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Stanley hauerwas (short - cut) - 24,25장 인내

Four Seasons Daddy 2023. 10. 6. 21:02

마태복음 24,25장 인내

 

성전파괴예언

 

l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떠나 감람산으로 돌아가셨다. 제자들은 그분께 조용히와서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이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표적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l  그들이 감람산에서 시간에 관해 이러한 질문들을 한 것은 적절한 것이다. 스가랴 141-5절에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위한 열방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서시는 산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l  제자들은 그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에 참여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전이 파괴될 것- 제자들로 하여금 당연히 어떤 표적이 주의 임하심과 그에 상응하는 세상 끝을 알리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묵시적인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재림의 징조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시는 대신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올 사람들에 대해 경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자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그 시대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으로 지배될 만큼 극적일 것이다. 나라가 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고, 세상은 곳곳에서 기근과 지진으로 위협받을 것이다.

 

l  그 시대의 극적인 본질은 제자들로 하여금 종말의 시간을 확정하도록 유혹할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l  거짓 메시아들은 종말에 대한 기대를 이용할 것이지만, 그런 이유로 오히려 제자들은 아직 끝이 아니다.”라고 인식해야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앞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징조를 요구한 것에 대해 비난하셨지만(16:1-4), 지금은 제자들의 질문을 이용하셔서 시대의 표적을 읽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그런 세상에서 제자들로 하여금 기다리는 방법을 배우도록 훈련시키신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 시대의 표적을 읽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이야말로 정확히 그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과제는 종말을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 아래에서조차 견디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24:13)

 

l  제자들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 또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이름 때문에 핍박받고, 죽음에 넘겨지며, 열방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 원수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들을 미워할 원수들이 생길 것이다.

 

l  제자들이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 또는 기독교인들이 미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반드시 신실함의 표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기독교인들이 신실하다면, 그들은 미움을 받을 것이다.

 

l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열방으로 나아간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한 제자도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충성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백성의 도전을 인정하지 않는 원수들을 생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열방으로부터 오는 미움에 직면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을 예상하도록 제자들을 준비시키신다.

 

l  그들은 단순히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서로를 미워하고 배신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없다면 그들에게는 죽이거나 죽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불법이 통치하고, 사랑은 식을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제자들을 준비시키신다, 끝은 이미 왔다. 그러나 그 끝은 제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을 배우도록 요구한다.

 

l  인내는 예수님의 시간과 온 세상에 그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제자의 길이다. 오직 이 소식이 온 세상에, 모든 민족과 나라가 예수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에만 끝이 올 것이다.

 

l  그러나 선포가 모든 민족과 나라가 예수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나라가 올 것이라는 뜻은 아닌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듣는것은 그 이름이 교회를 구성하는 것,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으로 구현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신실함을 위한 예수님의 이름이 인내.

 

l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오심과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표적에 관한 질문에도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

 

l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대들 사이에 놓여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 기다리는 것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신다. 기독교인들은 그분께서 돌아오실 날과 시각을 계산하지 말라는 경고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l  예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께서만 그런 지식을 지니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l  역사를 손에 쥐고 다스리기 위해 필사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시대의 종말을 결정하려는 시도들을 막으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그 묵시적인 이미지를, 예수님께서 할 수도 없으며 해서도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 즉 오직 아버지께서만 아시는 것(24:36)을 알기 위해서 사용해왔다.

 

l  예수님께서 묵시적인 언어를, 특히 다니엘 선지자의 언어를 사용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미래를 예언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오신 분의 임재 안에서 사는 것을 배우도록 도우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전쟁의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요청하시는 것이다.

 

l  묵시는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예언의 수단이다.

 

l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종종 위대한 표적들과 전조들-십자가의 표적과는 전혀 다른 표적들과 전조들-을 생산하는 거짓 메시아들과 선지자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배워야만 한다.

 

l  두가지 유혹들- 종말의 때를 예언하거나 역사의 움직임을 분별하기 위해 예수님의 묵시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훈련의 특성을 배반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오심에 비추어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 그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한다. 묵시적인 언어의 극적인 특징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시하시는 도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l  예수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의미하신 것이 무엇이었을지를 둘러싸고 끝없는 추측들이 있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훼손될 것은 성전이 아니라- 물론 그 일도 일어나겠지만 -, 그분께서 훼손되실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도록 도우시고자 한다.

 

l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시며, 성전이시다(8-9). 그분의 십자가 처형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확실히 우주를 황페하게 하는 가증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다.

 

l  그 황페함이 예수님께서 묘사하시는 위기가 된다. 그 위기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그리고 그분의 전 사역을 통하여 나타났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 위기를 심화시킬것이다.

 

l  더욱이 그 황폐함은 예수님께서 반응하시는 극적인 언어가 시사하는 준비되어 있음readiness을 요구한다. 묵시적인 언어는 제자들로 하여금 곧 다가올 위기를 준비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l  곧 보게 되겠지만, 그런 교훈들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다리고 지켜봐야 하는지를 훈련시키는 비유들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훈계들로 이루어진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때에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후로도 다시는 알려지지 않을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그분의 고통이다. 그것은 사람의 손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하시는 고통이다.

 

l  세상의 날들은 감해cut short’졌고, 그럼으로써 선택받은 사람들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기의 날들 또한 옛 시대의 시체를 뜯어먹는 데 능숙한 독수리를 불러온다.

 

l  거짓 메시아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행하라고, 즉 큰 표적들과 징조들을 제공하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표적들과 징조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l  실제로 이 독수리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흉내 내는데, 곧 광야나 골방으로 들어가며, 그들이 오직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공유되는 비밀한 지식을 가졌다고 제시할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리 경고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거짓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잘못 인도되지 않게 하신다. 왜냐하면 우주의 요소들만으로도 인자의 오심이 예언될 것이기 때문이다(13:10, 32:7)

 

l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9)

 

l  그날에 다니엘의 비전이 성취될 것이다. 한 표적이 하늘에 나타날 것이고, 인자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들을 다스리는 권한이 주어져서 그것들로 하여금 그분을 섬기게 할 것이다.(7:13-14)

 

l  선택받은 사람들이 모든 나라들에서 모여들어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백성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열방에서 부른 사람들을 영접하기 위해 두 팔을 벌린 채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린 모습으로 하늘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재림의 예

 

l  예수님께서 다니엘을 사용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앞서 생각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분별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주의를 잎을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 알게 해주는 무화과나무의 교훈으로 돌리신다.

 

l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보고 메시아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고는 이 세대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분 안에서 영원eternity’이 우리의 시간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l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피조물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l  제자들의 과제는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자의 승리의 날과 시각을 모르고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측하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준비하고 또 준비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l  제자들은, 노아가 그러했듯이, 비가 오지 않아도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 방주에 주어진 이름이 교회다.

 

l  교회의 건축자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살아갔던 것처럼, 계속해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로 둘러 쌓일 것이다.

 

l  그러나 홍수가 날 것이고, 모든 것을 익사시킬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인자께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이 휩쓸려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인데, 이는 그분의 오심이 전혀 다른 홍수기 때문이다.

 

l  그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피의 홍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의로우신 재판관에 의해 재판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협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사실을 진술하고 계시는 것이다.

 

l  제자들은 그들이 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집주인이 도둑이 언제 올 지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깨어 있었을 것이고 그의 집이 털리지 않게 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물론 우리들 대부분의 문제는 누군가가 우리의 집에 침입하기를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도둑이 오고 있고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올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l  묵시적이란 기다림을 요구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것은 단지 어떤 종류의 기다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화된 소망에 의해서 가능해진 기다림이다.

 

l  예수님께서 그 소망이시며, 그분께서는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같은 소망이 스며들게 하신다. 그것은 이상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지치게 되는 이상주의의 소망이 아니다

 

l  오히려 그것은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아버지의 인내로 훈련 받는 소망이다. 인내 없이 소망으로만 가득 찬 사람들은 자기들이 소망하는 것을 위해 인내를 파괴하라고 위협한다.

 

l  소망없이 인내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그들이 발견한 대로 그대로 두라고 위협한다.

 

l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망이든 인내이든 그것을 위한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인내하면서 소망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를 배워야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전에 제자들로 하여금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해 비유들을 사용하셨던 것처럼(13), 지금은 그들로 하여금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비유들을 사용하신다.

 

l  그분께서는 “(그때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떠나 있는 동안 다른 종들을 관리하도록 위임된 두 명의 종들을 묘사하신다.

 

l  한 종은, 그가 행할 것이라고 기대된 대로, 주인이 없는 동안 다른 종들에게 제 때에 양식을 내주는 것을 계속한다. 그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 그가 해야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복이 있다. 따라서 주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그 종에게 맡길 것이다.

 

l  그러나 악한 종은 혼잣말로 주인이 지체하게 되리라고 하고는 그의 동료 종들을 때리기 시작한다. 그는 술꾼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더 이상 주인의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그가 생각지도 못할 때 돌아올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설명하시지 않는다. 그보다 그분께서는 서로에게 종으로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은 주인이 돌아오는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해서 섬기려고 할 것이라고 가정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선한 일을 주셨다. ‘시대의 종말에 대한 어떠한 추축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더 이상 서로를 섬길 필요가 없다고 제안할 수도 없고 제안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마지막이 왔다는 것은 그런 일을 훨씬 더 이해하기 쉽게 할 뿐만 아니라 긴박하게 만든다,

 

l  왜냐하면 선한 일은 영광 중에 오신, 인자이신 예수님에 의해 가능하게 된 희망과 인내의 일이기 때문이다.

 

l  에수님께서는 두 종, 즉 주인이 없는 동안 일하는 한 종과 주인이 없을 때 동료 종들을 때리는 다른 종의 비유를 설명하시지 않고, 오히려 다른 두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l  뒤따르는 비유들인 열 명의 신부 들러리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는 둘 다 경계해야 할 필요성과 경계하는 사람들을 지탱시켜 주는 데 필요한 일을 강조한다.

 

l  더욱이 그 일이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그것은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자들을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방문하는 일이다.(25:35-36)

 

l  열 명의 신부 들러리의 비유를 소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익숙한 공식인 천국은 이와 같으리니를 사용하신다. 그런데 이번에만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천국은 이와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l  그 때에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고 있음을 암시한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권고하신다.

 

l  이사야 54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산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기를 원한다고 선언하신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예레미야 3132절과 호세아 21-20절에서 알 수 있듯이, 종종 하나님과의 결혼서약에 충실하지 못했다.

 

l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더욱이 이 신부를-바울은 교회(고후11:2,5:21-33)로 규정한다-요한계시록 197절에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l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l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나라에 관한 이러한 비유를 위해 결혼 잔치를 중심 모티프로 사용하시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물론 결혼은 축하행사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심판이기도 하다.

 

l  그러므로 신부 들러리의 비유는 축하 행사에 초대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신부 들러리들은 당연히 늦게 온 신랑과 더불어 축하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은 기다림의 긴 밤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l  어리석은 신부들러리들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시간이 언제인지를 확신할 수 없을 때에는 자신들이 배운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l  예수님께서는 달란트 비유를 신부 들러리의 비유와 연결하신다. (마치)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그의 종 세 명에게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권고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지 않는다.

 

l  그보다 이 비유는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고해서 번 것을 받을 자격이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확실한 판단이다.

 

l  달란트의 비유와 열 명의 신부 들러리의 비유는 계속해서 일하는 종, 즉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동료 종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종에 관한 해설이다.

 

l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는 오직 우리가 받은 것 만을 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신다.

 

l  이 비유들 각각은 우리에게 선물을 받은 자,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어떻게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l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해도, 위대한 일들을 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신일 진리를 말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같은 간단하고도 힘들 일- 을 행하는 것이다.  

 

l  그런 일은 우리의 주인께서 우리에게 나누라고 요구하신 기쁨이다.

 

l  어떤 표적이 시대의 종말이 오는 것을 알려주냐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비롯된 그분의 위대한 설교의 절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713-14절의 본문으로 돌아오신다.

 

l  인자께서 영광 중에 오시고, 모든 천사들이 그분과 함께 할 것이다. 그분께서는 왕이시기 때문에 열국이 그분 앞에 모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염소들로부터 양들을 구별해내실 목자- 왕이시다.

 

l  그분께서는 양들을 자신의 오른편에, 염소들을 자신의 왼편에 두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아버지께 복을 받았으며, 세상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된 그 나라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인데,

 

l  이는 그분께서 주리셨을 때에 그들이 그분께 먹을 것을 주었고, 그분께서 목마르셨을 때에 그들이 그분께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셨을 때에 그들이 그분을 영접했고, 헐벗으셨을 때에 그들이 그분께 입을 것을 주었고, 병 들으셨을 때에 그들이 그분을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히셨을 때에 그들이 그분을 찾아와 주셨기 때문이다.

 

l  그러나 의인들은 그 왕께 그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자신들이 언제 그분을 위해 행했는지 되 묻는다. 왕께서는 자신의 가족들인 이 사람들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을 위해서 그들이 행한 일이 곧 그분께 행한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l  그런 다음 그 왕께서는 자신의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기소를 당하고, 마귀와 마귀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보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

 

l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나아가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이다.

 

l  제자들은 이제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종말의 표적이 되시는데,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시간을 내어 굶주닌 자를 먹이고(14:13; 15:32-39), 병자를 고치고, 평화 없는 자를 위로하고(15:21-28), 이방인을 환영하고(8:5-13), 투옥되고, 두명의 죄수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다.

 

l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마을들을 돌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여행에 동행할 때 그들이 목격하고 받은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 나라의 파수꾼이 되기 위해서 배우게 될 방법이다.

 

l  왜냐하면 그 나라의 일을 수행함으로써 그들은 분별의 은사를 받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마귀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l  그 표적은 그들이 시간을 내서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벗은 자들을 입히고, 목마른 자들을 마시게 하고,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병든 자들과 감옥에 있는 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l  나아가 그런 일들은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후원하는 자로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권력자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다. 자비의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형성된 백성은, 선을 행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 그러나 사실 권력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을 간파할 수 있는 백성이 될 것이다.

 

l  기독교인은 유일하게 중요한 위기에 반응하며 사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감옥들에 있는 자신을 방문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시간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