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 제5장 설교

Four Seasons Daddy 2022. 9. 2. 13:35

마태복음 5장 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께 입맛이 당기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내면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른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바깥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박해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더 같이 들어가게 된다.   

마태복음 53-10, 유진피터슨 메시지

 

산상설교   팔복

l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과 에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그분의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산으로 그에게 나아오는데서 드러난다.

 

l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셨다. 마태는 종종 예수님께서 동정심으로 무리를 보신다거나 그들에 대해 슬퍼하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시기 전에 단지 무리를 보기만 하셨다고 한다.

 

l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그분을 따른다. 제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듣는 말씀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l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시내산에 오르게 하셔서 율법을 받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어 산으로 오라고 하시는데, 아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모세와 함께 산에 오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19:16-25)

 

l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산에서 예수님께 참여하려고 용기를 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님, 곧 새로운 모세께서는 제자들에게 둘러 쌓이셨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마치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위해 모세에게 가르침을 받았듯이 가르침을 받는다.

 

l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라는 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중에 있는 사람들도 가르치셨음을 나타낼 수 있다.

 

l  하지만 산에서 예수님께 참여하는 제자들의 움직임을 볼 때, 마태복음 전체에서 발전되는 제자들과 무리들 사이의 긴장을 얼핏 알아채기 시작할 수 있다고 본회퍼는 제안한다.

 

l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자들을 부르셨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아 회개하라고 설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본회퍼는 그것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라고 묻는다.

 

l  예수님께서는 보신다. 그분의 제자들이 저 너머에 있다. 그들은 그분께 참여하기 위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무리들에게서 떨러졌다. 그분께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다. 그들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들은 포기renunciation와 결핍want 가운데 살고 있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며, 유혹받는 자들 중에서 가장 유혹받는 자들이고, 굶주린자들 중에서 가장 굶주린 자들이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전혀 아무 것도,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찾아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무리들을 보실 때, 그것은 그분께서 찾으시던 위대한 공동체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제자들은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여기 저기서 경청하는 자들과 믿는 자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무리들 사이에는 끝까지 적대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모든 분노가 제자들 위로 쏟아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절당할 것이다. 십자가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리스도, 제자들, 무리들-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의 고난의 전 역사를 볼 수 있다. (본회퍼, 2001,101)

 

l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는 마태복음의 정황에서 분리되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산상설교는 가르쳐진 내용들이 그것을 가르치는 분에게서 분리되면 율법이나 도덕이 될 수밖에 없다.

 

l  그 설교를 홀로 의로움의 실체이신 분에게서 분리할 경우,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모두 문자적으로 지켜야만 하느냐고 묻게 될 것이다.

 

l  산상설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그런 질문들이 허용된다면,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방향으로 전략이 전개된다.

 

l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과 관련되는 의미지, 그것을 공적인 영역에 적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제안한다. 그와 같은 전략이 지닌 문제점은 마태복음 어디에서도 그러한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l  아마도 좀 더 정직한 대안적인 읽기는 이 설교가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그런 적용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식만 느끼게하는 데 유용할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l  종교개혁 논쟁은, 때로 산상설교우리로 하여금 용서의 필요를 인정하도록 하는 데 의가 있는 율법이라고 제안하면서 이와 같은 전략을 형성한다. 그래서, 바울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바, 율법과 복음 사이에 강한 구별이 만들어진다.

 

l  그런 관점에서 실천하기 힘든 이 설교의 가르침들은 기껏해야 이상들’ – 즉 기독교인들이 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그 설교가 제안하는 대로 우리가 사느냐 못 사느냐의 여부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성격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로 간주된다.

 

l  이런 식으로 산상설교를 읽는 것은 종종 유대주의는 율법의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라고 제안하면서, 기독교를 유대주의로부터 구별하려고 한다. 개신교가 이런 읽기를 좋아한다.

 

l  그러고선 종종 천주교를 향해 기독교 형식을 띤 유대주의, 즉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를 부인하는 율법주의라는 눈길을 보낸다. 개신교와 천주교적인 읽기 사이의 대조를 가정하는 이런 식의 산상설교 읽기는, 기껏해야 그 설교가 어떻게 공교회의 정황에서 읽히고 순종되는지에 관한 질문을 정초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l  그러나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따라야만 하는 것인지를 묻는 질문들을 합당하게 취급해온 공교회의 관습은 단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분리시킨 기독론적인 성찰일 뿐이다.

 

l  교회가 스스로를 세상 속에서 편안하게 안주하는 모임으로 가정할 때, 교회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지닌 종말론적인 특성을 상실할때, 그리스도 안에서 초래된 구원은 너무나 자주 개인주의화되고 경건주의적인 용어들로 이해된다.

 

l  구속에 대한 충족설Satisfaton teories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주된 설명이 되어 구원받은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설교가 묘사하는 제자도의 급진적인 특성을 회피하도록 해주었다.

 

l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되고 난 다음에야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l  이런 식으로 구원을 이해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산상설교가 더 이상 구원을 구성하지 않는 하나의 윤리로 전락하고 만다는 데 있다. 본회퍼는 그렇게 이해된 구원을 값싼 구원이라고 불렀다.

 

l  그가 값싼 구원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것은 은혜를 교리로, 원리로,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반진리로서의 죄용서를 의미하며, 그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를 긍정하는 사람들은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다.”(2001,43) 본회퍼에 따르면, 그렇게 단언하는 것은 온 세상이 은혜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세상과 똑같이 살아도 된다는 가정으로 이끈다.

 

l  은혜에 대한 이런 견해는, 종종 그렇지 않을 경우 서로를 향해 깊은 불일치에 있다고 생각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진보적인 기독교인들 양자에게 모두 공유되어 있다. 다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얼마나 순응해야만 하는지 그 정도에서만 조금 다를 뿐이다.

 

l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이 설교를 말씀하신 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설교는 시간 안에서 가능해진 새로운 시대의 실재reality. 따라서 그렇게 설교하신 분에게서 설교를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l  산상설교는 이방인이나, 개혁가, 광신도, 교주로서 현실에 관계하신분이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실재reality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경험하신 분으로, 이전에 이 땅에서 산 어느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실재의 깊이를 공개적으로 밝히신 분의 말씀이다. 산상설교는 실재의 주님께서시며, 율법이신 바로 그분의 말씀이다. 산상설교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인 행동의 문제가 제기될 때 핵심이 되는 사항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행동이 실재와 일치하는 행동이라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행동은 어떤 윤리적인 원리에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비롯된다 (본회퍼,2005,23)

 

l  산상설교의 요구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단지 이상일 뿐이다. 실제로 산상설교의 요구들은 우리로 하여금 약한 자들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누구든 심각하게 비도덕적이라고 논쟁할 수 있다.

 

l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인 요구들이 포기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포기하게 된다. 산상설교에서 말씀들은 예수님의 삶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이 산상설교를 해석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기독교인의 가시성 - 등경위에 등불

 

l  따라서 산상설교는 개인들에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심으로써 그 징후로 삼으신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산상설교는 영웅적인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백성의 헌법이다. 산상설교의 요구는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를 의존하도록 고안되어 있다.(하우워워즈,1993,63-72)

 

l  그러므로 산상설교는 요구조건의 리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 그 주위에 모인 백성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그렇게 모이는 것이다.

 

l  본회퍼에 따르면, 교회가 이렇게 구성되는 것은 교회의 가시성을 요구한다. 소금이되는 것, 세상을 위해 빛이 되는 것은 교회가 가시적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l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가시성invisibility으로 도망가는 것은 부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이기를 원하는 예수 공동체는 무엇이든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일 수 없다.

 

l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주위의 문화와 자신들이 동일시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비가시적이 되려는 유혹을 받는다.

 

l  그러한 비가시성을 만든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코스탄틴주의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가이사와 동맹을 맺을 때 사용하는 전략을 묘사하는 용어.

 

l  요더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기독교인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바뀌었다고 놀랍게 관찰했다. 즉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예외적인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l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이후에는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 예외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기독교가 지배층이 되면서 이교도들을 도덕적으로 강제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l  콘스탄티누스 이전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황제의 인격에서조차 역사를 통치하시고 있다는 것을 신앙의 문제로 가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깨서 교회에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l  콘스탄티누스 이후 지배층이 되면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콘스탄티누스 안에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명목적인 기독교인들의 군중 속에 참된 신자의 공동체가 있을 거라는 믿음 위에서 받아드려야만 했다.

 

l  더 이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과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 일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성찰로 바뀌게 된다.

 

l  콘스탄틴주의로 이동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 없이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였다는 것이 요더의 견해다

 

l  본회퍼에 따르면, 산상설교와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모든 시도들에 도전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5:14)

 

l  본회퍼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와 같은 도시에 대한 호소에서 예루살렘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제 그 도시는 제자들의 공동체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한다.

 

l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더 이상 어떤 결정에 직면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가능한 유일한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가시적인 신앙 공동체다. 그들의 제자도는 그들을 세상과 구분지우는 가시적인 행동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도가 아니다. 따라서 제자도는 밤의 빛과 같이, 평지의 산과 같이 가시적이다.  비 가시성으로 도망가는 것은 부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이기를 원하는 예수 공동체는 무엇이든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공동체일 수 없다 (본회퍼,2001,113)

 

l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가시적이 될 수 있기 위해서 행한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제자들은 다르게 되기 위해서 다르게 부름을 받았다는 뜻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제자들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시지만, 그 다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 자신 때문이다.

 

l  본회퍼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제자들의 의로움은 제자들에게 조차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해준다고 말한다.

 

l  가시성과 다름은 예수님에 의해 가능해진 삶의 방식으로 이끌린 결과다. 따라서 산상설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시대의 한 백성의 삶의 방식에 대한 묘사다.

 

l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한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복이있다고 천명하신 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와 더불어 변화된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l  팔복들 각각은 선물의 이름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각각의 사람들이 각각의 복을 소유할 것이라고 전제되지는 않는다. 오희려 팔복에 거명된 선물들은 이렇게 다양한 선물들이 예수님의 제자도로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의 공동체안에 존재할 것임을 시사한다.

 

l  팔복에 대한 모든 이해의 원천도 예수님이셔야만 한다. 우리가 마음이 가난한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는 것은 예수님께로부터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람들에게 이 마음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할 수 있었다.

 

l  바울은 우리의 영의 가난이 예수님의 자기 비우심과 같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가난이 소유가 없어져도 살 수 있는 백성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가정한다.

 

l  가난한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사람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세상의 노예상태에서 자유케 하는 가난의 종류를 발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근처에 당신을 놓아둘 수 있다. 더군다나 놓칠 수 없는 것은 그런 가난이 지닌 정치적인 의의다.

 

l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세상의 권력에 우리가 순응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재물 부, wealth-아주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l  팔복 중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것보다 더 기독론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이 행복, 심지어 평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포기하고 세상을 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본회퍼, 2001,103)

 

l  더욱이 예수님처럼 제자들은 여전히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굳센 온유함으로 불의를 견딘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백성의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까지 보여주신 용서에서 드러나는 자비로 인해 복이 있다. 그런 백성이 평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다른 어떤 목적telos을 가지지 않고 다만 예수님 안에서 체화되는 그 나라를 제정하고자 하는 순수함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l  팔복들 각각에 reward’이 수반된다는 것이 제자가, 예컨대, 하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 마음이 가난해지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앞서 제안한 것처럼, 팔복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그것들이 선물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l  자비로운,긍휼이 여기는 자가 자비로움심,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가능해진 삶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l  덕은 그 자체로 상일 수 있으나 기독교인들에게 덕-팔복에서 제안되는 종류의 덕-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공동의shared삶을 칭하는 이름들일 뿐이다.

l  그러므로 팔복에 묘사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못 비난받고, 심지어 예수님 때문에박해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런 박해는 그들이 선지자의 전통에 서 있음을 가리킨다.

 

l  선지자의 직임은 이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 이 새로운 공동체에게 주어졌다. 선지자들의 인격이 이스라엘에게 또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되었듯이,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표식sign이된다.

 

l  따라서 제자들은 잘못된 겸손의 놀이를 할 여유가 없다. 지나친 것은 위험하다. 십자가는 제자들의 사역 -이방인들에게조차(5:16)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선한 일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을 밝히는 빛이다.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청하신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아야만 한다고 제안하신다.

 

l  구약성경에서 율법이 지닌 위상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성찰할 때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의 의로움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나아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다.

 

l  왜냐하면 그 나음excess’의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해가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하도록 이끄는지를 평가하는 데 적절한 맥락을 이해하도록 도움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한 계속되는 도전을 기꺼이 환영해야 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 때문에(15:1-9), 세부적인 것들을 강조하면서 정작 더 중요한 문제들은 무시하는 것 때문에(23:23),탐욕과 자기 방종 때문에(23:25-26)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하실 것이다.

l  모든 비판은 율법의 목적에 관해 이스라엘이 이해하는 바 대로 제기되었다. 예컨데,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유사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하신 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담긴 정치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l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로움, 거룩하고자 하는 그들의 올바른 열망은, 그들이 유배상태에서나 이방인의 세력에 점령당한 때에서조차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 남아 있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빈번하게 이스라엘은 권력, 특히 로마의 힘에 도전하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신실하기를 구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준수가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l  하지만 정확히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고자 하는 자들, 예수님의 제자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도록 또는 존재하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폭력적으로 로마를 전복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의 나라는 폭력으로 로마를 전복하려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로마의 폭력에도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l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나라는 체제 전복적인 것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 체제전복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로움이며, 그로인해 그분의 십자가로 귀결되는 체제전복이다.

 

l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옛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시지 않고 옛 질서 가운데서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한 백성을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l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세상을 위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책망에 뒤따라 나오는 그 대립antithesis 다만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

l  요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나 모세, 기드온, 사무엘을 부르시면서 행하셨던 것을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이제껏 보아왔던 다른 어떤 사회와도 같지 않은 한 사회를 도래케 하기 위해서 그분의 말씀 주위로 사람들을 모으신다.

 

l  이것이 산상설교뿐만 아니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가시성visibility이다. 이 가시성에 관한 세부사항들이 일련의 대조를 이루면서 뒤따라온다.

 

l  너희가 (그것에 관해)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치 팔복에서처럼 이러한 대립은 율법이 요구하는 공동체의 종류를 자세히 설명하고 묘사하기 위함이다.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

 

l  예수님께서는 율법은 지켜져야만 한다.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고 방금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따라서 살인과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적을 증오하는 것들은 금지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만드신 공동체는 그것이 회피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회피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예증해야 하는 그 공동체의 특성 때문에 그럴 뿐이다.

 

l  게다가 예수님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들 서로간에 화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 화해는 화해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를 만든다.

 

l  따라서 예수님께서 형제 자매들에게 분노를 품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들과 화해하려고 힘써야 한다고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에 대해 놀라서는 안 된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화를 촉발시킨 상대와 더불어 화해하지 않고 제단에 나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l  분노와 희생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결합되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좋게 보시는 것에  화가 나서 아벨을 죽였다(4:1-16) 예수님께서는 이제 회개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신다.

 

l  따라서 누구든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화해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희생으로서 살인의 악순환을 깨뜨리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화해햐야 한다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화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18:15-20)

 

l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그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면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만일 우리가 잘못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믿는 사람과 대면할 것을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l  왜냐하면 그 잘못은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거룩함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믿는 사람과 대면하라고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실수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l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이 주관하는 재판정에 서로를 끌고 간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경고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서로간에 분을 품은 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책망하신 것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항해 행동하기보다 잘못된 일로 고통받기로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l  바울이 그들에게 이것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무엇보다 세상에게 세상의 정의와 다른 대안을 제공하는 교회가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l  그러므로 교회는 성찬을 받기 위해서는 죄의 고백과 고해, 화해가 필수적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어떻게 우리가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 채로 감히 화해의 잔치에 올 수 있겠는가? 하나됨에 주어진 이름이 사랑이다.

 

l  빵과 잔의 선물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고 또 서로간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찬을 받지 않는 편이 낫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의 거룩함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육신의 열정 :  분노 욕망  결혼  이혼

l  분노와 욕망은 육신적인 열정이다. 우리는 분노와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나 욕망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시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인 존재임을 가정하신다.

 

l  오히려 그분께서는 분노와 욕망이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를 위해 섬기도록 형성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라고 제안하신다.

 

l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죄성에 거주하도록 초대받지 못하게끔 강제하는 한 백성의 구성원이 되라고 제안하신다.

 

l  우리는 혼자서 욕망에 대한 다른 대안을 품을 수 없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욕망에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 있음을 발견하도록 요청하는 한 나라에 참여하라고 제안하신다.

 

l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된 공동체는 생물학적인 재생산으로 자라나지 않고, 증거와 회심에 의해서 자라난다. 독신과 육체적인 순결은 이방인 선교를 구성하는 실천들이다.

 

l  만일 우리가 전쟁하는 세상에서 평화에 헌신된 백성이라면, 만일 우리가 상호불신하는 세상에서 신실함에 헌신된 백성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분노나 욕망에 지배되는 데서 자유롭게 하는 삶의 방식에 사로잡힐 것이다

 

l  아마도 예수님께서 만드신 예기치 않은 세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 가운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몇몇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l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된 공동체는 생물학적인 재생산으로 자라나지 않고, 증거와 회심에 의해서 자라난다. 독신과 육체적인 순결은 이방인 선교를 구성하는 실천들이다.

  

l  간음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이혼에 대해서는 남성의 특권에 대항해 제시된다은 그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새로운 몸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l  그러므로 본회퍼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l  예수님께서는 결혼이나 독신을 하나의 요청되는 프로그램으로 만드시지 않는다. 그대신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포르네이아 음행, 곧 혼내관계와 혼외관계에서의 부정에서 자유케 하시는데, 이런 부정은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바로 그 몸에 대해서 죄가 된다(고전6:13-15) 심지어 제자들의 몸조차 그리스도와 제자도에 속해 있다. 우리의 몸들은 그분의 몸의 구성원들이다.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몸에 연합해 있기 때문에, 부정은 예수님 자신의 몸에 대해 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에 관해 말하기를, 그들은 그 육신을 그것의 열정과 욕망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한다.(5:24) 그래서 이 구약의 계명을 성취하는 것조차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순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그 몸을 보는 것이, 그리그것에 연합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명하신 순결을 위한 힘을 제공한다. (본회퍼,2001,127)

 

l  어떤 조건에서 그리고 언제 이혼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532절을 사용하는 사람들, 특히 포르네이아스porneias,음행들 라는 근거없이에 대한 의미를 결정하려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본문을 하나의 허용에서 하나의 법률적인 교환으로 변형시킨다.

 

l  중요한 점은 언제 결혼이 끝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보다 질문은, 새로운 허용을 고려할 경우, 기독교인들이 결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l  비슷한 방식에 질문은 이혼한 여성이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떤 교회가 그런 여성이 재혼하는 것을 필요성의 문제로 삼지 않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거짓된  가식에서  진실한 공동체로

 

l  본회퍼는 맹세는 우리가 거짓말의 세상에서 사는 표식이라고 본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특히 자기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스스로 신뢰한다면, 명세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l  멩세는 우리를 거짓말로부터 보호해 주려고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맹세는 그것이 있음으로써 거짓말을 하는 어떤 권리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측면에서 거짓말을 부추킬 수도 있다

 

l  서로 간에 진실되게 말하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진실되게 말씀드리기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배워야만 한다. 이것이 시편이 교회의 가장 위대한 기도서인 이유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하지 않고 기도하기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l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께 몹시 화내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화를 내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기를 거절하셨다는 것을 발견하도록 한다.

 

l  게다가 시편은 우리를 진실되게 말하도록 훈련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인정하게 하거나 적어도 우리의 죄가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시편이신 이유는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마태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편을 통해서만 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제자들의 진실함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기초한다고 말한 본회퍼가 확실히 옳은 이유이기도 했다

 

l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로서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진실되게 만들 수 있다. 십자가를 알게 된 자들은 더 이상 어떤 진실로부터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 십자가 아래 있는 자는 진실됨을 확고히 하는 계명으로서 맹세 없이도 진실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진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진리 없이는 예수님을 향한 진리도 있을 수 없다. 거짓말은 공동체를 파괴한다. 그러나 진리는 가짜 공동체를 찢어 발기고 참된 교제를 세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덮개가 벗겨진 진리에 거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l  그런 진실된 공동체는 갈등을 두려워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믿는다면 서로 서로 대면하라고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 단지 서로 잘 지내라라는 권고사항이 아니다.

 

l  더군다나 교회를 구성하는 진리는 기독교인들이 요구받는 삶의 방식 때문에 세상의 거짓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팔복에서 들은 대로, 그런 백성은 박해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l  그러나 진리 가운데서 기뻐하기를 배운 백성은 다른 어떤 삶도 바라지 않으리라는 것이 확실하다.

 

l  진리의 백성에게는 분명히 적들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그들의 적들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실 뿐만 아니라 보복하지도 말라고 하시는 그분의 명령을 훨씬 더 특별하게 만든다.

 

l  우리의 적들을 사랑하라는 요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가하려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과제는 산상설교 전체가 지닌 묵시적인 특성을 명확하게 해준다.

 

l  그렇게 사는 것은 인내를 요구하는데, 그 인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어 우리의 시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우리의 죄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l  팔복에서 복이 있는 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인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전혀 자비롭지 않은 세상에서 자비롭게 되기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들의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l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우리를 화나게 하는 자들과 화해할 준비를 하는 것, 결혼생활에 성실한 것, 진실을 말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적들을 사랑할 수 있는 시공을 창조해 내는 습관이다.

 

l  팔복들5:3-10과 대립들5:21-48에 의해서 요구되는 인내는 만일,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듣는 대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산상설교의 중심에는 다음과 같은 헌신이 있다.

 

l  검이 아니라 십자가, 난폭한 힘이 아니라 고난당함이 역사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의 열쇠는 그들의 효용성이 아니라 인내다. 의인들의 승리는 원인들과 결과들의 모든 계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부활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과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 사이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십자가 부활의 관계다. 9요더,1994b,232)

 

l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해지라고 요청받지만, 그 완전함이란 그리스도의 원수 사랑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완전함은 우리가 죄가 없다거나 분노나 성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l  오히려 완전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폭력에 기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분투하는 한 백성의 일부가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렇게 사는 것은 서로 진실을 말하는 것, 서로에게 약속에 신실하는 것, 화해를 추구하는 것을 배우는 습관들을 요청한.

 

l  그렇게 사는 것은 평화주의 그리고 혹은 비폭력이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그런 설명이 팔복들과 대립들에서 묘사되는 삶의 형식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의 형식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마태가 그분이라고 말한 사람, 즉 하나님의 아들이실 때에만 진실되게 살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l  본회퍼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적인 개인과 공직을 담당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올바르게 주목한다.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에게 그들의 공적인 책임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고 제안하시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l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들로서 짊어진 그들의 책임에서조차 떠나라고 요구하신다. 본회퍼는 어느 누구도 사적인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는 항상 책임들로 구성되어 존재한다고 언급한다.

 

l  그래서 만일 우리가 공격을 당했다면, 우리는 자녀들의 부모로서, 회중의 목회자로서, 또는 외교관으로서 당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악한 수단들을 사용하여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정확히 우리가 그와 같은 정황에 놓여있기 때문이.

 

l  예수님께서는 악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령님의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그 무기들은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에 의해 형성되어야만 한다.

 

l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악에 승리하리라는 신앙을 발견한 사람들만이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약속이 있는 유일한 순종이다. 무슨 약속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분의 승리와 함께 하는 공동체에 관한 약속  고난당하는 사랑이 악에 대한 응징이요 악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오직 십자가에만 참되고 실재적이다. 십자가의 부르심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들은 이러한 가시적인 공동체 안에서 복이 있다. (본회퍼,2001,1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