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Stanley hauerwas (short - cut) - 23장 공박하시는 예수님

Four Seasons Daddy 2023. 10. 6. 17:13

마태복음 23장 공박하시는 예수님

 

l  거룩에 대한 그분의 끊임없는 관심은 타협하시지 않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엄중하게 공격하시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는 것과 그들이 누구냐 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선언하신 일련의 woes’는 주로 그들의 위선을 가리키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판단, 특히 위선에 대한 판단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무리들이 복수형인 것은 성전에 여러 파벌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에게 가르치신다. 이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가 있음을 시사한다.

 

l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있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으로 인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완전히 거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화 선언을 전개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선이 도덕적으로 모호하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세 가지 불만을 갖고 계신다. 첫째,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신들은 그렇게 짐을 진 사람들을 기꺼이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신 예수님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11:28-30)

 

l  둘째,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경건을 실천하는 데 조심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경고(6:1)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

 

l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신분과 위신을 추구한다고 비난하신다. 그들은 잔치에서 윗자리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원한다. 그들은 시장에서 존경 어린 대우를 받고 랍비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한다.

 

l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님의 초기의 맹렬한 비난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권면하시는 것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뿐이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를 랍비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칭호의 사용을 금지하신 것에 담긴 정치적인 함의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는 그 칭호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용될 때, ‘아버지라는 명칭의 모든 사용을 부인하시는 것이다.

 

l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도자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의 지도자이신 메시아만 계시기 때문이다.

 

l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그분의 권면, 그분께서 정확히 인식하신 대로, 그분께서 메시아심을 가정한다.

 

l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은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 선물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분을 메시아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그 율법에 따라 살지 않기 때문이다.

 

l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유일한 이점그들의 신분에서 비롯되는, 예수님께 대한 저항의 형태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제자들에게 서로에게 종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키시는데, 하나님의 거꾸로 된 나라에서는 자신을 높이는 자들은 모두 낮아지고, 낮아진 자들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l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비난하시는 그러한 삶의 형태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판단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l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자의 위치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행동하실 권력이 없으시다.

 

l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항하여 판단하신 것과 같은 판단을,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더 나은 삶으로 초청하기 위해서 시도하기보다, 그런 판단을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행동으로 변형시키는 권력의 위치에서 행하게 될 때,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

 

l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율법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배반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긴 반열에 서 계신다.

 

l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를 선포하실 때 이스라엘 밖에 서 계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판단은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 자신의 판단이다.

 

l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련의 화는 보다 중요한 문제보다 율법의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l  미가 68절에 의거하여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친절을 베풀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그들에게 상기시키신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성전을 지원하는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원이 정의와 자선을 행하는 것을 대신하거나 대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아처럼 성전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배 받기를 원하신다. 예레미아서에서 하나님께서는, 만일 이스라엘이 길을 돌이켜, 서로 정의롭게 행하며, 이방인이나 과부나 고아를 억압하지 않고,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 가지 않으면, 성전에 머무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l  만일 성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쫓으실 것이다( 7:1-15)

 

l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정의와 자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고 이스라엘을 향해 말한 예레미야의 선지자적인 외침을 공명하는 것이다.

 

l  예배와 정의 사이의 필수적인 연결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탐욕과 자기 방종에 사로잡힌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예수님게서 비난하시는 무대를 마련해준다.

 

l  누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사람이어야만 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삶과 욕망, 습관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그런 변화는 단지 의로움의 외적인 형태만 따라 한다고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예배함으로써 형성된 삶에서 비롯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자기 모순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바깥은 아름답지만 안에는 뼈와 더러운 오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부도덕한 삶을 사는 것은 마치 우리가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글자 그대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l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 3:7), 꿈의 살인자들을 지옥으로 가는 판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뱀과 독사로 규정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눈 먼 인도자들이라고 묘사하신다. 그들이 눈이 멀었다는 것은 인도자가 되려는 그들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남을 인도하려는 자들은 종종 그들이 인도하는 자들을 두려워한다.

 

l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백성을 인도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이는 후자가 진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백성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l  에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신 것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제기하신 예수님의 비판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가 되도록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바리새인들 및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함을 가정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l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선지자들과 서기관들을 이스라엘의 회당과 여러 마을에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신다.

 

l  교회는 그 나라의 비전을 교회 앞에서 지키도록 지시하는 대리인들agents을 통해 교회로 하여금 위선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직위들positions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l  교회는 그것의 성경과 전통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기억의 대리인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교회는 정신적인 게으름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언어적인 자의식의 대리인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l  교회는 일치를 보증하고 교회의 결정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질서와 적법 절차의 대리인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l  이 대리인들 각자는 위선에 유혹 받을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 것이라고 확신케 해주는 보장은 없다. 위선은 교회가 진실된 말을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경우에만 피해질 수 있다.

 

l  만일 그런 공동체가 사라진다면, 인도하려는 자들의 운명 또한 암울해질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은 혹독하지만, 그분의 비애woes또한 슬픔에 찬 비애다.

 

l  이스라엘로 하여금 신실하게 살도록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자들이 어떻게 거짓된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의 비난은 가혹하지만,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이 원했다고 생각하는 삶을 얻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l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위하면서도 한편으로 반대하는 예수님의 애도는 예루살렘을 향한 그분의 슬픔의 외침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자신의 예언자들을 죽인 도성.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지금 황폐해진 성전이 있는 도성,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닭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예수님께서 보호하시기를 바라는 도성

 

l  하지만 예수님의 슬픔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118편을 실행하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분께서는 이제 시편 118 26절을 인용하시면서 성전을 떠나신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l  그 시편의 그 다음 줄에는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다. 그분께서는 주님의 집이 되실 것이다.

 

l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실 때, 제자들은 성전을 구성하는 건물들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그 성전에서 그리고 그 성전에 관해 말씀하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성전이 인상적인 건축물이라는 점을 예수님께 보여 드리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지고 그래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 파괴될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생각이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미래가 될 것이다.

 

l  그 성전은 AD70년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언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성전의 파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예수님의 사역과 삶에 대한 마태의 이해는 성전의 파괴에 의존한다고 제안되기도 한다.

 

l  그러나 성전의 운명은 로마인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삼일 만에 성전을 재건하시기 위해 성전을 파괴하시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고소를 당하실 것이다.(26:61)

 

l  이런 고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성전의 파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이제 그분을 경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