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기독교역사

종교개혁 1

Four Seasons Daddy 2020. 12. 26. 12:16

1. 개요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The) Reformation(영) / Reformation(독) / Reformatio(라) / 

일반적으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의 부패와 심각한 타락상뿐 아니라 교황 및 사제들의 심각한 복음훼손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기독교 내부의 대규모 개혁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역사, 그리고 세계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약 천 년간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종교 개혁의 결과,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참된 복음을 회복하고자 종교개혁을 일으킨 기독교인들을 개신교라고 한다.

 

2. 용어 정립

 

흔히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처음에는 유럽사에서 워낙에 큰 사건이라 the Reformation처럼 고유명사로 쓰였고, 다른 종교의 개혁에 대해서는 정관사 the가 빠지고 소문자로 reformation으로 쓰였는데 현대에 와서 기독교, 유럽 중심적이란 비판 때문에 가장 좁은 의미의 종교개혁인 개신교의 출현 사건의 경우,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중립적 용어가 생겨났다. 그렇다고 기존용어가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다. 워낙 오래 관습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병용하고 있다. 우리 식으로 굳이 번역하면 가톨릭을 포함하는 의미로 쓸 경우'기독교 개혁', 개신교의 출현만을 의미한다면 '프로테스탄트 개혁' 정도로 번역해야겠지만, 그러면 또 번역상의 난제가 생기는 탓에 굳어진 종교 개혁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존의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란 표현을 그대로 써주는 편인데, 그 갈라진 양상을 강조할 때는 교회 분열 또는 종교 분열이라고도 한다. 즉 소위 "종교개혁"이라고 일컫고 상세한 내용은 분열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일부 천주교 보수파에서는 개신교의 출현만을 일컫는 경우 '종교 개혁'이라는 표현 대신 '종교 분열'이라는 표현을 즐겨쓰기도 한다. 이는 교회 역사상 루터 말고도 각종 분열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대표적으로 정교회와의 동서 분열(The Great Schism이라고 한다)이 있고, 그 다음에야 아비뇽 유수, 그리고 루터가 있다. 그리고 천주교 보수파라면 루터 등의 행위를 절대 '개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태동만을 주목하는 것은 그림의 한쪽 면만을 보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하여 대대적인 가톨릭의 쇄신 움직임도 일어났다. 예전에는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처음 대항 종교개혁으로 명명한 것에서 유래하여 학술적으로 이 개혁을 대항 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라고 불렀으나,[6] 현재에 와서는 이 용어가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친 용어임이 지적되어 '가톨릭 개혁(The Catholic R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가톨릭의 개혁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참고하라.

 

3. 프롤로그

 

흔히 종교개혁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로 보는 게 일반인들의 시각이지만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그에 맞선 가톨릭 교회의 대항종교개혁 모두 시대적 산물이고 내적인 변혁이라는데 견해가 보통이다. 다만 개신교계에서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 기념일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인물사적인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토머스 칼라일 마르틴 루터가 없었더라면 하는 if 떡밥으로 루터가 없었으면 프로테스탄트도 없고 독일의 분열도 없고 프랑스 혁명도 없고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근대 사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부터 두드러졌는데 종교개혁을 다룬책에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인물에 대한 연구 자체가 빠져버리고 대략적인 서술만이 남은 경우도 남아서 1970년대부터는 인물사 경시에 대한 반성이 이뤄져서 시대적 사건과 함께 균형적으로 연구하는 추세다. 다시말해, 오늘날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루터와 츠빙글리와 가톨릭 쇄신가 등 개인들에 맞추는 영웅주의적 사관을 배격함과 동시에, 종교개혁이 어떤 필연성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관도 배격한다. 이는 다른 역사학 분야에서도 유사하다.

신학계 역사 신학의 입장에선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역시 인물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고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 바로 이전시기 '후기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 중이다. 종교개혁 시기 수백 년 전 중세 가톨릭 교회 자체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개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터도 이전의 개혁적 분위기나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교회론에 대한 근본적 회의주의 운동이 기존에는 번번히 실패로 끝나고 몇몇은 가톨릭에게 이단으로 찍혀 음지에 숨어있어야 했던 반면, 루터와 칼뱅 등이 양지로 끌어내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결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연구 또한 이뤄지는 게 사실이다.

사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봐야되는지는 논란이 있긴 하다. 중세 초기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들 모습이 오늘날에 비해 상당히 부패하여 있던 것은 크게 이견이 없고, 성직매매, 수도원(수녀원)의 타락, 교회의 세속권력, 가톨릭교회가 사회 현실과 타협한 여러 풍습등의 문제는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점이기 때문에 15~16세기의 개혁가들이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부패상을 가톨릭 신자들이 손놓고 바라본 것은 아니다. 중세 이전부터 교회 구성원들이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그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원 운동이 개혁의 모습으로 볼 수 있고, 심지어 루터교회가 출현하던 시기에도 수도회들의 쇄신 운동은 단절되지 않았다. 오늘날 가톨릭에서 존경 받는 쇄신 운동가들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성 후안 데 라 크루즈)은 이 시기 스페인에서 배출한 개혁가들이다. 데레사와 요한은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했다.

물론 루터의 출현은 순수하게 우발적 사건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으며,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개혁을 위해 나타난 수도원들도 조직화되어 가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지기도 하는 등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거기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황 교황청도 100여 년간 아비뇽 시절과 분열시기를 겪으며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시기는 마감하였지만 교황청은 잃었던 세속권력을 회복하고 교황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세속적 영토다툼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주교나 대주교는 대체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독점했고, 추기경들은 대체로 이탈리아 명문가에서 선발되었고 교황선출도 그리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체계가 경직 되면서 교회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경직성이 더해져 갔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크게 3가지 흐름인데, 첫 번째는 신비주의 운동이라고 볼수 있다. 중세 3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요한 타울러 등은 영성을 갖춘 신비주의자들로 이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직접적으로 비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두 번째는 데보티오 모데르나라 불리는 일종의 신도 경건운동으로 수도원적인 경건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이는 마르틴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는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 발도파 등의 사상적/윤리적 개혁가, 개혁 공동체들이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사보나롤라의 경우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쳐바르고 피렌체의 개혁을 이끌다가 화형당한바 있다. 발도파는 청빈을 강조하여 당시 비대해진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 다만 이들이 번역이 금지되었던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번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은 그 이전에도 행해지던 일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인쇄술의 발달로 후대에 갈수록 번역이 활발해진 것뿐이다.

또 한편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중세의 '공의회우위설'(공의회가 교황 위에 있다는 교설)이다. 이는 교황직의 분열 때문에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교황 위에 있는 공의회 외에는 분열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생각과 연결되어있다.

실제로 공의회우위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의 단일성 회복에 영향을 끼쳤다.

 

이 거룩한 콘스탄츠 시노드는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고 있다. 분열의 종식과 하느님 교회의 일치 및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 찬미를 위해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된 이 시노드는 하느님 교회의 일치와 개혁을 더 용이하고 확실하고 훌륭하고 자유로이 성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규정·정의·결의·선언하는 바이다:

 

  이 시노드는 성령 안에서 적법하게 소집되었고, 보편적인 공의회를 구성하며,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며, 자신의 권한을 직접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앙과 현재의 분열의 근절 그리고 하느님 교회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과 관계하는 사안들에서 이 시노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누구나, 어떠한 신분과 지위와 품위를 지녔든, 또 비록 교황이라 할지라도, 이 거룩한 시노드와 향후 위에서 언급한 전제들 아래 적법하게 소집되는 모든 공의회의 명령·결정·규정·지시 들에 순종하기를 고집 세게 거부하는 자는, 만일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며, 필요할 경우에는 다른 조처들도 사용될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 1415년 4월 6일자 교령 「헥 상타」

 

교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신앙, 교회일치, 머리와 지체에서의 개혁에 관한 문제에 관해 공의회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 교령은 비상조치이기는 했으나 아무튼간에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는 후대의 가톨릭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되고 있다.

 

분열의 과정 그리고 특히 교령 「헥 상타」에 대한 해석은 "로마" 노선과 "갈리아" 노선 사이에서 수백 년간 불화의 원인이자 논쟁의 핵심이었다. 갈리아주의자들은 「헥 상타」를 구속력있는 문헌으로 여겼고 그 안에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원칙적 우위가 명시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우위를 분열이라는 특수 긴급 상황에 한정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반면 엄격한 교황주의자들은 그레고리우스 12세까지 포함한 로마계 교황들만이 정통적이며 그레고리우스의 사임과 1415년 7월 4일 그에 의한 공의회의 정식적인 새로운 소집이 비로소 콘스탄츠 공의회에 적법성을 부여했고 그로써 "공의회 방안"을 통한 분열의 종식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이들에 의하면 「헥 상타」는 이미 형식상으로도 무효이며 사실 일종의 이단적 조처이니, 왜냐하면 분열이라는 긴급 상황에서도 공의회가 적법한 교황보다 상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시었다. 그밖에 물론 온건한 교황주의적 입장도 있었다. 이것은 달리는 분열을 제거할 방법이 없는 특수 상항에서는 공의회가 "교황들" 위에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이 입장은 그러므로 피사 공의회를 부분적으로 인정했고, 1409년부터는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아니라 알렉산데르 5세와 요한 23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간주했던바, 사실 그리스도교계 대부분이 이들을 교황으로 인정했고 또한 1414년 오직 리미니를 중심으로 한 지역만이 참 교회라는 그레고리우스 측의 주장은 뭐라 해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쳐갔다. 금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로마 교황의 공식 명단은 성 바울로 성당 벽에 그려져 있는 교황 초상화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이런 관점에 부합한다. 이렇게 「헥 상타」는 분열시의 상황예속적 긴급조치로 인정되었으나, 그 상황을 넘어서까지 공의회의 우위를 통용시키는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1960년대 이래 특히 가톨릭 교회사학자들 사이에서 다시금 매우 강도높게 진행된 「헥 상타」에 관한 토론은 이 문서가 교의적 결정을 한 것은 아니라는 데 널리 의견이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어휘나 역사적 맥락 그리고 바로 공의회우위설 주창자들의 태도 자체가 그런 해석을 배제하고 있다. 교령은 "이 콘스탄츠 공의회"와 그것의 구체적 임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용한 어휘는 교회법 용어이지 교의학 용어가 아니다. 촉구된 것은 순종이지 신앙이 아니다. 처벌 대상은 불복종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지 견해가 다르거나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12세 ―그리고 베네딕투스 13세 ―의 추종자들에 대한 공의회의 태도는 사람들이 「헥 상타」를 고집하지 않았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과연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법성이라는 무대를 제공했으니, 그들이 참여해야 공의회가 비로소 보편적으로 되고 그리하여 이전의 모든 회합(「헥 상타」를 공포한 회합을 포함하여, 적법성이 결여된 회합들)도 보편적으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바젤 공의회의 엄격한 공의회우위설(수위설) 주창자들조차도 적수들을 이단자로 선언하기 위해서는 「헥 상타」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앞으로 보려니와,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우위라는 "진리"는 1439년 「사크로상타」Sacrosancta에서 비로소 명확히 정의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내용적으로 볼 때 「헥 상타」를 그저 분열 상황을 위한 긴급조처로만 이해하기는 힘들다. "머리와 지체에서의 교회 개혁"에 관한 사안들에서도 공의회가 우위를 보유한다는 언명 그리고 처벌 위협과 "이후의 모든 공의회"에 관한 구절들은, 비록 명확히 표현되지 못했고 또 앞뒤가 맞지 않는 면도 있지만, 아무튼 공의회의 우위성의 일반화를 겨냥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공의회에 ㅐ한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의 차이는 이미 4월 6일 이전 며칠간의 소동 속에서 양측이 익히 알고 있었다. 자바렐라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다만 분열 상황을 위한 비상非常 교령을 원했고, 반면 다수파 특히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은 거기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결국 다수파가,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의 두 번째 도망 이후,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회를 위한 「헥 상타」 교령의 항구적 의의의 관한 문제 역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아무튼 이 교령은 무류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유효한 신앙의 결정도 (지금도 통용되는) 교회법규도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되었다. 혹시 당시와 유사한 교황의 극단적 무능과 실패(분열을 야기하거나 이단에 떨어짐 등) 상황이 발생하면, 교회를 위해 이 교령에 일종의 "본보기 역할"이 주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라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게 된다면 「헥 상타」는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교회의 극한 상황을 위한 범례적 의의를 보유하게 될 것이다: 교황이 자신의 본분을 현저히 거스르는 경우, 공의회가 교황 없이도 최고 심급을 구성한다. 브라이언 티어니가 「헥 상타」는 당시 상황에서 교회의 일치 그리고 바로 교황직의 존립을 가능케 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교회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헥 상타」와 콘스탄츠 공의회 교부들의 조처를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그로써 제가 판 구덩이에 빠지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그것이 없었다면 교황이라는 우두머리의 단일성이 회복되지 못했을 바로 그 조처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82-184쪽

 


여담으로 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 유명한 얀 후스 재판이 발생했다.

 

  교회의 쇄신이야말로 프라하의 교수 얀 후스Jan Hus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이었다. 요한 23세 폐위 후 심의 휴지기에 공의회는 후스라는 인물과 그 가르침에 대해 논의했다. 1415년 5월 5일 그의 45개 명제들이 단죄된 영국윈 위클리프Wycliffe는 후스의 모범이었다. 후스도 위클리프처럼, 범죄로 점철된 작금의 교회를 떠나 하느님께 (구원을) 예정받은 자들이 모인 영靈(Pneuma)의 교회로 도피했다. 거기서 사제직과 성사의 질료적 집전이 아니라 오직 영의 소유가 구원을 보장한다. 스스로 흠 없었던 그는, 성직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그의 보호자였던 프라하 대주교마저 격분시켰으나 귀족과 체코 국민들로부터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공의회는 그에 대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려야 했다. 지그스문트 왕은 그에게 콘스탄츠 행 통행증을 교부했다. 그에게 내려진 교회의 파문은 철회되었으나 성무 집행 정지 ― 미사 집전과 설교의 금지 ―는 철회되지 않았다. 콘스탄츠에서 후스는 이 금지를 어겼고, 구금되었다. 공의회가 임명한 예심 판사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기를 거부했다. "나는 어떠한 오류도 가르치지 않았다. 체코인치고 이단자는 없다." 그는 1415년 7월 6일 골수 이단자로 단죄되어, 현행법에 따라 세속 기관이 처형했다. 1년 후, 친구였던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도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주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 후스는 의연했다. 형집행을 목도한 인문주의자 포지오Poggio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 문제만 빼면 ― 그는 탁월한 사람이다"(Vir Praeter fidem egregius)

 

  -후베르트 예딘, 《세계공의회사》, 최석우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84-85쪽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 받은 쇄신이든, 인정되지 않은 쇄신이든 간에, 근래의 역사학자들이 종교개혁을 더욱 넓은 범위로 해석하는 단서가 된다.

 

  우선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해보자. 실제로 '종교개혁' 따위가 있었는가? 이 표현이 가리키는 사태가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오늘날 우리가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독교 내부의 '개혁' 요청은 이 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매 시대마다 기독교를 시급히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베네딕토회의 수도원 생활 쇄신과 연관되었던 잉글랜드 교회의 '10세기 종교개혁', 교황의 지시를 받아 기독교권 서방 전역에서 성직자의 독신을 강요하는 데 성공한 12세기 종교개혁을 확인했다. 훗날 14세기에 경쟁자 2명(한때 3명)이 교황 성좌에 앉을 권리를 주장한 '대분열'은 다음 세기에 격렬한 레포르마티오(reformatio, 개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15세기 종교개혁에는 공식적인 면과 비공식적인 면이 공히 있었다. 성직자 지도부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 정체를 조직화함으로써 지도력 위기를 봉합하고 분열 추문을 예방하고자 했다. 그런 위엄 있는 모임은 피사(1409), 콘스탄츠(1414~1418), 파비아와 시에나(1423~1424) 바젤과 기타 장소(1431~1449)에서 열렸다.(중략)

 

유럽의 반대편 끝자락에 자리한 보헤미아 왕국에서 또다른 급진적 사제 얀 후스(Jan Hus)는 외국의 대군 주권과 로마의 관할권에 대항하는 민족 봉기를 고무했다. 또한 후스파는 미사  성체성사에서 평신도에게도 빵만이 아니라 포도주까지 줄 것을 요구했다. 목표와 우선사항이 각기 다른 개혁 운동들이 항상 양립 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졌다), 총괄해서 보면 그 운동들은 마르틴 루터 이전 세기에 유럽 종교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이 무기력과 현실 안주였다는 어떠한 견해도 거짓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루터 이전에 숱한 개혁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연관된 종교개혁에 정관사를 붙이고 'r'을 대문자로 바꾸어 'the Reformation'이라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강력한 논증들이 있다. 단수(單數) 종교개혁에 관한 옛 교과서들은 으레 1517년에 루터가 항의한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하고 길어야 10년 남짓 지난 시점에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사건으로 보였고(잉글랜드 같은 다른 곳에서도 중요한 반향이 일어나긴 했지만), 서사 형태가 깔끔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이유로 루터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뒤이어 독일 가톨릭교도 황제의 뜻에 대항해 프로테스탄트 국교회들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었고,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교회의 무질서한 상태를 감안하면) 예측 가능했다.

 

이제 이런 단수 종교개혁의 연대기도 지리도 더는 설득력 있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불가피했다'는 가정은 중세 후기 가톨릭교의 유연성과 정신적 활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연구를 고려하면 적어도 논박이 가능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때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이자 끝으로 보였던 것 ―독일에서 전개된 루터의 운동―이 실은 훨씬 더 큰 전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이제 학계에서 두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단수 종교개혁은 복수 종교개혁들에, 즉 저마다 고유한 지향과 의제를 추구했던 복수의 신학적·정치적 운동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처럼 뚜렷이 구별되는 국가·지방·지역 단위 종교개혁들이 있었다. 그 운동들이 모두 루터파였던 것도, 모두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신교의 어느 야심찬 갈래는 루터주의와 경쟁하며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더 정확한 명칭은 '개혁파' 신교이지만, 그 갈래는 흔히 신학적 약칭으로 '칼뱅주의'라 불린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구교인 가톨교를 처음으로 대체한 신앙으로서 칼뱅주의를 경험하긴 했지만, 칼뱅주의는 이따금 '제2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린다. 당대의 종교 실험자들 모두가 루터와 칼뱅을 비롯해 권한을 가진 위치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세속 행정관들과 동맹을 맺은 '관료적' 개혁가들의 선례를 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들과 별개로 일부 집단과 개인이 시도한 아래에서 위로의 '급진 종교개혁'도 있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사회질서를 상상했고, 관료적 개혁가들마저 당연시한 기독교의 기본 전제를 과감히 재고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들 중 하나는 가톨릭교회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났다. 루터와 칼뱅의 도전에 직면하여 로마가 세력을 결집하고 성직 위계를 재정비한 사실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었다. 19세기에 독일 신교 역사가들이 대중화한 상투적 서술에서 가톨릭의 이런 움직임은 소극적이고 본질적이고 반동적인 대응이라는 뜻으로 '대항―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불렸다. 그 이전가지 종교개혁에 관해 쓴 이들은 (그리고 오늘날에도 놀랄 정도로 많은 이들은) 테베라 강의 이런 견해를 생략하든지 아니면 책 뒤쪽의 부수적인 장에 우겨넣었다. 그러나 점차 '가톨릭 종교개혁' 또는 '가톨릭 쇄신'이라 알려진 것은 단순히 적에 직면하여 방어시설을 보강한 대응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넓은 운동이었다. 신교 반란에 앞서 가톨릭교 내부에 이미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정신적 동향들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신교 반란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다른 일부는 그러지 않았다.

 

「The Reformation」, Peter Marshall

 


한편, '교회 구성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타락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의외로 각 개혁운동들 사이에서, 가톨릭 개혁가와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개신교 개혁가 사이의 논쟁이든, 합의된 의견은 없다. 이를테면 재세례파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내용을 집어넣은 타락이라 주장했지만 루터와 칼뱅의 관점에서는 전혀 타락이 아니다. 또한 침례회 신자들이 보기에는 교회의 권위있는 교의라는 개념 자체가 타락이겠지만, 역시 루터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권위 그 자체가 (가톨릭의 해석보다는 소극적으로 해석되지만) 근본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무엇이 타락인가'는 합의가 안되어있고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를테면 성 도미니코 데 구스만은 베네딕토회로 대표되는 중세 수도원들이 민중의 삶과는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다고 느끼고는, 도시에서 소규모 공동체 위주로 민중의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도미니코회를 설립했다. 반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수도자들이 세속의 신자들과 너무 심하게 어울려 산다고 느끼고는, 봉쇄수도원이 개혁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가톨릭 내부의 수도원 개혁운동들 사이에서도 '문제의식'과 '해결'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1571년 10월 6일에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엔카르나씨온에서 겪었던 일은 가톨릭 내부에서도 '타락'과 '개혁'에 대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보여준다. 교황 성 비오 5세가 특파한 순찰사 베드로 페르난데스는 데레사를 엔카르나씨온의 가르멜회 수녀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날 새 원장 데레사에게 수녀들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수녀들은 "어용 원장 물러가라", "선거권 박탈이다"라며 아우성을 쳤다. 수녀들이 보기에는 자치권에 대한 교황청의 간섭이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타락이였던 것이다. 반면 테레사측은 각 지역의 수도원이 중앙(교황청)과는 격리되어 지역 인사들과 온갖 연줄로 얽혀있는 것이야말로 타락이라고 여겼다.


특히 '무엇이 타락인가'라는 논쟁이 가톨릭 개혁운동들 내부 혹은 개신교 개혁운동들 내부를 넘어, 가톨릭 개혁운동과 개신교 개혁운동 사이의 논쟁이 될 경우는 문제가 더더욱 꼬인다. 단적인 예로 대사(면벌부) 논쟁을 살펴보자. 개신교 개혁가들은 성경에 직접 언급되어있지 않은 대사라는 개념이야말로 타락의 증표라고 여겼으나, 가톨릭 개혁가들은 대사라는 개념 자체는 타락이 아니되 신앙의 공로로 받아야 할 대사를 '상품'으로 전락시켜버린 성직자들의 행태를 타락으로 여겼다.[18] 또한 중세 가톨릭 교회 특유의 활발한 자선 문화는 가톨릭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름다운 사회였으나, 개신교 개혁가들은 구원을 돈 주고 산다고 여기며 타락의 증표로 생각하였다. 또한 후에 소개할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로 가톨릭 교회가 각 지역의 성직자들을 효율적인 신학교 체계로 교육하려고 한 것 역시도, 시선에 따라서는 타락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로 네덜란드 지역의 개신교 개혁가들이 그러하였는데, 이들은 신학교야말로 지역 교회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자 폭정이라 여겼다.[19] 교황청에서 성직자의 독신의무를 통해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만 하더라도, 오늘날의 가톨릭 신자들이 보기에는 개혁이지만, 오늘날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기에는 성경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것을 교황이 밀어붙인 타락이라고 여긴다. 또한 중세 교회의 초대형 떡밥이던 서임권 논쟁에서도 타락에 대한 관점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이 논쟁의 중요한 결론 중 하나인 보름스(Worms) 정교조약(1122년)과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를 살펴보자면, 황제나 봉건영주는 서임식에서 반지와 지팡이 대신에 홀(笏)을 통해 세속재산을 하사하도록 하여 주교직에 내리는 교권과 속권을 구분하였다. 다시 말해, 후대로 갈수록 성직자의 속권은 세속 통치자들에게로 돌아가고 교권은 더 엄밀하게 정의되어가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이는 가톨릭 신자들이 생각하기에는 역사적인 진보이지만, 개신교 개혁가들이 생각하기에는 세속권력과의 결탁으로 보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종교개혁 시대쯤에 특히 독일 지역이 이른바 경건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타락했다는 오해이다.

 

  주교들의 사목적 책임의 효과적 수행을 저해한 또 하나의 요인은 중세 말엽 주교들의 권한이 여러모로 공동화空洞化했다는 사실이다. 사목과 교회 규율을 강력하게 관장하려 시도한 주교들은 온갖 방면에서 장애에 맞닥뜨렸다. 당시 사목적 직책들의 거의 대부분을 좌지우지하고 담당자들을 지명하던 교회 후견인들은 대부분 평신도였으나, 종종 교회 단체들(주교좌 성당 참사회 · 수도원 · 대학) 그리고 외지(타국) 주교들인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주교좌 참사회 또는 부주교들(실제로는 일종의 영역 주교들이었다)은 종종 교구의 정규적인 공동지배 구조를 형성했고, 매우 독자적인 지위를 보유했으며, 주교의 권한을 사사건건 제한했다. 더 나아가 교황 특면과 유보권들도 온갖 곳에 주교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영역들이 생겨나게 했고, 그리하여 사실상 교회 조직의 뿌리깊은 독소가 되었다. 흔히는 수도원들만이 아니라 (예컨대 후견법을 거쳐서) 수도원에 속하는 본당구들 전체가 면속되었다. 대개의 경우 주교들은 자기 교구 성직자들의 일부에게만 실제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엄격한 개혁을 관철시키고자 했던 주교들은 얼마 안 되어 이 온갖 독자적인 기구들과의 가망없고 진빠지는 게릴라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황청에서의 끊임없는 소송에 얽혀 들어가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대개는 체념을 하고 말았다. 사실상 중세 말엽 많은 교구들에서 일종의 무정부 상태 내지 온갖 기구들의 극히 혼미한 대립-병립 통치가 지배했다. 수십 년이나 계속되는 끊임없는 싸움을 피하고자 한다면 대개의 경우 그저 모든 것을 되어 가는 대로 놔두는 수밖에 없었다.

 

  하급 성직자 영역에서는 중세 말엽의 전형적 현상인 "성직자 프롤레타리아"가 나타났다. 도시들 가운데는 사제와 수도자가 전체 주민의 10분의 1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 · 영적으로도 극히 수준이 낮았다. 중세 때의 일반적인 시골 신부 또는 도시의 평범한 "교구 소속 신부"는 처지가 가련했고 교육도 거의 받지 못했다. 사제가 된 사람은 대개 한 사목자에게 "견습하러 가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대학에서의 신학 교육은 대개 수도회 소속 사제들만 받았는데, 그것도 항상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도시의 매우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사목 사제가 아니라 "미사 집전 사제"였던바, 이들의 물질적 기반은 미사 예물과 그것에 관련된 부과금이었다.

 

  독신제의 준수는 이 성직자 프롤레타리아의 대부분에게 문제 밖의 일이었음이 확실하다. 독신제가 실제로 어느 정도나 준수되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나라마다 사정이 매우 달랐다. 15세기 독일(쾰른 또는 콘스탄츠)의 시찰 보고서들에 의하면 교구 사제의 3분의 1이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정도만 해도 비교적 양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문제에서 그리고 민중들의 종교생활에서는 더더욱, 중세 말과 종교개혁 직전의 상황이 이른바 건전한 중세 전성기 때보다 나빴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1500년 전후의 시기는 특히 독일에서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경건"했고 신앙이 뜨거웠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 종교적 이상과 당시의 사회 현실을 반영한 교회구조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당시 개혁에의 외침은 전반적인 쇠락의 증거가 아니라 종교적 활력의 증거였다.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05, 212-213쪽



물론 당시 사람들이 신앙에서 느끼던 불만은 어느정도의 진심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곧 객관적 의미에서 옛날보다 타락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소 경박한 비유를 들자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진심을 담고 있더라도 '아름다운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물론 현대인들이 이 시기의 유럽에 대해 놀랄만한 일들이 많지만 말이다.

 

4. 전개



학자들은 대체로 종교개혁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다음 기술된 분류 가운데 첫 3가지(루터파, 칼뱅파, 잉글랜드국교회)는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나, 그 외(과격혁명론자, 재세례파, 반삼위일체파, 가톨릭)는 거의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 북독일과 북유럽의 마르틴 루터 와 루터주의 (마르틴 루터, 필리프 멜란히톤, 유스투스 요나스, 요하네스 부겐하임, 게오르크 슈팔라틴 등)

  • 스위스와 남독일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츠빙글리, 하인리히 불링거, 마르틴 부처, 외콜람파디우스, 장 칼뱅 등)

  •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니콜라스 리들리, 토마스 크랜머, 휴 라티머, 존 녹스, 마르틴 부처 등)

  • 과격혁명론자 (토머스 뮌처, 라이덴의 얀, 한스 뎅크 등)

  • 재세례파 운동 (후터파, 스위스 형제단, 메노나이트 등)

  • 반삼위일체파 (이들은 예수가 도덕적으로 우수했기 때문에 신적 능력을 받았다고 보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후에 유니테리언으로 이어졌다.)

  • 가톨릭 교회의 개혁운동


개신교 입장에서 종교개혁을 설명할 때 누구든 독일(루터파)과 스위스(칼뱅파)에 대해서는 꼭 언급하지만, 잉글랜드(국교회)의 종교개혁은 여러 관점을 가진 다양한 신학자들이 참여되었고 가톨릭의 입장까지 배려(?)된 면이 있어,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 과격혁명론자와 재세례파는 같이 묶이는 경우도 있다. 반삼위일체파나 가톨릭의 개혁은 개신교 입장에서 종교개혁이 아니니 언급하지 않는다.

 

4.1. 마르틴 루터와 95개조 반박문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었던 루터는 스승인 요한 스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최신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루터는 사도 바오로의 발언으로부터 이신칭의,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미 루터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 지 오래된 가운데 1517년,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인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겸 할버슈타인 주교인 알브레히트가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알브레히트가 면벌부 판매에 나선 이유는 마인츠 대주교직에 오르려고 빚을 내서 샀기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동생[25]인데 교회법을 위반하여 20세 이전에 주교 서품을 받았고, 이후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법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패키지처럼 돈으로 사모았는데, 마침 신성로마제국 최선임 선제후 직위인 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매물(?)로 나오자 다소 무리를 하여 빚을 내서 선도 구매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에서 파견한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요한 테첼[26]을 브로커로 고용하여 당시 독일서 가장 큰 사채업자(?) 푸거 가문의 야코프 푸거에게 2만 1천 두카트의 빚을 졌고[27] 8년간 면벌부 판매수입을 보장받았으며 판매수입의 절반과 초입세[28]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치기로 합의했다.

사실 성직 매매 문제를 파고들자면, 16세기 초에만 있는 게 아니었고 그냥 이전부터 자주 있던 일이라 딱히 고대의 교회보다 이 시절이 더 심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1215년에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무려 공의회 차원에서 다루는 등 중세의 교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한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문제는 루터의 시대인 16세기에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 중요하다.[29] 그리고 독일에서 그간 교회의 경제적 수탈로 인하여 반로마 감정이 폭발하자 전유럽에 순식간에 파급력이 미치게 된다.

독일 작센지방의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의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런 그가 보기엔 면벌부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에 루터는 면벌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의 차원에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이때 루터가 하필 교회 대문에 내건 이유로 '루터가 가톨릭 교회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해 대문에다가 박아놨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종교적인 의미는 없고, 단순히 교회 대문이 일종의 '게시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문에 내걸었을 뿐이다.

당시 종교개혁의 파급력을 최대한 작게 해석하는 입장의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게 아니라 교구 주교들에게 면벌부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가 직접 쓴 건 사실이고 이전부터 동료 신학교수나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으며, 브란덴부르크와 마그데부르크 주교 등에게 항의편지를 보내고도 답변이 없자 직접 내건 걸로 본다. 이러한 주장은 1960년대 가톨릭 교회사가가 주장한 것인데 1540년대 필리프 멜란히톤의 루터파 신학자의 서술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지 개신교나 일반역사가들은 그냥 뭐 어쩌라는 반응(날짜는 별 중요치 않다)이다. 어쨌든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작품이며 공론화 되었을 때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저작임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며, 이 주장이 가톨릭 내부적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실 루터는 이 시점에서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등지려는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대사제도의 남용과 면벌부의 효력에 대해서 "교회가 그럴 권한이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제기였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면벌부의 원리로 내세운 수많은 성인들의 공덕이 쌓여서 그것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그 공덕의 관리는 교황이 담당하며 이 공덕을 면벌부로 판매한다는 이론을 반박했던 것이다.

애초에 면벌부에 대한 논쟁은 루터가 혼자 말하던 것도 아니고,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노회와 도미니코회에서 이미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작센의 수도 비텐베르크의 성 근처에 자리한 교회의 문에 반박 조항들을 길게 열거한 문서―95개 논제―를 붙였다. 장차 역사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순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태어나고 중세가 급사한 날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일부 학자들은 95개의 논제를 붙였다는 것마저 부인해왔다. 반박문을 게시한 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경천동지할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 당시 루터는 얼마 전에 설립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고, 신학부 내에서 학구적 논쟁을 시작하는 관례적인 방법은 사전에 논제를 게시하는 것이었다. 접근하기 편한 위치에 있었던 까닭에 성채 교회(Castle Church)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 역할을 했으며, 루터의 행위는 오늘날 대학에서 강의 목록을 공지하는 행위보다 별반 극적일 것이 없었다. 95개 논제 자체는 딱히 혁명적이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새로운 교회 창설을 요청하지 않았고, 신학에서 그리 대수롭지 않은 모호한 문제를 제기했다. 1517년에는 교회를 개혁하려는 청사진도, 예측 가능한 결과도 없었다. (중략) 면죄부를 둘러싸고 도미니코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가 반목하기도 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두 수도회가 논쟁한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는 대수롭지 않은 "수사들 간의 다툼"으로 치부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면벌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가열되었고, 내부자로서 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비판하던 루터는 점점 교황청과 대립을 하게 된다. 당시 교계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억누르려는 입장이었고, 루터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교황청에서는 처음에는 루터의 사상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고자 151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는 루터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 데에 일조하였고, 교황청은 이제 루터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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