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Stanley hauerwas (short - cut) - 27장 십자가 처형

Four Seasons Daddy 2023. 10. 17. 10:06

마태복음 27장 십자가 처형

 

빌라도의 신문

 

l  예수님께서는 어둠을 틈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심문받고 규탄 당하셨다.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부당한 판단을 확증하기 위해 어둠에서 행해졌던 일을 밝은 데로 끌고 나온다.

 

l  그들은 오랫동안 잘 설립된 게임을 계획한다. 예수님께서는 유죄셔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지금 체포되신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져야만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분을 대항하는 그들의 판단을 확증한다.

 

l  더욱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다. 그가 구타 당하고 조소 당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하지만 죽일 권리는 로마에게 있다.

 

l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예수님의 운명은 이방인인 로마의 지방 관리에 의해 결정될 것인데, 그는 로마인들이 성가신 백성으로 간주하던 자들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l  이스라엘의 삶은 항상 다른 민족, 다른 나라들과 얽혀 있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바벨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한 백성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l  그러나 이스라엘은 좀처럼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지 못하고, 너무나 자주 보다 강력한 나라들을 의지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살아남는 법을 배웠지만 생존은 종종 단지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l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생존 이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오히려 그분께서는 그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지시게 되었다.

 

l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세상의 권력을 이용하려 하지만, 그 대신 그들 역시 이용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l  유다는, 배드로처럼, 예수님께서 규탄 당하시는 것을 목격했고, 마태가 밝히지 않는 어떤 이유로 인해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마음을 바꿨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은 삼십 개를 갖다 주면서 고백한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l  그가 행한 일은 취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거래한 자들은 예수님께서 재정하신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유다는 자신이 큰 경기장에 있는 하찮은 선수라는 것을 발견한다.

 

l  역설적이게도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유다에게 한 바로 그 말은 빌라도가 온백성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때도 사용된다.(27:24-25)

 

l  그러나 유다는 너무 어두운 결과를 초래하는 결정에만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그는 자신을 매단다.

 

l  유다는 은 삼십 개를 성전에 던졌지만,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금고에 넣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핏값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은 대제사장들은 그들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깨나 관심을 기울인다.

 

l  여기서 또 다시 율법은 대제사장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고 체면만을 유지하는 데 사용된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율법의 껍데기와 관련되는 눈먼 인도자에 관한 예수님의 묘사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핏값을 다루는 방법을 통해 확증된다. (23:16-22)

 

l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함께 상의한 후, 그 돈으로 나그네들과 외국인을 묻기 위한 장소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기로 하는 데 동의한다. 마태는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 예레미야가 밭을 산 예언적인 행동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이 이뤄졌다고 말한다(32:6-15)

 

l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열방으로 보내셔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도록 하실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항해 음모를 꾸몄던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스라엘에 온 외국인들이 묻힐 밭을 삼으로써 예수님께서 열방을 이스라엘로 모으시는 것을 재현하기 시작한다.

 

l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실재를 회피할 수 없다. 그분을 죽이려는 과정조차 그분께서 행하시기 위해 오신 일을 성취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속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현존 없이는 교회가 있을 수 없듯이, 교회가 없이는 이스라엘도 있을 수 없다.

 

l  한편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뿐만 아니라 빌라도라는 인간에 의해 로마의 심문대상이 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다.

 

l  빌라도는 국가의 관리다. 그는 국가의 관리로서 관심 있는 것을 질문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셨다. 그분께서는 성전을 청결케하시고 성전에서 눈이 먼 자들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치신 후에 그 칭호를 받아들이시기까지 하셨다.

 

l  그러나 빌라도의 질문은 이방인이 하는 질문이다. 그는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냐고 묻지 않는다. 그보다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다. 그는 에수님께서 헤롯의 라이벌인지 알고 싶어한다. 누구도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가이사의 라이벌로 간주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네가(그렇게)말한다라고 대답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유다가 수사적으로 나는 아니지요라며 자신의 배반을 숨기려고 시도했을 때, 그에게 응답하신 것과 같은 대답니다.

 

l  또한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에게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말하도록 요청받았을 때도 똑같이 응답하셨다. “네가 말한다, 로마의 대표를 포함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스스로 비난받도록 하려는 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응답이다.

 

l  그분께서는 왕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왕권은 빌라도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로마에 별로 위협이 되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l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께서 대표하시는 정치가 로마가 인식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로마에 대해 더욱 급진적인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l  한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빌라도를 지원하기 위해 와서는 예수님을 대항해 고소한다. 마태는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근거를 말해주지 않는다.

 

l  그러나 그들은 로마의 대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을 것임을 알고 있는 영리한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성전과 관련된 예수님의 예언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l  로마는,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질서를 원한다. 빌라도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실제로 그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도록 돕는 데 아무런 이유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그러셨듯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제시하는 고소에 침묵하셨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돕고 싶어한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저들이 제시하는 많은 고소들을 듣지 못하냐고 묻는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하셨다. 그분의 침묵은 이사야에 묘사된 침묵이다.

 

l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 것과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신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로마의 권력에 직면하신다. 그 권력에는 고난 받는 종의 형태로 오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없다. 더군다나 그 권력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써 폭로되고 소용없게 된 옛 시대의 권력이다.

 

l  그러므로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세상의 빌라도들이 대표하는 권력의 종말을 표시하는 것이다. 빌라도의 권력은 예수님믈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l  그러나 권력이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그것은 그 권력이 실질적으로 끝장났음을 모든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l  빌라도 앞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침묵은, 거짓과 불의에 기초한 질서에 직면할 때 요구되는, 진리의 침묵이다. 빌라도 앞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질서와 평화를 혼동하도록 유혹하려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증거에 신실하고자 할 때마다 교회가 보여주는 침묵이다.

 

l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굴복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굴복은 빌라도의 권위를 전복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진실한 침묵의 힘이다.

 

l  총독은 크게 놀라워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치유를 목격한 무리처럼 놀란다. 그는 전에 이런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l  그는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협조하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다루는 데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l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자신의 목숨조차 구걸하시지 않는다. 빌라도는 죽으실 분 앞에서 무력하게 서서, 자신이 포로된 자임을 확인한다.

 

l  그러나 빌라도는 유월절에 총독이 무리를 위해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관례를 통해,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기쁘게 하는 것에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l  무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누구를 석방하고 누구를 십자가에 처형할지 선택하도록 한다. 무리가 모였고 빌라도는 그들에게 누구를 석방하기를 원하냐고 묻는다.

 

l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당혹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바를 대항해 예수님을 세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에수님을 시기해서 자신에게 그를 넘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무리가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풀어 달라고 그에게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l  더군다나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을 석방코자 하는 추가적인 동기가 있다. 빌라도의 아내가 예수님에 관한 꿈을 꾸고 괴로웠다고 그에게 전했던 것이다.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꿈과 헤롯에 대한 박사들의 꿈처럼,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께서 옳은 사람이라는 꿈을 꾸었다.

 

l  그녀는 빌라도에게 예수님과는 엮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전한다. 빌라도의 아내는, 헤로디아와 달리, 예수님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죽음의 정치에 빠져 있는 한, 결과는 마찬가지다.

 

l  빌라도는 아내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빌라도 앞에 모인 무리들 사이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리를 설득하여 빌라도에게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요청하도록 독려했다.

 

l  그래서 빌라도가 무리에게 자신이 누구를 풀어주어야 할지를 묻자, 그들은 바라바를 요구한다. 빌라도는 이 문제를 그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메시아라 하는 예수를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다.

 

l  이번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규정하지 않고, 대신 이스라엘 백성이 인식하는 방식대로 예수님을 칭한다. 즉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보다 빌라도는 그가 메시아라고 불렸다라고 말할 뿐이다.

 

l  무리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외친다. 빌라도는 의아해한다. 그는 무리에게 예수님을 왜 죽이려고 하는지 물어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악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l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친 자들 중에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을 전하신 것, 다리를 저는 자들, 듣지 못하는 자들, 눈 먼자들을 치유하신 것,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과 논쟁하시는 것을 들은 자들이 있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l  무리는 의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시면서 무리를 동정하시긴 했지만, 그들을 결코 신뢰하시지는 않는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다(10:37-39)

 

l  로마가 총독으로 임명한 빌라도는 무리를 회피할 수 없다. 그는 무리가 바라는 일,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폭동이 시작되려 한다. 빌라도는 무죄한 사람을 죽이는 불의를 두려워하기보다 폭동을 더 두려워한다.

 

l  그는 예수님을 규탄하는 절차에서 그 중심에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책임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 그의 손을 씻으며 말한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이제 무리들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다가 예수님께 행한 일을 취소하려고 할 때와 같은 위치에 있다. “너희가 당하라

 

l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이 선언은 기독교인들이 수세기 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살해한 자들이라고 거명하면서 살인자 취급을 했다.

 

l  더군다나 마태가 백성전체로 규정한 것은 단순히 무리들이나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유죄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l  그럼에도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한 본문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복음서들에서, 특히 마태복음에서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l  마태는, 우리가 처음부터 본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 엘리트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 그리고 무리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복음서를 기록했다.

 

l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을 죽였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분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죽였다. 무리가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무리에 속했기 때문이다.

 

l  이스라엘 엘리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거룩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에게 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l  백성전체가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달리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죽였고 또 계속해서 죽이고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하도록 하자

 

l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은 그분께서 거짓말과 속임수에 기초한 세상의 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은 그분께서 안전safety과 안락confort이란 이름으로 통치하는 모든 자들에게 위협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사랑이 그분의 사랑으로 통치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 가운데 오시려고 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태에게서 이와 같이 배웠다.

 

십자가의 달리심

 

l  빌라도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준다.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채찍질했을까? 빌라도는 왜, 가야바와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추정적으로 심문한 후에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모멸하도록 군인들에게 그분을 넘겨주었을까?

 

l  그들은 예수님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우고, 그분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하면서 조롱한다.

 

l  그들은 글자 그대로 자기들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들이 행한 일은 이분께서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기 위해서 오신 왕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견디신다. 이것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다. 아들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삶을 알 뿐만 아니라 그 삶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고난 받으셔야만 한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창조주를 배반한 이후로 아버지께서 바라셨던 것이다.

 

l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가는 길에 군인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을 강제로 지고 가라고 한다. 시몬이 자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군인들에 의해서 강제로 형틀을 지고 간다.

 

l  그들은 골고다라고 불리는 곳으로 왔는데, 그곳은, 마태가 말해주는 것처럼, ‘해골의 곳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곳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모르지만, 그 이름은 그곳에서 행해질 악한 일에 적합한 이름이다.

 

l  군인들은 예수님께 쓸개를 섞은 포도주를 가져와 마시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맛을 보시고는 마시기를 거절하신다. 그분께서 마시기를 거절하신 것은 시편 6921절을 반향하는데, 거기서는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마실 것으로 식초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l  시편이 교회의 찬송가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들로 기도드릴 때,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l  “(그리고)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마태는 정교하게 기술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l  그분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는가?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는, 그 외에는 달리 상상할 수 없는, 한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에 교차되는 곳이다.

 

l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제 우주의 특성을 결정한다. 십자가는 불가해한 고난을 설명하는 상징이 아니다. 누구든 세상의 비극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분노를 설명하거나 담아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l  그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분만의 것으로서, 불가해한 고난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한 백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인생의 비극에 직면했을 때 요구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사랑이다.

 

l  십자가에 의해서 요구될 뿐만 아니라 가능하게 되는 우리의 과제는,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서로에게 등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l  마태복음, 곧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마태의 이야기이자 제자도에 대한 마태의 이해, 그리고 교회의 시작에 대한 마태의 묘사 등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른다.

 

l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삶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죽으신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요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율법을 이용했던 이스라엘의 엘리트 그룹에 도전하셨기 때문이다.

 

l  그들은 그분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이해한대로 그분의 머리 위에 붙였다.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그들은 빌라도의 사람들이다. 빌라도처럼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l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가는 자들은 그분을 비웃고 머리를 흔들면서(22:7),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l  빌라도의 군인들은 그분을 유대인의 왕으로 규정한다. 그분께서는 이제 성전과 관련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끌고 오는 방식으로 조롱을 받으신다.

 

l  그분께서는 또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 조롱을 받으신다. 그들은 그분께서 다른 사람들은 구했음을 인정한다. 그분께서는 눈이 먼 자들, 듣지 못하는 자들, 말하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자들과 배고픈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셨다.

 

l  이스라엘의 엘리트들은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한 가지 도발을 더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주어지는 도발이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 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이 조롱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아버지께도 향한다.

 

l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구하실 것이지만, 죽음을 통과하시기 전에는 구하시지 않을 것이다. 성전은 회복될 것이지만, 그 회복은 한 몸, 곧 예수님의 몸의 형태로 이뤄질 것이다.

 

l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l  그들은 지금, 모든 제자들처럼, 그분을 버렸다. 그 대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그분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된 두 명의 강도들이 있다. 이 강도들조차 지나가는자들과 엘리트들이 그분을 조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조롱한다.

 

l  유일한 참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 관계가 전혀 없으시다. 심지어 여자들도 그분을 멀리서바라보았다(27:55) 그분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자, 지나가는 자, 엘리트들, 군인들이 모두 증인들이다. 우리 역시 이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증인들이다.

 

l  정오에서 오후 세 시까지 어둠이 온 땅을 뒤덮는다. 마태복음이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주적인 힘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활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2:2)

 

l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모든 창조물이 반응할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아모스에서 주님께서는 그 날에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l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8:9)

 

l  그날이 이르렀다. 심판의 날. 구속의 날. 약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l  예수님의 절규, 곧 시편 22편에서 배운 절규는 오직 이스라엘의 메시아께서만 하실 수 있는 외침이다. 그분의 절규는 그분께서 삼위일체의 제2위가 아니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일체의 삶인 밝고 선명한 사랑의 실증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시다.

 

l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6-8)

 

l  그리스도의 가장 절대적인 특별한 순간-절대적인 십자가에서의 유기-하나님의 영광, 곧 그분께서 계시는 공간과 시간으로서 그분의 힘이 세상의 눈 앞에 전시되는 순간이다.”

 

l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그분을 괴롭힌 자들의 죄가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결정하게 하시지 않는다.

 

l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 사랑으로부터 그분의 창조물을 소외시키는 것 만을 미워하실 수 있음을 뜻한다.

 

l  아버지께서 아들을 희생시키시는 것과 아들께서 기꺼이 희생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다.

 

l  구경꾼들 중 일부는 예수님의 절규를 듣고 그분께서 엘리야를 부르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그분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지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스폰지에 신 포도주를 적신 후 그분의 입술을 축인다.

 

l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항의하면서,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하는지 보기 위해서 기다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잔인함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나 엘리야는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이미 왔기 때문이다. (11:14,17:12-13)

 

l  그 때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죽으셨다. 인자께서 죽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죽으신다. 그분께서는 정말로 완전한 사람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죽지 않으셨지만, 아들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시고 죽음으로 들어가셨다.

 

l  이전에 성전이 모독되던 때와 같이,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둘로 갈라진다. 성전, 곧 예수님의 몸이 부서졌다. 다니엘 122절의 예언대로, 무덤이 열리고 잠들어 있던 성도들의 몸이 살아나고, 그분의 부활 후, 거룩한 성으로 들어간다.

 

l  지금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반되는 극적인 사건들은 옛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을 표시한다.

 

l  군인들과 함께 지키고 있던 백부장은, 지진과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고 겁에 질렸다. 그는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다.

 

l  마태는 그 곳에 많은 여자들도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그분을 버렸지만, 이 여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에게 여러가지를 제공해 주었다.

 

l  마태는 그들이 무엇을 제공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열두 명 외에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음을 아는 것이 좋다. 더군다나 마태는 그들의 이름을 알려준다. 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배대의 아내-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다.

 

l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이제야 그녀가 아들들을 위해 무엇을 요구했는지 알게 되지만, 그녀는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있다.

 

l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 후에 여자들이 갈릴리에서부터 그분을 따라온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마태는 우리에게 이전에 만나 적이 없는 다른 예수님의 제자에 관해 말해준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다.

 

l  마태는 요셉을 새로운 무덤을 소유한 부유한 남자라고 확인해 준다. 그런데 그는 그 무덤을 자기가 사용하기보다 그곳에 예수님을 모시고자 한다. 부에 대한 예수님의 혹평을 고려할 때(6:24; 19:23-26), 예수님께 부자 제자가 있었다는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l  하지만 우리는 요셉이-그는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신의 부를 보호의 한 형태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는 것,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의 시신을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

 

l  그러나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빌라도는 쉽게 동의한다.

 

l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 깨끗한 삼베로 싸서 바위를 뚫은 무덤에 두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 그분의 시신은 죽은 시신과 같이 다루어졌다. 요셉은 무덤 문 앞에 커다란 돌을 구려 놓고 돌아갔다.

 

l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를 돌보았던 요셉처럼, 이 요셉은 예수님의 죽은 시신을 돌본다. 그러나 요셉은 돌아갔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 맞은 편에 앉았다.

 

l  이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신뢰했기 때문에 기다린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실 것이다. 이 여자들은 그 부활을 기대하는 신실한 증인들로서 무덤의 맞은 편에 앉아 있다.

 

l  그러나 그들만이 예수님께서 삼 일 후에 일어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아니다(16:21; 17:13; 20:19).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또한 사흘 만에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l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있은 다음 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 앞에 모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있을 때에삼 일 후에 자신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음을 그에게 상기시킨다.

 

l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대제사장들과 결탁하여 다시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자들 중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백성들에게 퍼질 수도 있는 예수님에 대한 더 많은 소식들을 통제하고자 대제사장들과 연합한다.

 

l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사흘째 되는 날까지 무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제자들이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하려고 시체를 훔쳐갈지도 모른다고 제안한다.

 

l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단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백성들이 제자들의 말을 믿을 경우, 그 속임이 시체를 훔쳐간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빌라도에게 말한다.

 

l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분명히 백성들을 신뢰하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서 제자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걱정하고 있다.

 

l  따라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무덤을 지켜 달라고 요구한다. 빌라도는 그렇게 하기로 동의하고 군인들을 배치하여 무덤이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도록 한다. 무덤을 지키는 자들은 무덤을 단단히 지킬 뿐만 아니라 무덤 앞의 돌을 봉인해 버렸다.

 

l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빌라도는 돌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곳에 붙들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일어난 지진과 갈라진 바위로부터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

 

l  그들은 둔감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