 하나님앞에 나아가기 전까지 부정한 상태입니다.  부정한 존재가 하나님께 드릴 예물, 이 소는 하나님께 드릴려고 가져가는 순간 성물이 되었습니다. 이 소는 바꾸면 안되요. 근데 부정한 존재가 성물을 끌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로 간다는게 맞는 말인가, 5장5절이 저에게는 힌트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아무일에 잘못하였다 자백했을 때 이미 그와 하나님 관계는 회복되었다라는, 이미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예요, 제사로 용서을 받는 것이 아니라 .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  5장5절 '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그러면 용서받고 끝나는 건데 왜 성전에 가나요, 공식적인 확인 이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죄를 고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우리 서로서로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우리 공동체 안에 꼭 필요한 모습이다 싶습니다. 공동체 안에 누군가에게 듣게되는 사죄의 선포가 이미 우리가 계속 이미 해결되었는데 죄의 사슬이 나를 묶게되는데, 그 사죄의 선포가 그의 죄의 사슬을 끈어버리는 것이 있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을 공식화 하는 겁니다. 너는 죄의 종이 아니다라는 것, 너는 이미 지은 죄는 값이 지불되었다는 것,  빚진게 하나도 없다는 걸 공식적으로 선포해 줄때 저는 그게 예배자로 하여금 자유한 삶을 살게하고, 당당한 삶을 살게하고, 공동체 전체에게 하나님과 해결이 되었구나 하는 걸 확인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는 무엇이냐  사죄의 공식화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속죄제를 드려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속죄제를 드리면 이미 하나님이 용서받아서 정하여진 사람 그래서 예물을 드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당신의 죄가 사함 받았노라 공식적으로 선포함에 따라 다시는 그런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지 마시라 요게 있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속죄제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너 더이상 매어서 살지 말라고, 너  더이상 눌려 살지 말라고, 결국  속죄제는 개인적 삶의 리셋이구나. 너 이제 기본값을 회복했어. 너 이제 얼마든지 담대하고 용기있게 살아가라 그게 속죄제 였겠다하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인 삶의 속죄제가 개인적 삶의 리셋인거구요, 민족 전체를 리셋 시키는 것이 16장에 나와있는 속죄일 이겠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새출발입니다. 계속 다시 새출발할 수 있게 하고 이런 거죠. 우리 레위기 16장의 속죄일이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속죄일이 그러니까 은혜였구나, 이 백성으로 하여금 늘 새출발하게 하는 은혜였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게 속죄제였습니다. 

번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적헌신, 속죄제가 말하고 싶은 건 죄로 부터의 자유 

레위기 8,9,10장에 제사장이 위임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근데 여기 끔찍한 것이 있지요, 10장에 나답과 아비후 첫 제사장들이 이 잘못해서 죽임을 당하는 이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레위기 전반부 1에서 16장에서는 10장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즉사하게 되는 일이 있구요. 후반부 17장에서 26장까지 에서는 24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평신도 한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들을 저지르고 공동체 전체가 돌을 던져 죽였더라 이런 내용이 24장에 있습니다.  제사장과 평신도의 죽을을 통해  하나님 앞에 살아간다라는게 이 무한하고 풍성한 자유이지만, 하나님의 법도가 있더라는 것. 그거 양쪽에서 아주 강조하고 있는것이 있지요. 

11장부터 15장까지가 정결규례가 있습니다. 11장의 정결규례가 유명한 대응이지요, 왜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고 하신걸까, 있습니다. 일단 집고갈것이 12,13,14,15에서 이야기 하는 부정은 제의적부정입니다. 제의적(cultic) 부정이기 때문에 도덕적 부정이 아닙니다. 제의적부정은 죄는 아니지만, 거룩이라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걸림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제의적 부정에 대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기 보다는 절차가 필요해요. 이런 저런 절차를 거치면 무조건 원위치, 정결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겠다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15장은 도덕적부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제의적 부정을 다룬다는 것, 이거 일단 유념할 필요가 있구요.

왜 돼지고기 먹지마라 했을까?  대체로 학자들에게는 문화인류학적인 이유가 있다. 고대 사람들이 생각한 정,부정이 있다는 거죠, 있어야 할 곳이 있지 않은 것, 절대적 판정이 아닌, 관계적 판정,  11장 43~45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그래서 레위기 저자들에게는 성도의 구별된 삶 이게 말하고 싶은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별된 삶을 살아야되, 그런 구별된 삶을 수천년전의 고대사람들은 있어야 할 영역에 제대로 있는 것들은 먹어도 되는 것들, 그런데 영역을 넘드는 것들은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 도마뱀은 더러워나 혐오스러워가 아니라, 도마뱀으로 상징되어지는 바, 넘나드는 것에 대한 거부, 소로 상징되는 바, 소가 착해서,온순해서가 아니라, 전혀 그런것과 상관없습니다.  구별된 삶을 표현하고 싶어서 고대의 제의 체계를 활용했다는 것,  그런 우리는 레위기 11장은 절대로 폐기된 말씀이 아닙니다. 레위기 11장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이고요,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고대제사는 이렇게 구별된 삶을 표현했다면, 지금은 21세기를 살면서 성도의 구별된 삶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그게 우리가 해야할 고민이고, 그게 레위기 11장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드리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성도의 거룩을 이루어 갈것이냐, 이게 관건입니다.  

 

 

김근주교수의 레위기,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_3부

레위기 12장의 산모의 정결규례, 남자아이를 나으면 40일동안 부정, 여자아이를 낳으면 80일간 부정 그러고는 성전에 찿아가서 속죄제를 드린다.  왜 여자아이를 낳으면 2배나 부정하지?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고대인들은 본문은 성차별적인 본문이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그런생각들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왜 속죄제를 드리라는 거지? 12:7 '...속죄할찌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 속죄제를 드린 결과가 사함이 아니라  정결이구나. 아하, 속죄세는 죄문제 때문에 드리는 것 뿐만아니라. 정결때문에도 드리는 구나. 그 다음에 13장14장에서는 나병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병환자가 나았을 때도, 왜 속죄제를 드리지 싶은데, 나병환자가 속죄제를 드리면 정결하게되는 이런 변화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레위기안에 있는 속죄제는 2가지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게하는 기능, 죄의 용서를 공식화하는 기능이 있는가 하면, 정결케하는 기능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15장에 가면, 15장은 남자와 여자의 정상적인 유출과 비정상적인 유출을 다룹니다. 남자의 비정상적인 유출은 요즘날로 말하면 성병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부정, 어디에 다아서도 안돼고, 이런저런 부정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람이 낳았으면, 제사를 드려서 일단회복 이렇게 되고요. 그 다음에 남자의 정상적인 유출도 다룹니다. 그게 성관계 후에 사정, 그 직후는 부정하다, 바로 성소에 가서는 안되고, 이런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 다음날 아침이면 저절로 회복되는게 남자의 정상 유출이구요. 그 다음에 15장은 세번째로 다루는 게 여자의 정상적인 유출입니다. 생리예요, 그래서 레위기는 여성이 월경을 하는 7일동안 부정하니까, 성소에 가서는 안되고 누구 닿지않아야되고 이런 이야기들이 있고요. 이것도 7일이 지나면 저절로 정상으로 복귀하는 거구요. 마지막으로 여자의 비정상적인 유출은 월경기간이 아닌데도 계속해서 하혈을 하게될때, 신약성경에는 혈누증이라고 표현한 병인거죠.  비정상적인 유출은 낳은다음에 속죄제를 드려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구요. 정상적인 유출은 시간만 지나면 그냥 복귀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성의 월경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레위기는 그것을 부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 법은 부정이라는 말을 규정함을 통해 이 여성을 보호한 것이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월경기간에는 여성들이 감염등의 몸이 취약하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지말아야하는데, 레위기는 전혀 그런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월경중에 성관계하면 뒤져 자식아, 이런 말씀을 15장에 언급하고, 18장 언급하고, 20장에서는 처벌규정을 언급해서, 저는 레위기안에 여성성에 대한 보호가 있구나. 뭐 이런 생각들을 해보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는 여성을 어떻게 보호하고 존중할 것인가, 그게 레위기 15장을 읽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깨달음이겠다 싶은 것이다. 

16장 리셋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앞에 새 출발하는 구나. 해서 17장부터는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을 다룬다라고 그렇게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레위기 연구자들은 17장부터 26장을 일러서 성결법전 이런 멋진 별명을 이 책에다 붙혀 주었습니다.  성결 즉 거룩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고 있는 법전들이다.  그래서 17장이 재물과 피를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 하나님의 거룩한 삶에 궁면에는 제사도 있겠죠, 그래서 레위기 특징이 똑같은 제사규례인데, 16장까지의 제사규례가 나올 때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지, 그런 입장에서 제사규례를 다루구요. 17장부터 26장까지의 제사규례는 일상을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가지, 이런 측면에서  제사문제를 다루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거룩, 히브리어의 거룩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분리 이게 거룩이라는 말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구별되었다,분리되었다, 쉽게 말하면 다르다 이런게 되겠구요, 나에게 친근하지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경험하는게 거룩의 경험, 근데 성경에서 오직 거룩은 하나님 한분만 구별되고 분리된 그런 존재 인것이죠. 그분 스스로가 내재적으로 거룩해요.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구별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근데 나머지 모든 것은 관계 때문에 거룩해져요  그래서 하나님 말고 나머지 거룩을 관계적 거룩,혹은 파생적 거룩 이런 식의 겁나 심란한 말로 표현하는 거죠. 가령 이스라엘은 전혀 거룩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근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백성이니, 이 관계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성민인 겁니다. 가령 나는 성도, 내가 거룩한게 아니고 난 하나님의 사람이다 보니 그리스도인은 성도가 되는 거죠. 

그래서 17장부터 26장까지 레위기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그러니 이게 하나님의 관계 때문에 거룩해졌고, 이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은 이미 거룩한 백성이예요. 그런데 17장부터는 하나님의 계속해서 거룩해라 명령도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16장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이 주어진 거룩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을 향해 거룩한 삶을 살아라. 구별된 삶을 살아라. 그런 명령들이 17장에서 26장의 취지라고 우리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들을 읽어가면서, 뭐가 구별된 삶이지, 어떻게 살아가는게 거룩한 삶이지, 이런 것들을 우리가 17장이하에서 기대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장에 재물과 피 먹지 말라하였습니다.  18,19,20장은 독특합니다. 18장에 나와 있는 것이 16절 근친 성관계를 금지하는 말씀, 매우 특이하죠 그다음에 20장에 가면 거기도 역시 18장에 나온 것을 거의 되풀이하는 근친성관계를 금지하는 말씀이 있고, 18장과 차이라면, 근친성관계 하지마, 그건 나쁜짓이야, 20장에 오면 근친성관계 하지마, 넌 죽었어, 다름점은 처벌규정이 계속 나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요.  18장은 이것은 잘못이야, 20장은 이런 잘못을 저지르면 이렇게 벌을 받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짝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레위기가 짧은 장 수 중에 근친성관계에 규정을 두번이나 적었을까, 싶은 것입니다. 우리랑 관심사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라면, 성도의 거룩한 삶이라고 할때, 성관계이야기를 더군다나 근친 성관계 글쎄요 이참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아마도 고대세계에 근친 성관계가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거다라는 것이구요 

근데 이렇게 배열되는 통에 19장이 가운데 끼게 된거죠, 이게 문학적인 기법이 되는 거죠, 양쪽에 대칭을 두고 가운데다가 둬서 19장을 부곽시켜 강조되는 이런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19장이 핵심인 걸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입니다. 해서 19장에 초점을 두게 되는게 있다싶은거죠.  

19장 2절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아에 대놓고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이 표현도 독특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거룩한 개인, 그런데 19장의 명령은 개인한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거룩을 들어야 하는 대상이다라는 것, 그리고 너희는 거룩하라 이거 뭔가요 거룩은 공동체적인 차원을 지니는구나. 라는 것을 19장이 혹은 레위기가 계속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룩은 지 혼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루는 일이다 라는 것이 레위기가 그리고 구약성경이 말하는 참 중요한 차원이라고 생각이 되구요, 그다음에 19장에 3절부터 거룩한 삶이 내용일 뭔지 기대하게 될텐데, 37절까지 예배관련 규정도 있고, 이웃과의 관련 규정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19장에 잡다하게 모여있어요. 레위기 19장의 거룩은 한 영역에 국한하지 않은 거예요. 거룩은 잡다하다라고 말하는 게 딱 맞아요, 삶의 모든 영역과 연관된게 거룩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은 예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게 빠져버리면 병든 영성입니다. 그런데 이게 영성깊은 것 처럼 여겨지고 있다. 저는 이게 우리네 영성을 병들게 만드는, 일부를 전부인 것 처럼 왜곡한 더 심각한 잘못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2절에 너희는 거룩하라 하시는데, 이유가 뭐냐,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 거룩함의 기준,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은 광야내내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시내산의 광야생활 초기, 노예근성에 쩌른 그들에게,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잡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구요. 마태복음 5장에 그 유명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요, 5장 마지막에 가면, 이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은 단계적교육 그런거 없이, 처음부터 노예근성에 쩔어있고, 어제까지 물고기 잡던 제자들 향해, 애초부터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애시당초부터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도록,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닮도록 부름 받은 자, 그게 하나님백성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싶은 것입니다. 

9~10절은 농부에게 요구되어지는 거룩은 농사 추수할 때 다 줍지 않는 것, 그 다음에 밭의 한 모퉁이는 아예 남겨둬버리는 것,  왜 그렇게 하나요, 10절에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  공통점은 땅이 없는 두 집단, 그 사람들도 그것으로 추수하고 살아가더라 입니다. 이게 농부의 거룩이예요. 농부의 거룩은 그의 기도로 나타나지 않아요,그의 성경,말씀묵상,전도로 나타나지 않아요, 모퉁이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얼마큼이나 남겨놔야 하나요, 최소 1/60, 모퉁이 사이즈를 정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크기는 너가 알아서 해라, 내 기도빨, 말씀묵상의 깊이, 나의 경건의 깊이,기도의 깊이가 무엇으로 나타나는 가 하면, 내가 남긴 모퉁이로 나타난다.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만나자 너무 기뻐서 자기 재산의 절반를 내놓았어요, 그에게는 그게 모퉁이 인거죠, 사도행전 2장에 가면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공동체가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나요, 자기 가진 것 전부를 다 팔아서 교회앞에 내어놓고 사도들이 그것을 팔아서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더니 공동체에 핍절한 자가, 가난한 자가 한명도 없었다. 결국 내어놓은 것이 어디에 쓰였냐면, 분배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라는 점에서, 어러 이 모퉁이와 연결된다 싶은 거죠. 성령충만은 모퉁이 사이즈로 나타난다라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입니다.  그럼 상상이 가잖아요, 그 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는 이 이스라엘이 믿음이 깊어지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다 좋아할 거예요. 저 사람들이 교회를 열심히 간다. 성경을 겁나 열심히 묵상한다. 그 동네 외국인 노동자들은 진짜 기뻐할 거예요, 저 사람들이 은혜받으면 받을수록, 믿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모퉁이가 커지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들은 정말 기쁠것입니다. 

대한민국 개신교 교회가 성도가 넘처나면, 새벽기도 겁나 세게하고, 24시간 예수님 바라보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기뻐하냐라는 것입니다. 안기뻐하잖아요, 그딴 식으로 24시간 주님을 보지 마라 입니다.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정체성이 아슬아슬한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기도 많이 하는게, 하나도 않기뻐요, 하나도 유익이 되지 않구요, 그딴건 뻔한 거예요, 그런건 경건이 아니거구요, 거룩이지도 않습니다. 종교적인 놀음인것입니다. 레위가 말하고 싶은 건 나의 거룩은 모퉁이의 크기로 표현된다는 것 이거죠.   

 

 

김근주교수의 레위기, 어떻게 읽고 적용할 것인가?_4부

근데 모퉁이 남기려는데 쫄리잖아요, 근데 자급자족하는 자연농입니다. 근데 내년에 흉년이, 고대 사회에는 흉년이 겁나 많았어요. 물 관리가 잘않되면 흉년이 나버리고, 아니면 전쟁이 나버리면 내년을 기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야되는게 저축이잖아요, 왜 저축해야 하냐면, 미래가 불투명하다보니 계속 저축해야되는 일이 있는데, 근데 모퉁이를 남기자니,  내년에 흉년나면 어떻하지, 말아먹는 것입니다. 그럼 모퉁이 남길때 덜덜 떨리는 거죠, 19장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가 16번이나 쓰였습니다. 왜 여기 이렇게 많이 쓰였겠습니까, 쫄지마라는 겁니다

13절에 가면 억압과 착취라는 말이있습니다. 이거 고용주이지요, 고용주에 거룩은 뭔가요, 되도않게 아침에 사원들 대리고, Q.T.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딴게 거룩이지 않다가 13절에 말씀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고용주의 거룩은 무엇인가요제시간에 지급된 제대로 된 품삵, 돈이다라는게 19장13절이 가진 굉장한 말씀이구나 싶은 것이 있죠.  그거랑 비슷한게 신명기 24장 14~15절 입니다. 거기에도 역시 품꾼을 고용하면 당일에 주고, 해지는 후까지 미루지 마라이런 말씀이 있어요. 왜 그러냐하면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삵을 간절히 바라느니라, 그가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히브리 말로는 '그는 그의 생명을 품삵위에 두고 있다' 이렇게 히브리말로 표현했습니다. 온통 이 노동자의 목숨이 그 품삵위에 달려있다, 그러니 제시간에 품삵줘라, 제시간에 주지 않는 것이 13절에 억압이고 착취이다 라는 것입니다. 

15절에 가면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간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재판장의 거룩, 되도않게 Q.T., 묵상 이런소리 하지마라입니다. 판결입니다. 판결을 하자니, 쫄리잖아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예배,기도,Q.T.인 것입니다. 이것을 하면할수록 심령이 담대해지면, 재판에 연루된 사람의 낯짝을 보지 않고, 판결할 수가 있겠다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에 가면, 33절에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여기서 외국인은 살길이 없어서 흘러들어온 그야말로 밑바닥입니다. 그런 외국인을 34절 '동포같이 여기고 자기같이 사랑하라' 굉장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우리도 죄인이였다가 예수의 피로 은혜받았잖아요, 적어도 한국교회는 난민에 대하여 우호적일 것, 그러면 개신교가 세상이 빛이고 소금이지 않겠습니까, 그럼 세상사람들이 왜 개신교 교회가 세상속에 존재해야 하는지, 저 교회가 이 나라에 왜 있어야 하는지가 명료해 지지 않겠습니까, 

35절에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요거 상인이죠.  상인의 거룩은 뭔가요, 가게 문열때 기도하기 이딴거 아니예요, 가게 문열때 예배하기 이딴게 거룩이지 않습니다. 공정한 저울과 추,  팔때나 살때나 같은 저울, 남에게나 나에게나 공평한 저울, 나에게나 남에게 같은 잣대, 소비자가 누구이든 간에 같은 잣대로 물건을 판매하는 것, 그게 장사하는 사람의 거룩입니다. 

레위기에서는 거룩을 무엇이라 표현하는냐, 농부가 남긴 모퉁이,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품삵, 판사가 내린 판결, 상인들이 사용하는 저울, 그야말로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것들로  가장 심오한 감정인 거룩을 표현하는 것, 그게 레위기 19장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은 오늘 우리에게도 과제인거예요, 오늘 우리는 거룩을 어떻게 세속적인 말들로 표현할건지, 그럼 가정주부의 거룩은 뭐지, 직장인들의 거룩은 뭐지, 목사의 거룩은 뭐지, 이건 우리의 과제인 거죠.  이렇게 생각해보면, 레위기 19장이 성결법전의 중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 마지막 쳅터에서 중요한게 있다면, 절기 본문이다 싶습니다.  17장에서 26장까지는 성결법전이라 했구요, 26장은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이런 복이, 이런 식으로 않살면 어떤 심판이, 이게 26장에 있는거죠. 그래서 사실상에 어떻게 살야야되는가는 25장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17에서25장까지가 그럼 거룩의 내용일 텐데, 그 가운데 19장은 18장과 20장이 감싸서 도두러지게 만들었구요, 그 다음에 또하나 성결법전에서 중요한 부분이 23장에 절기가 나옵니다. 특히 레위기는 특이하게도, 절기를 안식일과 7대절기 요렇게 23장에서 구분을 해요, 절기가 출애굽기,민수기,신명기에도 나오는데, 어디에도 이렇게 않했습니다. 여기만 안식일을 가장 먼저 하고, 안식일은 일주일마다 오잖아요, 이걸 절기라고 부를 수 있나요, 우리가 부르는 모든 절기는 일년에 한번 오잖아요,  일주일에 한번오는데 특이하게도 레위기는 절기본문에 가장 처음에 안식일을 다루고, 그 다음에 일곱절기, 유월절,무교절해서 일곱절기, 절기를 일곱게 만들려면 겁나 힘듭니다. 출애굽기나 신명기는 절기가 3개 있어요, 유월절,맥추절,초막절 삼대절기체제인데, 레위기 23장만 칠대절기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제가 보니 레위기는 숫자 7을 겁나 좋아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주일 마다 안식일이 오구요, 그 안식일을 확장하는 일년의 일곱번의 절기가 있구요, 그게 확장되면 7년마다 찿아오는 안식년이 있구요, 그게 확장되면, 7번의 7년마다 찿아오는 희년이 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희년은 어디나오냐, 25장에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후반부에 23장의 절기본문과 25장의 절기본문이 있는데, 근데 절기본문은 가장 작은 단위의 안식일이 있구요, 7대 절기가 있고, 7년마다 안식년이 있구, 7번의 칠년마다 그래서 50년마다  희년이 있구, 그래서 레위기는 안식일을 끝까지 밀어부친게 희년이라고 생각하구있구나 이런 생각을 저는 해볼수 있겠다 싶고,  가장 마지막에 희년이 있고, 희년이 레위기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특히 25장 8절부터 55절까지 가장 긴 분량을 할해 한 것이 희년이라점에서도, 가장 마지막이고,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는 점에서 희년에 모든 강조점이 있구나, 그 다음 또하나는 희년은 일곱번의 안식년, 그 다음 해에 희년입니다. 그럼 희년이며는 고대이스라엘의 일곱번 달이 새해,그럼 일곱번째 달 첫째날, 이게 나팔절입니다, 그날 부터 희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레위기 25장에 보면 일곱째 달의 열흘째 되는 날에 희년이 시작되었다는 거죠, 근데 일곱째 달의 열흘째 되는 날이 무슨날인가요 속죄일이니, 왜 1일부터 희년이 시작되지 않고 일부러 속죄일부터 시작하려 했다는 거죠. 

속죄일이 뭔가요 레위기 전반부 1장부터 16장까지 결론이 16장의 속죄일이였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17장부터 26장까지 후반부 26장은 추가, 그럼 마지막의 희년이 있는데, 그 희년은 언제 시작하냐 속죄일, 그래서 희년은 레위기 전반부와 후반부를 모두 묶어내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싶은 거죠. 그래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은 그냥 27개 장가운데 하나인 것이 아니라, 레위기 전반부화 후반부를 한 몸에 담아내고 있는게, 희년이다라는 것입니다. 

희년은 속죄일에 시작하구요, 희년에 선포하는게 자유라는 외침입니다. 아마도 대제사장 같은 이가 자유라고 외치는 것으로 부터 희년이 시작될겁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있냐면, 모든 땅은 주인에게, 모든 사람은 가족에게, 이 두가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가령 살다가 삶이 너무 힘들어서 땅을 남에게 팔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가난이 해결이 되지 않아서 우리집이 뿔뿔이 사람들에게 종처럼 팔려가서 다른 집에서 품삵노동을 하게 되는 것, 이더라는 거죠. 그렇지만 희면이 찿아오면, 남에게 넘어갔던 땅이 무조건 원 주인에게로, 남에 집에 종사리하게 되었던 가족들이 무조건 자유의 몸이 되어선 원 가족에게로, 다시 모여오게되는 일이 있더라는 거죠. 

희년은 속죄일로부터 시작되요, 속죄일은 죄로부터의 자유, 하나님의 리셋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적인, 하나님 앞에서 죄로부터의 자유가, 그 자유는 땅이 돌아오고, 몸뚱아리가 자유로워지는 사회경제적인 자유하고 결부되어 이루어지는 그게 희년인 거죠. 죄에 대해서도 리셋시켜서 너 이제 아무 죄도 없어 정결하니 담대하게 살아, 뿐만아니라 땅과 가족들까지도 원래대로 돌아와서 다시 이땅가지고 가족과 함께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기, 결국 희년 역시 영적인 리셋과 죄로부터의 자유이구나. 영적이 자유와 땅의 회복과 노동력의 해방이라는 사회경제적인 리셋, 이 두가지를 다 담아내고 있는게 희년이구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희년 규정이야말고 레위기의 절정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되죠. 

희년은 라셋이 되기 때문에, 죄로부터의 해방, 사회경제적인 해방 이게 희년입니다. 

제가 볼때 레위기는 희년을 향하여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내세에 대하여 아무것도 없지만, 저는 희년과 같은 본문은 구약성경에서 엿볼수 있는 영광의 나라,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냐 이겠다 싶은거죠.

 희년제도 크게 두가지 인것입니다. 첫번째가 무르기인거구요, 두번째가 희년인것입니다. 무르기는 희년 전까지 내가 가령 너무 가난해서 땅은 진작에 팔았구요, 남에 집에 종사리 가는 댓가로 몸값을 백만원 받기로 한것입니다. 그걸보고 안되겠다 해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내가 대신 지불할께 해서 백만원 지불하고 내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될때 이걸 무르기라고 표현하죠,   근데 그렇게 무르기 할, 가장 가까운 친척도 너무 가난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럼 희년까지 가면 다시 그 땅이 주인에게, 노동력은 자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럼 희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희년은 자급자족하는 자작농이 기본입니다. 우리는 자급자족도 아니고 농사가 기본이 아니기 때문에 희년 말씀은 오늘날에 못지켜요, 지킬려고 해서도 안되고, 왜냐하면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사회 경제적인 상황이 다른데, 그대로 지킬 수가 없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런 말씀을 내 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고대 농경사회에서 이러했다면, 의도한 게 무엇이였겠냐 하는 거죠, 무르기 제도 이게 의도하는게 무엇이었게냐 하는 거죠, 누군가의 가난이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가난해 졌을 때, 성경은 왜 가난해졌는지 않물어요, 그 사람이 게을러서인지, 술만 마시고 놀아서인지, 사회구조적 문제인지 성경은 절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누군가가 가난해진 것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같이 문제를 해결하더라는 거죠. 그럼 무르기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뭐냐, 연대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예수께서 누가 나의 형제이고 모친이냐,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이들이 내 형제자매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뭔가요 가난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대응하는 것, 그건 무르기가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할수있는 것 이겠다 싶은 겁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그사람의 것으로만 두지말고 공동체가 연대하자. 공동체가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나누어지는 공동체라는 이거 참 중요한 일이겠다 싶습니다. 무르기제도의 현대적인 실천은 연대 라고 생각합니다.

두번째가 희년, 희년은 50년째에 원위치 이것이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아무리 잘못을 했다하더라도, 그 자식대에 가서는 희년이 와요, 그 주인에게 다 돌아오지 않습니까, 결국 50년마다 리셋버튼이 뭐냐, 가난의 대물림을 막아내는 것, 저 그게 실질적인 효과였을 거다 싶습니다.  가난의 되물림을 막아줄 구조적인 방편, 그게 50년이 알려주는 알맹이였다싶습니다. 그럼 오늘날에 가난을 되물림하게 하는 원인들이 뭐냐하는 것을 생각하구요, 그거 어떻게 구조적으로 바로 잡아보냐, 하는 것이 우리사회가 레위기 25장을 읽으면서 해야할 고민이겠다 싶습니다. 

레위기 전체가 말하고 싶은게, 하나님의 관심은 새출발에 있구나 싶어요, 우리는 죄짖는 사람이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난해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그냥 죄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에서 해어나오지 못한체 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그 죄로부터 놓여나서 새로 또 새로운 삶을, 그래서 개인의 속죄제, 민족전체의 속죄일을 통해 계속 새출발을 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구요, 산모의 속죄제,나병환자의 속죄제,유출병환자의 속죄제, 전부다 이제 이사람 새출발하니까 누구도 과거를 문제삼지 마라, 하나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새출발로 초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새출발은 반드시 같이 걸어가는 사회가 있어요. 노동자의 임금을 제시간에 지급하고, 나는 형편이 괜찮은데, 모퉁이를 남겨서는 않괜찮은 사람들이 살게하고, 그리고 우리동네 찿아온 외국인들을 함께 살도록 배려하고, 그다음 일정기간이 되면, 땅을 원래대로 다시 리셋시켜서, 모두 같은 줄에서 출발하게 붙들고, 하나님의 새출발은 영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적인 차원이나, 사회경제적 차원, 모든 차원에 걸쳐서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건, 새출발인 것 같아요. 넘어질수도, 쓰러질 수도 있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세상이겠다 싶구요. 우리사회의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된다는 것은, 모두 교회다니게 된다 그 뜻이 아니라, 누구든 새출발할 수 있게 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안전한 것이 생겨나게 될때, 이게 우리사회가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모습이 된다라는 의미라고 싶습니다.    

김근주교수의 레위기.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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