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Stanley hauerwas (short - cut) - 21,22장 예루살렘과 성전

Four Seasons Daddy 2023. 10. 6. 13:42

마태복음 21,22장 예루살렘과 성전

 

l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벳바게와 감람산에 도착한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시기 위한 집결지가 될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해 애통하시는 분으로 감람산에 서 계신다. 그러나 또한 모든 민족이 다윗의 하나님을 인정하게끔 이끌도록 되어 있는 제사장-왕으로도 서 계신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님께서시지만, 일반적으로 왕의 이미지와 관련이 없는 피조물인, 나귀를 타시는 분으로 규정하신다.

 

l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것은 스가랴 99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통치자가 그렇게 타고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l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이 시편을 재현하시고,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곧 당시 외국의 권력의 통치 아래 있던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의 승리를 볼 수 있게 하신다.

 

l  한 무리, 매우 큰 무리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분께서 오시는 길 위에 그들의 겉옷을 펼치고, 또 나무들에서 가지들을 꺾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한다. 그들은 시편 118편의 단어들을 사용해서 그분을 찬양한다.

 

l  마태는 그 도시가 소동케 되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이는 누구냐”. 그분을 환영했던 무리가 갈리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라고 대답한다.

 

l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칭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그들의 선지자들을 죽인 도시임을 아신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시라는 표현을 받아들이신다.

 

l  그럼에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묘사하는 사람들은 그분께서 선지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제사장이시며 왕이시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l  이 왕께서는 폭력적인 반란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곧 자유라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단 한 분이 되심으로써 승리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자 즉시 성전으로 가신다.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신 것이 어쩌면 승리의 입성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성전은 이스라엘을 정의한다.

 

l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정치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성전을 둘러싼 오용abuse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종속은 똑 같은 정치적인 실재의 측면들일 뿐이다.

 

l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과 그분의 성전 정치의 정화라고 부르는 것은 근대 정치의 지배적인 이해에 도전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진리와 경배의 문제를 정치와 결부시키지 않는다.

 

l  예수님께 정치는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사하시는 권세는 생명을 주는 것이며, 생명의 원천 그 자체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l  이제 예수님, 곧 이스라엘의 선지자시자 왕이신 분께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역할을 맡으신다. 오직 그분께서만 희생을 성전 생활의 핵심인 거룩함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12:5-6)

 

l  예수님의 사역은 성전을 중심에 둘 것이다. 이는 성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을 진실로 예배하는 것 없이 어떤 것이 참된 정치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l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드러가셔서 매매하고 있던 자들을 내쫓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매매하는 자들을 정죄하심으로써 이사야와 예레미아의 역할을 떠맡으시면서, 그들에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56:6-8)

 

l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이 종종 행동했던 것처럼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신다. 그분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써 성전은 이스라엘을 위해 청결하게 된다.

 

l  그분께서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과 매매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자마자, 눈이 먼 자들과 다리를 저는 자들이 성전에 계신 그분께로 왔고 그분께서 그들을 치료하셨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l  예수님께서 희년을 제정하신 것은 이제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 곧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한다.

 

l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자, 심지어 어린 아이들, 성전에서 항상 배제되었던 자들까지 성전에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l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회복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오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이 권력에 관한 것임을 이해한다. 그들은 곧 예수님께 그가 행한 것을 할 수 있는 권위를 어디로부터 얻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l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 그가 행한 것 - 눈이 먼자, 다리를 저는 자, 가난한 자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듦으로써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 을 행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l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에 들어가셨다. 행해진 것은 돌이켜지지 않을 것이다. 성전에서 어린 아이들의 외침은 당국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지위에 위협이 되신다는 점을 알렸다.

 

l  그분께서는 성을 떠나 베다니로 향하시며, 다음날에 돌아오리라 계획하신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께서 성으로 돌아오신다. 마침 배가 고프시다. 그때 길가에 무화과 나무를 보시지만 잎사귀만 있음을 발견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 및 서기관들과 이제 막 대결하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거기서 열매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나무는 말라 버렸다. 마치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성전을 말라 버리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l  제자들은 놀라서 무화가나무가 어떻게 금방 말라 버렸는지 궁금해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을 때 놀랐던 것과 마찬가지로(8:23-27),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는 달리, 만일 그들에게 신앙이 있다면, 무화과나무에게 행해진 일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시키신다. 만일 제자들이 신앙으로 기도하면서 그렇게 구한다면, 그들은 산을 바다 속으로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l  제자들에게는 아직 그런 신앙이 없지만,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그들이 신앙을 갖게 될지 아니면 파멸하게 될지를 의미하는 어떤 대결로 인도되고 있다.

 

l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에 들어가시고, 이번에는 가르치시기 시작한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도전하면서, 그가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는지는 물론이고, 누가 그에게 성전을 청결케 하고, 성전에서 눈이 먼 자와 다리를 저는 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어린 아이들로 하여금 합창케 하는 권한을 주었는지 묻는다.

 

l  이것은 속임수가 있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권위에 호소하신다면, 자신의 정체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역으로 질문하시면서, 만일 그들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면 자신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답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는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기원했는지 물으신다. 그들은 요한의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어떤 권한으로 자신이 성전을 청결케 했고, 성전에서 가르쳤고, 성전에서 치료했는지 그들에게 말하기를 거부하신다.

 

l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질문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수 세기 동안 반복되어 왔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려는 시도들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독교 이단들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들을 세우려고 하는 시도들은 우상숭배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십자가를 짊어진 기독교인들은 그 진리가 어디에서 왔든지 상관없이,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됨을 발견한다.

 

l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의 관계를 아직 끝내지 않으신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이제 막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규칙에 제기되는 도전을 그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신다.

 

l  그분께서는 두 명의 아들이 있는 포도원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못한 첫째아들이라고 명백하게 결론 내리신다.

 

l  그러므로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에 앞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세리와 창녀들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요한의 선포를 믿었고, 자신들이 회개해야만 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포도원과 관련해 또 다른 비유를 제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주인이 돌아와서 이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신다.

 

l  그들은, 나단에게 대답한 다윗처럼, 그 주인이 사악한 소작인들을 비참하게 죽일 것이라고 대답한다. 나아가 주인은 수확기에 포도원의 열매를 자신에게 줄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빌려줄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시편 11822-23절에서 말하는 것, 곧 이스라엘의 위대한 승리의 노래를 성경에서 읽어 보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심으로써 그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신다.

 

l  사악한 소작인에 관한 비유는 이스라엘의 삶에 관한 마태의 개략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울타리가 쳐지고, 땅에 기초가 세워지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보호받는 하나님의 포도원이라고 부르셨다.

 

l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신실할 것을 촉구하셨으나, 백성들은 그들을 때리고, 돌로 치며, 죽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을 보냈지만, 그분조차 거절당하셨다.

 

l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의 주인이 행한 모든 일이 주님께서 행하신 것이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21:42)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한 백성에게 주실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조금도 모호하게 하시지 않았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거절된자들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혀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을 체포하기를 원한다.

 

l  헤롯이 자신의 위신이 깎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죽였던 것처럼,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 역시 그들의 권력이 거짓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에 무리를 두려워한다.

 

l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맹렬한 비난은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거부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부활 후에 제자들은 계속해서 성전에서 예배드릴 것이다(3:1)

 

l  이스라엘 백성들 또는 유대인들은 결코 뒷편으로 제쳐둘left behind’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뒷편으로 제쳐진다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l  기독교인의 과제는 우리와 같이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이유를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예수님께 신실하게 되는 것이다.

 

l  우리가 예수님께 신실할 때에만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그들이 우리와 같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l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과제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과제와 비슷하다. 곧 그 비유 안에서 우리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곧 전통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여 자신들을 교만한 생각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과 같은 인식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한 가지 형태가 될 수 있다.

 

l  기독교인들은 진리를, 곧 고난 없이 획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폭군들처럼 통치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마태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리 그리스도께서 곧 그 진리이시다-를 알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l  그런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에 관한 사변적인 게임을 할 시간이 거의 없다.

 

l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맞서신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와 같다라는 익숙한 표현으로 비유를 시작한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과 관련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들이 그들 스스로 자리매김하도록 이끄신 첫 번째 비유와는 달리, 이번 비유에서는 그들과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자기 인식을 강요하는 공식을 사용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전을 청결케 하심으로써 시작된 잔치와 관련해 그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l  왕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고, 초청받은 자들을 부르기 위해 종들을 보내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는 큰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그들에게 이야기하라며 다른 종들을 보냈다.

 

l  그러나 초청받은 자들은 초청장을 경시했고, 자신들의 일상적인 업무로 바쁘게 움직였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왕의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왕은 격노해서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성을 불태웠다.

 

l  다시금 그는 종들을 거리로 보내, 거기서 만난 모든 자들을 선하든 악하든 불러 모았고, 그래서 결혼식장이 채워졌다. 왕이 손님들을 보러 왔을 때, 한 사람이 결혼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았다.

 

l  포도원 주인이 먼저 고용된 일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왕은 그를친구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결혼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그가 말문이 막혔다.

 

l  왕은 시종들에게 그들 묶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바깥 어두움 속으로 던지게 했다. 예수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고 결론 내리신다.

 

l  이전의 비유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비유 또한 권력을 가진 자들과 잘 사는 자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들 대부분은 (특히 근대의 상업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가 폭군에 의해서 지배 받고 있음을 거부하거나,

 

l  더 나쁘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폭군이 되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고,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을 인식할 수 없게끔 한다.

 

l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자신의 신부로 삼으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잔치에 참여할 시간이 없다. 우리에게는 그 안에서 왕의 아들이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구성원들이 되는 위대한 감사 축제를 축하할 시간이 없다.

 

l  하지만 이 비유는 또한 거리에서 잔치로 나아오는 사람들은 침례를 통해 그들에게 부여된 미덕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만일 교회가 환대할 수 있는 백성이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또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나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신다(21:43) 그분께서는 그분의 나라에 부름 받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에 대해 팔복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l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단지 평범한 위협이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하고는 그분을 붙잡으려는 계책을 짠다. 그들은 그들의 제자들을 몇 명의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낸다

 

l  그들은 예수님께서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황제의 것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 대답을 듣고 탄복하며 예수님을 떠났다.

 

l  바리새인들에 대한 대답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나뉘어진 충성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권고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우상을 숭배하는 동전들을 모두 그것들이 속해 있는 가이사에게 돌려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정치와 종교 사이의 구별을 알지 못하신 것처럼, 정치, 경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 사이의 어떤 구별도 알지 못하신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의 여부를 묻는 자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돈으로 황제의 충직한 종임을 드러냈다.

 

l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갖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시작이다.

 

l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야기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원래 의도된 것이다. 적어도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신에게 문제가 없을 때 오히려 당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l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위해 성전에 다시 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성전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삶의 주요한 당파들과의 싸움에 몰두하신다.

 

l  다음은 사두개인들의 차례다. 마태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말한다고 전한다. 사두개인들은 확실히 자신들이 부활에 대한 사상이 터무늬없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l  그분께서는 그들이 성경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규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죽은자가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l  부활은 죽음에서조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기를 거절하심을 말한다.

 

l  기독교인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삼위일체라고 불리는 사랑의 삶을 공유하게 하실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의 시간 또는 우리의 삶의 시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의해 변화될 것이다. 이 변화의 이름이 부활이다.

 

l  부활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가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증거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권세를 얻는 모든 것들을 아들께 복종케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님의 선물을 통해 그 복종을 나눌 수 있게 하신다.

 

l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눔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보다 부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다.

 

l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율법교사는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을 침묵시키셨음을 보고, 이제 어떤 계명이 가장 위대한지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5, 곧 이스라엘의 쉐마를 인용하여 답하신다. 마음과 목숨, 뜻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로 시작한다.

 

l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하는 계명이다. 그런 사랑에는 어떤 모호한 일반성도 없다. 오히려 그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구체적으고 일상적인 보살핌을 통해 명백해진다.

 

l  오직 율법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이 사랑은 가혹하고 무서울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진실되게 알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하시면서 우리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달려있다고 말씀하신다.

 

l  우리는 이분께서 산상수훈에서 자신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성취될 때까지 율법의 한글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예수님이심을 잊을 수 없다.

 

l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배우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요일 4:11) 진실되게 자신을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종종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이 계명들을 결합시켜서 제시하시는 도전은 하나님께 사랑 받음을 배우고, 그래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배우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우리에게 평생의 훈련을 요구하는데, 그 훈련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자기 중심성을 발견하고 압도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l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다. 교회와 모든 기독교인의 삶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것이다

 

l  어떤 계명이 가장 큰지에 관해 예수님께 율법교사에게 대답하신 것과 율법과 선지자가 어떻게 어울리는지에 많은 것들이 달려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응답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차이를 특징짓는 데 사용되어왔다.

 

l  기독교인들은 율법의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종교를 대표한다고 주장된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에 의해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l  이것은 우리의 차이점들이 이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 각자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l  예수님께서는 성전으로 돌아오신 이후 계속해서 질문을 받으셨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함께 모여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아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신다.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한다.

 

l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들과 그들의 치료를 증거하는 자들에 의해 다윗의 자손으로 규정되신 것을 안다(9:27, 12:23) 바리새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데 합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1절에서 위대한 시편 기자인 다윗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메시아를 주님께서라고 제시했다는 것에 바리새인들의 주의를 돌리신다.

 

l  예수님께서는, 만일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께서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보다 위대하고, 다윗이 주님께서라고 부는 사람이다.

 

l  바리새인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이때부터 어느 누구도 감히 예수님께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거나 적법성이 결여됨을 보여주는 질문을 함으로써 교사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l  예수님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분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행하셔야만 한다.

 

l  이는 예수님을 대적하여 모의하는 자들이 그분을 죽이기 위해서 사용하게 될 말과 행위를 피하실 수 없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