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호세아 9:7~9
제목 :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http://www.kjbc.or.kr/Ver02/inc/vod01.htm?g4_link=vod02/2011/sermon/110220-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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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8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9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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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호세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1-3장까지는 호세아와 그 아내 고멜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4-14장까지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홉 편에 걸친 설교입니다. 그 가운데서 호세아 9장은 다섯 번째 설교인데 이 중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말 번역이 대단히 난잡하고 해석도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호 9:7)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망하고 형벌의 날이 오게 된 것은 선지자들이 어리석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의 죄악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호 9:8) 북 왕국의 대표되는 지파가 에브라임이었기 때문에 북 왕국을 에브라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이 에브라임에게 올무를 놓아서 망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은 이것을 완전히 거꾸로 해석합니다. 이들은 NIV성경에 번역된 내용을 취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왜냐하면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선지자를 어리석은 자 취급하고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구나! 선지자는 네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을 지키는 파수꾼인데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가는 길마다 올무를 놓았고 하나님의 전을 향해서 원한을 품었도다." (호 9:7-8) 완전히 의미가 반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수의 학자들이 개역성경에 번역된 내용을 취하고 절대 다수의 학자들이 NIV성경에 번역된 내용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NIV성경에 번역된 것이 옳다고 믿고 이것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과 원한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선지자 즉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어리석은 자,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선지자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어리석다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호세아 9장 다섯 번째 설교의 주제는 “과연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I.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종종 어리석은 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왔다.
세상 사람들 혹은 이스라엘 백성조차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예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 28장 9절에도 유다 백성이 이사야 선지자를 조롱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사 28:9) 이사야 28장 7절을 보면 유다 백성이 포도주와 독주에 취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조롱하고 업신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장 7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사람들에게 조롱당할 때의 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 20:7) 하나님께서 권유한다는 말은 꼬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꼬셔가지고 선지자 했더니 사람들이 다 나를 조롱거리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꼬셔가지고 선지자가 되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백성을 향해서 너희의 죄악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니 순순히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증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포로 되어 끌려간 유다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70년간 포로생활을 해야 되니까 거기서 자리 잡고 살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 된 유다백성의 두목인 스마야는 예레미야를 “미친 자요, 자칭 선지자”라고 비난하며 옥에 가두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29장 2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도 조롱을 많이 당했습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시 31:13) 사방에서 다윗 왕을 비방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기드론 시냇가를 맨발로 도망가고 있을 때 사울 집안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을 비방합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고 돌아오자 그 앞에 제일 먼저 엎드린 사람이 시므이였습니다. 이처럼 아주 야비한 품성을 가진 사람도 다윗을 비방했습니다.
시편 73-83편까지 모두 11편을 기록한 다윗 시대의 성가대장 아삽이란 사람도 시편 79편 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시 79:4)
여러분 역사상 사람들에게 가장 조롱을 많이 당한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요 10:20) 예수님을 사람들이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보통 미친 것이 아니라 귀신들려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행 26:24) 로마 총독 베스도와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간증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에게 “미쳤다”고 했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다며 조롱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바보고 누가 미친 사람인지 경계가 상당히 흐릿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 9장에서 과연 누가 바보이며 누가 어리석은 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호세아 선지자를 바보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는 여로보암 2세 시대에 나타나 너희의 죄악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녀를 셋이나 낳고서도 집을 나가 바람피우다 노예 시장에 팔려간 여자를 돈 주고 다시 사서 자기 집안에 데려다 놓고 사랑하는 아내라고 하니까 호세아를 미친 사람 취급한 것입니다. 하지만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9장에서 내가 바보인지 너희가 바보인지 판결해 보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Ⅱ. 사실은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실로 어리석은 백성이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세 가지를 몰랐기 때문에 진실로 어리석은 자이며 진짜 바보라고 말합니다.
첫째, 농산물 수확의 주체가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농산물을 수확하면서도 이것을 누가 줬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농산물을 수확하고 1년에 두 번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를 지켰습니다. 이스라엘에 7대 절기 가운데서 맥추절이라고도 하는 오순절은 농산물의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장막절은 초막절이라고도 하며 가을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렇게 1년에 두 번 추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7대 절기를 다 폐하고 8월 15일 하루를 절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대상도 바꿔버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 신에게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바알 신이라고 하니까 우리와 관계없는 가나안 지방의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바알 신은 우상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당시 바알 신에 관한 교리적인 구조가 하나 있었는데 남신인 바알과 여신인 아세라가 사람들이 음행을 행하면 자극을 받아 연애하다가 비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 덕분에 농작물이 자라나고 수확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교리를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호 9:1)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타작 마당에서 음행을 행하면 그 대가로 바알과 아세라가 비를 내려주고 농사가 잘 되며 수확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바알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음행의 대가는 비가 아니라 너희가 앗수르의 포로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을 주신 주체를 알지 못했던 어리석은 백성이었다는 주제가 호세아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호 2:8)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기름과 포도주도 주시고 은과 금도 주셨는데 그것을 바알이 줬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호 2:9) 내가 줬는데 남이 줬다고 하니까 다 빼앗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축복을 다 빼앗기고 결국 앗수르의 포로 되어 끌려가는 비참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조그만 것을 빼앗기거나 모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언하건대 지금 여러분께 태극기를 그리라고 하면 제대로 그리는 사람은 몇 명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태극기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고 해서 어리석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의 축복을 다 빼앗길 것도 모르고 살고 있으면 그것이 바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의 주체를 몰라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역사의 교훈을 알지 못했습니다. 호세아 9장에는 역사의 교훈이 있는 세 장소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세 장소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먼저 기브아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호세아 9장 9절에 기브아라는 곳이 나옵니다.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호 9:9) 기브아라고 하는 동네는 다윗의 선왕이었던 사울 왕의 본거지이며 베냐민 지파의 본거지입니다. 사울은 기브아를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기브아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사사기 19-20장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한 레위인이 본처가 있는데 또 첩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장인도 두 명이 되었습니다. 레위인이 왜 첩을 두었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이 첩의 장인 집에 놀러갔다 밤이 늦어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라고 하는 동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깡패가 들어와 레위인의 첩을 밤새 욕보이고는 문 앞에다 버리고 갔습니다. 이 레위인은 첩을 걱정하지도 않고 밤새 잘 자고 일어나 보니 문 앞에 첩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그 첩을 열두 도막내어 12지파에 다 보내면서 이스라엘에 이런 악이 있는데도 보고만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베냐민 지파를 뺀 11지파가 다 연합하여 깡패를 내놓으라고 했는데 베냐민 지파는 깡패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베냐민의 군대가 얼마나 용맹한지 11지파를 상대로 1, 2차전을 이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3차전에는 이만 육천 칠백 명 중 육백 명만 가까스로 도망가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버리십니다. 이것이 기브아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기브아는 패역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오고 그 심판은 이만큼 철저하고 막중하다는 진리가 담긴 교훈의 장소였습니다. 두 번째는 바알브올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 9: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관하여 얼마나 시적으로 표현했는지 보십시오. 광야에서 포도나무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고 무화과나무에서 첫 열매를 따는 것처럼 반가워하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돌아서서 바알 신을 섬깁니다. 이렇게 자신들을 사랑한 하나님을 버리고 마음이 변하여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바알브올은 브올 지방의 바알신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모압의 도시 이름이기도 합니다. 민수기 25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압 여인의 미인계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성들을 다 유혹해서 음행을 하고 바알 신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지 염병을 내리셔서 이만 사천 명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남자 하나가 모압 여인을 데리고 장막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잡고 장막으로 뛰어들어가 음행하고 있는 남녀를 죽여 버립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비느하스를 축복하시고 앞으로 영영한 제사장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바알 신을 섬기다가 염병이 와서 이만 사천 명이 죽은 사건을 벌써 잊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길갈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 그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 방백들은 다 패역한 자니라” (호 9:15) 길갈이라고 하는 곳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 머무른 땅입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널 때 주어온 돌 12개를 세워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고 칼을 만들어 애굽에서 나온 남자 중에 할례받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길갈이라고 지었습니다. 길갈은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수치가 굴러갔던 이 자리를 바알 숭배의 본거지로 만들어서 수치가 다시 돌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집에서 쫓아내시고 벌하실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전혀 배우지 못한 백성은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셋째,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시리니 저희가 열국 가운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호 9:17) 누구의 말 들어야 될지 모릅니다. 목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무당의 말을 들어야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경말씀을 이야기하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끔 제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빼버려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은 받아들이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당이나 점쟁이 말 믿지 마시고 귀신들린 사람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대한민국에는 무당과 점쟁이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선지자를 미친 사람 취급하여 그들의 말은 듣지 않고 아합과 이세벨의 말을 듣고 바알숭배를 하다가 열국의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선지자를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보였고 미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활보하고 돌아다닙니다. 성경적인 바보가 많이 있습니다.
Ⅲ. 성경적으로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성경은 어떤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을 합니까? 많이 있지만 대표로 5구절만 읽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태양과 별과 이 땅을 보고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무신론자들을 성경은 어리석은 자들이라 말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잠 22:3) 자기의 장래에 큰 재앙이 온다는 것을 알면 그 길을 피해가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장래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피해야 지혜로운 사람 아닙니까?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잠 28:26)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길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께 배역하고 죄를 지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런데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죗값을 대신 갚아 주셨으니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렘 17:11) 여러분 사람이 부자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사악한 방법을 사용하여 부자 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결국 중년이 되면 날아갈 것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0)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재물 쌓기에만 급급하고 영혼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안 그러시지만 세상에 나가면 많은 사람이 목사라고 그러면 무시합니다. 설교자를 바보 취급하고 주의 종들을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고 머리 좋은 사람들도 많으며 능력 있고 도덕적이고 자비롭고 똑똑하고 출세하고 잘생긴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고민이 된다고 했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지옥에 친구들이 많이 가 있어서 친구들이 많은 지옥에 갈지 친구들이 없는 천국에 갈지 고민한다고 했답니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잠 9:18) 이런 사람들은 지옥 깊은 곳에 친구들이 가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뭐라도 보고 결정해야 될 것 아니냐고 말하니까 천사가 와서 구경을 시켜줬답니다. 그래서 먼저 천국을 구경시켜주는데 사람들이 다 흰옷을 입고 깨끗하게 다니는데 재미가 없어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니까 춤추는 여자도 있고 술도 있고 사람들이 재밌게 노는 것을 보고 지옥이 좋다며 지옥에 가기로 결정했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온통 불구덩이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한테 왜 자신이 본 것과 다르냐고 하니까 홍보관을 누가 나쁘게 지어놓느냐며 홍보관만 보고 속아서 오는 사람이 잘못이라고 꾸짖었다는 확인 안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옥의 홍보관만 보고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9장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잠 9:6)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최고의 지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또 평생에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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