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테러와 피신
동방박사의 방문
l ‘해롯 왕 때에’라는 어구는 현실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 묵시의 시간, 창조의 시간, 예수님의 수태의 시간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l 그러나 묵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 헤롯의 시간을 가로지르며 정치적인 위기를 조성한다. 예수님,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께서는 헤롯의 시간으로 탄생한다.
l 예수님의 수태와 탄생의 이야기는 신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을 형성해가는 이야기이다.
l 그 시간은 통지자들이 통치하는 시간으로, 그들이 그 시간을 구성하는 이야기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통치하는 자들은 시간이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l 헤롯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 헤롯이 왕인 이유는 단지 문제 많은 유대인들이 사는 이 골치 아픈 지역을 그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로마인들에게 좋았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점령당한 땅, 변방의 소읍, 강력한 제국의 끝자락에서 태어나신다. 그분께서는 필연적으로 로마의 권위 아래에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그 순간 그분의 죽음은 로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l 이 사람이 자기들이 마주했던 그 어떤 도전보다 더 결정적인 정치적인 도전이 되리라고 로마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l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운동은,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세상 안에서, 세상이 행하는 불인내의 폭력을 십자가와 부활로 항상 도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l 예수님께서는 시간속으로 태어나셔서, 헤롯과 로마의 시간을 위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계보가 분명하게 밝히듯이, 다윗계열의 왕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전의 추방상태에 있던 왕권을 구속하실 왕이시기도 하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전형이 되신다. 근대적인 기독교인들은 그 나라를, 우리가 최상의 인간적인 노력을 대표한다고 가정하는 이상들, 곧 자유,평등,정의,개인의 존엄성 존중 등과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l 이 모든 것은 기독교인들이 지지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만, 그 자체로는 그 나라가 아닌 목표들일 뿐이다. 이러한 이상들과 그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그 나라를 선포하신 분에게서 그 나라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l 그래서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한 아기에 대해 묻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 아기에 대한 헤롯의 공포는 그의 연약함의 깊이를 드러낸다. 헤롯들은 그들의 지위가 끊임없이 경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잘 안다.
l 왜냐하면 어떤 변화라도 그것은 그들의 불안한 지위를 더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롯들은 권력을 안정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공포 정치를 시행한다.
l 그러므로 한 왕이 태어나셨다고 믿는 낯선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결코 좋은 소식일 수 없다. 더군다나 그들이 새로운 왕을 찾는 이유는 그분께 경배하기 위해서다.
l 헤롯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안다(늘 자연스런 동맹관계에 있지는 않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어디서 메시아가 태어날 지 물어본다.
l 그들은 당대의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교육받은 지식인들은 대개 권력자들을 섬긴다. 그들은 그들의 성경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성경을 아는 많은 사람들처럼 통치자의 구미에 맞게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잘 안다.
l 그들은 미가 5장 2절, 즉 이스라엘의 통치자요 온 백성의 목자가 될 사람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예언으로 헤롯의 관심을 돌린다.
l 헤롯의 통치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분의 차이는 이보다 더 극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오실 분께서는 과거의 정치정권과 연관된 권력이란 수단에 의존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때가 되었을 때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다(마21:1-2)
l 이렇게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신 사랑love이 해와 달을 운행하시는 바로 그 사랑love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탄생을 알리기 위해 우주적인 창조가 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l 이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사랑과 같은 것이다. 당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워했다(마8:21-27)
l 그런데 비록 그 왕께서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돌보시기 위해 오시지만, 이 사랑은 확실히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관측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박사들이었다.
l 희망에 의해 인도된 박사들은 그 별을 따라 가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곳에 도달하기는 충분치 않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께서는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나셨으리라고 가정한다.
l 그의 조언자들에게서 정보를 들은 헤롯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은밀히 불러 언제 별이 나타났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낸다. 그가 그들을 은밀히 부른 것은 한 왕이 태어났다는 전제를 기정사실화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l 박사들은 헤롯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듣고 자기들 앞서 가는 별을 계속해서 따라 간다. 별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에 멈추자, 박사들은 아기께 경배하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나타낸다.
l 이 박사들은 세상의 복잡함을 인식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인데도, 모친과 아기를 보고는 아기에게 경배한다.
l 그들이 홀로 경배 받으실 수 있는 이 사람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성부에게서 비롯된 선물이었다. 똑 같은 선물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희망을 준다. 왜냐하면 이 아기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탄생에 의해 암시되는 대안적인 세계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기 때문이다.
l 더군다나 그것은, 박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으로 하여금 헤롯에 대한 대안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바쳐진 빵과 포도주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
l 박사들은 꿈을 통해 헤롯에게 돌아기지 말고 다른 경로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경고 받는다. 그들이 경험한 기쁨을 생각할 때, 그들은 분명 이스라엘에 머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서 그들이 경험한 기쁨을 전하는 증인이요 전초기지가 되도록 요구 받는다.
애굽피난
l 요셉은 곧 또 다른 꿈을 통해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헤롯의 진노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여정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같은 이름의 요셉은 이집트 사람들의 꿈을 해석해 줄 수 있었으나, 여기서의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을 신뢰하도록 선물을 받는다.
l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집트로 가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행 예언하신 이스라엘, 곧 자기 아들을 이집트에서 부르실 것이라는 말씀을 성취한다,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께서는 또한 자기 백성을 신실함의 땅으로 인도하도록 부름 받은 새로운 모세시다.
l 새로운 모세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같이 자기 백성의 불성실함을 담당하실 것이다. 모세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신들을 만들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하고 우리를 지키도록 돕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l 그러나 그 율법이 이제 예수님의 몸에서 구체화되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받은 것들을 왜곡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다.
l 헤롯은 박사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계산하여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l 아마도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 이러한 아기들의 죽음보다 성탄절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도전하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폭군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기들을 죽이고 계속해서 죽이는 세상으로 태어나신다.
l 마태는 이러한 경악스러움에 대해 어떠한 설명이나 정당화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우리에게 그런 경약스러움에 대해 준비하라고 했음을, 즉 라마에서 들려오는 큰 슬픔에 관해 경고했음을 상기시킨다. 거기서 라헬은 그녀의 아기들 때문에 울 것이며, 위로 받기를 거절할 것이다(렘 31:15)
l 복음, 곧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은 아기들이 살해당한 부모들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고 경배하는 사람들은 아기들을 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전한다.
l 이 세상의 헤롯들은 그 아기를, 곧 예수님을 미워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아기들을 다치게 하고 살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교회는 이러한 정치, 살해의 정치에 대한 대안이 되라고 부름을 받는다.
l 헤롯들은 마땅히 저항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헤롯의 삶을 사로잡았던 두려움이 우리의 삶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온 예루살렘의 사람들” 역시 이 아기 탄생 소식을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l 낙태는 아기들이 실재가 되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다르게 부르는 한가지 이름이다. 아기들은 정확히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우리를 그들이 미지의 미래 속에서 하게 될 일로 끌어 당긴다. 그러나 그런 끌어 당김은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의 매력이다
l 그와 똑 같은 사랑으로 박사들은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교회를 그 아기를 두려워하는 세상에 대해 대안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이다.
l 헤롯이 죽었다는 좋은 소식이 들린다. 교활한 사람이었지만 죽음마저 교활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왕들은 왔다 가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하다. 그들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그 나라를 통해 영원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l 요셉이 이집트에 있는 동안,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헤롯이 죽었음을 알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요셉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는다. 마리아와 예수님, 그리고 요셉은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왔다고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는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를 통치한다.
l 요셉은 다시 꿈에서 유대를 피하라고 경고를 받고, 그 대신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간다. 그럼으로써, 마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다(마 2:23)
l 이방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회개하게 하시려고 그 나라의 도래를 알리시려고 오신 분께서는 이방인들이 듣고 반응하는 것을 발견하실 것이다. 마태복음은 그러한 위대한 놀라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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