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NUMBERS(민수기)

구약과친해지기(민수기)-김근주교수

Four Seasons Daddy 2024. 8. 19. 08:01

[구약과친해지기] 민수기 1 : 두 번의 인구 조사 그리고, 새로운 세대

오늘 함께 살펴볼 것은? 민수기 (Numbers), 지난번에 이야기 했었지만, 출애굽기 19장에 이스라엘은 시내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하고 그다음에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출애굽기 19장부터 마지막까지 레위기 전체 그다음에 민수기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죠, 그래서 민수기 같은 경우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민수기 1장1절이 애굽에서 나온 지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 이렇게 출애굽 2년 차 되던해 두 번째 달 첫째 날 여전히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는 야훼의 말씀, 이렇게 민수기가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민수기는 시내산 단락이라는 큰 단락 안에 연결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베미드바르라는 이름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경우에 오경은 항상 첫 번째 나오는 단어로 그 책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책들은 가령 레위기 같은 경우는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이렇게 되어 버리니 레위기 전체의 내용하고는 잘 안 맞는 것이 되어 버리죠. 출애굽기도 '이름들' 혹은 '이것은 이름들이다' 이런 이름이 되어 버리니 출애굽기 내용이 딱히 안 들어오고 이런 것이 있습니다만 아마도 신명기 같은 경우는 '말씀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그럭저럭이다 싶은데 아마도 가장 적절할 수 있는 건 민수기일 것 같아요. 이 첫 단어 베미드바르라는 게 In the Wilderness, '광야에서' 이런 뜻을 가진 단어이다 보니 민수기 전체를 반영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경 가운데 창세기 빼고 출,레,민,신 가운데 광야 방랑 부분이 그래도 집중적으로 다루어져 있는 곳민수기라는 점에서 '광야에서'라는 민수기 제목은 꽤나 적절한 민수기 전체를 잘 담아내고 있는 제목이다. 싶기도 하죠.  제목 자체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다 싶습니다. 근데 실제로 제목은 정말 멋진 제목입니다만 내용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민수기가 글쎄요 언뜻 읽기에 가장 지루한 책이라고 하면 전 어쩌면 민수기이지 않을까? 레위기보다도 어쩌면 레위기보다 조금 더 지루할 수 있는 '민수기' 

제가 이렇게 강의를 나누면서 가장 바라는 것은 민수기가 안 지루하기를 민수기가 덜 지루하기를 바라는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히브리말 제목으로는 광야에서인 거고요. 영어권의 제목이 'Numbers'라는 뭐 이런 제목이고 그게 이제 동양문화권으로 한자 문화권으로 봐서는 민수기 백성의 수를 센 기록 이런 뜻의 한자 말로 번역되었죠. 민수기의 이런 Numbers라는 이름들이 붙게 된 까닭이 70인경이 번역하면서 그렇게 붙였습니다만 민수기 1장~4장 정도까지 계속 인구 조사 하는 것이 나오고 1,2,3,4장이 다 인구 조사하고 그다음에 뒤에 26장가도 다시 인구조사가 나오고 이스라엘의 인구를 세는 것이 첫 부분에 그다음에 중간 마지막 부분 즈음에 이렇게 중요하게 두 번 나오니 아마도 70인경 번역자들에게 가장 강렬했던 게 이게 숫자구나, 백성의 숫자를 세는구나. 그래서 숫자들 이렇게 그리스어로 제목을 붙였고 영어권에서 Numbers가 됐고 우리 문화권으로 와서는 좀 더 정확하게 '민수기' 백성의 인구조사기로 이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인구 조사가 두번 있겠습니까? 1~2장은 전체 인구 조사이고 3~4장은 레위 지파의 인구 조사입니다. 해서 1~4장에 인구 조사가 있는데, 왜 또 26장에 있겠습니까? 26장에 가면 광야 40년 방랑이 거의 끝난 겁니다. 거의 광야 방랑 40년이 거의 끝난 시점에서 다시 한번 전체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죠. 그랬더니 처음 인구 조사 민수기 1~4장 처음 인구 조사할 때 거기에 포함되었던 사람들은 당시에 모세,여호수아,갈렙 이 세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때 20세 이상으로 인구 조사에 포함되었던 모든 사람은 다 죽었더라. 전부 다 죽고 해서 민수기 1~4장의 인구조사에 포함된 사람들이 출애굽 1세대 성경의 기록을 따르자면 애굽에 있다가 출애굽해서 시내산까지 온 그래서 시내산 언약에 참여했던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 언약에 참여했던 그 사람들이 민수기 1,2,3,4장에서 통계가 확보되었다면 민수기 26장은 그 다음부터 38년 정도의 광야 시절이 다 지나고 결국에는 그 사람들 그때 인구조사에 포함됐던 남자들 다 죽고 완전히 새로운 그러니 1차 인구 조사 때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들 혹은 태어났더라도 20세 이하라서 그 인구조사에 포함되지 않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로 두번째 인구 조사가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민수기는 1~4장,26장  본문 스스로가 두 개의 중요한 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죠.

결국, 1장부터 25장까지가 출애굽 1세대 이야기, 마지막 25장까지도 이스라엘이 막 죽어요.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거역해서 25장까지 막 죽는 일들이 생기는 거고 해서 광야 출애굽 1세대가 다 죽는 거고요. 그다음에 26장에 출애굽 2세대 혹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 요즘 시기의 신세대가 26장에 인구 조사가 되고 27장부터 마지막 36장까지인가요 거기까지는 출애굽 2세대 새 세대의 이야기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해서 민수기는 크게 그런 두 덩어리로 생각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럼 점에서 두 개의 커다란 뭉텅이들을 가지고 있죠. 말씀드린 것처럼 25장까지 계속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있죠. 그다음에 26장의 새로운 인구 조사가 있고요. 그리고 27장부터 마지막 36장까지는 어떤 불순종 사건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전까지 민수기에는 게속 걸핏하면 불순종 이걸로 불순종 저걸로 불순종, 불평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26장 이후부터의 출애굽 새 세대는 불평,불만 같은 사건이 적어도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수기는 하나도 그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새 세대들은 굉장히 진취적으로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고 행해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26장의 전체 인구 조사 다음에 27장에서 이야기하는 게 슬로브핫의 네 딸들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있습니다. 

그 네 딸들이 그 집안에 아들이 없이 네 딸들만 있었고 그런데 딸들에는 기업이 상속이 안 되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해서 네 딸들이 모세에게 항의하고 그래서는 모세가 충분히 타당하네. 이런 경우 딸들에게도 유산을 상속해!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게 27장에 있고요. 이 슬로브핫의 네 딸들 그다음에 나오는 게 여호수아가 모세를 뒤이어 후계자로 세워지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방식의 내용들이 전개되고, 민수기 가장 마지막 36장에 가면 다시 슬로브핫의 네 딸들을 둘러싼 사건이 등장하는 걸 볼수 있습니다.

결국, 민수기는 26장의 두번째 인구조사 다음에 27장부터 36장까지 출애굽 새 세대, 2세대를 다룰 때 슬로브핫의 네 딸들로 시작해서 스로브핫의 네 딸들로 끝맺게 이렇게 설정을 하고 있어서 이게 독특하구나 싶은거죠. 특히 오늘날에야 여성주의가 우리에게 알려진 덕분에 우리가 성경을 보고 일상을 살아갈 때 얼마나 무심코 차별적인 표현들이나 생각들이 있었고 혹은 의도적으로 성차별적인 표현들이나 의도들이 있었던 것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정말 까마득한 고대를 배경으로 한 민수기가 출애굽 새 세대를 이야기할 때 슬로브핫의 네 딸들로 27장에 시작하고 36장이 끝맺는다는 이런 식의 짜임새를 짠 건 굉장히 인상적이고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싶어요. 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했던 걸까요? 적어도 민수기 27장부터 36장까지의 이런 내용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그다음에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다들 주체적입니다.

슬로브핫의 네 딸들도 기도하는데 이런 걸 하라고 하나님이 시켜서가 아니라 합리적인 요구. 아니 왜 우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우리한테는 유업을 안 주시면 그럼 우리 아버지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것들이 기도 중에 나온 거라든지 하나님이 명령한 거라든지 이런 거 없습니다. 당연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요구들을 하고요.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이 슬로브핫의 네 딸들이 가령 자기 속한 지파, 므낫 지파였던가요? 여기 속한 지파, 다른 지파 사람하고 결혼하면 그 여성과 함께 땅이 다른 지파로 이동하게 되니까 그래서 슬로브핫의 네 딸들은 지파 안의 남자랑 결혼하도록 하면 좋겠다. 이것을 같은 지파 사람들이 모세에게 문제 제기하고 모세가 그것도 역시 타당하겠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런 사건들도 그렇고 그다음에 중간에 이 이스라엘이 요단강 동편에 최초로 정착하는 일들이 생기죠. 모압 평지에 도착하면서 어떤 지파들은 요단강 건너 땅이 아니라 요단강 동편 땅에 정착하기로 하고 이랬을 때 그 지파를 둘러싼 자칫하면 지파 간 전쟁이 생길 뻔한 상황이 있습니다. 근데 우리 본문을 보시면 요단강 동편에 남게 되는 지파들이나 이 지파들이 굉장히 신중하고 차분하게 상황들을 이끌어가고 자기들의 입장을 말하고 또렸하면서도 겸손하고 정직하게 이런 이야기들을 해서 자칫하면 초장부터 엄청나게 큰 갈등이 생길 뻔한 것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거 새 세대인 겁니다. 이 새 세대가 야훼, 하나님을 격려하면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신중하고 전체 공동체를 고려하면서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는 것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뜻밖에도 저는 민수기를 보면서 민수기가 21세기와도 통할 만큼 현대적인 어떤 감각들이 보인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특히 슬로브핫의 네 딸들 이야기는 주목할 만하죠

 

 

 

[구약과친해지기] 민수기 2 : 민수기를 나누는 두 가지 방법

슬로브핫의 딸들 이야기와 연관해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1~4장의 인구조사가 다 남자 조사입니다. 1,2장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인구의 기준 자체가 왜 20살이야 하면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 이제 광야하고 가나안 정복하고 전부 전쟁 상황이다 보니 사람 수를 세는 게 목숨이 있냐 없냐가 아니라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이냐 그래서 20살 이상의 남자들을 세는 것이지. 그게 1,2장에서 20살 이상의 남자 12지파 다 세고요.

그다음에 3,4장에 가면 레위인은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따로 세요. 다만 레위인을 세는 방식은 두가지죠. 1개월 이상의 남자 아이들을 죄다 세는 것이 한번 있고요, 그다음에는 30세에서 50세 성소에서 봉사하는 성막 관련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나이 그걸 30~50 이건 오경마다 나이가 다 달라요. 오경이 서로 안 맞는 것들이 레위인이 언제부터 직무를 시작하는가가 성경의 언급들이 서로 나이가 안 맞는 것이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민수기 3장,4장은 30살부터 50살 사이가 레위인들이 성소 직무를 수행하는 나이라고 했어요. 그 나이대의 남자들을 센 통계도 나오고 그래서 레위인의 통계는 두개가 나와요. 1개월 이상의 남자 아이들 그다음에 30~50세의 남자들 하여튼 1~4장 그래서 전부 남자들의 통계만 나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26장에 가면 다시 한번 출애굽 2세대 인구조사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도 마찬가지로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들을 인구 조사하는 겁니다. 근데 아주 특이하게도 26장에는 스로브핫의 네 딸들이 므낫세 지파 이야기하면서 이름들이 언급이 돼요.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딸들이 넷이 슬로브핫에게는 딸들이 넷이 있었다. 그 딸들의 이름 밀라, 말라, 노아, 호글라 이렇게 이름들을 쭉 소개해 주는 그게 거기에 나와 있어서는 이거 특이하다 1~4장에는 여자 이름을 한 명도 안 나오는데 이게 나오더라는 거고요. 그다음에 곰곰이 찾아오면 아셀 지파 가운데 아셀의 딸 세라가 있다. 이것도 언급이 있어요. 왜 있을까요? 이거는 아셀의 딸 이름은 왜 언급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만 어쨌거나 26장 46절에 나와 있고요

그다음에 레위 지파 같은 경우도 26장에 수를 세는데 거기도 역시 아므람이라는 사람에게는 아므람이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인 거죠. 아므람의 아내로 요게벳이라는 언급 이름 언급이 나오고요. 그 다음에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 난 자녀아론, 모세,미리암이라는 이름이 또 거기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거 민수기뿐이겠어요 레위기, 출애굽기, 신명기, 다 불친절해서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왜 1~4장의 인구 조사에는 남자 조사이기 때문에 전쟁에 나갈 사람은 남자고 성소에서 직무 수행할 사람도 레위인 가운데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만 세는 게 너무 당연할 것 같고 근데 왜 26장에서는 역시 여기도 싸움에 나갈 남자들을 계수하면서 슬로브핫의 네 딸들 그다음에 아셀의 딸 세라, 이 두 경우는 왜 언급을 했을까 싶은 거고요. 그다음에 레위지파에서도 성소 직무 수행하고 상관이 없는데 굳이 아므람의 아내 요게벳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그다음에 그 자녀 가운데 미리암도 언급이 되고 하더라는 거죠. 해서 몇 명의 여성들이 민수기 26장에는 언급되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다음부터는 이거는 이제 묵상의 영역이겠다 싶습니다만

하여간 분명한 건 26장부터는 새 시대인 겁니다. 새 세대를 전개하면서 새 세대를 보여주면서 민수기는 여성들을 언급을 했고요. 언급할 뿐 아니라 뒤에 27장부터 36장을 슬로브핫의 네 딸들로 시작하고 끝맺고까지 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민수기 저자의 지평, 세상을 보는 눈,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바라보는 시각 안에 독특하고 특별했던 여성들에 대한 언급,시각,자리 이런 것이 있구나 싶은 것입니다.

그 까마득한 고대 시대에 이러 했던 시각들을 생각한다면 오늘날에 우리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고 동등하다는 게 상식이 되어 버린 여성주의 시각이 정말 누구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생각하면 저는 우리가 훨씬 더 진취적이어야 한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글자에 메여 있을 것이 아니라 민수기가 이런 식으로 하는 걸 생각하면 오늘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보다는 훨씬 더 진취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지위와 활동에 대해서 훨씬 더 진취적인  게 저는 맞겠다 싶어요 세상보다도 더 뒤에 이 교회의 여성 인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참 민수기에 비하면 부끄러운 일이겠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를 크게 두 덩어리 이렇게 인구조사라는 걸로 나누어 볼 수가 있겠고요, 또 하나 민수기를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은 여정입니다. 여행길에 따라서 이동에 따라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시내산에 도착했고 계속 시내산에 머무르고 민수기도 시작이 마찬가지고 그러다가 시내산을 시내 광야를 언제 출발하냐? 민수기 10장 11절에 가면 다시 광야 여정 시작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민수기는 1장1절부터 10장10절까지를 시내 광야라는 지역과 연관해서 첫 번째 단락을 묶을 수가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10장11절에 광야를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25장 18절까지 25장에 가면 모압 평지,여리고 맞은 편 요단감을 경계에 두고 요단강의 왼쪽 편이 여리고가 있고 요단강의 오른쪽 편이 모압 평지인 겁니다. 그래서 모압평지가 사실 조금 더 넓은 영역입니다만 민수기는 계속 여리고 맞은편 요단강가 모압 평지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이 진을 친 장소를 언급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그다음에 하게 될 신명기는 통째로 모압 평지에서 선포된 모세의 고별 설교 이런 형식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미 민수기는 26장 정확하게 모압 평지에 도착한 건 22장이지만 22장 1절에 모압 평지에 도착했다가 나오지만 본격적으로 모압 평지에서의 출애굽 2세대는 26장부터 시작되는 거기 때문에 해서 10장 11절부터 25장 마지막 18절까지가 광야 여정이라고 묶을 수 있죠. 10장 11절에서 25장 마지막까지 38년가량이 지나가버리는 겁니다. 그다음에 26장 1절부터 마지막 36장까지가 모압 평지 그래서 민수기 전체는 시내 광야, 광야 여정, 모압 평지 이렇게 세 개의 지리적인 장소가 변경되는 모습으로 민수기를 또한 나눠볼 수 있겠다.

그 모압 평지에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모압 평지에 도착한 게 22장, 근데 22~24장은 발람 이야기예요, 우리 이따가 한번 언급을 해야 될 모압왕 발락이 초대했던 당시의 예언자 발람이 이야기했던 거 그레 22-24에 나오고요. 그다음에 25장은 아까도 언급했지만 민수기에서는 이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장면 그게 25장에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2~25장도 모압 평지에서 일어난 일들이지만 이 22~25장은 과도기인 거죠. 이전 세대가 마지막 도착한 모압 평지이기도 하고요. 26장부터는 새 세대의 모압평지. 해서 이 과도기 22~25장은 이건 정말 겹쳐지는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가 겹쳐지는 지점이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해서 전체적으로 시내 광야, 광야 38년, 모압 평지 이런 지리적인 변화 그다음에 1~4장의 인구조사 26장의 인구 조사해서 결국 민수기는 출애굽 첫 세대의 죄악, 그다음에 출애굽 2세대의 새로운 출발과 희망. 이런 구도를 민수기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걸 통해 1세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것이기도 하죠. 출애굽 1세대는 전부 광야에서 다 죽을 만큼이나 계속 불순종하고 거역했던 세대라는 것. 그래서 곳곳에 이 사람들의 불순종에 대해서 민수기가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걸 통해 이렇게 살아갔으니 광야에서 다 죽을 수밖에 없었구나.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갈 수밖에 없었구나. 이런 걸 전달하는 것인 거겠구요.

그다음에 그런 부정적인 역할만 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분석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과거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하는 까닭은 당연히 이런 내용들, 출애굽1세대의 불순종을 보면서 지금 읽고 있는 우리들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약속의 땅을 누리고 쟁취하고 획득할 수 있느냐? 이 관점 때문에 이것 때문에 1세대의 불순종들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민수기가 인구 조사로는 둘로 나누지만, 여정에 따라서 셋으로 나누다고 했지 않습니까? 각각의 부분마다 사건이 있고 불순종과 연관된 사건이 있고 규례가 있습니다.

가령 사건하고는 좀 독자적으로 보이는 규례들 제사 관련 규례나 제사장 관련 규례 절기 관련 규례 이런저런 정,부 관련 규례 이런 것들이 1~10장에도 나오고 10장11절부터 25장까지에도 뭉텅이로 나오26장부터 36장에도 뭉텅이로 나와요. 민수기의 세 덩어리에 전부 다 세부적인 율법 규정들이 다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곳곳에 내러티브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리고 주로 그 이야기들은 광야 행군했다는 이야기하고 불순종했다는 이야기 이게 1부,2부에 나오고 3부인 26장부터는 새 세대가 어떻게 진취적으로 일들을 착착 해결해 가는지 여기는 주로 좋은 이야기만 있습니다만 하여튼 1부,2부,3부에 전부 내러티브하고 율법이 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첫머리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번 창세기나 출애굽기, 레위기 때 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오경을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불러요. 토라는 율법인 거죠.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율법, 우리 보통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은 이래라 저래라예요. 그런데 창세기에 율법이 있어요? 없습니다. 거의 없어요. 출애굽기에 물론 율법이 있죠. 레위기 율법 천지고 민수기도 신명기도 그래요. 근데 이 책들은 전부 율법하고 내러티브. 이야기하고 단단히 물려 있습니다. 심지어 율법이 가장 많다 여겨지는 레위기조차도 레위 8-10장에 제사장 위임, 그다음에 24장에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한 사람이 죽는 사건 이런 것들을 통해 율법하고 내러티브가 결합되어 있고 민수기 역시 크게 3개의 지역에 따른 시내산, 광야38년, 모압 평지세 개마다 이야기들이 있고 거기마다 율법 규정들이 있어율법과 이야기는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경을 율법 규정이라고 생각하는 건 편의상 토라라고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붙인 이름이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이라고 하지만 그 율법 안에는 내러티브가 스토리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경을 토라라고 할 때는 그저 율법이라고 이해하는 건 착각입니다. 그런 세부적인 법 규정뿐만이 아니라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 그래서 흔히 그러잖아요. 예수님 때문에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이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게 그러면 거기 율법이 뭐냐는 거예요. 창,출,레,민,신은 네러티브하고 율법하고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내러티브는 빼고 아브라함 이야기는 지금도 설교할 수 있고 이런 이야기는 지금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율법은 사라진 이 말이 안되는 그건 토라 자체가 내러티브와 율법이 결합돼 있는 건데 그 가운데 이거를 생으로 분리시켜서는 얘는 살아있고 얘는 불가능한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받으려면 전부를 받아야 되고요. 차려면 전부를 차야 되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 점에서 우리의 율법 이해라는 건 이 토라라는 다섯 권의 책의 성격이 구성이 어떤지를 하나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터무니없는 발언이다. 실은 것이 있습니다. 

그 점에서도 다시 한번 우리는 개신교 교회가 가톨릭은 안 그럴 것 같아요 개신교 교회가 율법과 복음 이런 식의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건 지극히 부적절하고 부당한 이야기일 겁니다. 아브라함 사건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의 상징이지 않습니까? 이 사건하고 규정하고 분리해서 이거 안되는 일이다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죠. 해서 민수기 자체가 1부,2부는 다 불순종 이야기인데 그런데 그 안에도 토라들이 규정들이 꽤 많이 1부 2부에도 다루어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점에서 이 광야 38년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그 시대를 죄악의 시대로 정죄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런 불순종 사건들을 설명하는 걸 통해서 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는가를 설명하는 거고요 그와 동시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해서 새로운 세대를 향한 도전, 이런 것들이 1부,2부의 의도 가운데 또 있다는 거죠

그래서 1부,2부에도 규정들이 아주 잔뜩 담겨 있고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죠. 말씀드린 것처럼 언젠가부터 제가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오경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완성된 건 바벨론 포로기, 포로기 끝자락 바벨론 포로 갔다 온 이후 이런 시점에 창,출,레,민,신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완성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수기 같은 책이 하고 싶은 게 뭔가요? 이제 바벨론 포로를 경험한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그럼 바벨론 포로라는 건 다시 약속의 땅에서 축출돼 버린 사건이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다시 우리가 약속의 땅에 살 수 있으려나? 어떻게 우리가 야훼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가 있을까? 그럴때 민수기가 그 역할인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가? 그래서 이 과거 역사를 되돌아봄을 통해 출애굽1새대의 모습들을 보여줌을 통해 지금 살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

사실 이런 식의 진술이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하고 있는 진술이기도 하죠. 이 이때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귀감과 모델이 되는거다. 바울도 역시 그렇게 풀이했습니다만 주후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만 구약이 귀감이고 모델인 것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기와 포로기 직후 포로에서 돌아온 지 좀 지난 귀환공동체 이들에게도 역시 그때의 광야 사건이 귀감이고 모델인 겁니다. 그런 것들이 민수기를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배열되고 편집되게 했다는 거죠. 

특히, 오늘날에 이 오경 연구자들은 오경 가운데서도 민수기가 제일 나중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이야기까지도 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구약과친해지기] 민수기 3 : 어떤 관점에서 민수기를 읽어야 하는가?

그래서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우리가 민수기를 읽으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이제 공동체가 새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회복의 운동을 시작하려고 하는 시점에 이 책이 어떤 역할을 했을까? 민수기를 읽으면서 그때 광야 시절을 걸어가던 모세와 그 백성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민수기를 읽기, 약간 적절치 않습니다. 주인공은 그 사람들이에요.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멸양의 주인공은 이순신이지만 그 영화가 대박 히트를 한 건 지금 영화를 보는 청중들하고 접점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민수기를 읽으면서 포로 귀환 이후 에스라-느헤미야 뭐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래서 사실 오경을 잘 알기 위해서 우리한테 훨씬 더 필요한 책이 말라기 같은 책들 말라기가 포로 귀환 이후에 한참 지난 이후에 책이기 때문에 말라기 같은 책 에스라-느헤미야 이런 책들 그다음에 예레미야애가 바벨론 포로이래 이 백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고 너무 괴롭다고 그냥 비명을 질러대는 게 애가기 때문에 예레미야애가라는 책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웠는가가 들어와야 하고요. 그다음에 이사야 56장~66장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귀한 직후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그다음에 귀환한 지 좀 지난 다음에도 공동체 안에 일어나는 여러 갈등들 말라기를 통해 그리고 에스라-느헤미야를 통해 이런 책들을 통해 포로기와 포로 귀환 이후 백성들의 고통, 괴로움, 충격 이런 걸 생각하고 이게 좀 그림이 그려지고 그러고 민수기를 레위기를 보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그게 훨씬 더 정확하게 민수기를 볼 수 있는거겠다 싶구요.

그다음에 제가 구약 강의할 때마다 하는 거지만 우리한테는 큰 도움이 되는게 일본 강점기입니다. 일본 강점기 때 우리가 어떠했고 그다음에 해방 직후 1945년에 그 망할 놈의 일본 천왕이 항복을 한 겁니다. 조선이 해방됐지 않습니까? 그러자 물밀 듯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을 뿐만이 아니라 한 1945년부터 1948~9년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정치 단체들이 생겨나고 정당들이 생겨나고 난리법석 무질서라고 보일 정도로까지 많은 것들이 생겼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해방 조국에 대한 기대인 거예요. 해방된 조국에 대한 기대 때문에 이런 나라가 저런 나라가 그런데 이거를 미군정은 이해하지 못했고요. 무질서라고 생각했고 강제로 찍어 눌러버렸고 조금이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끼가 있는 건 개박살을 내버렸습니다. 저는 미군정이 조선의 해방과 변화에 너무 나쁜 영향을 미쳤다 싶고, 그 미군정에 들러붙은 한민당 이승만 세력들 이런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시죠? 저의 정치적인 개인적인 견해들이 막 들어간 이야기겠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해방 직후 가령 혹은 또 일본 강점기 말 1930년이래 일본의 기세가 대단해져 갔던 이래 조선 사람들은 무슨 생각 했지? 그다음에 해방 직후에 1945년부터 50년까지의 해방된 조국에서의 사람들은 조국을 향한 마음이 뜨겁던 사람들은 뭔 생각을 했지?

그런 마음으로 그게 민수기와 같은 책을 공동체가 마련하고 정리하고, 아마 주로 제사장들이 했을 겁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책을 마련하고 정리해서 공동체에 제시하고 공동체가 납득하고 동의하고 아멘하는 겁니다.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이거 제가 전에도 했을 것 같은데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에스라가 율법책을 하루 종일 낭독하잖아요. 그러자 백성들이 그걸 듣고 펑펑 울어요. 이거 명확해요 이 사람들이 이거 모르는구나. 한 번도 못 들어본 이야기를 에스라가 이야기하는 거고요. 듣고는 평평 울고 그러고는 또 들려주시오. 이런 일들이 느헤미야 8장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토라의 말씀이 오경의 말씀이 갑자기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포로기 때 이래 쭉쭉 형성되어 가고 귀환하면서 어떤 상황과 기점들을 통해 이렇게 모여진 것들이 공동체 안에 확인되고 느헤미야 8장처럼 공인되고 모두가 하나님 말씀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이게 가르쳐지게 되고 이런 작업들이 되는 거죠. 그 가운데 민수기라는 책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전 그 점에서 어쩌면 우리 몇년 전에 드라마였던 미스터 션사인 같은 그런 영화가 아죠. 그런 드라마들이란든지 일제강점기를 다루면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박경리 선생님의 토지 같은 책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읽고 민수기를 읽으면 달라지는 것이 있겠다 싶은거죠.

그럼 민수기가 살아나게 이 책이, 지루한 책이 아니라 프로그램이구나. 이 프로그램이 우리 어디가서 오늘 프로그램이 어떻게 돼요. 할때 그런 프로그램도 있지만 십게 말하면 강령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만들어가지? 이거를 담고 있는 게 우리 프로그램인 거죠. 민수기는 공동체를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강령 프로그램이 민수기 안에 착착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민수기는 레위기와 신명기 사이에 있어요.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의 마지막 고별 설교레위기에 나타나고 그 치밀한 제사 관련 규례그 사이에 민수기가 넣어서는 이 둘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 있더라 이죠 그래서 레위기랑 겹쳐지는 내용들이 솔찬하고요. 신명기랑 겹쳐지는 내용들도 솔찬해요. 대표적인 게 정탐꾼 가나안 땅을 정탐하려고 정탐꾼 보내는 이야기가 민수기 버전이 있고 신명기 버전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버전이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지 비교해 볼 일이겠습니다만 그렇게 또 신명기 전체가 모압 평지에서의 고별 설교고, 민수기도 26장부터는 모압 평지 이야기고 요점에서도 민수기하고 신명기가 겹쳐지고

그다음에 민수기가 다루는 법들이 나오고 있는 법들 대부분이 세부적인 규례들은 레위기와 연관이 돼요. 레위기의 제사 규례들하고 연관해서 민수기에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훨씬 세부적인 레위기에는 안 나타나지만, 민수기에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직무가 어떻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고 보수는 어떻게 되는 건지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세부적으로 존재하는 거죠. 그 점에서 저는 납들이 되긴 해요.민수기가 레위기보다는 나중 책이겠구나. 레위기는 기본 제사 체계가 있고 민수기는 그걸 보완하며 마무리하며 정리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들을 하게 되죠. 그다음에 정탐꾼 이야기를 통해 신명기하고도 연결하고 아마도 그래서 레위기로 대표되는 그리고 신명기로 대표되는 글의 종합 연결 이런 작업이 민수기였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는 오경 안에서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책이겠구나 싶은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미 뭐라 뭐라 민수기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이 짧은 강의에서 좀 더 우리가 시간이 길다면 세부적으로 단락, 단락을 다룰 곳이 있겠습니다만 지금 저는 그러기보다는 민수기를 어느 시각에서 볼 거냐가 저는 그게 이 시간 함께하는 분들이 꼭 붙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생기면 해방 직후에 조선 땅, 이 관점이라는 게 생긴 다음민수기를 일게 되면 달라지는 것이 있겠다는 거죠. 그럴 때 1~4장의 인구 조사 읽을 때 한편으로는 겁나 지루하고요. 한편으로는 기쁜 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하 동문이 많아요. 이하 동문이 동문이라서 읽다 보면 계속 같은 말이 반복돼서 저는 그렇더라고요.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갈 때 민수기 1,2,3장은 제일 힘듦면서도 제일 편했어요. 계속 같은 내용이 반복이기 때문에 하여튼 그래서 휙휙 넘어갈 수가 있는 것도 빼기가 좋았던 이런 것이 있습니다만.

우리한테는 그렇지만 회복해가는 공동체의 강령 차원에서 해방 직후 조선 땅 이런 마음으로 보게 될 때 1~4장은 회복된 자신들인 겁니다. 거기에 남자만 60만인 거죠. 60만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20세 이상이 60만이면 그럼 20세 밑은 고대 세계는 아이들이 많이 낳았지 않습니까? 우리 우리나라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 지금은 인구가 인구 위기 지경이 되어서 지하철에 온통 나이 드신 분들 천지지만 우리 10년 전 20년전 거슬러 올라가면 정말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던 세상이었지 않습니까? 고대 세계는 더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장정만 60만이면 이스라엘 전체는 물경 4배 한 식구의 4배가 되고 이러면 200만, 240만, 하여튼 간에 어마어마한 숫자이지 않습니까? 그 숫자가 시내 반도에 200만을 풀잖아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일 겁니다. 근데 민수기 1~3장은 그래서 그 인구는 저는 신학적인 숫자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이렇게 쉽게 생각하지만 어려운 것 단위까지 그냥 60만 이름 아니고 상징적인 숫자구나 싶은데 60만 하고 단단히 1의 자리 숫자가 0이 아니고 10의 자리도 0이 아니에요. 이렇게 세밀한 숫자가 무슨 상징이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싶습니다. 근데 하여튼 적어도 이 포로기 이후에 해방 직후에 신앙 공동체들이 1~4장을 볼 때는 기쁨과 흥분과 설렘과 놀라움입니다. 우리 진멸되지 않았구나. 우리 사라지지 않았구나. 우리는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셨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는 게 1~4장에 인구조사입니다. 그렇게 인구 조사 다 한 다음에 7장 가면 이제 성막을 다 완성했고 성막에 기름 발라서 다 거룩하게 구별했습니다. 

이제 그걸로 뭐하느냐? 12지파 차례대로 나와서 준비했던 예물을 드립시다하고 예물을 드리는데 7장도 절수 겁나 많아요. 12제파가 다 무조건 등장해야 하든데 우리가 가령 후에 시상식 할 때 제일 첫번째 사람에게는 상장을 다 읽고 나머지는 이름만 읽고 내용은 전과 같습니다. 내용은 이하 동문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하 동문을 안해요. 이하 동문을 안 하고 그 똑같은 내용의 상장을 계속 반복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읽기 편해요. 무슨 가령 르우벤 지파의 지도자 누구가 드린 예물은 이러하니 하고 똑같은 거기 때모여서문에 한 번만 읽고요. 저는 그랬습니다. 한 번만 읽고 그다음부터는 시므론 지파 누가 드린 예물이라도 안 읽어요. 왜냐하면. 앞에 똑같기 때문에 겁나 절수는 많은데 금방 읽을 수 있는 이런 것입니다만 저 같은 사람은 그냥 이렇게 읽어버렸지만

고대 이 사람들 해방 직후에 유대인이 신앙 공동체 사람들에게는 12지파가 전부 다 모여서 하나님 앞에 어느 지파가 더하고 덜하고 없이 인구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똑같은 재물을 전부 다 나와서 이거 드리고 저거 드리고 12지파가 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사실 해방 직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직후에 이스라엘이 12지파 다이지 않아요. 주로 유다 지파 출신들이 압도적이고 아니면 베냐민 지파 이정도 일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에도 유다와 베냐민이라고만 언급되어 있고 베냐민 지파가 글쎄 얼마나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민수기 같은 책은 12지파를 전부 다 등장을 시키면서 그래서 온 이스라엘 쪽 관점 비록 그들은 굉장히 축소되었지만 온 이스라엘을 늘 염두에 두면서 12지파가 전부 차례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더라는 거죠. 그거 자체가 감동입니다. 우리 해방된 세상에서 가령 너무 안타까죠. 1948년 정부 수립 선언을 해버렸습니다만 그런 거 말고 그렇게 일부 만에 그걸로 하지 말고 정말로 모든 국민이 다 함께 합의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뻐하는 어떤 것이 있었다면 그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그때 순서 하나하나가 다 기쁜 겁니다. 그때 가령 그 당시에 대한민국의 지방 행정국 해방 직후 행정구역 제가 모르겠습니다. 경기도를 대표해서 누가 어떤 걸 하고 경상북도를 대표해, 남도를 대표, 전라남도 대표해, 이렇게 했을 때 그거 자체가 감격 함경도, 평안도 다 할 때 얼마나 감격이었겠습니까? 근데 이게 빠져버리면 민수기는 겁나 지루지루가 되는 거죠

그래서 민수기가 지루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가 사라져서요. 역사가 사라지고 현실이 사라지게 되면 이 책은 따분한 규례책이 되어 버리고 역사가 들어오게 되면 이거는 강령인 겁니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가 돼야 하지? 우린 지금 어떻게 우리 모습들을 과거를 돌아보면서 우리 모습을 차근차근 만들어 갈까? 라는 겁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그런 와중에 과거를 덧칠하지 않고 우리는 단군의 위대한 자손이다. 이런 헛소리 하지 않고 덧칠하지 않고 출애굽1세대를 격렬하게 사실적으로 비판적으로 딱 제시해요. 그렇지만 까버리는게 목적이 아니라 사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면 다 죽는 거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은 겁니다. 그때 우리 모두가 죽었구나. 그럼 우리는 다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어떻게 다시 시작하지? 이 관점에서 볼 일이겠구나 싶은 것입니다. 그게 저는 우리가 민수기에 읽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싶습니다. 

 

 

 

[구약과친해지기] 민수기 4 : 끊임없는 불평!

민수기에서 남은 부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불평입니다.  민수기의 히브리말 제목이 영어로 In the wilderness 광야에서라고 했지만, 달리 불평하며 In the Complaints. 불평하며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끊임없이 불평해요.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런 불평들을 보도하고 있나요?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 건가요? 이 해방 조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건가를 말하고 싶어서 이런 불평들을 하는 거죠

그 불평들 가운데는 애굽에서 먹었던 생선,오이,참외,부추,파 이건 없고 맨날 만나만 먹어! 이런 불평도 있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기도 하고,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어떤 경우는 가는 길이 힘들다고 불평하기도 하고, 가장 근본적으로는 가나안 땅 정탐꾼 사건과 둘러싼 가나안 땅에 대한 험담이에요.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시겠다는 땅 자체에 대한 실망과 원망.  이게 전부 다 의도적인 거겠죠. 해방되어서 돌아온 조국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에스라, 느헤미아, 말라기에서 보는 것처럼 공동체 내부의 갈등들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 이 사람들에게 광야 방랑 시절의 정탐꾼 이야기가 가지는 중요성들이 있겠다 싶은 것입니다. 그런 불평들이 나와 있기도 한 것을 볼 수가 있죠. 다 공동체를 향해 말하고 싶은 바가 있는 것이겠습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모세와 아론의 리더쉽에 대한 불평들이 있기도 하죠. 이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 때문에 비판했고, 이것 때문에 어떤 문제들이 생기기도 하고 고라의 당이라고 하는 고라, 다단, 아비람 이런 집단들이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해서 근본적인 또 문제를 제기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이런 시간도 역시 민수기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게 전부 다 생생한 사례들이죠. 해방 공동체를 향한 사례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공동체의 불평, 원망 사이에 계속 규례들은 등장해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규례들이 배치되어서는 이게 그저 과거에 대한 비판적 분석만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구나 싶은 거죠. 

백성들은 계속 뭐가 없다고 불평했지만 먹는 게 없으니 불평, 길이 힘들어 불평, 지도력 때문에 불평, 가나안 땅 때문에 불평했지만, 전부 다 이거는 뭐가 없다고 힘들어요. 뭐가 없어요. 뭐가 없어요. 이렇게 불평했지만 사실 민수기를 관통하는 참 중요한 주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 하나님의 임재이죠.  그들은 먹을 게 없어요! 불평했지만 정작 그들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계속 시야에서 놓쳐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죠. 우리 광야 기간 동안에 낮에는 구름이 밤에는 불이 그들을 인도했다는 게 출애굽기에도 있고 신명기에도 있지만, 민수기에 가장 많이 여러번 언급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낮과 밤에 구름과 불로 그 백성들을 곳곳마다 인도하셨다는 것들이 나오죠.

그다음에 민수기에는 성막을 중심으로 야훼께서 임재하시는 야훼께서 거하시는, 야훼의 거처인 성막을 중심으로 사면으로 이스라엘이 진 치는 것. 이런 내용이 민수기에 실려 있죠. 그것 자체가 그림이죠. 하나님 백성들의 거쳐 한복판에 야훼의 거처가 있어서 야훼 하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구나. 말 그대로 너희 안에 있다고 하는데 정말 말 그대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구름 기둥과 불기둥 역시 늘 그들과 동행하시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지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굶주리지 않게 하시고 또 필요할 때마다 물이 나게 하셔서 물을 공급하셔서 먹게 하셨던 것이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백성들의 마음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뿐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 만나와 메추라기 물과 같이 육체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이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공급하신 분이었구나.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정말로 먹고살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보여준 것이 또 민수기에서 광야 시간이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늘 없는 걸 찿아서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정작 그들에게 있던 가장 중요한 것, 야훼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 이걸 너무 많이 시야에서 놓쳐버린 것이 있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가 민수기 22장부터 24장에 있는 발람이야기입니다. 발람 이야기는 참 어려운 이야기이지요.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다가가고 있을 때 그때 모압 땅을 지배하던 발락이라는 임금이 이스라엘의 진격을 보고 쫄았고, 그럼 어떻게 하지? 당대의 유명한 발람이라는 예언자를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해야 하겠다. 그래서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특이하죠. 하여튼 그래서는 발람을 모셔오는 과정에서 발람이 안 간다고 하고 돈 잔뜩 줄게, 하나님이 하라는 것만 할 거야, 뭐 이런 거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본문 진짜 어려운 본문입니다. 본문 자체가 어렵다기 보다는 22~24장에 나타난 발람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들 성경 읽어보시면 바람 괜찮은 사람이고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가고, 하라 하면 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구나라고, 하나님의 예언자이구나가 되는데 22~23장 빼고 나면 나머지 모든 민수기 본문, 민수기 25장에도 그렇고 30 몇 장인가 거기에도 그렇고 거기에는 발람 나쁜 놈으로 나와요.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천하의 나쁜 놈 신명기에도 발람은 나쁜 놈으로 나오고요. 나머지 구약에서 그리고 심지어 신약 성경에 곳곳에서 발람을 까요. 즉 민수기 22~24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신,구약 성경 본문은 일관되게 발람을 나쁜 놈이라고 죄악의 대명사인 것처럼 언급해요.

그런데 22~24장은 안 그런 겁니다. 도무지 거기에서는 이 양반이 뭐가 나쁜지를 잘 찾기가 어렵다는 게 그래서 본문이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22~24장이 그려주는 발람하고 나머지 모든 본문에서의 발람하고 이게 안 맞아서 어려운 거죠. 그러다 보니 이제 나머지 모든 부문이 일치단결해서 나쁜 놈이라고 하니 22장에 나오는 발람을 나쁘게 읽는 겁니다. 해서 발람이 나는 돈을 아무리 줘도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는 것만 전할 거야라고 말할 때 나머지 이 본문들의 이해에 압도되면 이 인간이 말로 이렇게 하지만 실체로는 돈 욕심, 말이 되기는 하죠. 우리도 그렇잖아요. 저는 돈 같은 거 상관 없어요. 말씀만 전할 뿐이죠. 속으로는 돈 줘요, 돈 줘요, 이런 마음이 저도 있기 때문에 발람이 구라쟁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특히 그것을 뒷받침하는 게 그래서 발람이 가는데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가는데 나귀가 그 앞을 칼 빼고 드는 하나님의 천사를 발견하고 나귀는 안 가는데 발람은 가자고 해서 나귀 때리고 나귀가 바보 멍청이! 나도 보이는데 너 안보여? 이런 거 있고 이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발람의 가는 길을 막는 걸 보면 이런 막는 장면을 보면 이 인간이 구라쳤구나! 싶은 생각을 하는데 본문에는 구라라는 것이 정말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너무 어려운 그래서 어려운 본문이다 싶습니다. 우리 짧은 시간에 이 부문 가지고 더 붙지는 않겠습니다. 이 본문이 말하고자 22~24장에 놓여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료해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아직 다다르지도 않은 곳에서 그들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모압 왕 발락 같은 이런 세력들이 있고, 발람을 동원해서 저주하려는 이런 세력들 이스라엘은 감당도 할 수 없어요. 자기는 여기 있는데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대적이 있다는 겁니다. 완전히 무기력하고 무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훼께서는 이스라엘보다 먼저 가셔서 발람에게 요청되던 그 모든 저주를 복으로 바꿔버리신 겁니다. 오히려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풍성하게 축복하게 하시는 거죠. 우리 흔히 고백하는데도 나보다 앞서가시는 주님 나보다 앞서가셔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를 위해 행하시는 주님 이게 발람 스토리가 말하고 싶은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왜 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겁나 열심히 하지만 우리한테 보이는 건 빙산의 일각이고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전 정말 실감해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절 씹는 분이 있더라니까요. 나는 모르는데 날 씹고 욕하는 분들이 있고 그걸 우리가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저를 축복하고 저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하시는 분들도 있더라는 겁니다. 그거 우리가 어떻게 다 단도리? 적절치 않은 표현 같아요. 다 어떻게 우리가 챙기고, 바로잡고 그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뿐인 거죠. 그래서 저에게나 우리 모든 분에게나 전하고 싶어요. 너무 치밀하게 사람 관계하고 그러지 말라고 눈앞의 것 우리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사는 거지. 정말 발 넓게 막 이런다고 될 일은 아니겠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구나 싶고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께서 이미 미리 가셔서 그렇게 행하시는 것이 있죠.

결국, 발람이야기도 민수기 전체 안에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사건이에요. 만나처럼 메추라기처럼 그다음에 불기둥, 구름 기둥처럼, 성막 사변으로 둘러친 진처럼, 발람 사건 역시 야훼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는구나. 이걸 역력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발람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과친해지기] 민수기 5 : 통제할 수 없는 야훼 하나님

한마디 더 이야기 한다면 아까 제가 언급했던 왜 발람은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가는데 그게 구라였다면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그러면 갈게요! 이것마저도 발람이 사실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안 들었으면서 들었다고 구라를 친 건가?  이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천사가 막는 게 너무 당연했겠다. 싶고 근데 저로서는 이게 구라라는 흔적을 본문에서 발견하기는 너무 어려운데 싶어서 그럼 구라가 아니라면 그럼 하나님은 가라 하셔놓고는 왜 발람 앞에 칼 들고 그 천사를 보내신 거지? 싶은 거죠.

근데 이런 사건이 성경에 여러 번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모세 보고 너 가서 내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라! 그래서 모세가 네! 알겠습니다. 하고 가는데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나타나셨더라. 그때 십보라의 할례 사건 이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이건 뭐지? 이것도 진짜 어려운 본문이에요. 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가라고 하셔놓고는 그게 할례가 문제였었으면 진작 말씀하시지 진즉, 시내산에서 만났을 때 잠깐 됐고 할례부터 이렇게 됐어야 되는데, 그때는 내버려 두시던 하나님이 너 가라. 네 알겠습니다. 가는데 모세를 죽이려고 나타나셨더라. 출애굽기 4장에 있죠

정말 어려운 왜 이러시는 건가? 싶은 것이 있죠. 그것뿐인가요 야곱이 하나님이 라반에게 있을 때 밧단아람의 라반과 함께 있다가 이제 때가 되어서 너 돌아가라 하잖아요. 돌아가는데 그런데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이 등장해서는 야곱에게 하여튼 해를 끼치려고 하는 장면. 야곱이 끝까지 버티는 이런 장면이 있잖아요. 이런 일들은 왜 생기는 거지?

그다음에 여호수아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제 여리고를 향해 진격하려고 할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또 칼 들고 등장해요. 그리고 칼 들고 등장하는 건 분명히 적대적인 행동이지 않습니까? 그건 또 왜 그러지? 이런 몇 개의 장면들은 이상해요. 왜 하나님은 갑작스럽게 칼 들고 나타나서 이 주인공들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시는 거지? 정말 저는 상식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싶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지만 다 가설인 거고, 그 가운데 좀 더 나은 설명을 선택하는 정도일 것 같아요. 제가 그걸 지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쉽게 납득이 안 돼요. 쉽게 납득이 안 되고 잘 파악이 안 되는 분이고, 저는 그거 자체가 인정해야 하는 거다 싶어요. 저 같은 신학 연구 공부하는 사람들이 뭐라 상식적인, 합리적인 설명들을 본문을 가지고 본문에 기반해서 해보려고 하지만 적지 않은 부분에 가서는 안 통하는 곳이 있더라고요.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파악할 수가 없겠구나.

하나님의 깊은 뜻과 행하심의 의미가 무언지는 그렇다고 전부를 다 포기해 버릴 수는 없어요. 할 수 있는 한 본문을 비교하고 궁리하면서 찾아갈 일이겠지만 어떤 영역들은 그냥 하나님의 지엄하심이 하나님의 신비하심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을 내 손아귀에 쥐고 통제를 못 하겠구나.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군요. 그럼 내가 아마 쥐고 흔들수도 있을 텐데 하나님은 사람이 결코 쥐고 흔들 수 없는 사람의 통제 바깥에 계신 분. 

이런 것들이 칼을 빼 들고 서 있는 여호화의 사자 이미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겠다 싶습니다. 민수기 이 짧은 나눔의 마지막은 앞부분에서도 이야기했던 26장 이후의 출애굽 새 세대입니다. 거기도 역시 율법 규례들이 있어서 다소 지루한 부분들이 있지만 새 세대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도 전투가 나와요. '미디안 전투'라는 것이 나오는데 31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명령해서 모든 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미디안과 전투하고 전투한 다음에 획득한 상대방 민간인들이 있겠고 상대방의 전리품들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을 처리하는 전부 모세의 명령을 따라서 여호화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이 말이 계속 반복되면서 전쟁의 집행과 결과, 전리품의 획득과 분배 모든 것들이 명령대로 처리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거 의도적인 거죠. 31장에 이런 내용이 있어서 새 세대구나.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그 점에서 이 전투는 민수기 31장의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예배였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민수기가 마지막에 그리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그게 새로운 공동체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인 겁니다. 이런 삶으로의 격려, 초대, 자극, 도전, 이게 민수기가 말하고 싶은 것이겠다 싶습니다. 

해서 민수기를 이런 관점에서 한번 각자 읽어볼 수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 싶습니다. 아까 제가 일본 강점기 이야기했지만 그 점에서 조선 사람이 가지는 유익이 크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선 땅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왔고 들어왔던 또 영화나 드라마로 책으로 보아왔던 것들이 있어서 그게 구약을 이해하는 도움이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구약 성경이 거의 대부분이 바벨론 포로기 직후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의 멸망, 다윗 솔로몬 시대가 아니라 전성기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바벨론 포로기 직후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의 멸망, 다윗 솔로몬 시대가 아니라 전성기가 아니라 패망기, 식민지 시기, 이 시기가 구약 성경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시기였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졌던 일제강점기 구한 말 중국에게 혹은 열방에게 눌렸던 그 괴로웠던 시절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에 미/소 사이에서의 엉망이 되던 시절. 이런 것들이 전부 그 점에서 저는 이 한국이야말로 한반도야말로 구약 성경을 이해하기에 나아가 신약 성경을 이해하기에 정말 적합한 지형이었구나. 위치였구나 싶은 겁니다. 구약이나 신약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가 뭔가요? 핍박당한 자들, 억합당한 자들, 식민지를 경험한 자들, 약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눈물 흘리는 자들, 이 사람들의 시각이야말로 성경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고 크게 보아 조선 땅은 정말 그런 땅이었구나.

하나님이 저는 우리나라에 주신 은혜라면 그 은혜겠구나 싶은 것이 있습니다. 민수기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