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 배반과 체포
수난의 준비
l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라는 친숙한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마치셨음을 알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다all 마치셨을 때”라고 기록한다.
l 마태는 “다all”를 더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가르치시는 사역을 끝내셨고, 우리는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웠음을 나타내다.
l 예수님의 생애는 급격한 전환을 맞지만,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십자가에까지 따라가는 인내심을 얻도록 도움으로써 우리를 준비시켜 왔다.
l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신 31:24), 이스라엘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돌보셨던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가를 불렀다.
l 신 32:44-47
l 모세의 “모든all”과 마태의 “다all”는 같은 기능을 한다. 모세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교훈 모두를 마음에 새기도록 명령했듯이,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겨야만 한다.
l 우리와 제자들은 이제 십자가까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마태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그분을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참을성 있게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l 이스라엘이 종종 율법의 선물을 저버렸던 것처럼, 우리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저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 오고 인자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도록 넘겨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l 갑자기, 적어도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이는데, 예수님께서는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시고,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이다. 사건들이 신속하게 진행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 시간이 통제 불가능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자가…..팔리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은 자기들이 통제하고 있다고 환상을 가지겠지만, 예수님께서 넘겨지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운명을 적의 손에 맡기시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시기 위한 것이다.
l 사사기에서는,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이 주님의 눈앞에서 악한 짓을 행하며 바알과 아세라를 경배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따라 가서 절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불같이 임하여 그들을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다(삿 2:11-15)
l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마음의 정욕”에 그대로 내버려 두셔서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고(롬 1:24-25)말한다.
l 그러나 이번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넘겨주신다(마 20:28)
l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위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시고, 우리의 이마에 그분의 피를 표시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공포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신다.
l 하지만 이스라엘 권력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은 충분히 많았다. 그분께서는 며칠 동안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그들과 논쟁하셨으며,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 신실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도전하셨다.
l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그분을 대항해 음모를 꾸미기 위해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은밀히 예수님을 체포하기로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계획한다.
l 그러나 헤롯처럼, 그들 역시 그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여, 유월절 기간에는 체포하지 않기로 했다.
l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가 담긴 설화석고alabaster한병을 가지고 식탁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다가와서 그 머리에 부었다.
l 예수님께서는 다시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자들 앞에 계신다. 하지만 이 비범한 여성, 익명의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귀한 기름을 그분께 붓기 위해 모든 경계들을 거부한다.
l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했고(삼상 16:12-13), 사독 제사장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했는데(왕상 1:39), 이 여인은 죽을 운명의 왕인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다.
l 제자들은 화가 나서 여인의 행동에 항의한다. 곧 그 향유가 가치가 있으니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이제 막 예수님께서 배고픈 자들, 목마른 자들, 헐벗은 자들을 돌보는 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들었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여인을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는 항상 함께 있겠지만,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과는 항상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l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대비해서 그분의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l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의 신앙이다. 이 여인은 한 가난한 자에게 소중한 향유를 부었다. 우리와 항상 함께할 가난한 자는 예수님이시다. 모든 낭비extravagance가 주어져야만 하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l 교회의 부는 가난한 자들의 부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부족을 정당화하는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신실한 교회에 관한 표현이다.
l 이 여인, 이름도 없는 이 여인은 교회가 항상 세상을 위해 있어야만 하는일-귀중한 향유를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헤프게 쏟아 부은 일-을 예수님을 위해서 행했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그녀를 기념하기 우해 이 여인이 그분을 위해 행한 일이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녀의 익명성은 가난한 자들의 익명성이다.
l 우리의 이름은 역사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불성실의 한 형태다. 그녀는 우리의 선조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이나 예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수많은 가난한 자들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다.
l 왜냐하면 그녀와 그들이 행한 일은, 그분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기억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분의 몸과 피를 주신, 오직 한 분에 의해서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l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이것은 너희와 많은 사람들의 죄 용서를 위해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l 예수님의 낭비에 제자들은 분노한다. 열두 명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배반하면 무엇을 주겠냐고 묻기까지 한다. 마태는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반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은 삼십 개를 받았다는 것은 돈이 관련 없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유한복음에서는 유다를 도둑이라고 말한다(요 12:6)
l 우리는 예수님께서 돈과 같이 사소한 것 때문에 배반당하실 수 있다는 생각에 움찔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유다는 그 중에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악 – 가장 어두운 악 – 은 너무나 자주 하찮은 것으로 위장한 채 다가온다.
l 우리는 대제사장들이 왜 유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다. 유다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누가 예수님인지 확인해주기 위해서 이용될 것이다.
l 유다는 아무런 선한 이유도 없이 자신의 일을 행한다. 그는 의인화된 악으로서, 악 자체를 사랑하여 자신의 일을 행한다. 이 한심한 사람 유다는 완전히 마귀의 권세 아래 놓였다.
l 그가 행하는 악은 맹목적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악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눈이 멀었다. 악은 그것이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악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알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월절 예식
l 이제 배신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그분께 남은 시간을 표시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유월절 식사를 어디에 준비하기를 원하시는지 여쭌다. 그들에게 집이 없다. 그리고 무교절의 첫날이 된다.
l 무교절은 예수님께서 단번에 나누시고 재구성하실 시간을 표시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도성 안의 “아무” – 또 다시 무명의 사람 – 에게로 가서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라고 전하라고 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의 때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이 끌려 들어가는 시간,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시간은 아니다. 그나 예수님께서는 식사, 배신까지 도사리고 있는 식사를 통해 자신의 시간 속으로 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신다.
l 죽음의 천사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식사를 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지금 여기까지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지금 이 식사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 중 하나가 예수님을 배반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l 그들은 괴로워하며 서로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한다. 그들 모두가 그분을 배반할 것이다. 죄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는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그릇에 손을 담그는 사람, 곧 자신과 함께 손을 씻는 사람이 자신을 배반할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 청결함의 몸짓이 배신의 표시가 된다.
l 예수님께서는 인자를 배반하는 사람에게 화를 선언하신다. 배반자는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유다가 어떻게 배신할 수 있을까.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l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고, 눈먼 자들, 다리 저는 자들, 듣지 못하는 자들,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 고침을 받는 것을 목격했고,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장로들과 논쟁하시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배반할 것이다.
l 마귀 또는 모든 악은 선에 기생하지만, 마귀의 자식인 유다는 선하신 그분께 기생한다.
l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반응한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그 질문을 ‘주님’께 했지만, 유다는 그분을 ‘랍비’라고 부른다. 물론 유다가 그분을 랍비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유월절을 기념할 수 있는 집을 가진 사람에게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생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라고 하셨다.
l 유다는 그분을 랍비라고 올바르게 부르지만, 그분께서 교사 그 이상이심을 깨닫지는 못한다.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유일한 반응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반응이 그렇듯이, 유다 자신의 말이 스스로를 유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l 그러나 유다의 배신은 그분의 사명을 저지할 수 없다. 그들이 먹고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빵 한 덩어리를 취하셨고, 그것을 축복하셨고, 그것을 쪼개셨고,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받아먹으라고 명하셨다.
l 왜냐하면 “이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감사를 드리시는데, 이로써 이것을 성찬이 되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빵으로 우리를 먹이시는 것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하여금 생명을 주게 될 빵이 되게 하신 것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l 그분께서는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부서질 것을 예상하시면서 그 빵을 쪼개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신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받아먹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그것이 그분의 몸이기 때문이다.
l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 때문에 제자들은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것,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시면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증거했던 빵 덩어리의 증식 대신에, 이 식사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직접적으로 나눈다.
l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잔을 드셨다. 그분께서는 다시 감사드리고 그들과 컵을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l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다” 잔을 마실 것을 고집하시는데, 이로써 유다도 잔을 함께 나눌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나 유다는 생명의 나라에 참여할 수 없는 그의 죽음을 마신다. 유다는 배반한 자신의 죄를 감당할 수 없어 자살할 것이다.
l 예수님에 의해 초래된 구원은 천상의 것ethereal이 아니다. 그분께서 가져오신 구원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먹는 음식만큼이나 육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생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 가르치셨던 것은 그분께서 누구시고 무엇을 행하셨는지와 분리될 수 없다.
l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복음의 진리를 성찬의 살과 피에서 분리시키려는 모든 기독교적인 설명에 대해 도전이 된다.
l 복음은 세례와 성찬으로 구성된 구체적인 사람들안에서 일어나는 그것의 구현과 별개로 알려질 수 있는 어떤 철학적인 진리가 아니다.
l 신앙에 대한 개신교의 강조는 너무나 자주 복음을 자신의 삶에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도발적인 설명으로 만드는 데 유감스러운 영향을 끼쳤다.
l 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선적으로 그렇지 않으면 획득할 수 없는 것, 곧 세상 속으로 우리의 몸들이 아로새겨지는 한 생명과 한 백성들을 제공한다.
l 이 빵과 포도주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느냐는 질문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교회가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 즉 성찬이 제정되었음을 잊고 있다는 표시다.
l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요소들이 살과 피가 되느냐에 관한 설명은 대부분 기계론적인 설명을 제공하려는 시도들로서, 그럼으로써 창조는 ‘저기 뒤쪽에back there’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에 도달하실 수 없다고 가정하게 된다.
l 그러나 우리는 “ 구원은 이 땅의 한 가운데서 창조된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l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다. 마태복음의 첫 문장이 이를 명시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됨으로써 새로운 창조에 참여한다.
l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께서는 또한 우리를 위하여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만드시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l 교회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행할 때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세상이 화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기억이 되는 것이다.
l 우리는, 비록 그분께서는 죽으셨지만 우리의 기억이 그분을 살아 계시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세상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l 성찬은 그리스도의 시간을 그분의 백성이 사는 시간으로 만드는 축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께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들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의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유월절에 그분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식사는 그분의 부활,승천,그리고 성령님의 보내심을 통해 그분께서 교회와 계속해서 나누시는 식사가 된다. 그래서 이 식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기독교인을 세상을 위한 한 몸, 한 분 그리스도로 묶는 일치의 식사가 된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께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줄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마 20:28). 따라서 희생의 언어는 종종 성찬의 기독교식 축하를 형성한다.
l 실제로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죽음 –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누라고 초대하신 식사를 통해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죽음 – 에 의해서 “한 번의 제사single differing”가 드려졌고, 그럼으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히 10:13-14)
l 하나의 희생, 곧 예수님의 죽음의 희생이 드려졌고, 그것이 그 동안 우리의 죄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드려졌던 모든 희생들을 끝내게 했다.
l 희생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려 드리려는 우리의 열망을 구현하는 탁월한 인간의 행동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희생하는 동물로 창조하셨다.
l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분께 희생을 드리라고 지시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우리 모두가 그랬듯이, 희생이라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라는 가정을 섬기기 위한 장치로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
l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에 그분의 생명을 연결시키셨고, 그럼으로써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시고, 우리 방식대로 그분과의 관계를 결정하려는 시도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신다.
l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보내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겸손케 하셨고, 죽음의 지점,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복종케 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거하지 않는 모든 희생을 영원히 끝내버리셨다.
l 마태는 식사 후 제자들이 모세처럼 ‘찬송’을 부르며 감람산으로 갔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제자들이 어떤 찬송을 불렀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아마도 그것은 시편 114-118편의 전부 또는 일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편들은 종종 유월절 끝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특히 애굽으로부터의 구출하심을 축하하기 위해서 불려졌기 때문이다.
l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되돌아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밤에 그들 모두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불행한 소식을 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남겨지시고 홀로 죽으실 것이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갈릴리에서 그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 앞서 가실 것이다.
l 베드로는 다시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구별하려고 하고,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예수님께서는 더 잘 아신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그가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항변한다. 베드로, 예루살렘에 가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책망했던 그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님께서 죽음에 처하실 것임을 이해하는 것 처럼 보인다. 모든 제자들이 차례대로 예수님을 배반하느니 기꺼이 죽겠다는 베드로의 맹세에 동조한다.
l 분명히 우리들 대부분도 예수님을 따라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예수님을 버리느니 기꺼이 죽겠다고 맹세할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l 예수님을 따라 죽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지어졌음을 기억하는 교회일 수는 있다. 순교자들의 피는 여전히 교회의 씨앗이며,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조차 로메로Oscar Romero와 같은 순교자들이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한다.
겟세마네의 기도
l 얼마되지 않아 제자들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결심을 시험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으로 가신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저기over there”가서 기도하는 동안 앉아 있으라고 하셨다.
l 그분께서는 자신이 변형되실 때 데려가셨던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려가신다. 그분께서는 슬퍼하고 흔들리기 시작하셨다. 즉 그분께서는 시편에서 종종 표현되는 고통을 드러내신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자신과 함께 머물러 자신이 기도할 동안 깨어 있어 달라고 하셨다. 그분께서는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l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야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죽음만이 아니라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분리됨에 직면하신다.
l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외치실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도 버림받으심으로써 혼자되는 공포를 겪으셔야만 한다.
l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만나시는 공포다. 그분께서는 아무도 직면해 본 적이 없는 외로움에 직면하신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가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l 그분께서는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에게 – 그가 산상수훈에서 가르침 받았듯이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l 베드로의 인성을 공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정신은 기꺼이 그러기를 원하지만 그의 육신은 약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베드로의 실패는 그가 깨어 있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은 데 있다.
l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아가셔서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l 그분께서는 제자들과 자신의 피의 잔을 나누셨지만, 이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신다. 그분께서는 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겪으셔야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고,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배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폭풍우의 혼돈으로 배가 위협을 당해도 주무셨다. 육체가 약하고 믿음이 거의 없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들을 구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l 이로써 그들은 아직도 참된 위험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열명의 신부 들러리의 비유에 나오는 처녀들처럼, 제자들은 준비되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을 잠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의 고뇌의 실재에서 도피하는 방식으로 항상 우리를 유혹하는 꿈과 환상의 세계로 물러난다.
l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깨우려 하시지 않고 그분의 고뇌의 기도를 계속하신다. 기도는 자는 것에 대한 대안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l 더욱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왔다는 것을 아신다. 제자들에게 기대하라고 가르치셨던 모든 것이 지금 가까이에 있다. 인자께서는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신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배반자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두드러지게 제자들을 계속해서 ‘우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심지어 우리가 그분을 버려도 그분께서는 그들과 우리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셨다.
수난의 시작
l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부터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온 큰 무리와 함께 도착했다. 무리는 몽둥이와 칼을 들고 왔다.
l 유다는 제자였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 중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데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유다가 그리스도와 가깝게 있다는 것 때문에 그 배반이 더욱 가슴을 저민다.
l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 – 사랑을 배신하는 데 사용된 사랑의 몸짓 – 으로 배반한다. 외후의 만찬에서 그랬듯이, 유다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러 누가 예수님인지 확인해줌으로써 그 무리가 누구를 잡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준다.
l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시며, 그가 하려고 여기에 온 일, 다시 말해 스승을 배반하는 일을 하라고 명령하신다. 포도원의 비유에서, 주인은 이른 아침에 고용된 사람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자신이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마 20:13)
l 지금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유다를 부르심으로써, 그분께서 그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나 유다는 우정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l 갑자기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 중 하나가 손에 칼을 잡고, 그것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다. 마태는 이 사람이 제자들 중 하나였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l 예수님께서는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라고 명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그분께서 구하시면, 아버지께서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보내셔서 자신을 보호하도록 하실 것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이 성취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씀하신다.
l 칼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다. 예수님께서는 천사의 군대를 보내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l 십자가는 성경의 성취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3장7-9절에서 말하듯이, 도살당하는 어린양이 되셔서, 입을 벌리지 않으실 것이고, 침묵을 지키실 것이고, 정의를 왜곡하며 살아가는 땅에서 끊어지실 것이고, 그분의 백성의 허물 때문에 곤욕을 치르실 것이다. 그런 것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운명이다.
l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이 마치 자신이 강도인 것처럼 칼과 몽둥이를 들고 겟세마네까지 와서 자신을 체포하는지 물으심으로써 무리에게 도전하신다.
l 마태의 모든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분을 체포하러 온 무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계속된 가르침이었다.
l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의 삶의 핵심에 있는 궤적을 성취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항상 바라셨던 사역이다.
l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버리고 도망간다. 비록 우리는 이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지금 일어난 일은 놀라우면서도 너무나 계시적인 것처럼 보인다.
l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것, 예수님께서 적들에게 넘겨 지시는 것,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게 되실 것 등은 제자들을 매우 두렵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한 세상이 싸움이나 저항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싸우거나 방어하기를 거절하셨다.
l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왕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승리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비무장한 채로 죽음에 직면하실 것이다.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분을 방어할 어떤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l 그들은 세상의 조건으로 대응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세상의 폭력에 도전하는 그 나라의 급진적인 성격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l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한 백성을 창조하시는 일에 관여하시기 위해서 로마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럴 것이라고 아셨듯이, 이제 혼자서 세상에 맞서야만 하신다. 세상은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형식, 곧 예수님을 대적하는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서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자기 관저로 모으는 형식을 취한다.
l 마태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 들 가까이 들어가서, 경비병들 틈에 앉아 “그 결말을 보려고”한다고 보고한다. “멀찍이 따라가”는 우리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을 훌륭하게 묘사한 것이다.
l 우리는, 베드로가 그랬듯이, 우리가 끼어들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날것인지를 보고 싶어한다. 불행히도, 그런 전략은 우리가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과 함께 앉아 있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l 제사장들과 온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할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형에 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명의 증인들이 그들의 증언에서 일치해야만 한다. (신 17:6)
l 많은 거짓 증인들이 나왔지만, 그들의 증언은 일치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두 명의 증인이 나와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l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성전을 청결케 하셨고(마 21:12-17),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지만(마 24:1-2), 그분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고 사흘 만에 그것을 재건하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l 하지만 이 고발에 어느 정도의 진실은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인격 안에서 성전이 되실 분으로 행동하셨다. 그분의 십자가 처형은 다니엘 선지자가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성전의 희생제사의 끝이시다. 그분께서는 삼일 후에 부활하여 홀로 예배에 합당한 분이 되실 것이다.
l 그렇게 거짓 증인들의 입에서 진실이 나오지만, 그들이나 그들에게서 듣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진실이다. 왜냐하면 이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성경을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l 대제사장은 마침내 자기가 듣고 싶어했던 것을 들었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에 의해 지명된 한 사람만이 성전을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삼하 1:12-13). 따라서 누구든 성전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l 그러므로 자기가 성전을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를 고발하는 자들에게 반응하도록 다그치지만, 그분께서는, 이사야 53장 7절에서 말하듯이, 조용히 침묵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을 지키실 것이지만, 그 침묵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 권력에 항거하는 데 필수적인 침묵이다.
l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재촉에 응답하시기를 거절하신 것은 그분께서 진실되게 답변하더라도 그것이 진실되게 들릴 수 없기 때문이다.
l 그런데도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말한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제사장은 제자들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금지시키신 분에게 맹세한다(마 5:33-37)
l 대제사장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마 4:3), 예수님께 자신이 메시아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말하라고 도전한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에게 하셨듯이 대꾸하신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더 말씀하신다. “네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 하늘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다 7:13 인용)
l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가 같은 분임을 분명히 하시면서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에 가까워질수록 그분의 정체를 식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다양한 칭호들이 하나가 된다.
l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고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범했다고 비난한다. 예수님, 곧 신성모독을 제외한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마 12:31-32)분께서, 이제 신성모독으로 비난받으신다.
l 대제사장은 증인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거기 있는 모든 자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에 대해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
l 대제사장은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라는 답이 나올 줄 알면서 의회의 평결을 요구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사50:6), 주먹으로 때리고, 손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말한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l 곧이어 무리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천명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수님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판결을 선언할 것이다.(마27:25).
l 끔찍하고 무섭도록 역설적인 그 판결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침 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손으로 때리고, 그분께 예언해 보라고 요구하는 고문자들은 예언의 성취가 된다.
l 그들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장로들 앞에서 견디신 가짜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실제로 메시아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한다.
l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셨고 또한 어떤 분이신지 인식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베드로가 거기 있었고, 그는 예수님께서 예언의 성취이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l 더군다나 베드로는 “그 결말을 보려고” 했지만, 조롱당하고 고문당하는 예수님을 보는 것은 그로 하여금 메시아가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그의 기대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했다.
베드로의 부인
l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마 16:16)라고 규정했던 베드로는, 그가 저 갈릴리 사람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냐는 하녀의 질문에 대답할 때,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부인한다.
l 베드로는 다른 하녀에 의해서 그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라고 주변에 있던 자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음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라며 맹세까지 한다.
l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들은 베드로가(마 5:33-37), 지금 자신이 예수님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맹세를 하는 것이다.
l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것이 분명했던 것처럼, 그분을 부인하는 것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삶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l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억양 때문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발각된다. 그는, 하녀들이 지적한 대로, 갈릴리 사람이다. 그의 억양이 그의 정체를 알려줬다.
l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눈에 잘 띄게 했을 것이라고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과 자신을 분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했을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한다.
l 그 순간 닭이 울고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수님을 세번 부인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몰린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 망연자실했다.
l 그는 대제사장의 뜰의 근방에서 나와 쓰라린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베드로에 관해 또는 베드로에게서 듣는 마지막 순간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너무나 자주 그러한 것처럼, 눈물을 흐리며 예수님께 신실하지 못했음을 애통해 하면서 그 자리에 머문다.
l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그분의 교회를 세울 바위로 지명하신 것은 잘하신 일이다. 베드로의 쓴 눈물은 항상 교회의 눈물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을 부인하는 위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l 예수님깨서는 교회가 세워질 바위인 베드로에게로 우리를 정확히 인도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들 중에 으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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