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연구원 느헤미야/김근주 교수의 구약

구약과친해지기(신명기)-김근주교수

Four Seasons Daddy 2024. 8. 19. 08:16

[구약과친해지기] 신명기 1 : 신명기에 관한 오해

오늘 같이 나누어 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 오경 가운데 가장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신명기라는 한자어 이 신자가 우리 옥편에 찿아보시면 되풀이할 신 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아마 이거는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성경을 처음에 옛날에 번역할 때 이런 한자를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신명기 명자는 명령할 때 명자이니 신명기는 되풀이된 명령, 되풀이된 말씀 이쯤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식의 한자 번역이 나오게 된 건 이 책의 영어 제목인 Deuteronomy 이것 때문에 되었을 겁니다. Deutero 라는 게 두 번째의 이런 뜻이고, 그다음에 nom 율법이라는 뜻이니 Deuteronomy는 말 그대로 두 번째 율법 이쯤 되는 거죠.

사실 우리 신명기 17장 18절에 보면 개역 성경에는 등사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왕은 자기 곁에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하나 기록해야 한다. 마치 오늘날의 성경 필사하듯이 왕은 율법서를 하나 필사해서 자기 옆에 늘 간직해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등사본 요즘으로 치면 카피인 거죠. 하나를 필사해서 또 하나를 만들어낸 카피이겠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해서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런 단어를 썼고 그게 영어 단어에서 만들어진 것이 Deuteronomy이고 우리 말로 와서는 되풀이된 명령에 관한 기록해서 신명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해서 이런 이름의 출처가 신명기 17장18절이라는 것 일단 짚고 갈 만하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저는 신명기가 되풀이된 명령이라는 점에서 이것도 또 의미가 있다 싶어요. 신명기 우리 읽어보시면 느끼지만 계속 반복입니다. 계속 규례와 법도를 들으라. 지켜 행하라. 마음 다해 행하라.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라.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거의 같은 내용이 같은 권면, 촉구들이 계속 반복되는 걸 볼 수가 있죠.

그점에서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말씀이구나 싶고요. 이건 신명기와는 약간 떨어져 있지만, 인간적이 생각으로 해보면 이 오경의 시간 틀에 따르면 모세가 이거 신명기가 가장 마지막 해, 광야 방랑의 마지막 해 모세 인생의 가장 마지막 해입니다. 그의 나이 120세 되어서 정말로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거죠. 그러니 아주 나이 든 경험이 엄청나게 많은 노인인 모세가 설교하는 겁니다. 그러니 능히 상상되죠. 했던 소리 또 하고 했던 소리 또하고 계속 되풀이 이러하겠구나 싶지요. 

제가 늘 신명기 할 때마다 하는 얘기지만 우리 찬송가 가운데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이런 가사를 가진 찬송이 있죠. 제목이 뭔지 제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요즘은 우리가 교회에서 찬송가 잘 안 불러서 제가 최근 10년 안에 그 찬송을 부른 기억이 없습니다만, 옛날 고등부 때는 자주 불렀던 것 같습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 주시오. 이거 딱 신명기예요.  늘 듣던 이야기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고 또 들려주는 게 신명기이겠습니다. 

그다음에 신명기 전체를 생각할 때 또 기본적인 언급을 해야 할 것이 날짜입니다. 우리 신명기 1장 1절에서 3~4절까지 보시면 신명기는 출애굽 광야 방랑 40년째 되던 해 11번째 달 첫날 쉽게 11월1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광야 방랑이 이제 한두 달이면 끝나는 거예요. 끝나고 요단강 건너가고 가나안 진격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 요단강 건너가는 것은 신명기에 나오지 않고요 여호수아서에 가서 나오는 거고 신명기 마지막은 모세가 죽는 거로 끝나는 것이겠습니다만 신명기는 그래서 1장 첫머리에 11번째 달 초하루 이렇게 하고는 4장4절부터 시작해서 오늘이라는 표현이 4장에 여러 번 오늘이 나오고 5장에도 6장에도 7장~12장, 4장~12장까지 모든 장마다 최소한 한 번 이상씩 세,네 번씩 오늘이라는 표현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27장 이후에도 27~32장까지 가장 마지막이 32장 48절입니다. 신명기는 34장까지예요. 그러니 거의 마지막까지 계속 오늘이라는 것이 되어있더라는 겁니다. 특히 오늘 표현이 나오는 가장 마지막이 32장 48절인데, 거기에는 바로 그날 해서 오늘 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로 그날 해서 특별하게 강조까지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결국, 신명기는 그 전체를 하루 동안에 주어진 말씀으로 만들고 있구나 라는 겁니다. 신명기는 이 신명기 전체를 단 하루의 시간에다가 할애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보죠. 창세기 천지창조부터 요셉의 죽음까지니 천지가 언제 창조됐는지를 모르니, 지구 나이가 40몇 억 년이라 그럴 때 그럼 창세기 안에 거의 40몇 억 년의 역사가 있어 버리는 것이지 않습니까?  엄청나게 긴 역사가 창세기고요. 출애굽기 1장1절이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간 사람들의 이름 이런  게 나와 있고, 1장8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등장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출애굽기1장1절부터 7절까지가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 400년의 세월을 7절 만에 확 건너가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1장8잘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등장해서 이스라엘이 억압과 핍박을 당하고 종으로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과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하게 되죠. 출애굽에서는 출애굽기 19장에 가면 시내산에  도착이지 않습니까? 우리 이제까지의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출애굽기 19장에 시내산에 도착해서 나머지 출애굽기 전부 40장까지 레위기 전부 27장 그다음에 민수기 10장 10절까지가 다 시내산입니다. 10장 11절에 시내산 출발이니, 이 출애굽기의 첫 7절에 400년을 보내버리는데, 근데 출애굽기 19장부터 레위기 전부 민수기 10장10절까지는 딱 1년이에요. 우리 성경이 할애하고 있는 날짜들을 보면 딱 1년을 할애하고 있고요. 특히 출애굽기 40장 가장 마지막 장인 40장, 그다음에 민수기 1장 비교를 해보면 레위기에 할애하고 있는 시간은 얼마냐 한 달입니다. 한 달 동안에 주어진 말씀으로 레위기가 제시되어 있더라는 거죠.  민수기 10장11절에 시내산을 출발해서 광야 방랑을 시작해서 민수기 마지막까지 38년입니다.  민수기가 36장까지 인가요. 해서 그 기간 동안 이 장들을 다 38년의 시간에다 할애하고 있더라는 거죠

그리고 신명기는 하루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창세기부터 신명기는 천지창조부터 모세의 죽음까지 엄청나게 긴 세월을 다루는데 말입니다. 근데 그 가운데 압도적인 분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내산 단락 출 19장에서 민수기 10장10절까지는 1년, 특히 그 가운데 한가운데 핵심인 레위기에는 한 달, 신명기 굉장히 분량이 많은 책에는 하루이더라는 거죠. 해서 결국에는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오경은 거기에 할애하고 있는 시간의 틀을 보니 누가 보더라도 오경의 초점은 뭐냐? 레위기하고 신명기예요.  한 달 동안에 선포된 말씀에 레위기 통째를 할애하고, 하루 동안에 전해진 모세의 설교에 신명기 전체를 할애하였다는 점에서 이 오경을 지금과 같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이렇게 완성한 사람들은, 오경의 이 핵심이 뭐냐? 레위기하고 신명기라고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이건 객관적인 사실인 거죠. 알 수 있겠다 싶은 것입니다.

해서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의 오경 이해는 압도적으로 창세기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좋아해요. 우리는 창세기를 훨씬 더 좋아하고, 창세기 아닌 내용은 그리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그 가운데 신명기도 인가 있어요. 신명기에 인기 있는 부분들은 주로 1장부터 11장까지입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 사랑해라. 하나님 경외해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의 계명을 지켜라. 딱 이거예요. 이게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우리 아침에 개인 경건의 시간에 큐티 할 때도 이런 부분들은 참 좋아요. 내가 하나님을 마음 다해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가? 자신을 돌아보기도 좋고요. 그다음에 저 같은 목사의 경우 설교하기에 딱입니다. 설교하면서 교인들 쪼아대기,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십니까? 이렇게 남한테 훈계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기에 딱 좋은 본문이 신명기 1장부터 11장이라는 겁니다. 해서 우리네 교회에 가장 인기 있는 오경 본문은 창세기의 이야기들인 거고요. 그다음에 나머지 출,레,민,신은 그닥이지만 그나마 이 신명기 1장부터 11장까지 설교하기 딱 좋은, 묵상하며 개인의 삶에 적용하기 딱 좋은 이런 본문들이 그나마 인기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경 스스로가 본문에다 부여하고 있는 시간의 틀을 볼 때 오히려 오경 자체는 이 레위기와 신명기, 레위기를 생각하면 레위기는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주로 규정이지 않습니까? 근데 그걸 레위기하고 신명기, 신명기에도 사실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앞부분에 1장 11장에 하나님 사랑해라 계명 지켜라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12장부터 26장에 있는 규례와 법도 이거 지키게 하려는 것, 이것을 12장부터 26장 이 핵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부분에서 그렇게 했던 말 또하고 또 하면서 강조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정작 그래서 오경에서 최종적인 오경의 모습에서 정말 중요한 책들은 레위기 그다음에 신명기, 신명기 가운데서도 12장에서 26장 이렇다는 거죠. 그거 생각하면 우리가 당장 반성하고  돌아볼 곳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개의 본문 레위기 통째로 하고 신명기 12~26장. 보통 우리가 신명기 법전이라고 부르는 이 본문들이 우리네 교회에는 인기가 없거든요. 거의 읽히지 않고 특히 주일 오전 예배 설교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본문들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저는 한국 기독교, 한국 개신교 교회는 적어도 오경의 의도에서 꽤 많이 벗어나 있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왜 그런 일들이 생겼을까 할 때 저는 1차적으로는 바울에게 어떤 책임이 있다 싶은 것이 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생각을 해보면 루터랑 칼빈한테도 책임이 크다 싶어요. 바울보다는 어쩌면 사실 저는 바울은 이해가 되는 것이 있지만 하여튼 루터와 칼빈이 특히 루터 같은 경우에 반율법. 그전까지의 기독교의 율법주의적인 행위에 대한, 행위도 사실 우리네 교회는 정의롭게 살아야 구원받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맨날 착하면 어떡하지? 착한 거로 구원 못 받는데 제가 늘 하잖아요. 착하기나 한 다음에 그런 고민 하시라고 늘 하고 싶은데 우리네 교회는 너무 착해서 행위를 의지할까 봐 너무 정의롭게 살아서 행위를 의지할까 봐. 단 한 사람도 그런 적이 없었고 그런 시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루터가 붙어 싸웠던 시대에는 정작 정의로운 행위,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면죄부를 사고파는 이런 것들이 문제였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때 이래 루터에게 있던 반율법주의적인 경향 이런 것들이 있으면서 칼빈 역시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그 루터와 칼빈 이래 생겨난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근본적인 특징이 율법에 대한 거부감.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는데 하여튼 이런 것들이 우리네 안에 생겨나면서, 오경에서, 사실 오경의 초점은 객관적인 초점은 레위기와 신명기인데 근데 그 개신교가 지닌 반율법적인 경향 이런 것들이 레위기를 신명기를 민수기를 경시하게 만들었고요. 딱 출애굽기 19장 시내산 율법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교회는 관심을 꺼버립니다. 모든 관심은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야곱 이야기 온통 그 얘기만 하고 있는 것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관심들이 성경에 분명히 존재하는 본문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에서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지나치게 치우져 있다. 그리고 정작 오경이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율법에 대한 경시야말로 저는 우리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 교회, 한국 개신교만의 문제이지 않습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개신교. 미국의 장로교니 감리교니 유럽의 장로교니 감리교니 침례교니 이 서구 세계가 가지고 있던 어떤 신학들, 이 서구 개신교가 가지고 있던 신학들, 그게 한국에도 전해졌고 한국은 더 안 좋은 쪽으로 확장된 것도 있고 그러겠습니다만 저는 개신교의 근본적인 한계가 있고, 문제가 있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거 글쎄요. 저는 유럽은 조금 다르다 싶은데 미국 개신교가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보면 여전히 성경에 대해서 부적절하게 이해하고 있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해서 일단 첫 번째 짚고 가는 것이 신명기를 비롯한 오경의 시간 틀은 신명기를 굉장히 부각시키고 있다이겠습니다. 

 

신명기 2 : 신명기의 짜임새와 십계명

신명기 1장1절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00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로 하다 보니, 별수 없이 이렇게 되었고요. 근데 히브리어로는 이는 말씀, 이것들은 말씀들이다. 이렇게 두 단어로 시작해요. 이것들을 뜻하는 단어 말씀들을 뜻하는 단어가 제일 처음에 나와서 이것들은 말씀들이다. 근데 말씀은 말씀인데 어떤 말씀이냐? 꾸며주는 말이 모세가 요단 저쪽 어디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이렇게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이는 ~다 하고 그 ~를 꾸며주기가 4장 44절에도 이것들은 율법. 근데 어떤 율법이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그다음에 장소 요단 동쪽 벳브올 맞은편 이렇게 되어 있더라는 거죠. 그다음에 29장 1절에도 역시 우리 이거 개역이라 뭐라 이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뭐라하고 끝에 가서는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말씀. 언약의 말씀인데 어떤 말씀이냐? 이러이러한 해서 이 세군데가 다 이것은 ~다. 이것은 ~인데 그 ~가 뭔지를 뒤에 오는 말로 꾸며주고 반드시 거기에 장소가 나와요. 

장소가 1장1절, 4장44절, 29장1절이 다 다르게 표현했지만 전부 다 어디를 가리키느냐? 모압 평지를 가리켜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모압 평지, 왼쪽은 여리고인 겁니다. 이제 모압 평지에서 요단강만 건너면 여리고인 거예요. 그 요단강 동편 우리 성경은 요단 맞은편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요단 동편 모압 평지가 이 장소가 1장1절, 4장44~46절, 29장1절에서 언급되고 있더라는 것. 이게 세번 나와요. 그래서 신명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신명기는 이 독특한 도입하는 표현을 가지고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구나 라는 겁니다.

해서 신명기는 1장1절에서 4장 43절까지 모세의 첫 번째 설교, 4장44절~28장 끝까지 모세의 두 번째 설교, 29장1절부터 그다음까지 모세의 세 번째 설교, 이렇게 모세가 마지막 하루 동안에 전한 세 차례의 설교로 신명기의 짜임새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우리 본문을 들여다보면 세 개 말고도 이는 ~가 세 번 더 나옵니다. 그게 6장1절, 12장1절, 33장1절 이 세 군데가 더 있습니다. 근데 그 셋 6장1절, 12장1절, 33장1절은 이는 ~ 근데 어떤 ~냐 이러한 것은 똑같은데 이 세 군데는 없는 게 뭐냐? 장소가 없어요. 1장1,29장에는 이는 ~하고 장소 모압 평지를 가리키는 이런 저런 장소가 처음에 3개에는 다 있었는데 나중 3개 6:1,12:1,33:1에는 장소가 안 나와서 이거 자체로도 우리가 알게 되는 거죠. 얘네들은 똑같지만, 장소가 없는 걸 보니 소제목이네, 이럴 수가 있는 거죠.

해서 두 번째 설교가 4:44~28장 마지막까지라고 했는데 거기에 이게 두번째 설교이지만 6:1절에 또 하나의 소제목이 있는 거고 12:1절에 소제목이 있어서 4장~28장까지는 4~5장, 6~11장 이렇게 가볍게 그다음에 12~28장까지 이렇게 나눌 수 있겠구나. 저절로 본문 자체가 해주는 바이죠. 그다음에 29:1절부터 마지막 34장까지는 33:1절에도 이는 ~가 있어서 이것도 일종의 소제목이 되는 거죠. 해서 29~32장까지 33~34장까지 이렇게 신명기의 짜임새를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짜임새를 나누지만, 이 세 단락의 내용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줄기차게 반복돼요. 계속 반복됩니다.

반복하면서 모세를 통해 줄기차게 나누어지는 게 지난 40년에 대한 반성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너희가 얼마나 불순종을 하고 얼마나 거역했는지 계속 그런 예들을 끄집어내면서 오늘 이제 너희는 여호와이 규례를 지켜라. 마음 다해 사랑해라. 이런 말씀을 모세가 계속해서 하고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모세 앞에 있는 청중들은 출애굽 2세대인 거죠 신명기 2장에 나와요. 광야 지금까지의 기간에 출애굽 1세대가 전부 다 죽었다. 전부 다 죽었고 해서 지금 앞에 있는 청중들은 2세대 청중들인 겁니다. 그 사람들을 향해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너희들은 순종해라.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원하시는 규례와 법도 너희가 생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가 무언지를 알리겠다. 지켜 행하라. 계속 그렇게 모세가 이야기하는 것이 있죠. 이 가운데 우리 1~11장까지를 몇 군데 저는 짚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신명기 4:7~8절입니다. 

신명기 4:7~8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여기 큰 나라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이 큰 나라가 어디 나오냐 하면 창세기 12:2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 떠나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이런 약속을 하셨지 않습니까? 그때 개역 성경은 거기 창세기 12:2절에 큰 민족이라고 번역했지만, 똑같은 히브리말 표현입니다.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게 무슨 의미냐? 우리가 세계 최강이 된다는 거냐? 우리 영토가 세계에서 제일 넓어진고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거냐? 가장 국민의 숫자가 많은 나라가 된다는 거냐? 온갖 생각을 다 할 수 있을 텐데 신명기 4:7절은 해석해 주고 있는 거죠. 뭐가 큰 나라냐? 할 때 이 4장 본문은 두 개로 우리처럼 그들의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런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큰 나라 큰 민족이라는 거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우리처럼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큰 나라인데 큰 민족인데 무엇을 해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규례와 법도가 정말 공의롭더라는 겁니다.그래서 우리는 큰 나라다.

해서 이런 신명기는 아마도 이 큰 나라 약속에 대한 공동체 안에 있던 어떤 회의들 의심들에게 우리 꼴이 이게 뭐람? 하나님의 약속은 겁나 거창했는데 막상 우리의 꼴은 뭐람? 아마도 이런 의심이나 회의나 낙담 이런 것들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에 대해서 신명기 4장 7~8절이 이야기해요. 진짜 큰 건 뭐냐? 쪽수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력도 아니고요. 그 망할 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향력 이런 헛소리들도 아니라는 겁니다. 국력도 아니고요. 경제력도 아니고 인구의 숫자도 아니고요. 영토의 크기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동행. 하나님께서 맡기신 공의로운 규례와 법도 이게 크다의 핵심인 거죠

이거 부끄럽지 않습니까? 아직까지도 우리네 교회들은 개허접스럽게 교회 쪽수 가지고 난리법석을 떨어요. 교회 쪽수 가지고 무슨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가령 저는 통합측 목회자입니다. 통합측 같은 경우 명성교회 쪽수 앞에서 명성교회 쪽수와 돈 앞에 전부 대가리를 숙이고는 명성교회가 명성교회 살리지 않으면 교회가 망할 것처럼 저는 더 우기는 게 명성교회 그냥 욕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래도 명성교회를 잘라낼 수는 없지 않냐? 그래도 명성교회가 앞으로라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냐? 아니 왜 그런 걱정을 왜 작은 교회에 대해서는 안 하세요? 왜 정말 하루하루 한 주 한 주를 버티기 어려운 작은 공동체들이 이 천지인데, 아니 왜 별 쓰레기 같은 걱정을 하세요? 어떻게 어떻게 네 걱정인 해라. 우리 늘 그러고 싶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명성교회 걱정입니다. 거기 몇만 교회예요. 안 망해요. 돈도 겁나 많고요. 쪽수도 겁나 많기 때문에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세상 쓸데없는 게 명성교회 걱정일 겁니다. 명성교회가 망하면 예수님의 복음이 위축되겠습니까? 명성교회가 쇠해지면 명성교회 사태 때문에 우리 교회가 치고받고 싸우느라고 이러고 있으면 복음이 약해지나요? 안 그렇습니다.  이미 복음은 약해졌어요.  이미 복음은 쑥밭이 돼버린 겁니다. 안 하겠다고 생난리를 치다가 막판에 자식하네 교회 줘버리면서 이미 우리네 복음은 세상의 말이라고는 안 통하는 그러고는 명성교회가 동성애 반대에 아직까지도 열을 올리고 있고, 장신대를 향해 무지개 신학교다. 이런 헛소리를 이 명성교회 목사가 하고 있고 이게 현실인 것이죠. 전 정말 명성교회에 묻고 싶어요. 아니 동성애자들이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동성애자가 도대체 한국 개신교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댁은 잘못했잖아요. 자기 자식에게 교회 줘버려니 이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댁은 교단법이고 뭐고 다 어겼는데 동성애자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해서 이렇게까지 아니 장신대가 무지개 신학교라니요? 장신대가 한 짓이라고는 그 무지개 퍼포먼스 한 학생 다 쫓아낸 거 그거 한 거예요. 총장이건 선생들이건 뭐건 간에 전부 다 그냥 학생들 다 짤릴 때 대가리 숙이고 입 다물고는 눈치 봐가면서 그 학생 전부 징계했던 것. 그게 장신대가 했던 짓거리인 겁니다. 장신대 총장들이 했던 짓거리인 거고요. 근데 이 명성교회 목사가 장신대를 향해 무지개 신학교, 무지개 총장. 정말 이 개들의 난무하는 세상이구나 싶은 갑자기 격분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뭐가 큰 건가요? 쪽수가 큰 건가요? 규모가 큰 건가요? 신명기 4장은 이야기해요. 그건 큰 거 아니라고. 우리처럼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 하나님과 함께 동해하며 살라고 부름을 받은 큰 나라가 어디 있냐? 우리처럼 이렇게 공의로운 규례와 법도를 받은 나라가 어디 있냐? 이게 교회의 자랑인 겁니다. 이거야말로 이 공동체가 크구나.  이 공동체가 정말 큰 곳이라는 걸 말하게 하는 것이죠. 해서 이거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것이겠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신명기 5장에 나타나는 십계명입니다. 우리 십계명이 출애굽기 20장에도 있고, 그다음에 신명기 5장에도 있지 않습니까? 둘 다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라고 둘 다 이야기를 해요. 출애굽기 20장에서는 그 산을 가리켜 시내산이라고 부르고 신명기는 줄기차게 그 산을 호렙산이라고 부르고 뭐 이런 차이가 있지만 이건 누가 읽더라도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같은 사건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 20장의 십계명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적지 않게 다르죠.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우리 안식일 계명에 있어서 출애굽기에서는 내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이레째 쉬었으니 너희도 쉬어라.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해서 안식일을 이야기 하는게 출애굽기고요. 신명기 5장에서는 너희도 애굽 땅에서 종이었지 않냐? 종이었던 너희를 인도해 내었으니 너도 종들이랑 나그네랑 너네 집에 있는 종들이랑 쉬게 해라. 이 출애굽 사건에 기반해서 안식을 명령한다는 점에서 출애굽기 십계명과 신명기 5장 십계명은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다른 차이가 있다면, 가장 마지막 10번째 계명에 있어서 출애굽기는 네 이웃의 아내나 집이나, 남종,여종 소와 나귀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마라. 이렇게 출애굽기는 이야기한다면, 신명기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그다음에 네 이웃의 집이나 소나 나귀나 남종  여종을 탐내지 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제가 약간 틀리게 말했는데 출애굽기에는 네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집이나 아내나 나귀, 소, 남종,여종 탐내지 마라인 거고요 신명기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문장 하나 끊고 그다음에 네 이웃의 집이나 나귀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차이가 출애굽기에서는 집이나부터 시작을 해서는 아내, 소, 나귀, 남종, 여종 이렇게 나와서 출애굽기 20장에서 여자는 재산이었구나. 여자를 재산처럼 네 이웃의 집 탐내지 마! 해놓고는 그 집에 이 히브리말로 베트인데 거기 속하는 게 뭐냐? 아내랑 소랑 나귀랑 남종, 여종 뭐 이렇게 되어 있더라는 거고요. 반면에 신명기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마. 그리고는 네 이웃의 집이나 소나 나귀나 남종, 여종 중에서 신명기에서는 아내가 집에 딸린 재산은 아니구나.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기도 하죠. 그래서 전반적으로 신명기의 십계명은 출애굽기보다는 좀 더 사회적인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여러 차이들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짚고 갈 것은 별로 은혜롭지는 않은 거지만 왜 한 사람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면 그리고 신명기 5장에서는 내가 그때 호렙산 올라가서 이거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분명히 해요. 그럼 왜 내용이 다르지? 특히, 인식일 계명 같은 경우에 솔찬히 달라버리는 겁니다. 왜 이런 일들이 있지? 이 양반이 40년 지난 다음에 헷갈렸나? 까먹어버리고 헷갈려서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 건가 그러기에는 나머지 계명이 너무 일치하는 것들이 거의 일치하는 것들이 차이도 있지만 거의 일치하더라는 거죠. 해서 이런 것을 성경은 겁나 냉정하게 보시는 분들은 저자가 다르다고 생각을 해요. 출애굽기 20장의 출처와 신명기 5장의 출처가 다른 서로 다른 문서로 존재하던 게 우리 오경 안에 들어 왔나 보니 서로 다른 뭐 이런 것들이 있다라는 것이 있죠. 적어도 이 두개를 비교해 보면 출애굽기 20장이랑 신명기 5장을 다 모세가 썼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만일 모세가 이렇게 썼다면 한 저자가 이렇게 틀리게 쓰는 건 사실 우리 대부분 글 쓸 때 저도 그렇고 우리 다 그렇잖아요. 똑같은 비슷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옛날에 뭐라고 했지? 당연히 찾아보고 확인하고 뭐 그러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모세가 오경을 다 썼다면 당연히 이분이 옛날에 썼던 언제 썼을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썼던 출애굽기도 있었을 거 아니예요. 보면 딱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한 사람이 써서 이렇게 될 수는 없는 거고 40년 사이에 쓰였다면 이럴 수도 없는 것일 겁니다. 해서 이 십계명의 증거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만 봐도 우리 오경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료가 아니라 여러분서가 결합되었구나. 긴 세월에 걸쳐서 결합되었고 출애굽기보다는 신명기가 좀 더 사회적이구나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죠, 달라진 시대 달라진 상황이 각각 이렇게 반영되어 있구나 생각하게 되죠.

 

 

신명기 3: 신명기가 말하고 있는 규례와 약자들

그다음에 이 12장 앞까지 또 하나 생각할 것이 10장입니다. 모세의 두 번째 설교 4장 44절부터 시작한 두 번째 설교가 가장 내용이 길지 않습니까? 잘 들어라! 하고 5장에서 십계명 이야기했고요. 그다음에 5장의 십계명이 하나님의 기본 텍스트가 이렇게 있으니 6장부터 이제 내가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이룬다고 하면서 6장4절부터 그 유명한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 하나님 여호화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하면서 그 유명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라. 

우리 보통 쉐마라고 알려진 그 본문이 6장에 있고요. 이거랑 비슷한 게 10장에도 있습니다. 10장에도 가면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게 뭐냐? 해서 당연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마음 다해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격려하고 또 그런 내용들이 10장에 나오는 것이있습니다. 그렇게 10장 12절 이하에서 그런 것이 나오고요. 그리고 그 아래로 가면 근데 그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이냐? 신중의 신, 주 중의 주, 크고 높으신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높의심을 찬양하는 그런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정말 그 구절이 특이한 것이 가령 하나님은 신 중의 신 하나님들 중에 신 중의 신 주 중의 주, 왕 중의 왕 크고 높으신 가령 이런 것들로 찬양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CCM을 만든다면 이거 딱 우리 경배와 찬양 있지 않겠어요? 제가 늘 나누지만, 저 경배와 찬양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찬양. 하나님의 높으심을 노래하는 찬양을 부르잖아요. 그러면 우리 안에 정말 하나님께 대한 경배하는 이 마음이 가득하게 되고요. 저절로 이런 찬양들은 눈을 감게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묵상하면서 손들고 눈 감고 찬양하게 돼요. 근데 그 구절이 진짜 특이한 게 크고 높으신 하나님 그리고는 곧바로 뭐냐? 그는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뇌물을 받지 아니하신다. 이런 말씀이 나와요. 

찬양 가사에 외모랑 뇌물 나오잖아요. 눈 다 뜨게 돼요. 이런 가사들은 눈을 다 뜨게 되고 손 올라 갔던 거 다 내려오게 만들어버리는게 외모, 뇌물이고요. 그다음은 뭐냐? 그래서 그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 이런 말씀이 있는 겁니다. 이거 진짜 멋지지 않습니까?  신 중의 신, 왕 중의 왕 크고 높으신 여호와 정말 가장 높고 존귀하신 여호와인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요. 그래서 그분은 나그네, 고아,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는 겁니다.  

저는 정말 답답한 것이죠. 우리 경배와 찬양은 하나님의 높으심을 노래하는 건 정말 많은데 왜 그 가사들은 맨날 그것만 하지? 왜 신명기 10장에 나오는 것처럼 크고 높으신 여호와에 대한 찬양이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다음에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 왜 이런 가사들로는 텍스트에 있는데 왜 이렇게 연결되지 않냐는 거예요. 왜 우리네 찬양은 전부 다 눈 감고 부르게 만드냐. 다 손들고 부르게 손 들고 참 좋은데 손들고 찬양하라. 성경에 있으니 맞겠습니다만 온통 왜 그런 것밖에 없는가 싶은 것이 있습니다. 찬양할 때 정신 바짝 차리게 하는 겁나 맨눈으로 말똥말똥 눈을 뜨고 이 말씀의 의미가 뭐지? 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찬양이 이것만 부르자는 게 아니라 그런 찬양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인거죠. 우리 경배와 찬양 가운데 정의가 가사에 들어가 있는 게 몇 개나 있습니까? 고아와 과부, 나그네 이 사회적인 약자 구약시대 때 고아,과부,나그네고요. 지금은 고아,과부,나그네이지 않아요.  지금은 고아,과부,나그네가 뭐겠습니까?

노동자,외국인 노동자라든지 비정규직 노동자라든지 성소수자라든지 난민이라든지 다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겁니다. 이런 가사가 우리네 찬양에 있냐는 거예요. 고대 이스라엘은 시편에도 잠언에도 나그네, 고아, 과부가 나오잖아요. 고대 이스라엘은 이런 사회적인 약자를 하나님 찬양 노래 가사에 넣었잖아요. 왜? 근데 오늘 우리의 찬양은 가사에 외국인 노동자가 안 나오고, 왜 난민이 안 나오고, 왜 성소수자는 안 나오고 눈 감고 손 들고 하나님의 높으심만 노래하게 해요. 노래하는 거 맞죠? 맞는데, 그것만 있다는 건 유감이다 싶은 겁니다. 그 찬양은 너무 허망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 맘 다해 전심으로 찬양하지만 실제로 눈 뜬 다음에 내가 난민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질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는 게 없다는 거죠. 특히 이게 만만치 않은 게, 그 신명기 본문이 크고 높으신 하나님 외모, 뇌물 소용없음, 고아,과부,나그네를 위해 정의를 행하심. 그다음 구절이 뭐냐? 그러니 너희도 나그네를 사랑하라. 이걸 이렇게 논리가 이어져 가요. 굉장한 논리이지 않습니까? 경배와 찬양이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대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전 이거 정말 우리한테 숙고가 필요하다 싶은 거죠. 나그네가 오늘날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난민일 거로 생각됩니다. 

미국에 보수 집단이 있지 않습니까? 미국도 왜 보수당과 보수적인 공화당하고 그다음에 눈곱만치도 덜 보수적이고 좀 진보적이라는 민주당 미국은 늘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정권이 왔다 갔다 그러지 않습니까? 미국 공화당이 언제부터인가 휠씬 더 보수화되고 있고요. 지금도 미국이 그렇고 어쩌면 다음 대통령이 트럼프인지 화투인지 이 개양아치가 그 어마어마한 미국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눈곱만치라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입니다. 이 공화당이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가치 가운데 이민 반대입니다. 이민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 이민 정책 이민을 못 하게 외국인들이 더 못 들어오게 멕시코 사람들이 혹은 어디에서건 이 미국에 더 못 들어오게 그래서 미국은 자기네끼리만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국, 미국 공화당이 생각하는 미국은 백인들의 미국입니다. 아시아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고 멕시코도 아니고 오로지 이 백인 개신교인들 개신교는 가톨릭인 주로 개신교지만 와스프라고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오로지 백인 개신교인들의 세상, 이게 그 트럼프 낯짝에서 딱 드러나는 이게 미국 공화당이 생각하는 정말 좋은 나라로서의 미국이라는 거죠. 정말 묻고 싶은 그리고 이 공화당은 낙태 반대도 확고하고요 기독교적인 가치도 확고하게 배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신명기에 하나님께서 그러잖아요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애국에서 나그네였고 너희도 그러니 높으신 하나님을 묵상한다면 그가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지 않는 걸 묵상한다면 나그네 사랑하라. 신명기 10장은 딱 그리로 가고 있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외국인이 미국 땅에 흘러들어오는 걸 어떻게 해서든 차단하려고 난리치고 있고, 백인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이런 공화당 같은 집단들이 어떻게 성경과 털끝만치도 연관될 수가 있냐 싶은 겁니다. 근데 미국에 보수적인 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교회들이 대체로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저는 정말 묻고 싶어요. 댁에 있는 성경책에는 신명기는 없는 건가요? 댁의 성경책에는 신명기 10장 이 말씀은 없는 건지 이건 장식인 건지 낙태만 반대하면 나태 반대하고 동성애에 반대하고 그럼 다 되는 건지? 미국 개신교나 한국 개신교나 이거 두 개만 해주면 그냥 전부 다 다 우리 편, 정말 그게 성경의 가치인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역시 제가 약간 격분한 것이 있습니다만 토대는 저의 격분의 토대는 신명기 10장입니다. 10장 12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아 너의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시는 게 뭐냐? 이 본문 자체가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하게 무언가를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하나님 사랑해라. 경외해라. 근데 하나님 사랑과 경외의 내용이 뭐냐? 하나님만 생각해도 마음이 좋아요. 이런 거 아닙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크고 높으신 여호와. 외모,뇌물 안 통함, 나그네에게 정의를 행하심. 그러니 너희도 나그네 사랑해라. 신명기 10장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4: 천국의 모습을 알려주는 신명기 법전

신명기 12장1절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는 규례와 법도, 어떤 규례와 법도냐 해서 신명기 특유의 도입하는 어구가 12장1절에 있어서 12장부터 단락이 또 하나 갈라지는구나 라는 걸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학자들은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를 신명기 법전이라는 말로 이 장들을 묶어서 생각했습니다. 

앞부분에 1장부터 11장까지 계속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 했지만, 막상 규례와 법도가 뭔지 나오지 않았었고요, 그 규례와 법도가 어디에 나오느냐? 12~26장까지 왕창 몰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러다보니 12장부터는 교회에서 설교되지 않아요. 온통 고대 이스라엘의 규례와 법도 라는 거죠. 제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언약 법전, 레위기에 나오는 법전 그다음에 레위기 17장부터 나오는 성결 법전 그다음에 신명기 12장부터 나오는 신명기 법전까지 법전이 나올 때마다 우리 이 영상에서 그렇게 나누었습니다만

신명기 12장도 너희가 이렇게 시작해.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이것들이 규례와 법도다.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일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작을 한다는 거죠. 결국 제가 종종 그런 질문하지만 천국은 어떤 삶이 이루어질까요? 나중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국 간다는데 그 죽어서 간 천국은 어떤 세상일까요? 천국에서는 눈물이 없을까요? 가령, 눈물이 없으려면 천국에서는 길 가다가 돌부리에 결려 넘어지는 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상처가 날 거고요 세게 부딪히면 눈물이 찔끔 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이 천국에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천국은 정말 아예 상처라는 것이 없는 걸까요? 길 가다가 넘어지는 일 자체가 천국은 없는 걸까요? 깜빡 못 보고 움직이다가 앞에 있는 기둥 위에 콱 무릎이 부닥쳐서 아이고 무릎이야 하는 일이 천국에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을 수도 있겠다 싶고요. 있을 수 있다면 이런 육체에 상처 나는 일, 천국 가도 상처가 있겠다. 그러면 당연히 마음의 상처도 있을 겁니다. 천국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실수하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 세상일까요?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은근 혐오의 말들을 내뱉는 일들이 천국에는 하나도 없는 걸까요? 근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마음의 상처가 딱 되지 않겠습니까? 천국에는 부모님이 애들을 안 혼내실까요? 천국에서는 애들이 지 알아서 다 공부하기 때문에 자기 할 일을 다 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야단칠 일이 없는 걸까요? 이런 것들 다 상상해보면 아마 저도 그렇고 누구도 답을 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저는 신약 성경은 구약은 천국 이야기 안 해요.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구약은 죽은 다음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도 다루지 않습니다. 다니엘서 빼고는 안 다루고 있습니다. 

신양 성경은 줄기차게 부활을 이야기하잖아요. 내세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막상 신약 성경에 그럼 내세에는 무슨 일이 있지? 죽은 다음에 그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지 정작 신약 성경은 별로 말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네 교우들은 제가 이런 식의 질문하면서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교우들은 할 말이 없어요. 생각해 보지 않았고 우리 늘 천국 소망가지고 산다지만, 천국이 어떤 곳인지 자체가 우리한테 그림이 별로 없어요. 그냥 막연하게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영생을 누린대요. 영생이라니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건 그럼 천국은 피부가 노화하지 않는다는 건가? 천국은 그럼 영생이라면 피부가 노화하지 않는 건가? 도대체 무슨 화장품을 바르면 하여튼 간에 어마어마한 일들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국의 모습은 그럼 어디 나오느냐? 법전이라는 거예요. 가령 신명기 12장1절에 너희가 평생에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가 이러하니라 해서 신명기 12장부터 25장에 나와 있는 이 신명기 소위 말해 신명기 법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그 세상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 그런 내용들이 12~26장까지에 제시되어 있고요. 레위기에 제시되어 있고 출애굽기 20~30장까지 언약 법전이라는 거기에도 제시되어 있더라는 거죠. 저는 그점에서 언약법전, 레위기 법전, 신명기 법전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 그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세상은 이런 거라는 게 이 3개의 법전에서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3개의 법전 말고 법전은 없는 걸까요?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오경 다음에는 율법이 없어요. 모세가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에 서서 율법을 듣고 선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명기 가장 마지막 34장 가장 마지막 몇 구절을 보면 모세를 가리켜 전무후무라고 그런 말은 없지만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다시 없을 예언자다. 다시 없을 사람이라고 신명기 34장이 마지막 절에 쓰고 있습니다. 그 구절이 하는 역할이 뭐냐 하면 그래서 오경은 여기까지인 겁니다. 이마도 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에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열왕기하까지를 포괄하는 커다란 작품이 쓰였을 거래요. 엄청나게 커다란 하나님의 창조부터 시작해서 약속의 땅에 마침내 들어가서 쫓겨나기까지 창세기부터 열왕기하까지 엄청난 작품이었을 텐데 그게 줄고 줄어서 이거는 요런 따로 떼고 그럼 어디 오경 신명기 마지막까지 그러면서 신명기 마지막에 모세가 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사람이니 모세가 죽고 나면 더 이상 모세를 통해 선포될 율법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신명기로 끝! 해서 오경이 된 다음에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컸던 것들이 오경으로 이렇게 좁아졌을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만 해서 

율법은 모세의 죽음으로 끝입니다. 왜냐하면, 더 율법을 전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끝. 신명기 바깥에는 율법은 없어요. 이게 율법이라는 겁니다. 그 점에서 오경에 실려 있는 이 3개의 법전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죠. 저는 왜 우리네 교회가 천국, 죽은 다음에 세상에 대한 상상이 없고요. 그게 없는 게 단순한 문제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어떤 걸 거라는 그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그러면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할 때 뭐하냐? 오로지 예수 믿어야 천국 가기 때문에 교회가는 전부가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관한 내용이 뭐냐? 아무 생각이 없고요. 아무 그림이 없습니다. 그럼 할 수 있는 게 뭐냐?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예수를 믿어야 갈 수 있다.  해서 온 열방에 예수를 전하자. 예수님을 믿게 하자가 되는 거죠. 해서 천국에 대한 그림이 없기 때문에 우리네 교회는 전도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경을 통해 오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뭔지를 보여주고 있고요. 그래서 이런 본문들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읽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예수를 전한다는 것의 의미가 뭐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간다는 게 어떤 삶을 사는 건지, 예수를 믿고 살아간다는 게 일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려는 건지 그게 어디에 있느냐? 법전들에 있다. 

이 법전들을 궁리하게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엿볼 수 있고, 그려볼 수가 있겠다. 싶은 것입니다. 해서 저는 법전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텍스트다 싶은 것이 있죠. 이미 우리가 출애굽기에서도 뭐라 뭐라 했고 레위기에서도 길게 우리가 이야기했던 적이 있죠. 신명기 12~26장까지 쭉 있습니다. 거기에 정말 별의별 규례가 다 있고요. 여기 나와 있는 규례들  사실 우리가 시간이 되면 하나 하나를 다루면서 상상하고, 의미를 풀어보고 그다음에 그 의미가 의미하는 바를 상상해 보고 이런 것이 필요하겠습니다만 우리 여기에서는 해볼 것이, 크게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가장 신명기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12장 신명기 법전의 첫머리에 있는 성소 중앙화 규례라는 게 있습니다. 

신명기 12장은 너희들이 눈에 보이는 아무 데서나 제사들려서도 안 되고, 너희가 살고 있는 각 성에서 제사드려서도 안 되고 반드시 내가 너희들 가운데 한 지파 안에 택할 장소 한 곳이 있을 텐데 거기 가서 제사드려야 된다. 이걸 이제 학자들이 그럴싸하게 성소의 중앙화 혹은 성소의 중앙 집중화 이런 식의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저기에 있는 성소는 다 없애버려야 하고 오직 한 군데 하나님이 정하시는 그곳 그곳에서 예배드려야 된다. 이런 것이 신명기 12장에 있어서 이게 신명기 법전이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왜 한 곳에서 예배드리라고 하는 걸까? 할 때 우리가 이 신명기 12장, 13장의 내용을 보면서 짐작하는 게, 지방 여기저기서 제사를 드리면서 우상숭배들이 자행되더라는 겁니다. 통제가 안 되고 그러다 보니 우상숭배가 막 자행되고 이방 풍습이 막 들어오게 되고 이러다 보니 성소의 중앙화 이런 것이 있는 거죠. 그러면 언제나 한 곳에서만  예배드리야 되나?  그렇지 않아요. 가령 우리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는 광야 성소는 전부 다 물건들에 고리가 다 있잖아요. 그래서 막대기를 꾀어서는 들고 다니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 어디나 하나님은 그곳에 이동 성소이지 않습니까? 이런 전승이 하나 있는 거고요.

신명기는 이런 거 다 틀렸어 라고 하기보다는 신명기는 어떤 상황 속에서 지방 곳곳에서 드려진 것들이 야훼 신앙을 훼손하고 우상인 바알 신앙이 뒤섞여 들어오고 이러다 보니 지방 성소 다 때려처! 한 곳에서가고 되는 거지요. 특히 이런 신명기는 가령 왜 우리 북왕국을 개창한 여로보암 임금이 있지 않습니까? 이 여로보암 같은 경우에 북왕국을 독자적인 나라를 만들면서 벧엘과 단, 두 군데에다가 성전을 세우고는 금송아지를 안치하고 여기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는 곳이야 이랬더라는 거죠 해서 신명기에 성서 중앙화는 그 여로보함처럼 벧엘과 단 이런 데 세워진 성소는 정통성이 있지 않아. 다 우상숭배야. 오직 한 곳에서만 이런 것들이 있겠다 싶은 거죠. 

우리 열왕기하를 보시면 열왕기하를 기록하신 분들은 이 남왕국 유다의 왕을 평가할 때 가령 여호사밧, 여호와 보시기에 겁나 잘했다. 이거 잘하고 저거 잘했다. 그런데 그가 산당은 패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보적인 평가를 하더라는 겁니다. 그 이후로도 아주 괜찮은 칭찬받는 왕인데도근데 그가 산당에서 분향했더라 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근데 그러다가 주전 622년 이 요시야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 율법책을 발견해서 읽었더니 요시야가 자기 옷을 찍고 회개했고 그러고는 했던 조치가 유대 전역에서 지방산당들을 다 때려 부수는 일들을 해버립니다. 전부 때려 부숴버리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도 거행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거기에 열왕기하 22장,23장 요시야 본문에서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율법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가 신명기에 여러 번 나와요. 레위기,민수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신명기에 나와서 이거 하나 율법책이라는 신명기에 나오는 단어가 요시야 본문에도 있더라는 것. 그다음에 두 번째가 신명기 12장에서 지방 성소 안 된다 했는데 요시야가 지방에 있는 산당들을 다 때려 부쉈더라 이 두 가지의 일치들을 보면서 요시야 때 발견된 그 율법책이 뭐냐? 지금의 신명기에 핵심적인 내용이었을 거다. 이게 학자들이 옛날부터 꽤 오래전부터 성경을 읽던 사람들이 깨달았고 학자들이 정비했고 지금까지도 아주 타당한 견고한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걸 한 걸음 더 나가서 요시야 시대 때 신명기가 쓰였다. 기록되었다고까지 이야기를 해요. 사실 이게 큰 차이는 없습니다. 신명기가 훨씬 이전에 쓰였지만, 전혀 모른 채로 있다가 요시야 때 알려졌다면 신명기가 요시야 때 쓰였다는 것이고 사실은 차이가 없는 것이죠. 가령 우리 아까 이야기했던 여호사밧 왕이니 아사 왕이니 아주 여호와 보시기에 옳게 했던 괜찮은 왕인데 신명기 12장 같은 내용을 알았더라면 산당에서 제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근데 왜 이 사람들이 여호사밧이 참 좋은 왕인데 왜 산당에서 제사하지?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신명기를 모르는구나라고 하는 게 맞겠죠. 근데 요시야는 율법책 발견하고 그러더니 옷을 찢고 회개하더니 산당 다 때려 부숴요. 

요시야가 발견한 게 신명기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해서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시야 시대 때 주전 622년 달리 표현하면 주전 7세기 말에 신명기가 거의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적어도 12장,26장 이 정도가 형성되고 나라가 멸망하고 바벨론 토로로 가면서 신명기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거의 완성이 되었을 거다. 이런 것들이 학자들이 신명기에 대해서 그리고 있는 그림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법전에 가장 첫머리에 중요한 내용이 성서 중앙화라는 것이 있고요. 그다음에 신명기 법전에 실려있는 법들에는 사회적인 규례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나그네와 고아,과부를 변호하고 보호하고 이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규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뒷부분에 모여 있기도 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기도 하고 해서 굉장히 많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출애굽기 언약 법전에도 있고 레위기의 성결 법전에도 있지만 신명기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거 하나하나 제가 규정을 들여다 볼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은 이런 세상인 겁니다. 

이거 보면 저는 그 생각이 들어요. 나그네가 없는 세상이 천국이 아니라 나그네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천국인 겁니다. 고아가 없으면 가장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고아도 자기 삶을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있어요. 그게 신명기가 그리고 있고, 구약이 그리고 있는 세상이라는 거죠. 가난한 자가 아예 없으면 좋겠지만 가난해도 기본적인 삶이 살아가는 게 가능한 세상. 저는 그렇다면 정말 나중에 죽은 다음에 천국 생각할 때, 천국에서도 넘어지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근데 내 슬픔이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 나의 그냥 불운만이 아니라 그 슬픔을 같이 공감하고 슬퍼할 사람이 있고, 그리고 언제든 새로 출발할 수 있고 저는 그런 것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의 근본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은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이 땅에서도 눈곱만치라도 그런게 되도록 한번 넘어져도 새 출발이 가능한 세상. 이런저런 경제적인, 육체적인 문제가 있더라도 능히 기본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이거를 우리 속된 말로는 복지국가라고 부르기도 할 겁니다. 기독교는 한국 개신교는 복지국가 개무시해요. 복지국가가 별것 아닌 거로 생각하고요. 특히 한국 개신교는 보수와 결합해서 복지제도 혹은 사회보장 제도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게 한국 보수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왜 몇 년 전에 그리스 국가 경제 위기가 엄청나게 닥혔을 때 조선일보 같은 이런 쓰레기 신문들이 보수가 출기차게 했던 게 복지 정책이 사화보장 정책이 그리스를 망하게 했다고 개소리라고 생각을 해요. 부패가 망하게 하지 가난해도 기본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게 망하게 한다고요. 그러면서 맨날 하는게 아니 복지 제도가 잘 왜 있는데, 누가 열심히 일하겠냐고? 이렇게 말하는 게 있습니다. 저 사람에 대해서 정말 동의하기 어렵다 싶어요

 

신명기 5: 신명기에 등장하는 임금이야기

그다음에 신명기에 또 하나의 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임금 이야기입니다. 아까 신명기라는 제목 자체가 신명기 17장에 나오는 임금이 옆에 율법서의 등사본은 갖추어야 한다. 거기서 나왔다고 했습니다만 신명기 17장에 너희 중에 만일 임금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세워라. 근데 임금을 향한 잔소리가 거기 겁나 많이 나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해서 임금뿐 아니라 신명기 법전에는 여러 리더십이 있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다루어지는 게 재판관이고요. 그다음에 재판관이 있고 그다음에 임금 왕이 있고요. 제사장이 있고 예언자가 있고 그렇습니다. 이 직제들이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거죠. 재판관이 하는 일은 재판인 거겠고요. 그다음에 이 제사장 신명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레위 사람 제사장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겁니다. 레위기하고 민수기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거기서는 가령 아론 자손이 제사장이고요. 아론 자손이 아닌 레위 지파는 레위인인 겁니다. 이거는 섞이지 않아요. 무조건 아론 자손은 대대손손 제사장이고요. 아론 자손이 아닌 레위인은 그냥 대대손손 레위인인 겁니다. 

근데 신명기는 레위 사람 제사장이라고 해서 모든 레위 사람은 다 제사장이 될 수가 있었어요. 대체로 신명기에서는 레위사람들이 제사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사장으로 봉사하지 않는 지방에 사는 레위인들도 있습니다. 근데 이 지방에 살고 있던 레위인이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장 할래요. 그럼 할 수 있어요. 이게 이제 신명기하고 민수기의 차이이지 제사장과 레위인 사이에 호환되느냐? 민수기나 레위기, 민수기는 안 되고요. 신명기는 이게 얼마든지 호환 가능 이렇게 되어 있죠. 그 레위 사람 제사장도 재판 역할을 수행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제가 언제 나눈 적도 있습니다만 히브리어에서 재판하다는 동사가 있습니다. '샤파트'라고 해서 거기서 '미슈파트'가 나왔는데, '샤파트'는 '재판하다'인데 고대 세계에서는 재판은 통치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재판은 누가 하는 일이냐? 임금이 하는 일이예요. 근데 신명기는 이 재판을 누가 하느냐? 재판관이에요. 재판관 가운데는 레위 사람 제사장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재판 역할 즉, 사법권이 따로 주어졌더라는 거죠. 임금이 해야 하는 가장 큰 일 중의 하나가 재판인데 사법 권리인데 이거 신명기에서는 잘라내서 재판관에게 혹은 제사장에게 주었고 임금에게는 재판의 권한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신명기 17장에 보시면 임금을 향한 단단한 경고가 있어요 군말을 많이 둬서는 안 된다. 군대와 말들을 많이 이게 군사력이잖아요. 한 나라 임금의 힘은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거 많이 둬선 안 돼. 그다음에 금과 은이 임금에게 많아선 안 돼. 아니 그게 없으면은? 싶은데 말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결혼 함부로 하지 마라. 자꾸 이방 나라와 결혼해서 세력을 늘리려고 하는데 이거 안 돼. 그거 하자고 임금하는 건데 결국 임금의 핵심은 이방 나라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힘을 기르고 강력한 군사력, 강력한 경제력, 이게 국가의 힘이지 않습니까? 이게 임금의 힘이지 않습니까? 근데 신명기 17장은 이걸 다 잘라버립니다. 군마 안 돼! 혼인 안 돼! 금은 안 돼!

거기에다가 심지어 17장20절은 그래서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에 의해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임금 스스로가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하고 자기가 유별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이 있는 겁니다. 그러고는 권면하는 게 뭔가요? 율법서의 등사본을 기록해라 누가 기록한 걸 늘 읽어라가 아닙니다. 필사하라고 명령하는 것인 거죠. 신명기가 생각하는 임금님은 뭐 하나요? 군사 없고요. 돈도 별로 없고요. 결혼은 했겠죠. 근데 외국에 막 이런 자매들이 있지는 않은 거고요. 맨날 해야 하는 재판을 할 권한은 없습니다. 재판 사법권은 분리돼버렸고요. 자기 뭐 하느냐? 맨날 성경 필사예요. 성경 필사하면서 그 말씀 묵상하고 그 말씀 묵상하고 신명기가 그리고 있는 왕은 랍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전하고 나누는 사람. 아니 우리가 임금 하자는 이유는 그 권력과 부귀영화 때문에 하는 건데, 근데 신명기는 이렇죠. 신명기 안에는 그래서 명확하게 솔로몬 비판이 있어요. 솔로몬에게 있던 솔로몬의 시대에 금과 은이 돌멩이처럼 많았더라. 뭐 이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군사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계속 돌아가며 동원하는 군사들이 있었죠. 그다음에 솔로몬이 했던 그 어마어마한 이방 결혼들 신명기 본문은 명확하게 요시야 시대 때 발견되었거나 형성된 신명기는 명확하게 솔로몬을 까요. 솔로몬을 까면서 그딴 건 임금이지 않다고 그딴 걸로 나라의 변화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사실 이런 흐름이 예수께서 들에 핀 백합화만도 못한 게 솔로몬의 영광이다. 이런 표현을 우리 주님께서도 하신 것이 있기도 하죠. 마 6:28~29 그래서 늘 율법서를 필사하면서 묵상하는 사람. 이거 어디 나오나요? 시편1장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이거 신명기가 그리고 있는 임금시편 1편이 그리고 있는 의로운 사람이기도 해요. 겁나 독실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이게 신명기가 생각하는 임금인 겁니다.

임금이 해야하는 임금이 하는 참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법을 만들기잖아요.  자기가 규례를 만들어요. 임금이 선포, 우리 그런 임금을 다니엘서에서 보지 않습니까? 창세기 요셉 이야기에서도 보고요. 다니엘서에서 에스더에서 임금이 제멋대로 법을 만들어버리는 걸 우리 막 보지 않습니까? 신명기의 임금은 해야 하는 일이 법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법이 있어요. 율법서가 있는 겁니다. 이미 만들어진 법을 열심히 필사하면서 그 법에 순종하는 것. 신명기의 임금은 법 제정자가 아니라 이미 있는 법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준수해야 하는 신앙인 이렇게 신명기가 그리고 있죠

그래서 임금은 명확하게 율법 아래 존재하고 있고요. 사법권은요? 제사장에게 넘어간 것인 거고요. 그다음에 또 하나 신명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직제가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명기 18장에 예언자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예언자 이야기를 하면서 누구든지 모든 이스라엘은 이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왕은 예언자 밑에 있는 겁니다.왕은 결국 율법 아래에 있고요. 재판권은 사법권은 제사장에게 넘어갔고요. 예언자가 야훼의 말씀을 선포하면 왕은 그 말에 순종해야 하고 이게 신명기가 그리고 있는 왕이죠.

이 놀라운 것이 신명기가 요시야 때 형성되었다면 주전 622년경 7세기 말이니 지금부터 2600년 전인 겁니다. 그 까마득한 옛날에 권력 분립이 신명기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임금의 권한이 굉장히 축소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럴 거면 이거 왜 하지? 진짜 봉사인데 이거 완전히 섬김과 봉사 말고는 할 이유가 없는, 사실 그 점에서 오늘날보다도 훨씬 더 민주주의 세상이 이 신명기 법전에서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 레위 지파가 제사장이 되기 때문에 레위 사람 제사장 신명기에 아주 독특한 표현입니다. 

근데 그 레위 지파에는 분깃이 없어요. 기업이 없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에도 민수기에도 레위기에도 있는데 신명기에 또 하면서 이 레위 지파는 기업이 없고 소득이 없습니다. 그럼 뭘로 사느냐? 백성들이 드리는 재물을 가지고서 레위 지파는 살아요. 이것도 대단한 게 결국 이 제사장이야말로 실권이 있는 겁니다. 사법권이 그들에게 있는 거고요. 임금마저도 그래서 아까 신명기 17장이 임금은 율법을 필사하되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율법을 필사해라. 이렇게 되어 있어서 임금이 제사장한테 쫄리네. 잘못 적으면 이 자식이 똑바로 해! 이런 분위기가 있다는 겁니다. 제사장의 권한이 강조되었다 싶은데 근데 신명기는 제사장은 뭘로 먹고 사느냐? 자체 소득이 없어요 사람들이 드린 재물로 살게 함을 통해 사법권을 가진 사람이 재력이 집중되지 않게 신명기가 원천적으로 만들어 두고 있더라는 거죠.

최근에 윤석열 정부가 대법원장 후보로 추천했던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 청문회를 위해서 자료 공개해서 보니 아내 쪽이 어마어마한 땅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에 그냥 땅들을 소유하고 이 대법원장 후보는 난 몰랐어. 나는 상관없어. 처가일 거야. 이런 개소리를 하고 있죠. 정말 대한민국 지도층들 너무 절망적입니다. 이 인간들이 대통령의 아내부터 시작해서 미친 듯이 땅을 사요. 미친 듯이 땅을 소유하고 제가 아는 분 중에도 판사들이 있습니다. 판사는 월급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직장생활에서는 이렇게 판사든,검사든 간에 직장생활에서는 몇십억의 재산은 불가능해요. 절대로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월급을 전부 다 때려 박아도 몇십억의 재산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그 대법원장 후보의 재산이 몇십억이든가 100억이 넘던가 그러지 않습니까? 다 어디서 오느냐? 땅에서 오는 것이지요. 

신명기가 대단하죠. 레위 사람 제사장의 살 길은 오직 여호와의 화제물, 우리 식으로 겁나 쉽게 표현하면 헌금에 기반한 월급인 겁니다. 월급만 가지고는 결코 부유할 수가 없고요. 이 레위 사람 제사장은 땅이 없어요. 기업이 아예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소득이 확장될 그 어떤 길도 없는 거죠. 신명기는 그렇게 생각해요. 권력을 가진 지도층은 경제적으로 넉넉해서는 안 된다는 게 거기에 재력까지 결합이 되어버리면 이게 돈하고 권력이 결합되어 버리면 엄청난 것이 되니. 임금은 금,은이 많아서는 안 돼. 결혼 많이 하면 안 돼. 군마 많아선 안 돼, 제사장 땅 없어. 이거 어렵죠. 이게 2600년 전의 세상인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감당을 못해요. 그런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말씀이죠. 제가 힘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대한민국 지도층들에게 상류층들에게 부탁해요. 땅 좀 그만 사라. 이 도둑놈들이 땅 가지고 돈 좀 벌지 마라. 그거 너희 자식들한테 물려주지 마라. 정말로 부탁하고 싶어요. 연예인들이건 스포츠 스타들이건 돈 좀 벌잖아요. 미친 듯이 땅을 사요. 미친 듯이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팔아서 어떤 탤런트가 땅을 사고 팔아서 몇 십억을 남겼네. 이딴 게 기사가 돼요. 당신들이 사는 세상은 절망이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정말 절망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우리 청년부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저 유재석 좋아해요. 유재석씨가 근데 아직까지 건물 많이 샀다. 이런 보도는 제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유재석까지도 건물 사고, 지랄 발광을 하면 다시는 런닝맨 안 본다. 제가 할 수 있는 복수는 그거밖에 저 런닝맨 겁나 좋아하거든요. 런닝맹을 다신 안 볼 거야 싶습니다만 정말 연예인들에게 당신들 그돈 시청자 때문이지 않냐. 땅 사지 마라. 이 도둑놈들아 싶은 겁니다. 스포츠 하신 분들 추신수 박지성 누구든 간에 건물 사지 마라. 그거 안 해도 당신들 산다. 그거 안해도 당신하고 당신 자식까지는 부귀 영화를 누리고 살 겁니다. 근데 그거를 땅 사고 건물 사고 하지 마요. 건강하게 살아요.그나마 이 사람들의 좋은 점은 정치를 안해요. 권력에 가까이 가지는 않죠. 그래서 진짜 나쁜 것들은 판,검사나 이런 사람들이 돈까지 가졌으면서 권력까지 누리려고 할 때 우리 대법원장 후보 같은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나쁜 놈들 정말 나쁜 놈들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있죠.

신명기 법전이었었구요. 말을 하다 보니 제가 너무 많이 했구나 너무 길게 했구나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는 신명기 법전은 전반적으로 권력에 대한 견제, 권력 분립, 약자 보호 이런 것들이 아주 탄탄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고 이해하기로는 출애굽의 언약 법전하고 굉장히 비슷한데 훨씬 더 치밀하고 탄탄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싶고요. 그다음에 레위기 17~26장에 있는 성결 법전하고 이 두개의 법전은 정말 비등하게 제사와 일상이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싶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지켜내는 게 갈라낼 수 없을 만큼 딱 결합이 되어 있어서, 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이런 거구나 라는 걸 아주 잘 보여주는 게 레위기의 성결 법전과 신명기 법전이다 싶습니다. 

 

신명기 6: 반앗수르 문서인 신명기

그다음에 26장까지 있고요. 27장에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 법을 돌에 다가 다 새겨서 기념하라는 것이 있고요. 28장은 축복과 저주입니다. 이 법대로 살 경우에 어떤 복이 임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 어떤 저주가 임하고 라는 내용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그 뒤로 가면 이 법을 보관하고 그리고 매년 초막절마다 낭독해라.  이런 이야기도 이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연관해서 또 이야기할 한 가지가 고대 근동 조약과 신명기의 비슷한 점이라는 거죠. 이 고대 중동 지방의 히타이트 우리 성경이 '헷족'이라고 하는 헷족이 히타이트가 다른 나라와 맺었던 조약문이 있는데 그 조약문의 구조가 신명기와 비슷하더라는 겁니다. 가령 앞부분에 이 조약 당사자 양쪽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인 이야기 이게 머리말에 있고요. 신명기로는 1~11장일 겁니다. 그다음에 조약문 내용, 서로 어떤 의무들을 해야 되는지 이런 것이 있고요. 그다음에 이 조약문을 어디에 보관해라. 언제마다 읽어라. 이게 있더라는 거고, 그다음에 이 조약을 지켰을 경우에 어떤 복이 있고 이걸 안 지키면 어떤 저주가 임하게 되는지, 그다음에 축복보다는 저주가 훨씬 긴 것이라든지, 이거 헷족 히타이트의 조약문이랑 신명기의 전체 짜임새랑 거의 비슷하더라는 거죠. 

거기에다 주전 7세기에 앗수르의 에살핫돈이라는 임금이 관련된 조약문 에살핫돈 조약문이라는 것이 발견돼서 해석이 되었는데, 거기도 역시 이런 형식들이 있더라는 거고요. 특히, 거기는 이 종주국 나라가 에살핫돈이 자기한테 굴복해서 신하 조약을 맺은 그 나라를 향해 요구하는 게 뭐냐? 사랑하라고 요구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신명기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된 거죠. 신명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나오는데, 지금까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근데 신명기는 사방에 사랑하라가 있어서 이거 뭐냐 싶었는데, 그 에살핫돈 조약에 보니 봉신 국가, 신하 국가가 주인 국가를 향해 사랑해야 되는 의무를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더라는 점에서 이게 신명기 이해에 큰 도움이 된 거죠

신명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게, 그래서 달리 말하면 충성이구나. 내가 이 나라와 조약을 맺었으니 딴 나라에 기웃거리지 않는 것.  딴 나라랑 뭘 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라는 겁니다. 해서 신명기가 이야기하는 사랑이 그저 감정적인 분명히 감정적인 용어로 표현했습니다만 그저 감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 한 분께만 충성한다는 것. 내가 딴 것에 굽신거리지 않겠다. 그게 있겠다는 거고요. 특히 그 앗수르 조약은 이런 것들의 시대 속에서 이 신명기는 그 조약문의 형식을 가져와서 그 조약문들은 앗수르에게 순종하고 앗수르에 충성하고 앗수르를 사랑하고 이걸 요구하는 겁니다. 근데 신명기는 앗수르 자리에다가 여호와를 야훼 하나님을 기록한 거예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야훼께만 사랑을, 야훼께만 충성을 한다는 점에서 신명기는 신앙의 용어로 표현된 반앗수르 문서구나. 이런 생각도 해볼 수가 있는 거죠.

앗수르에 충성해서 될 게 아니라 앗수르가 내 마음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이 표현도 이 앗수르 조약 에살핫돈 조약문에 나옵니다만, 내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할 대상은 앗수르가 아니라 강대국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 한 분이구나. 이게 그래서 신명기는 굉장히 격렬한 문헌이기도 하다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럴 때 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는 뭔가요? 야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 한 분만 섬기기로 해놓고는 우상을 섬긴다든지 그래서 이게 문제가 되요. 하나님과의 충성 계약을 깨버린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고요.

가령 이스라엘이 신명기 법전에서 명령한 것과는 달리 가난한 자를 짓밟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억합한 겁니다. 이게 왜 문제겠습니까? 하나님과 충성 계약을 맺고 그리고는 조약의 내용으로 약자를 돌아볼 것 배려할 것이 있었는데, 이걸 어긴 것이기 때문에 단지 이웃에게 못되게 했네. 너 마음이 왜 이렇게 못됐어? 정도가 아니라 야훼에게 대한 충성 의무를 깨뜨린 거다. 이거는 야훼 하나님은 사랑하라는 그걸 깨뜨린 거다. 그래서 약자를 짓밟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이 여기지 않았어! 그게 왜 죄가 되냐? 할 때 근본적으로 야훼 한 분만 사랑한다는 게 그가 명한 조약을 따라, 계약을 따라 살아가는 건데, 그걸 깬 거기 때문에사회적인 범죄들이 하나님을 떠난 거다. 이렇게 신명기는 규정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예언서들에도 이어지는 거죠. 정의롭게 살지 않는 건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정의롭지 않은 것은 사실은 하나님을 떠난 거다. 이런 예언자들의 논리 예레미야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논리들은 전형적인 신명기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신명기의 구조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신명기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 선택이라는 표현이 신명기에 참 많이 나옵니다. 근데 너희가 많아서 선택한 게 아니다. 대단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제일 적었다. 이런 표현이 신명기 7장에 나와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무 중요하죠. 하나님이 누군가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셨다고 할 때 가능성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다. 잠재력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런 표현을 하셨다는 건 하나님 그래서 제일 못난 사람 키우기를 좋아하는 이런 것이라기보단 "가장 적은 이를 사랑하시니 누구라도 사랑하시겠네"가 될수가 있는 것인 거죠. 그래서 그리고 가장 적은 이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시고 풍성하게 하신다는 점에서나라의 크기나 민족의 크기나 능력이나 재능이나 실력이냐는 상관이 없겠구나. 그것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개인으로 보자면 나의 능력 나의 실력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명기가 그리고 신명기에 기반한 우리 기독교 신앙이 줄기차게 말하는 게 뭔가요? 능력 상관없다는 것. 능력이 관건이 아니라 실력이, 우리 당연히 부지런히 살고 자기 실력을 개발하는 게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능력이나 잠재력이나 미래 가능성이 절대 아니라는 것, 우리는 오히려 모든 사람 중에 제일 적은 자였다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이 그런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을 통해 이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드러내셨다는 거고 그래서 언제건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과 동행할 일인 거죠.

동시에 우리 신명기 뒤에 32장에 가면 하나님의 규례를 행해라 이게 살길이다너희 앞에 생명이 있고, 사망이 있다. 복이 있고 저주가 있다. 어느 길로 갈래? 너가 선택해라는 거죠. 생명과 사망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겁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만들어두셨고 이거 먹으면 사망이고요. 먹지 않고 순종하면 생명인 겁니다. 아담, 하와에게도 생명과 사망이 있었고 그들은 사망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 가장 적은 자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는 너희 앞에 생명, 야훼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살아가는 길이 있고, 사망 ,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길이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할래? 신명기가 당시에 이스라엘을 향해 묻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오늘 우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서도 묻고 있는 게 생명과 사망이 너희 앞에 있다. 어느 길로 갈래?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있죠.

저는 마찬가지로 생명과 사망의 길이 우리 한국 개신교 교회 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갈 건지 그다음에 온 인류 앞에 생명과 사망의 길이 있어요. 약자를 지켜내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이 생명 길을 갈 건지 아니면 임금이라 해서 군마 키우고 돈 모으고 사방에 자기 영향력과 힘을 과시하면서 휘둘러대는 사망의 길을 갈 건지. 우리 사실 그렇게 약자를 돌아보지 않고 휘둘러서 온 지구의 기후 위기가 닥쳐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100년이 가기 전에 지구는 끝날 거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의 길이 있는 거죠. 우리네 교회는 뭘 선택할지 돌아보게 되고 그 점에서 신명기는 오늘을 향해서 생생하게 말하고 있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