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9장 하늘 나라의 권세
나병환자 : 그분을 ‘주여’라고 지명한다, 예수님께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부장 : 이 사람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데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 그는 예수님을 권세와 권위가 있는 분으로 분명하게 인식한다.
베드로의 장모, 많은 수의 귀신들린 사람들, 아픈 사람들 : 치유의 권세를 행하시는 데는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권세는 우리의 허약함을 받아들이시는 권세이고, 우리가 고난 당하는 만큼 고난 당하시는 권세다
한 서기관 : 예수님께서는 그를 딱 잘라 거절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갈 곳이 아무 데도 없기”때문이다. 그 서기관은 서기관에 걸맞게 예수님을 ‘선생’으로 규정했지만, 그는 이 선생께서 우리에게 안전을 위해 애쓰는 것들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지혜를 가르치신다. 만일 당신이 편안히 머무르고자 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다른 ‘제자’ :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에게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라고 요구하신다. .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 이 사람은 삶 그 자체 앞에 서 있다. 예수님, 곧 우리 대신 죽으실 분께서는 그분을 따라오고자 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살아 있는 것들과 그들과의 관계를 결정하게끔 내버려두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깊은바다의 제자들 : 배를 뒤집어 엎을 듯한 풍랑을 만난다.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 때문에 두려워 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신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과 달리, ‘적다little’ 적은 믿음은 믿음이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처럼 보인다.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바람과 파도에게 명하시는 권세가 있는 분과 같은 분이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하실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두명의 맹렬하게 귀신들린 사람들 : 귀신들이 성자를 알아보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분께서 누구신지 우리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해진 시간 이전에 오셨다고 두려워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 안에 주무실 때 그분의 부재를 두려워한다. 반면에 귀신들은 예수님의 현존을 두려워 한다.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로 쫓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이 그에게 말씀해 달라고 요청했던 말인 “가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귀신들을 돼지 떼에게로 보내신다. 그러자 그들은 달려가서 바다 속으로 자신들을 던진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 :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귀신이 쫓겨난 것과 돼지 떼가 몰사한 것에 대해 보고한다. 우리는 적어도 예수님께서 권세가 있는 특별한 분으로 대우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시기를 요청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삶,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불확실한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 우리의 지역에서 떠나시도록 요청할지 모른다
중풍병 환자를 침상 채 옮기는 사람들 : 예수님을 ‘우연히 만나러run into’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도 나병환자나 백부장처럼 예수님께 자신들이 옮긴 사람을 치료할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옮긴 짐의 무게에서 문자 그대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우리는 중풍병 환자가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옮긴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말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 환자를 옮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다. 그들의 믿음은 그분께 충분하다. 중보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서로를 떠받쳐 줄 수 있도록 주어진 은혜다.
어떤 서기관들 : 예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권위를 행사하신다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을 알아 보신다. 그들의 마음에 있는 악한 것을 보시고 도전하신다. .
무리들 : 당연히 경외심에 가득 차지만, 그들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리인 마태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태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만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따름following이다.
세리들 및 죄인들 : 더불어 식사하신다
바리새인들 : 예수님께 왜 부정한 사람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는지 묻는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불결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을 피하며 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바르게 생각한다. 다만 비판적인 지점은 그들이 말하는 거룩함의 근거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오셨지 건강한 자에게 오시지 않았다. 거룩함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회당장인 한 사람 : 예수님께 와서 나병환자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는 아무런 호칭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병환자나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신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수 있을 것임을 안다고 말한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예수님의 옷솔을 만진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 을 영예롭게 하시고 그녀가 치료되었다고 선언하신다. 그녀를 치료한 것은 예수님께 고치실 권세가 있음을 믿는 그녀의 믿음이다.
두명의 눈먼 자들 : 예수님을 따라와 자비를 외친다. 어떻게 눈먼 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들은 고침받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구한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들에게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그들은 집안까지 따라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음을 믿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주여 그리하오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이 사람 예수님께서 행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리의 놀람은 단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반대만 늘어가게 할 뿐이다.
바리새인들 :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에 대해 오직 귀신만이 귀신을 축출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반응한다. 예수님께서는 모여드는 반대세력이 그분의 사명을 멈추게 하도록 두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도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시고 모든 질병을 고쳐주신다.
제자들 :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돕는 자들을 보내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요청하신다. 교회의 사명이 시작되었다 제자들의 기도는 응답된다. 그 응답은 바로 그들 자신이 될 것이다.
l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권위의 특별한 성격을 가리킨다. 당연히 그분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셔야만 했을 것이다.
l 그러나 예수님의 내려오심을 거론함으로써 마태는 미묘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예수님과 모세 사이의 연관성을 끌어온다.
l 예수님께서도 산에서 내려오시지만, 그분께서는 어떤 증거판도 가져오시지 않는다. 그분께서 아무 증거판도 가져오시지 않는 것은 그분 자신이 율법이기시 때문이다.
l 모세의 내려옴과 마찬가지로, 무리는 예수님의 돌아오심을 기다린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무리는 예수님 위에 주의 영광이 깃듦을 볼 수 없다. 무리는 예수님을 따르지만, 그들은 그분께서 누구신지 알아채지 못한다.
l 그분께서는, 율법의 첫 번째 증거판들처럼, 그분께서 구원하러 오신 사람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깨어질 것이다. 모세는 주님의 산기슭에서 율법의 증거판들을 깨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깨어지실 것이다.
l 십자가에서 깨어지시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된다.
나병환자
l 무리들 한 가운데서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마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그분을 ‘주여’라고 지명한다.
l 마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나병환자, 곧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l 왜냐하면 마태가 예수님의 사역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가면 갈수록, 국외자들outsiders또는 이스라엘에서 신분이나 새력이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보다 더 잘 알아보는 것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l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상황에서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경배 받으실만한 분으로 인정하다. 왜냐하면 그는 만일 예수님께서 결심만 하신다면 자신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를 고치시기로 결심만 하시지 않고, 나병환자를 직접 만지신다. 그 즉시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된다.
l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지시는 것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감상적으로 읽는다. 이러한 만남에서 일어난 사건이 감상적인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나병환자에게 하신 것은 오직 그분께서만 하실 수 있는 권세를 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l 마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그분의 사역의 한 부분으로서 치유의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말한다. (마4:23) 하지만 이제 그분의 치유 사역에서 드러나는 권세는 그런 권세로 인해 위협받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가 고쳐달라고 구하기 때문에 고쳐주신다. 예수님께서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 치유를 행하시지 않는다. 나병환자가 아무에게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담긴 어려움을 보여준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께 있는 능력을 보여주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지 권세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분께서 어떤 부류의 주님이신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l 이 치유가 야기하는 논란들은 그분께서 고치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지도자를 따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백부장
l 예수님께서 그리스 이름의 마을인 가버나움이라는 곳에 들어가셨을 때, 로마군대의 장교인 백부장이 와서 자신의 종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다. 나병환자처럼, 이 사람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데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
l 비록 나병환자와는 달리 무릎을 꿇지는 않지만, 그는 예수님을 권세와 권위가 있는 분으로 분명하게 인식한다. 이는 그 역시 권세와 권위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l 그런데 로마의 장교는 예수님께서 기꺼이 그의 집을 방문하여 종을 고쳐주시려는 것을 거절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실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l 이방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유대의 율법을 존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격이 없다’라는 말은 그가 자신의 삶과 직업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상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l 백부장은 예수님께 차라리 치유하시는 말씀만 해 달라고 구한다. 그러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금 이스라엘의 주님께서 어떤 분이고 어떻게 행하실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국외자가 예수님을 더 잘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에 놀라시면서 이스라엘의 어느 곳에서도 그런 믿음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신다.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깨닫는 것으로 보인다.
l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고 백부장에게서 예증된 믿음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l 더군다나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 나라에서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동쪽과 서쪽에서 오게될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l 사 2:3-4, 미가 4:1-8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의 성취가 이 백부장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신다. 선지자들은 열방들이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해 모일 것이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평화롭게 사는 것을 배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자를 고치심 바다를 잠장케 함… 권능의 기적
l 그날 저녁 늦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후, 많은 수의 귀신들린 사람들이 그분께로 나아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아픈 사람들을 모두 고치신다.
l 하지만 치유의 권세를 행하시는 데는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마태는 우리의 관심을 이사야 53장4절로 이끄는데, 거기서는 메시아가 우리의 허약함을 지시고 우리의 병을 담당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l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권세는 우리의 허약함을 받아들이시는 권세이고, 우리가 고난 당하는 만큼 고난 당하시는 권세다
l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는 다르시다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다름에 참여하길 바란다. 한 서기관이 와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딱 잘라 거절하신다.
l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갈 곳이 아무 데도 없기”때문이다. 그 서기관은 서기관에 걸맞게 예수님을 ‘선생’으로 규정했지만, 그는 이 선생께서 우리에게 안전을 위해 애쓰는 것들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지혜를 가르치신다는 것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예수민께서는 대답하신다. 만일 당신이 편안히 머무르고자 한다면, 당신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l 나병환자와 백부장이 부른 주님께서라는 칭호보다 ‘인자’라는 칭호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스스로 성취하고 있다고 이해하신 역할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와 동일시하는 것을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그것은 모욕 당하고 고난 당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새로운 시대의 개시를 알리신 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승리와도 같지 않은 인자의 승리의 귀환을 드러내신다.(마17:12,20:18,28 26:2,24)
l 제자들이나 우리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그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시는 이 분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l 또 다른 ‘제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예수님과 동행하는 여정을 중단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에게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라고 요구하신다.
l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은 ‘정상적인’ 것들이 재구성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 이 사람은 삶 그 자체 앞에 서 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죽음에 사로잡힌 채 죽은 사람을 장사하기를 원한다.
l 예수님, 곧 우리 대신 죽으실 분께서는 그분을 따라오고자 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살아 있는 것들과 그들과의 관계를 결정하게끔 내버려두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l 서기관으로서 제자가 되고자 한 사람과 우연히 만나신 후 예수님께서는 배로 물러나신다. 제자들은 곧 바로 배를 뒤집어 엎을 듯한 풍랑을 만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무신다.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 때문에 두려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깨운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신다. 그들이 왜 두려워해야만 하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과 달리, ‘적다little’
l 적은 믿음이라는 것은 이후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관계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특징으로 판명된다(마 14:31) 하지만 적은 믿음은 믿음이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처럼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바다가 조용해진다.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바람과 파도에게 명하시는 권세가 있는 분과 같은 분이시다
l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하실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복음서들은 좀처럼 역설적이지 않지만, 여기서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관한 마태의 보고는 분명히 역설적이다.
l 제자들처럼 교회는 스스로 믿음이 적은 자라고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자들의 배처럼 교회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안전한 방주다. 교회의 안전은 우리의 죄성을 고백하는 데서 오는데, 이 죄성이 자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여실히 드러나는 곳은 없다.
l 세상이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을 교회가 세상을 위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죄의 고백을 통해서다. 설령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적은지 발견하더라도, 귀신들과 맞닥뜨릴 때 기꺼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한다.
가다라지방의 귀신
l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 건너 편의 가다라 지방으로 오신다. 그리고 두명의 맹렬하게 귀신들린 사람들과 맞닥뜨리신다.
l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 성령님에 의해서 그분께 부여된 표현과 똑 같은 것이다.
l 귀신들이 성자를 알아보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분께서 누구신지 우리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그 존재가 죽음에서 비롯되고,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신 분을 알아볼 수 있다.
l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해진 시간 이전에 오셨다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정해진 시간이 지금이란 것을 발견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실 때 그분의 부재를 두려워한다. 반면에 귀신들은 예수님의 현존을 두려워 한다.
l 귀신들은 예수님을 대면하자 자기들을 돼지 떼에게로 쫓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이 그에게 말씀해 달라고 요청했던 말인 “가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귀신들을 돼지 떼에게로 보내신다. 그러자 그들은 달려가서 바다 속으로 자신들을 던진다.
l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가까운 마을로 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귀신이 쫓겨난 것과 돼지 떼가 몰사한 것에 대해 보고한다. 그러자 마을 전체가 나와서 예수님을 만난다.
l 우리는 적어도 예수님께서 권세가 있는 특별한 분으로 대우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자기들의 지역에서 떠나시기를 요청한다.
l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익숙한 삶, 심지어 귀신들려 죽음의 통치 아래 놓인 삶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불확실한 삶,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당연한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께 우리의 지역에서 떠나시도록 요청할지 모른다.
l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을 자신들의 방책대로 살라고 남겨두고 떠나시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l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강요하시지 않는다. 세상의 습관들은 깨뜨리기 어렵다. 예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l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에서 파생된 우리의 습관들에 도전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그들의 지역에서 떠나시기를 요청하는 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요청 받으신 대로 행하신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
l 배로 돌아오서 그분의 고향 마을로 가신다. 누구나 고향은 환영 받고 이해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보이신 반응을 통해 그분께서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
l 그러므로 예수님의 귀향 이야기가 결국 그분의 십자가로 귀결될 그분에 대한 적대의 시작이라는 점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있을 만한 안전한 장소가 아무 데도 없다.
l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진실보다 안정이 더 선호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도전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도착하시자마자 곧바로 중풍병 환자를 침상 채 옮기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신다. 나병환자와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중풍병 환자를 옮기는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을 ‘우연히 만나러run into’ 온 것처럼 보인다.
l 그러나 그들도 나병환자나 백부장처럼 예수님께 자신들이 옮긴 사람을 치료할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옮긴 짐의 무게에서 문자 그대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l 다시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개시된 운동, 곧 그 나라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도록 해준다.
l 우리는 중풍병 환자가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옮긴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말을 듣는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 환자를 옮긴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그분께 충분하다. 중보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서로를 떠받쳐 줄 수 있도록 주어진 은혜다.
l 예수님께서는 놀랍게 반응하신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 환자가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와 병 사이를 강하게 구분하지 않으신다.
l 예수님께서 중풍병 환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해서, 그 중풍병이 죄의 결과이거나 형벌이라고 생각하셨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몸을 고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를 용서하실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으신 분으로 행동하신다.
l 병과 죄는 모두 악하다. 어느 쪽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창조를 회복하러 오셨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몰아내시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모두 회복의 행위들이다.
l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우상숭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권위를 행사하신다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다.
l 서기관들은 분명히 이것이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맞다.-만일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경죄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을 알아 보신다.
l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있는 악한 것을 보시고 도전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9:5)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기다리시지 않고, 중풍병 환자에게 일어나 그의 침대를 집으로 가져가라고 말씀하신다.
l 예수님께서 중풍병 환자를 고치신 것은 그분께서 인자, 곧 새로운 시대를 전하는 고난 받는 종이시고, 그러므로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on earth”는 하늘과 땅을 묶어준다. 하늘에 속한 인자께서 땅에 계시다. 무리들은 당연히 경외심에 가득 차지만, 그들이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l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가능한 권위를 행사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분께서 그 사람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분께서만 행사하실 수 있는 권위를 행사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l 기독교 인본주의와 같은 것이 있는데, 너무나 자주 성육신에 관해 인본주의가 기념하는 방식은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형이시라는 가정에 동의한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성의 전형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이 사람이시지 다른 누구도 아니시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유일하게 참된 인간이시다. 칼 바르트가 옳게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의 인성은 말씀Logos과 연합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l 인성 그 자체의 개념에서 계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의 본성은 그것 자체의 인격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격성, 본질, 실재, 하나님의 말씀과 연합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본성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 안에서만 실제적이다. (바르트,1990,157)
l 바르트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전문적인 범주를 사용하여 마태복음에 처음부터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즉 어떤 다른 인간도, 어떤 다른 이야기도 이 사람 예수님의 생애를 대채할 수 없다는 점을 분병히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어떤 ‘그리스도 인물’의 전형이 아니시다. 복음의 특성은 예수님 그 자체이신 계시의 특성을 반영한다. 우리는 마태,마가,누가,요한에 의해 제공되고 교회에 의해 수행된 이야기들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알수 있다.
l 우리는 인성이라 불리는 것 안에 내재되었지만 아직 손대지 않았거나 심지어 왜곡되어 버린 권세를 입증함으로써 예수님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와 완전히 같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와 완전히 다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삶 없이는 불가능한 새롭게 된 신성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종말론적인 구세주시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삶에 대해 마태가 말한 모든 것을 실행하셔야만 했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성취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사명을 위해서 새로 모집된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인실 될수 있다.
l 예수님께서는 세리인 마태를 지나가면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놀랍게도 마태는 그대로 행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태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만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따름following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심쩍은 활동에 연관된 사람을 부르실 뿐 아니라, 세리들 및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신다.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들이 입을 열어 어찌하여 예수님께 부정한 사람들과 더불어 식사하시는지 묻는다.
l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을 불결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을 피하며 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바르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라 진실되게 살려는 그들의 시도를 못마땅해 하신 것이 아니다.
l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열망은 바른 것이다. 다만 비판적인 지점은 그들이 말하는 거룩함의 근거들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심으로써, 그들이 생각하기에, 율법이 요구하는 바에 반항하시느냐고 묻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도전을 들으시고 대꾸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그분의 다른 점을 분명히 하신다. 그분께서는 병자에게 오셨지 건강한 자에게 오시지 않았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은 병자다. 거룩함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l “한 (영원한) 제사” (히 10:12)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히 10:14)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드려질 것이다. 희생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성화와 거룩을 구하던 방법이다. 그러나 그런 희생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l 왜냐하면 홀로 죄를 위한 번제가 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이제 자비는 희생이 취해야만 하는 형태이며,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자들을 구별시키는 거룩함을 구성하는 것이다.
l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목적을 드러내는 완전한 희생이다. 그러나 사실 그분의 전 생애가, 마태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신 것이 자비다. 여기서 우리는 자비로운 자가 왜 복이 있는지를 본다(마5:7)
l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런 의사가 전혀 필요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병은 자기들이 건강하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바리새인들에게 반응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가져오신 나라는 자신들의 죄를 깨달을 수 있는 자들로 구성된다고 말씀하신다.
l 산상설교에서 그분께서는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마 5:17), 그 성취는 죄를 용서하시는 그분의 권세를 통해서 온다.
l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곧 그분 자신이다. 그분께서는 오셔서(마10:34-5, 20:28) 우리로 하여금 창조된 목적에 따라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l 예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말씀하실 때, “갑자기” 이스라엘의 대표자이자 회당장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나병환자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는 아무런 호칭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병환자나 백부장과 같은 믿음을 보여 준다.
l 다만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신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수 있을 것임을 안다고 말한다.
l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는데,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예수님의 옷솔을 만진다.
l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믿음 - 그분께서 곧 스스로 누구신지 말씀하신 그분이라는 믿음 – 을 영예롭게 하시고 그녀가 치료되었다고 선언하신다. 그녀를 치료한 것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 고치실 권세가 있음을 믿는 그녀의 믿음이다. 그녀는 즉시 나았고 그녀의 격리소외도 끝났다.
l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셔서 우는 자들을 내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예수님께서 그분의 권세를 나타내시는 것보다 이 상황이 더 나빠지게 되는 것을 거절하신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l 예수님께서는 결코 지체하지 않으신다. 여우나 새처럼 그분께서는 항상 움직이신다. 그 나라는 그분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기를 요구하는 운동이다.
l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그분께서 가야만 하는 것은 복음이 한 묶음의 믿음들이 아니며 그럴 수 없음을 가리킨다. 복음은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실제적인 남자와 여자들을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들을 만나셔야만 한다.
l 복음전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고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곧이어 보게 되겠지만, 제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l 선교하는 교회a missionary church가 아닌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증거한다.
l 예수님의 변함없는 움직임은 어려움에 처한 자들, 눈먼 자들, 벙어리 된 자들이 그분께 다가올 수 있도록 해준다. 두명의 눈먼 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와 자비를 외친다. 어떻게 눈먼 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보는 시력이 때로 뿌옇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l 그들은 고침받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구한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마태복음 첫 구절에서 이분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것을 배웠지만, 여기서 이 칭호는 이분의 왕권이 자비와 치유를 제공하는 책임을 맡은 것임을 단언해준다. 이것이 시편 72편12-14절에 나오는 다윗이다.
l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들에게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그들은 집안까지 따라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음을 믿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주여 그리하오이다”라고 대답한다.
l 나병환자처럼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자, 그들의 시력이 회복된다. 예수님께서는 “엄히” 그들에게 다짐하셔서 그분께서 행하신 바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 근방에 소문을 퍼뜨린다.
l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다짐하도록 하신 이유는, 그분께서 귀신들려 말하지 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 밝혀진다. 중풍병 환자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이끌려오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신다. 말하지 못하는 자의 말의 회복이다.
l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리가 놀라워한다는 것은 안다. 실제로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이 사람 예수님께서 행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리의 놀람은 단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반대만 늘어가게 할 뿐이다.
l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에 대해 오직 귀신만이 귀신을 축출할 수 있다고 말한으로써 반응한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사탄 그 자신을 대표하는 자라고 고소함으로써 예수님께 대항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시작한다. (마 12:22-32)
l 예수님께서 치유 받은자들에게 그분께서 하신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다짐하게 하신 것은 그분께서 오해받지 않으시려고 하신 것임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존재하고 행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대로 존재하고 행하셔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그분께서 아닌 것 때문에 거부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역을 불명예스럽게 하기 위해 어떤 중상모략이나 허위사실이라도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정해졌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통을 증거하기 위해 준비하고 전진해야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모여드는 반대세력이 그분의 사명을 멈추게 하도록 두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도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좋은 소식을 전파하시고 모든 질병을 고쳐주신다. 그분께서는 무리에게 둘러 쌓이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l 어느 놀라운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런 필요를 댐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돕는 자들을 보내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요청하신다. 교회의 사명이 시작되었다 제자들의 기도는 응답된다. 그 응답은 바로 그들 자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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