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20장 결혼, 재물, 그리고 권력
결혼
l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 큰 무리가 그분을 따라 유대로 왔다. 그분께서는 거기서 그들을 치료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도전해 오는 사람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우신 적이 없다.
l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을 시험하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 증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l 첫 번째 대면은 바리새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남자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합법적인지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혼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l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려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이 근거하고 있는 전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신다.
l 그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처음의 자리, 즉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창조를 주목하게 하신다(창 1:26-27; 2:18-24)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시고, 그래서 그분께서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그 갈비뼈로 여자, 곧 아담이 그의 살 중의 살로 인식한 여자를 만드셨다.
l 나아가 이러한 인식은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에 대한 이유가 된다. 그런 다음 예수님, 곧 창조 때에 아버지와 함께 하신 분께서 이렇게 덧붙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l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에수님의 논평은 말라기 2장 14-16절에 따른 것이다. ….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
l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창조하셨으며, 나중에 이것으로 이스라엘을 그분의 신부가 되게 하시는 그분의 부르심을 반영하게 하셨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에게 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함과 그분의 다함없는 신실함에 대한 표시로서 “매춘굴의 아내”와 결혼하라고 요구하신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결혼은 단지 결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신 분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특성이라고 상기시키신다. 결혼과 이혼의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결혼의 목적에서 분리되어 나올 수 없다.
l 예수님께 제기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담긴 문법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논하는 결혼과 성에 관한 토론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는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기도 전에 ‘어떤 원인’에 대해 묻는다.
l 우리는 결혼에 대해 무엇을 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기도 전에 동성애에 관해 묻는다. 그러나 대화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큰 잘못이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작은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 없이 그 구성원들이 결혼으로 부름 받아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교회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나온 결혼에 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l 창조로 말문을 여신 예수님께서는 결혼이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중 하나라고 지적하신다. 하지만 결혼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신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발견하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을 위한 열방의 빛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획득된 지식이다.
l 결혼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결혼의 목적을 분별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들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생산적이 되기를 열망할 수 있게 하셨지만, 그 열망은 우리의 자녀들이 선물에 힘입어 사는 것을 배운 공동체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악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l 바리새인들은 에수님에 의해 결혼의 목적을 상기하게 되었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혼을 금지하신다면, 왜 신명기 24장에서 이혼증명서를 허락하셨느냐고 질문한다.
l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마음이 완악하기에 모세가 허락한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부정을 저지른 경우가 아니라면 이혼을 금하신다. 또한 이혼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이러한 금지령은 일찍이 산상설교에서도 주어졌다 (마 5:31-32)
l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준거틀을 벗어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분의 대답은 이스라엘이 부름 받은 모든 목적에 신실한 것이다.
l 그러나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담긴 급진적인 함의를 이해한 제자들은, 특별히 남자들의 경우, 전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올바른 결론에 이르도록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대신에 그분께서는 솔직하게 모두가 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늘 나라를 위해 고자가 되는 선물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l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큰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으로 서로 호감을 느끼고, 성관계를 통해 한 몸이 되고, 자녀를 갖게끔 계획하신 것은 위대한 선물이다.
l 결혼하지 않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과 어린 아이들을 하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로 규정하는 예수님의 인식을 병치하는 것은 그분의 사역이 지닌 묵시적인 특성을 밝혀준다. 묵시는 그 동안 숨겨져 왔다가 이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통해 드러난 계시다.
l 교회는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또 구성될 것이다. 둘 다 신실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둘 다 모든 어린 아이들이 신앙안에서 바르게 양육되도록 양육의 소명으로 부름 받았다.
l 모든 사람이 친구가 되도록, 그럼으로써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위협하는 외로움을 잘 견딜 수 있게 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런 외로움은 우리가 선택한 관계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관계들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는 특별히 위협이 된다.
l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혼란스러운 문화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과제는 어린 아이들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결혼 또는 독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출발로서 좋은 방법이다.
재물
l 마태는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고 말한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질문자로 하여금 모든 답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신다.
l 질문자는, 율법이 명하는 행위들을 행하지만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만 행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비난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l 그러나 질문자는 영생에 관해 묻기 때문에 진지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만일 질문자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계명을 지켜야한다고 대답하신다.
l 그 청년은 자신의 질문을 옹호하면서 자신이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는다.
l 예수님께서는 종종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 기록된 것으로 규정되는 계명들을 열거하심으로써 대답하신다.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18절을 합하신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l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으러 온 사람은 자신이 이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게 여전히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l 영생을 구하는 사람이 아직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자신이 ‘계명을 지키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그는 어떻게 부자이면서도 계명에 신실할 수 있을까?
l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잘 아신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그가 가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l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그 자체로 그의 이웃에게 완전히 묶여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파트너의 삶이 될 정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이중의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다.
l 청년이 떠나간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즉 부자가 되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다.
l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마6:24) 예수님의 대답은 재물뿐만 아니라 구원에 관한 우리의 개념에도 도전한다.
l 구원을 받는 것, 침례를 통해 교회의 신도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다른 사람들의 요청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연약해지게 된다.
l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구원이란 우리의 소유의 손실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연약해지는 것을 수반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l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의 구성원들이다. 그들은 땅의 일부를 팔았지만, 수익금의 일부를 그들을 위해 보관했고, 그들의 재산을 팔아 모두 얼마를 받았는지 교회에게 말하기를 거부했다.
l 베드로는 교회에게 거짓말한 것에 대해 아나니아에게 경고한다. 베드로의 비난에 대한 반응으로 아나니아가 쓰러져 죽고, 곧이어 똑 같은 사건의 순서로 삽비라도 뒤따라 죽는다.
l 우리로 하여금 거짓말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우리의 소유며,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신뢰를 불가능하게 한다. 구원을 받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진실되게 말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게 하는 한 백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l 그러나 베드로는 방어적인 태도로 예수님께 반응한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랐음을 상기시킨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자기 평가를 부정하지 않으신다.
l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따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재판관으로서 열 두 보좌에 않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재판관으로 적합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신 분을 따르려고 가족과 생업현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l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는데, 곧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예수님에 의해 도래한 새로운 시대의 첫 번째가 될 것이다.
l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아침 일찍, 늦은 아침, 낮, 오후, 그리고 저녁 때 고용한 땅 주인과 같다고 하신다.
l 그가 고용한 모든 일꾼들은 그가 그들을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고용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l 처음 고용된 사람들은 주인의 관대함 때문에 마지막으로 고용된 사람들을 시기해서는 안 된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나중 된 사람이 먼저되고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l 이 비유를 주석하는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이 품삯을 지불하는 방식에서 암시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평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공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순전한 풍부함이다.
l 하나님의 사랑은 소진될 수 없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의 특성은 광범위하게 다양해질 수 있다.
l 이방인 기독교인들인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상속자로서 나중에 고용된 자임을 기억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 대해 매우 중요한 주석은 로마서9-11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바울의 이해다.
l 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유효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롬 11:11-12)
l 따라서 나중에 고용된 자인 교회에 관한 어떤 설명도 이스라엘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의 상속자인 유대인 없이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l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 아래, 우리가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나중에 고용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l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지만, 이 비유에서 결정적인 것은 주인이 나중에 고용한 사람에게 먼저 품삯을 지불하라고 관리인에게 지시한 점이다. 그가 먼저 고용된 사람들부터 품삯을 지불하기 시작했다면, 그들은 모두 같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l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시기심을 우리에게 숨기기를 거부하시는 진리의 은혜다. 포도원의 비유는 하나님의 정의의 전형이다- 정의는 진리에 의해 단련된다.
l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지금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고, 그리고 거기서 인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사형언도를 받고, 조롱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그리고 이방인들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말씀하실 때 분명하게 확인하신다.
l 그런 것이 포도원주인의 운명이다. 이것이 먼저 고용되었든 나중에 고용되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데 필수적인 하나님의 정의다. 이것이 하늘 나라가 가져오는 전복이다.
권력
l 그러나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급진적인 특성은 하나의 질문, 곧 신분에 관한 매우 인간적인 질문을 촉발시킨다.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와서 예수님께 호의를 구한다.
l 그녀는 자신의 두 아들이 그 나라에서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이 허락되도록 선언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녀의 요청은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하게 생각하심을 가정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 중에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변형되신 산에 가셨기 때문이다.
l 더욱이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이 권력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들들에게 직접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잔, 곧 방금 설명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것이 될 그 잔을 그들도 마실 수 있는지 물어보신다.
l 이에 그들은 순진하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겟세마네로 데려가실 그 야고보와 요한인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그분의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실 것이다 (마 26:36-46)
l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마셔야만 하실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은 명백하게 허세로 드러난다. 그들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깨어 있을 수조차 없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그분의 잔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유월절에 그들과 함께 잔을 나누실 것인데(마 26:26-29), 이 나눔은 그분의 죽음을 함께 나눔을 의미한다.
l 야고보는, 우리가 사도행전 12장 2절에서 알게 되는 대로, 헤롯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그들로서는 아직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잔을 나누게 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사람을 예비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서 그 자리들이 준비된다고 말씀하신다.
l 아들에게 모든 것이 주어졌지만, 아들은 자신의 소유인 사람들의 운명을 아버지께 맡기신다.
l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답하신 것을 듣고는 두 형제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 지금 그들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 그들이 지배하는 사람들 위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l 이 세상의 이방인들의 통치자는 폭군인데, 이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노예처럼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l 왜냐하면 이것이 인자께서 그들에게 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기 위해서 오셨고, 그분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l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에 비추어 교회가 어떻게 명령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점이다. 교회는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분의 삶의 전형이 되어야만 한다.
l 만일 교회가 서로를 섬김으로써 명령을 받고 다스림을 받는다면, 교회는 세상에게 폭정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l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은 우리의 종이 되겠다는 명목 아래 우리의 주권자가 되려는 통치자들에 의한 모든 정치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잔이다. 로마서 13장은 종종 국가의 강제력에 대해 기독교의 지지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인용되지만,
l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로마서 13장 바로 앞에서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아야만 한다는 바울의 조언을 종종 읽지 못한다.
l 롬 12:14-21
l 우리는, 우리가 서로 종이 되기를 배우고 그럼으로써 이방인처럼 통치하기를 거부할 때에만, 이런 식으로 살 수 있다. 교회 정치의 내적인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실재하는 권력에 대한 심오한 정치적인 도전이 된다.
l 요더는 로마서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삶의 현실이라고 가정한다고 제안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쩔 수 없는 삶의 현실이 섭리의 사역이거나 신적인 제도라고 단언하시지 않는다.
l 물론 우리에게 폭군으로 행동하는 자들은 우리를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폭정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l 요더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 요구는 기독교의 제자도에서 표현되는 다른 정치적인 대안을 창조한다고 주장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제자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처럼 장악하거나 지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l 오히려 그들은 그 외의 다른 일을 해야만 한다. 그들은 통치가 강제와 폭력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대안적인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대항사회가 됨으로써, 교회는 세상에게 그렇지 않을 경우 활용할 수 없는 하나의 정치를 제공한다.
l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야고보와 요한의 신분에 관한 제자들의 관심에 예수님께서 반응하신 것을 너무 정치적으로 읽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의 정치적인 특성은 그분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갈 때 불가피하게 된다.
l 그분께서는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세상은 한 구원자께서 우리의 통치 습관을 변화시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생명은 반드시 대속물로 주어질 것이다.
l 그러나 이 대속물은 단지 개인적으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사막에서 저항하신 그 유혹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다.
l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한 정치에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의 삶을 종식시키시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서로에게 또한 세상에게 종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l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 그분께서 여리고를 떠나시자, 큰 무리가 그분을 따른다. 길 옆에 앉아서 예수님께서 지나시는 것을 들은 두명의 눈이 먼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께 부르짖는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누구신지에 관해 눈이 먼 사람들에게 인정받으신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올바르게 규정했음을 부인하지 않으신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다윗의 아들이시다. 가나안 여인의 외침을 침묵시키려 했던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지만(마 15:21-28) 이번에 이 눈이 먼 사람들에게 침묵하라고 명령하는 사람들은 무리다.
l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그 상황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멈춰 서서 그들을 불러 자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그들은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한다.
l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자 즉시 그들의 시력이 회복된다. 그들은 시력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께로부터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께서자 다윗의 아들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l 이것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마지만 치유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눈이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치유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적들의 앞마당에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l 이 때부터 죽임을 당하실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서 처형하고자 하는 권력에 복종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승리 가운데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과 논쟁하실 것이다.
l 그러나 그분의 생명은 이제 죽음의 권세를 대표하는 자들에게 넘겨진다. 그들의 두려움에 그분 스스로가 기꺼이 복종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권력도 가질 수 없는 다들에게 스스로를 넘겨주실 시간이 시작된다.
l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조성하는 공포에서 자유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권력에 맞서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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