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장 부활
부활
l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 즉 사흘 만에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안식일 후, 곧 그 주간의 첫날에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는 무덤으로 간다.
l 마태가 그 시간을 나타낸 것은 시간이 이제 새롭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두 명의 마리아는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을 변경하실 분을 증거하는 첫 번째 사람들이 될 것이다.
l 실제로 새로운 안식일이 창조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분께서 새로운 창조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태초에’로 시작했고,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새로운 시작에로 열어주는 마지막에 도달했다.
l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 앞의 돌을 구리고 그 위에 앉는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그의 옷은 눈처럼 희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취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l 이 천사의 격렬하고 눈부신 빛에 직면하여, 예수님의 시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려고 배치되어 있던 사람들은 너무 두려워서 떨었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l 그들이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영향을 미친 변화를 나타낸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생각했던 자들은 이제 그들이 일평생 잡고 있었던 것이 죽음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l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일상 생활을 붙잡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삶을 창조한다. 이것은 다시 태어난 생명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삶이 어떻게 죽음에 의해 결정되어 왔는지를 드러내준다. 그러나 지키던 자들의 행위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죽은 채로 남아 있는 것, 또는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것도 가능하다.
l 지키는 자들은 죽을 정도로 무서워했지만, 천사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l 이 비범한 전언은 온전한 복음을 담고 있다. “무서워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무서워하는 것 없이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종종 엘리트들과 무리를 무서워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무서워하지 않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셨다.
l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도 강력한 하나의 삶의 길로 이끄시어 무서워할 시간이 없도록 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다.
l 하지만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는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신속하게 무덤에서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무서움은 기쁨과 어울려 있다.
l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무덤을 떠나면서, 이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들인 것을 안다. 그들이 무덤을 떠날 때 지닌 무서움은 우리로 하여금 부활을 부인하게 만드는 무서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무서움이다.
l 그들의 삶을 사로잡은 무서움과 기쁨은 죽음에 직면해서 안전한 삶을 창출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무서움으로부터 그들을 구해준다.
l 그들이 지금 경험하는 무서움과 기쁨은 부활로 인해서 가능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보지 못했다. 천사는 무덤 앞의 돌을 구려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빈 무덤을 볼 수 있게 했다.
l 그들은 무덤을 보러왔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훈련시켜 왔다. 누구든 그분의 십자가 처형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무덤을 보러 오지도 않을 것이다.
l 그러므로 그들은, 천사가 말하는 대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첫 번째 증거자들이다.
l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서조차 완전히 순종하신 아들을 축하하며 그분을 죽음에서 살리셨다. 예수님께서는 넘어지셨고, 죄인들과 죽음 그 자체에 복종케 되셨지만, 그분께서는 승리하셨다.
l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살리셨으나,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자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 처형이 부활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본다.
l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볼 수 없다. 우리는 창조를 볼 수 없듯이, 부활도 볼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부활은 살았다가 죽고 그리고 다시 산 사람의 부활이 아니다.
l 예수님께서는 죽음 그 자체에서 해방되시기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다시 죽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시지 않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살아나시어, 죽음 그 자체를 무너뜨리셨다. 그러므로 부활은 성령님에 의해 마리아가 잉태하는 것에서 시작된 그 역사의 절정이다.
l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말해주려고 무덤에서 서둘러 나오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신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다.
l 예수님께서 친숙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인사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다가간다. 그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이신 줄 알았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았고 그분께 경배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만져지실 수 있다.
l 예수님의 부활은 관념이 아니다. 그분의 몸이 살아나셨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분, 제자들을 부르신 분, 산상설교를 말씀하신 분, 다리 저는 자들, 보지 못하는 자들, 듣지 못하는 자들과 말하지 못하는 자들을 치유하신 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논쟁하신 분,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굴욕을 견디신 분, 그분께서 살아나셨다.
l 우리가 예수님께서 몸으로 살아나셨음을 아는 것은, 그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과 약속하시기를,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우리와 나눌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6:26-29)
l 그분께서는 성령님의 중개를 통해 그분의 몸을 우리와 함께 나누신다. 이 나눔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l 예수님의 신체적인 현존은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그분께 경배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누구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께 경배한다.
l 그들이 예수님께 경배한 것은 교회라는 이제 막 태동하는 새로운 실재의 중심적인 활동이 무엇인지를 표시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l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공을 가로 질러 다양한 형태를 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든 말씀이 전파되고 성례가 거행되는 곳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안다.
l 침례와 성찬에 의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대안이 되게 한다. 그러나 대안이 되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다.
l 그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경배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그 시간이 주어졌음을 증거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이 그분을 보게 될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라고 하신다. 제자들에 의해 버려진 예수님게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에게 제자들이 그분을 ‘볼’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l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그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분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신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백성을 부르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l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그분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로 가능하게 된 새로운 가족의 모판seedbed임을 나타내신다.
l 예수님의 형제들-인류-은 생명을 낳을 것이다. 다시금 우리는 교회의 시작을 본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는데(마 4:12), 그분께서 돌아오신 곳도 갈릴리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부름을 받았었는데, 지금 그 갈릴리로 재소집되는 것이다. 나중에 그들이 보내심을 받을 곳도 이 갈릴리로부터일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력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세상으로 들어가도록 보내신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알리기 위해 열방으로 가기 위한 숙영지가 된다.
l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말해주기 위해서 가는 동안, 무덤을 지키던 자들 가운데 일부가 도성으로 들어가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렸다.
l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다시 음모를 꾸몄고, 결국 최선의 행동방침은 이 병사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그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제자들이 밤에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쳤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l 우리는 부활을 볼 수는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이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다. 따라서 부활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진실되게 볼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l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끈질기게 진리를 말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물론 부활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 ‘결정적인 표적knockdown sign’이 되는 것은 아니다.
l 군인들은 천사들을 보고 죽을 만큼 겁에 질렸지만,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나 부활을 믿도록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권력 아래 계속해서 머문 채 그들의 음모를 기꺼이 돕는 것 이상으로 행동한 것처럼 보인다.
l 예수님이신 진리는 제자도를 요구하는 진리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것, 그분께서 행하신 것에 의해 변화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l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가 세상의 겉모습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세상은 구속받았다-그러나 세상의 구속을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을 섬김에서 오는 기쁨에 사로잡혀야만 한다. 이것이 종말론 적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다.
l 마태는 지키던 자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퍼뜨렸다고 보고하는데, 이는 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는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를 설명해준다. (마28:15)
l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납득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들과 실천들을 계승했음을 증거해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살리셨다고 믿는 백성은 예수님께서도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믿을 수 있다.
l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관한 계속적인 주석이며, 또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래도록 기대해 온 메시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l 불행하게도 부활을 거부하기 위해 매수해야만 하는 사람은 더 이상없다. 우리에게, 즉 근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부활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l 부활은 기적들 중의 기적인데, 기적들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부활은 기적들 중의 기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을 거부하기 때문은 아니다. 부활이 기적들 중의 기적인 것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l 열한 명의 제자는 갈릴리, 곧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신 산으로 가서, 예수님을 보고 그분께 경배한다. 그들은 이전에 그분께서 물 위를 걸으신 후에 그분께 경배했다. (마 14:33). 그러나 이제 그들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서 그분께 경배한다.
l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의심한다. 여기서 마태의 절대적인 정직함을 볼 수 있다. 숨길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 중 일부는 의심했다. 마태는 그들의 의심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l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음을 의심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의심은 예수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을 버렸음을 잊지 않았다.
l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누구신지 상기시키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그분이심을 알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다니엘서의 말을 사용하신다.
l 단 7:13-14
l 마귀가 졌다. 마귀는 예수님께 만일 자신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에 대한 권세를 주겠다고 했다 (마 4:8-11). 그러나 예수님의 전 생애는 그 제안에 대한 거부였다.
l 예수님으로 하여금 버림받으심과 십자가 처형을 견디도록 요구한 것이 그 거부였지만, 그 인내로 말미암아 그분께서는 승리하셨다. 그분께서만 이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다.
l 그분께서는 먼저 제자들을 이스라엘에게만 보내셨다 (마 10:5-6). 하지만 이제는 제자들을 온 세상에 보내시어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게 하신다.
l 세상의 기초부터 숨겨졌던 것, 지혜로운 자들에게 숨겨졌던 것이 이제 아들에 의해 계시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하나님이시다. 제자들은 이제 그 나라들로 파송될 준비가 된다.
l 그들은 그 나라들을 그분의 죽음을 무릅쓰는 나라의 시민들로 세우기 위해서 그들에게 침례를 주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이스라엘은 뒤에 남겨져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사명은 이제 교회라 불리는 새로운 실재로 계속된다. 교회를 통해 열방은 이스라엘을 축복받은 자라고 부르는 법을 배우게 된다.
l 나아가 교회는 다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경배하기 위해서 형성된 백성의 이름이다. 그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모사하신 삶을 사는 것이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침례를 주는 자들을 가르치고 그분께서 명하신 모든 것에 순종하게 하라고 명하신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삶의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
l 산상설교, 우리가 형제 자매로 서로를 섬길 수 있는 방법, 교회의 죄를 기꺼이 드러내는 데 요구되는 용서가 구원이다. 가르침과 가르치시는 분은 하나다.
l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구원이 마태의 복음이다.
l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사명은 그들에게 혼자 가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분께서는 그분과 그분의 사역을 증거하도록 위임된 자들과 항상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시다.
l 그분께서는 태초에 계셨고, 이것은 그분께서 시대의 끝날까지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실 수 있음을 의민하다. 그러나 그분께서 끝날까지 계실 시대는 그분의 나심,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로 시작된 시대다.
l 그 근거 위에서, 오직 그 근거 위에서만 기독교인은 그 메시지를 들고 세상으로 파송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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