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목음 1장 태초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The book of genesis’는 소소한 시작이 아니다. 마태는 이 사람 예수님의 족보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바로 그 시작을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한다고 제안하면서 출발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마태에게서 이 구절은 이 사람 예수님의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메시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하늘과 땅의 계보를 제공하듯이(창2:4),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족보를 이해해야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그 종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종말론Eschatology은 기독교인들이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이런식의 이해를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이다. 종말론은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세상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복음서들, 특히 마태복음은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성경에서 발견되는 이야기로 말미암는 것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없다고 가정한다. 창조는 이스라엘의 선택, 왕정, 죄, 추방, 그리고 구속을 포함하는 그 이야기의 첫 운동이다.
마태복음은 물론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요약이 되시고,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는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새로운 창조의 이야기라고 믿는다.
묵시적인 언어는 마태복음이 말하는 이야기를 번져 나가게 한다. 왜냐하면 그런 극적인 언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세상을 어떻게 보고 또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태복음이 착수한 어려운 과업임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묵시는 시간이 구속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시간을 분열시킨 것이다. 묵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세상으로 보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더군다나 그렇게 보는 것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에 도전하는 정략을 수반한다.
마태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보도록 돕는 계속 진행 중인 훈련인 것이다.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사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려고 복음서를 썼는데, 이는 구속받은 세계라는 새로운 현실에 순복하면서 살려면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만 함을 뜻한다.
마태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분이요, 우리가 새로운 창조의 백성으로 살려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요구하시는 분이다.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복음서를 다 읽은 결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꾸도록 할 것이다.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곧 그분의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복음서를 썼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하나님께서 변화시켜 오신 세상에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런 변화를 눈에 보일 수 있게 하더라도 놀라서는 안된다.
마태는 그의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에 의미를 둔다. 마태는 그의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가 아는대로, 예수님께서 살해당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알고 있다고 적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방식대로 마태의 독자들이 훈련되지 않는다면, 곧 복음서를 읽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 지식이 그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창조는 마태복음의 첫 문장의 주제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운명이 메시아이신 이 사람 예수님의 삶에 달려 있다고 제안한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함으로써 마태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증언하고, 아브라함에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모든 백성이 복을 받게 하심을 강조한다.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에 걸쳐 묘사된 대로, 죄 많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아브라함을 그의 고향에서 불러내셔서 새로운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이었다.
자신들의 하늘을 만들어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대체하고자 했던 인간들의 반역에 대해서,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만일의 사태들을 극복하고자 했던 백성들의 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세상의 백성들을 흩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과 겸손함을 배우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열방 가운데서 사는 것을 배우면서 그들의 안전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질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 백성이 거룩하고 성별되도록 부름을 받았고, 나아가 그들의 존재 자체로 하여금, 만일 그들을 불러내어 열방의 빛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신다면 이해될 수 없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규정되시는 것은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삶을 요약하여 보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마태는 성경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이 예수님께 얼어났다’라든지, 예수님께서 이렇게나 저렇게 행하시거나 말씀하셨다고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헤이스는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에 대한 구약의 증거 본문을 임의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 형태를 생각하면서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구속적인 사랑을 약속하는 핵심구절들과 예수님의 생애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라고 본다
마태는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핵심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분께서, 다른 왕들이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서 하는 것처럼 승리하지 않으실 수가 있는가? 제자로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이분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요 유일하게 참되신 왕께서 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셔야만 했는지 배우는 것이다
마태복은은 우리들, 곧 마태의 독자들을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훈련시키셔야만 했던 것처럼 훈련시키고자 한다. 즉 십자가에서 초래된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이 구원에 관하여 이해하는 방식(구원은 나의 적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거절하신 것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중대한 전환점은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한 고백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바르게 고백한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물론이고 베드로조차 아직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통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을 구원하실지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분의 정체성을 설명해 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외아들인 이삭, 곧 그를 열방의 조상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는다.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이삭의 이야기가 우리를 아주 불쾌하게 만든다고 고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으로서 우리에게 희생제사라는 것이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뿐만 아니라 겟세마네에서 몸부림치신 이야기를 제대로(마 26:36~46) 읽는다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희생제물을 바치는 체제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희생제사의 어법, 특히 전쟁의 희생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희생제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우리의 바른 열망을 표현하는 탁월한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좋은 선물일지라도 왜곡시킬수 있는 교묘한 존재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희생제사를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통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하심으로써 그들이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수단을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얼마든지 우리 자신의 마음의 도구와 욕망을 섬기는 수단으로 만들 수 있음을 입증해 주는 전형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겸손해지시고, 죽음-심지어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도 순종하시는 아들을 보내셔서, 그분의 십자가로 말미암지 않은 모든 희생제사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그들의 권리에 도전한다.
헤롯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세상의 권력의 정치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예수님의 정치’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신학적으로 마태를 읽는 것은 교회야말로 세상의 정치에 대한 대안적 정치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다윗의 자손,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님의 정치적인 특성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바르게 이해된 성육신이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새로운 길에 참여하도록 하심으로써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 생명의 길의 이름이 교회다.
예수님 안에서 초래된 구원에 관해 마태가 서술하는 것은 그분의 탄생, 제자들과의 관계, 가르침과 논쟁, 기적,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포함하는 예수님의 삶을 완전히 공개하기를 요구한다.
마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구속을 시작하셨다는 것과, 그 구속은 거룩하도록 부름받은 백성의 창조를 수반한다고 믿는다.
마태는 이 사람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방인을 포함하는 데 열려 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하려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첫 구절에서 이사람 예수님, 곧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시자 ‘다윗의 자손,아브라함의 자손’이신 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마태의 의도가 선언되는 이유다.
중요한 점은 마태가 족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다. 첫 번째 족보의 역사는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마태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역사의 절정을 대표한다고 생각한 다윗왕으로 끝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태가 족보에서 말하고자 하는 역사는 또한 상실의 역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두 번째 단락이 바벨론 포로, 심지어 팔레스타인에 돌아와서까지 이스라엘의 삶을 맴도는 추방에서 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족보의 마지막 단락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단지 이스라엘을 대표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율법의 갱신이시며, 그분께서 약속의 땅이시며, 그분께서 성전이시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왕이시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을 약속된 백성으로 만드는 모든 것의 회복이시다. 요셉이 입양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족보에 들게 되었고, 이스라엘을 위해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왕이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과거의 이스라엘에 관해 말하는 마태의 족보 이야기의 절정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재의 범주를 심오하게 변화시키심으로써 단번에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대표하신다.
마태의 족보에는 다말(창38장), 라합(호 2장),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삼하11-12장, 왕상 1장) 등 네 명의 여성의 이름들이 포함된다 마태가 이 여성의 이름들을 거명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의미심장한 일이다.
마태복음 곳곳에 나타나는 이방인들의 역할을 고려해볼 때, 마태는 다른 방식에서 이스라엘에서 배제된 외부자들인 여성들을 거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약속받은 백성을 유지시켜 가식 위해서 이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여성들은(그들이 여성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방인에게로 퍼져나가는 부인할 수 없는 실재를 대표한다.
마태의 족보는 하나님의 계획이 항상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격정적이면서 전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수행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다.
마태의 족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라고 임무를 부여하심으로써 실현가능해진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에 관해 마태가 말해야만 하는 기이한 이야기를 명료하게 해준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성령으로’ 한 아기를 임신하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 중 하나가 되심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성육신의 신비로 묘사하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 앞에 서게 된다.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께서 시간에 맞추어 삼위일체의 제3위이신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잉태되셨다. 마태에게 성령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르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 하나가 되시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하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반드시 필요하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성부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마리아의 아기를 수태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행하신 것과 다른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시도 창조에 부재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는 “저기 뒤쪽에 back there”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뜻하셨고, 계속해서 뜻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이다.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리시기를 거절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실재actuality는 동정녀의 탄생을 사실주의적인 용어로 설명하려 하고, 말이 되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잘못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창조를 설명할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온전히 사람이실 수 있음을 설명하려고 시도할 수 없고, 시도해서도 안된다.
니케아공의회와 칼케돈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설명하지 않고, 대신 설명없이 하나님의 신비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따라서 니케아와 칼케돈은 복음서들의 특성을 재생산할 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길은 이야기, 즉 요셉과 마리아가 “서로를 알지” 못했는 데도,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태가 족보 이야기를 하다가 마리아의 임신 이야기로 전환함으로써 우리에게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게 하지 않는 이유다.
마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의 수태와 탄생의 빛 안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임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수태와 탄생에 대한 마태의 설명은 미안한 기색이 하나도 없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이 주인이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 여전히 계시를 요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해줄 수 있는 새로운 여호수와라는 뜻에서 아기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영예를 안았다.
마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이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마태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공식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마리아는 처녀였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순결을 빼고 이 이야기가 전해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마리아의 순결을 증명할 다른 방도가 없다.
마리아의 순종이 없었다면, 즉 성령님을 받으려는 그녀의 자발성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의심스러워졌을 것이다. 또한 마리아는 우리의 아브라함이기도 하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의 고향을 떠나 이방의 행선지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듯이, 그녀의 자발성으로 하나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는 교회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녀는 새로운 백성이 되도록 부르시는 성자께 신실하게 응답한 새로운 창조의 첫 열매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인 것처럼,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다.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경륜 가운데서 마리아의 의의를 잃는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신다. 그분의 몸은 유대인의 몸이었다. 확실히 유대인의 몸은 사람의 몸이다,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사람’이신 그 몸이 특별히 마리아의 몸이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께서 죄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시려고 오신 분임을 잊지 않도록 한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다. 그러나 이 공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신실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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