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 제3장 세례자

Four Seasons Daddy 2022. 7. 20. 16:44

마태복음 3장 세례자

 

l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막연한 시작이다. 그 때가 언제인가? 요셉이 가족들을 데리고 나사렛에 간 지 얼마 만이란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라나셨는가? 그분의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그분께서는 왜 유대에 가셨는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셨는가? 모두가 좋은 질문이지만, 마태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내용들이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l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 불려질 것이라는 내용에서 요한이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으로 갑작스럽게 전환하는 것은 그 때가 하나님의 시간인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l  마태와 요한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끌려 들어가기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l  마태는 예수님의 주체성에 대해 하등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l  마태는 세례 요한의 출현에 대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연결되는 이야기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이 요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l  나사렛 사람Nazarene은 이스라엘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삼손은 자신을 모태에서부터 나실인Nazirite(16:17)이라고 기술한다.

 

l  나실인은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라는 징표로 표시된다. 나사렛 사람Nazarene은 기독교에서 수도사들의 역할과 같이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다. 요한은 나사렛 사람이라고 명확하게 기술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과거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지명된 사람들과 많은 것들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l  여하튼 우리는 요한이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으로 수태되고 태어났음을 안다(1:5-25) 잠시 동안 어떤 사람들은 그 구원자가 요한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께서 예수님 안에 오셨음을 알아보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l  요한은 분명히 매우 이상한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유대 광야에 나타났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었다. 그는 메뚜기와 야생동물을 먹으며 살았다. 그가 입은 옷은 열왕기하 18절에서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라고 묘사된 엘리야를 기억나게 한다.

 

l  엘리아, 곧 죽지 않고 병거에 실려 하늘로 올려진 선지자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할 뿐만 아니라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서 다시 올 사람으로 오랬동안 기대되었다. 4:4-6

 

l  세례 요한은 이 엘리야인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14절에서 요한이 엘리야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신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오실 그분이신지 의심하는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11:4-6

 

l  희년, 곧 레위기 25장에서 윤곽이 드러나고 이사야 61장에서 해석되는 땅과 사람들의 회복이자, 요한이 오고 있다고 말한 오랫동안 기대했던 불의에 대한 전복-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사역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하신다.

 

l  요한은 엘리야로서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경험한 광야의 유랑을 설명해준다.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은 그들이 형성된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배반했을 때 즉시 처벌받은 곳이기도 했다.

 

l  대개가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하신 것은 또 한편으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l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오직 선물로 왔던 음식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뿐 것 아니라 하나님의 불 같은 구름에 의해 인도받는 것을 배울 수 있기 위해서 소유물을 빼앗기는 것도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아모스 210-11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이렇게 상기시키신다.

 

l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요한의 설교는 얼핏 모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모호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몸소 구체화한다.

 

l  그가 곧 이사야 403, 즉 이스라엘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의 성취다. 그러므로 요단강의 전 지역을 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l  그는 오랫동안 기대되어 온 사람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l  그런데 요한이 회개를 요청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우리는 자꾸만 회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도록 유혹받는다. 하지만 요한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데 실패한 것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대신해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행동하시는 것을 뜻한다.

 

l  요한이 요단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출애굽 때 모세가 물을 가름으로써 이스라엘이 받은 세례를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은 물로 된 벽들 사이로 마른 땅을 가로질러 걷는 것처럼 죽음에 직면해야만 했다. 요한의 세례는 이스라엘이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죽음에 다시금 직면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회개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다.

l  요한이 요청한 회개, 즉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17절에서 선언한 똑같은 회개는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율법에 구체화된 거룩함으로 살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l  요더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한다는 것은 기분이 상하는 일이 아니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개신교, 아마도 특히 복음주의 개신교는 모든 개인이 온전한     자의식과 성실함으로 자기만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관심을 두기에, 그 나라와 그 나라가 주는 혜택을 혼동한 위험에 늘 놓여 있다.

 

l  만일 누군가가 회개한다면, 그의 새로운 생명, 새로운 길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돌이킨다면, 이것은 목적 없는 그의 삶을 위해 무엇인가 하도록 할 것이다. 동료애를 갖게 함으로써 그의 불안과 죄책감을 위해 무엇인가 하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회복된 자아의 제공을,불안과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불트만파the Bultmanns와 그레이엄파the Grahams는 틀린 것이 아니다

 

l  만일 누군가가 회개한다면, 그것은 소화해야 할 교리, 가치를 인정해야 할 유산, 그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래도 말할 양심을 갖게 함으로써 그의 지적인 혼란을 위해 무엇인가 하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신성한 진리와 논리정연한 의사소통에 관심을 두는 복음주의는 틀린 것이 아니다

 

l  만일 한 사람이 회개한다면, 그것은 총체적인 자기훈련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그의 도덕적인 약함을 위해 무엇인가 하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그를 부도덕으로부터 지키고 제 때에 일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팍팍한 삶의 현장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나를 도우신다고 약속하는 필파the Peales와 로버츠파Robertses는 틀린 것이 아니다.

 

l  그들에게 그들의 장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복음이 아니다라는 말이 충격적이다. 우리는 회개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l  요더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회개의 성격을 결정하시는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설령 그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의해 더 나은 삶의 길이 야기된다 할지라도, 요한은 그런 삶의 길을 제공하지 않았다.

 

l  그보다 요한의 사역을 절박하게 만드는 것은 하늘 나라천국에 관한 선포다. 그런 나라는 우리가 더 나은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 나라가 임하여서 우리의 회개를 임박하게 만든다.

 

l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회개하도록 요청한 것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선지자적인 요청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회개를 요청하는 것은 그가 곧 임할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의해 세상이 변하고 있고, 또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다르게 산다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도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제 한 백성이 다름이 되기때문이다.

 

l  이것이 요한이 바리세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거절한 이유다. 어떤 점에서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정죄한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l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점령하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수호할 수 있도록 타협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요한이 거절한 것은 이 같은 소위 권력자들이 그들이 변호하던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삶으로 인도하는 데 어떻게 실패하는지에 관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통렬한 비판을 미리 내다보게 해준다.

 

l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과업이 아니라 소유가 되도록 만들려 했다고 고소하신다. 요한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그들의 신분을 보장하는 데 충분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l  결과적으로 그들은 오고 있는 그 나라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돌들로부터도 약속의 자녀를 일으킬실 수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다.

 

l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한 요한의 정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사역을 통해 확대될 것이다. 마태복음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음모로 귀결되는, 예수님의 사역에 의해서 발생되는 일련의 논쟁들을 보고한다.

 

l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좀처럼 호감가는 구석이 보이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결국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가정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들이다

 

l  실제로 율법에 이해 요구되는 의로움에 관한 예수님의 이해는, 매우 적대적인 맥락에서 율법의 준수를 유지하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의 이해와 매우 비슷한 것이었을 수 있다.

 

l  요한과 예수님께서 정죄하신 것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말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과 가르침 사이의 불일치다.

 

l  요한에 따르면, 모든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맺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에 던져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 선지자들이 정죄한 것을 끌어오면서, 요한은 이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종종 하나님에 의해 가지가 잘렸는데, 이렇게 가지가 잘리는 것은 추방을 의미했다.

 

l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포기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고난을 통해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자 했다. 이스라엘에 대해 요한이 행한 선지자적인 정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형식인데,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부터, 실제로 돌 같은 마음에서부터(11:19) 그분의 백성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다.

 

l  마태에게나 바울에게나 그것은 율법이냐 복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냐 아니냐의 문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약속으로, 이스라엘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시기 위해서 오셨다.

 

l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부르심보다 신분을 주장하게 된다.

 

l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거절한 것은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을 핍박하도록 이끈 똑 같은 신분에 대한 전제다.

 

l  그러나 죄책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한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다지 유용한 자리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요한이 요청하고 있듯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께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다.

 

l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다. 그는 하나님의 정련하시는 불이신 분의 길을 예비하러 세상에 왔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가 열방에 베풀라고 맡기시게 될 세례가 아니다. 그 세례, 곧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의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운명을 기다린다.

 

l  요한은 오실 분께서 더 능력이 많으신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중에 배우겠지만, 그분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께서만 그러한 권세를 갖고 계신다.

 

l  요한의 겸손은 꾸며진 것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필수적이게 된 회개를 요청하는 선구자다

 

l  예수님의 과업에 관한 요한의 설명은 세상을 그대로 놔두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특징 지우려는 모든 시도들에 도전한다. 요한의 설교는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수반하는 파멸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을 예상케 하는 묵시적인 선언이다.

 

l  이 사람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쭉정이 같은 우리 인생들이 불태워 없어질 것이 요구된다. 그 불, 곧 성령님의 불은 너무 강렬하여 우리가 잡기를 두려워하는 사랑의 불이다.

 

l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 즉 우리가 그 안으로 세례를 받는 생애로부터 촉발된 사랑이며, 바울이 로마서6장에서 말하듯이 율법을 통해 드러나는 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다.

 

l  그 사랑-에수님께서 곧 사랑이시다-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종속되지 않는 기쁨으로 살 수 있다.

 

l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인 갈릴리에서 요단강에 있는 요한에게로 오신다. 죄에서 자유하신 분이, 자신의 모든 사명이 오직 이 분을 알리는 데 있었던 그분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다. 우리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임을 안 것에 놀라서는 안된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처음으로 말씀하시면서 요한에게 모든 의를 이루기위해서 그가 세례를 행해야만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 곧 정의와 율법의 전형이신 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따르신다.

 

l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단번에 완전히 정복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에 굴복하시는 것을 미리 맛보게 한다.

 

l  요한은 동의하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통과해 오는 이스라엘처럼,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또 이렇게 선언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l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으로 뚫고 나오신다. 그분의 사명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삶과 죽음에 의해서 시작된 나라는 세상의 용어로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l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창조주라는 전제에 의해서 생산되는 테러를 당하셔야만 하시는 분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처형에 굴복하실 것처럼, 그분께서는 요한의 세례에 굴복하신다. 그분의 여정이 시작된다. 마태는 우리에게 따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