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사명
l “그 때에 예수님께서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우리는 “그 때에”에 함축된 불길한 느낌을 감히 간과할 수 없다.
l “그 때에”라고 전하면서 마태는 성육신의 신비에 다가간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시간에 종속되도록, 육신에 종속되도록, 마귀에게 종속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하는 자”에게 던져지신다.
l 그러므로 “그 때에”는 십자가상의 고뇌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27:46)라는 외침을 내다보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시험, 즉 하나님의 좋은 선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로서는 신실하게 살아갈 수 없음이 증명되었던 시험을 받기로 하셨다.
l 아들께서는 순종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순종의 대가를 간과할 수 없다. 그분의 순종은 성경을 통해 드러난 이스라엘에 대한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에 달려 있다.
l 예수님, 곧 이스라엘의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하시는 분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읽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마귀에게 저항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하신다.
첫번째 시험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십 주야를 금식하셔야 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겸손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시면서 그들에게 주셨던 굶주림을 되풀이하신다.
l 겸손의 전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굴욕을 당하시며 우리를 위해 금식을 겪으신다. 그분의 금식은 열왕기상 19장 4-9절에 나와 있는 엘리야의 금식과 다르지 않다.
l 예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성부의 축복을 한껏 받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엘리야처럼 그분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에 의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항상 위협하려는 마귀와 직면하셔야만 했다.
l 타락한 천사인 마귀는 불순종의 신비를 보여주는 전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를 낳았던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게 하시고자 하신다.
l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에 우리가 자유로이 보답하기를 바라시면서 우리의 불순종을 기꺼이 무릅쓰신다.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상호의존하시는 사랑에 우리를 참여케 하시려고 강제하시지 않는다.
l 하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평화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우리가 고안한 장치들을 동원해 우리의 삶을 안전케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l 그러나 그 장치들은 우리 자신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서로서로를 대항해 가차없이 폭력을 행사하도록 인도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미치도록 만드는 것은 창조주에 대항해 반역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다름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받았던 선물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l 이것이 마귀가 한편으로는 교활하지만 동시에 자기파괴적으로 미치게 되는 이유다. 왜냐하면 마귀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틀림없음을 알고서 화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l 그러므로 마귀가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유혹하는’ 것뿐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마귀는 오직 기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귀는 그가 유혹하는 사람만큼만 강하다는 뜻이다.
l 그렇다고 이 말이 마귀의 유혹이 우리에게 파괴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견디신 유혹과 우리가 견디는 유혹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l 왜냐하면 마귀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로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로 사랑하신 백성, 곧 이스라엘에 의한 반역의 역사에서 계속된 역사를 되돌려놓기 위해서 오신 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l 그러나 이번에는 마귀가 질 것이다. 힐러리Hilary는 마귀가 그로 말미암아 죽고 불행하게 된 인간에 의해 패배하게 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아담을 유혹하기 전에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시기한 자가 마귀였다. 그는 인간 존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자마자 바로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 유혹을 받으심은 마귀의 시도가, 특히 성결하게 된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사악한지를 잘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귀는 성도들에 대항해 간절히 승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Manlio 2001에서 인용,57)
l 그러므로 마귀는, 예수님의 금식이 아마도 그분을 약해지게 했으리라 생각하고 이전에 하와에게 그랬듯이 예수님께 접근한다. 먹는 것이 마귀의 일차적인 공격라인이다. 왜냐하면 먹는 것은 우리의 의존, 곧 우리가 부인하고자 하는 의존의 핵심을 찌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l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귀가 먼저 예수님께 아주 순수하게 보이지만 의심이 생기도록 하는 발언을 하면서 말을 걸어온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3:1/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
l 마귀의 질문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가정하도록 초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회퍼는 뱀이 종교의 대표라고 본다. 왜냐하면 뱀의 질문은 하나님에 대해 피조물에게 알려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l 마귀는 분노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그의 영리함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 그는 교활하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시라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 즉 음식을 공급하시는 일을 하셔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시면서 신명기 8장3절을 인용하신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기 전에 이스라엘을 굶주리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어떻게 겸손하게 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
l 하나님께서는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l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음식을 공급하신다. 그러나 사탄은 음식과 하나님의 말씀이 분리될 수 있다고 우리를 믿도록 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제안을 거절하신다.
l 이스라엘에게 주신 만나의 선물과 같이 그 선물들은 우리를 마귀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도록 용기를 북돋고, 예수님을 유혹하고, 교회를 신실치 못하게 했던 것과 똑 같은 유혹들에 취약하게 만든다.
l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위해 증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선물하신 바로 그 백성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배반하도록 유혹받는다.
l 『대신문관』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 추기경과 예수님께서 심문과정에서 대면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현존으로 나타나셨고, 사랑과 능력이 그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길로 인식되었다.
l 추기경은 군중들을 두려워하여 그분을 체포하도록 명령한다. 추기경이 감옥에 있는 그분께 와서 그들-교회를 의미하는-이 마침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을 마무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l 교회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지상의 빵을 제공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자유의 욕망을 가까스로 통제해 왔다. 추기경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자유의 약속은 사람들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무법적이어서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l 추기경은 인류를 사랑했기에 에수님을 체포하게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따르면, 추기경은 안전의 산물이라고 가정되는 행복뿐만 아니라 안전의 환상을 가지기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태롭게 한다.
l 추기경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고 예수님을 고소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요구받은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능력을 보고 그분을 믿도록 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를 거부하시는데, 이는 그분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l 그러나 추기경은 주장하기를,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에게 빵을 주어왔다.
두번째 시험
l 도스토예프스키가 잘 알았듯이, 마귀는 자원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하는 유혹에는 실패했지만, 마귀는 예수님을 다시 유혹한다.
l 성령님이 아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이끌어 거룩한 도성, 성전의 첨탑으로 데리고 가서 뛰어내리게 함으로써 성부를 시험하도록 유혹한다. 더군다나 마귀는 성경을 인용한다. 시편91편11-12절
l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16절을 인용하시면서 맛서신다. 곧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맛사에서 주님을 시험했던 것같이 시험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l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의미하셨음’에 틀림없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본문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신다. 당신이 마귀와 씨름하고 있을 때, 그 본문의 ‘의미’를 찾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다.
l 이 두번째 유혹으로 마귀는 하나님의 손을 억지로라도 쓰게 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통치받기 원하는 대로 통치하시게 하려고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자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마21:4-5)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께서 힘으로 성전을 차지하기를 원한다.
l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제사장들의 제사장으로서 행동하라고 유혹한다. 예수님께서는 영웅적인 역할, 즉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수중에 넣고,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고,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수 없는 희생을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하라고 요청 받는다.
l 그러나 그러한 역할은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될 사람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자기 스스로 행동하기를 거절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성부의 뜻임을 본다
l 그러므로 부활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불필요하다고 제시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에 관한 마귀의 제안을 거부하시는 것에서 분명해진 성부의 사랑에 대한 그분의 순종을 확증하는 것이다.
l 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 성경에 관한 예수님의 사용은 예수님께서 선지자시며, 제사장이시며, 왕이심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 이스라엘의 참된 재판관이 되는 것은 왕의 삶의 일상에서 율법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율법의 지식을 요구한다. 신17:19
l 헤롯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정의로 다스리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왕이 되신다.
세번째 시험
l 그러므로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이 처음의 두 가지 시험들에서 위태롭게 된 것, 즉 예배와 정치 사이의 연결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는 만일 자신을 경배만 한다면 그에게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l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이 위기에 봉착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3-5)
l 마귀는, 특히 우리 시대에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치란 예배와 희생에 관한 것임을 이해한다.
l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경배하기를 거절하시고, 그럼으로써 거짓 신들에게 드리는 희생에 기초하고 있는 세상의 정치들에 대해 대안이 되신다. 다시금 그분께서는 신명기를 인용하심으로써 마귀에게 저항하신다.
l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0,신 6:13에서 인용) 예수님께서 대표하시는 정치는 항상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에 자리한다.
l 예수님께서는 성부에 관한 바른 경배 그 자체를 신실하게 보여주신다. 마귀을 거절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부르신 백성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하는 대로, 성자의 희생 안에서 발견되는 정의와 대조되는 세상이 대안으로 제공하는 정의에 결코 순종할 수 없다.
l 하지만 너무나 자주 예수님에 의해 그렇게 부름 받은 백성들인 교회는, 마귀가 예수님께 제안했던 권력의 수단들을 사용해서 통치하려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희생을 배신해 왔다.
l 마귀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의 조급함Impatience이다. 우리는 빵을 원하고, 우리는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구해주기를 원하고,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지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빵이시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원이시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평화시다. 그분께서 그와 같으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내인 그 나라의 증인이 되기 위해 배고픔, 우상숭배, 그리고 전쟁 가운데 있는 세상에서 그분과 더불어 기다리기를 배울 것을 요구한다.
l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가 한번에 하나의 작은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하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묵시적인 백성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로서, 묵시적인 백성이란 세상의 구원과 관련된 마귀의 용어들을 예수님께서 거부하심으로써 그들이 정의롭게 될 시간이 없다고 믿는 세상에게 대안적인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믿는 백성이다.
l 마귀의 유혹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세상은 죽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죽음은 결핍된 세상, 즉 음식, 힘, 생명 자체가 충분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풍성함이시기 때문에 마귀에게 저항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로섬게임이 되지 않는 나라를 가져오신다. 충분한 음식과 힘, 생명이 있다.
l 왜냐하면 그 나라가 임하여서 각자의 이웃을 먹이기 위해 시간을 내는 백성이 존재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결핍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신뢰 안에 사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셨다.
l “무서워하지 말라”. 천사는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말한다(마 28:4).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에 저항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없이 살 수 있도록 하셨다.
l “이에Then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이에Then”가 불길한 채 남아 있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제 그 싸움이 수반하는 것을 보았다. 마귀는 예수님을 떠나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신다.
l 그러나 마귀가 확실히 가버린 것은 아니다. 곧 이어 세례 요한이 체포된다. 싸움은 이제 시작 되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의 체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그분께서는 갈릴리로 물러나셨다.
l 그분께서는 유대와 아킬라오의 권력을 피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권력들과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요한이 천명했던 것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전파하시기 시작한다.
l 하지만 요한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지역인 갈릴리’에서 그 나라의 가까움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빛이 비추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사 9:1)을 이루신다.
l 사 9:6-7
l 다윗의 나라는 이제 예수님 안에 현존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에서 그 나라의 도래를 이방인들에게 선포하신다-놀라운 발전이지만, 이는, 선지자 이사야에게서 본 것처럼, 이스라엘 자신이 기대했던 바이기도 하다.
l 그것은 회개를 요구하는 나라다. 더욱이 회개는 제자도라 불리는 훈련을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에 놀라서는 안된다.
l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권세있는 자들이나 엘리트 가운데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부들을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낚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l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 그들은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에서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는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부친도 남겨 두었다고 말하는데, 이 남겨둠은 제자들이 자신들이 따르는 사람이 누구신지 깨닫기 위해 감당해야 할 희생을 보여준다.
l 왜냐하면 이 사람이게서 태어난 나라, 즉 다윗의 나라는 모든 제자들에게 그들이 겪어야만 할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다윗은 그분의 자주색의 용포를 금새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권력이 그분의 십자가 처형에서만 발견되게 하시는 분이다.
l 새로운 눈과 귀를 가진 사람만이 십자가를 통해 선포되는 진리를 보고 듣게 될 것이다.
l 복음서 전체에서 마태는 제자들이 얼마나 깨닫지 못했는지 빠짐없이 묘사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좇는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매료된 우리와 대조시킨다.
l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들고, 귀신들리고, 간질들고, 중풍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신다. 우리는 많은 무리가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심지어 요단 건너편에서도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을 따랐다고 듣는다.
l 무리 중에서는 종종 예수님께 경외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놀라움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칠 것이다(마 27:22-23).
l 우리는 아직 마태의 이야기의 초반부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존경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려면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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