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친해지기] 창세기 #1 : 창세기를 읽을 때 '00'을 버려야 한다!
창세기라는 책이 우리가 가진 신구약 성경 전체 첫 번째 책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창세기는 사실 우리 교회 다니는 분들은 정말 창세기는 듣기도 원체 들었고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 아담 하와에서 가인, 아벨,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정말 많이 들었던 이름들이라서, 어쩌면 우리에게는 창세기가 꽤나 익숙한 책이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가 지루한 율법, 지루한 설교 이런 것이 아니라, 전체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는 긴박하게 넘어가는 사건들이다 보니 또 우리 창세기는 읽기도 되게 쉽다고 느껴지는 이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창세기를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어떤 것들을 알아두면 좋을까? 이런 주제로 나눠보려고 하지만 사실 나름 알고 있는 것이 있어서 도움이 된다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나누고 싶은 것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 늘 창세기는 잘 읽어왔으니 지금처럼 창세기를 읽되 한번 이런 것도 생각해 보자는 취지에서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창세기가 첫머리의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언제일까요? 그 '태초'는? 그 태초는 도대체 어떻게 찾아갈 수가 있는 걸까요? '태초에'라고 하니 정말 이 모든 세상이 지어지던 그 가장 처음 우리 과학자들에 따르면 빅뱅으로 이 우주가 딱 그렇게 시작을 했다는데, 정말 이게 맞다면 거기인 거지 아니면 지구 땅에 이런 생명이 살게 된 그때인 건지 참 이것도 간단하지는 않은 문제이죠.
이런저런 견해가 있지만, 히브리말로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쓰였지 않습니까? 히브리말로 창세기의 가장 첫 표현은 직역하자면 '한 처음에' '어떤 처음에' 이런 식의 히브리말의 표현이 거기에 쓰여 있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 이것도 역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그 처음이 아니라 어떤 처음이라니 그럼 처음이 여러 개가 있었다는 거야? 여러개 처음 중에 하나라는 거야? 이런 생각들도 생길 수 있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거 가지고 너무 큰 집을 지어서는 안 되겠지만, 제가 창세기 읽으면서 먼저 이걸 우리가 기억하고 가면 좋겠다 싶은게, 창세기는 그야말로 세상의 처음이야기를 하고 싶은 책이 아니다. 그거 우리 찾아가기가 되게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의 처음, 우주이든 지구이든 이런 것이 언제 처음 생겨났을까? 이거는 창세기를 아무리 읽어도 알아낼 수가 없어요.
'한 처음'에라는 이런 식의 머리말은 대체 언제인 건지 과학자들은 우주 나이가 최근에 우리 쏘아 올린 이 망원경 가지고 굉장히 많은 걸 알아낸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최소한 130억 몇 억 년 그러면 130 몇 억 년 전이라는 건지 아니면 지구와 연관된 40 몇 억 년 이런 걸 말하는 건지 이거 참 어려운 일이겠죠. 제가 나누고 싶은 것은 창세기는 하나도 과학적이지 않아요. 전혀 과학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다 보니, 성경 저자 자체가 그런 걸 신경도 안 쓰고 써요. 가령,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을 만드셨지 않습니까? 근데 넷째 날이 되면 해와 달과 별 이런 것들이 암들어지면서 징조와 사시와 일자 연한 이런 게 되었다. 즉 태양과 달 별 이런 것들이 만들어지면서 날짜가 생기고 달력도 생기고 시간의 흐름도 생기고 이런 이야기가 넷째 날이 되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근데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을 만드셨고 보시기에 좋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 그 저녁과 아침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거예요. 저녁과 아침은 우리 오늘 알잖아요. 지구의 자전과 공전하고 연관된 게 태양, 달, 지구와 연관된 게 자전과 공전 이런 것이지 않습니까? 근데 창세기 스스로에 따르면 넷짜 날이 되어야 이 태양, 달을 하나님이 만드셔서 두셨고 그러면서 날짜와 절기와 시간들이 생겨났다고 이렇게 표현이 있는데, 이미 첫째 날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 날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런 것이죠 이거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은 이게 안 맞는 말,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세기를 이렇게 적어 내려가시는 분은 이런 게 문제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겁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랬어요. 우리도 제가 예수를 처음 믿은 것이 고등학교 때니, 제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당연히 고등학교 때 고1때 창세기 읽었을 겁니다. 근데 그 1장 3정에 나오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가 이상하다는 걸 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도 문제없이 하나님께서 이 7일 동안 세상을 이렇게 창조하셨구나라고 믿었던 거고 그랬습니다만 어느 순간에 따져보니 이게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 제가 까달았는지 모르겠지만 따져보자니 복잡해지고 왠지 내 믿음에 크게 유익할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쓱 덮고 끝냈습니다.
지금 제가 이걸 나누면서 우리 이걸 시청하시는 분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 내려놓아야 할 것. 과학입니다. 과학 가지고 창세기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과학을 말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도 문제없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가인이 형제를 죽이고는 쫓겨나지 않습니까? 근데 쫓겨난 가인이 누군가랑 결혼해요. 도대체 그 결혼한 여성은 어디서 생겼지? 싶은 것이 창세기는 분명히 아담 하와가 첫 사람들이고 둘이 부부가 되더니 첫째 아들 가인 둘째 아들 아벨 이렇게밖에 안 나와요. 근데 가인이 쫓겨나더니 쫓겨나면서 사라들한테 죽을까 봐 겁을 내요. 우리 말해주고 싶잖아요. 형제님 가인 형제님. 인류가 4명이 있는데, 당신 아빠,엄마,당신,당신 동생, 당신 동생을 당신이 죽였기 때문에 인류는 당신까지 3명 남았기 때문에 아무 데나 가시라고 그리고 평생 혼자 살아야 할 거라고 왜냐하면 식구가 이거밖에 없으니까요 근데 가인은 쫓겨나서 사람들에게 죽을까 봐 겁을 내고 그리고 어딘가로 가더니 결혼까지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창세기는 이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써요.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 싶은데 창세기는 전혀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누고 싶은 것이 창세기는 과학을 말하거나 팩트를 말하거나 객관적인 무엇, 이거 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려는 것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뭔지?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왜 우리의 삶에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이 생겨났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창세기 앞부분들은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창세기 읽을 때 첫 번째로 내려놓아야 된 건 과학입니다. 아직도 과학을 붙잡고 창세기 이야기가 과학과도 다 맞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과학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창세기랑 과학이랑 맞는 게 있으면 거봐 하나님 말씀이야 그러고 창세기랑 과학이랑 안 맞잖아요. 과학이 뭘 몰라서 조금만 지나면 성경이 옳다는 게 밝혀질 거라고 이런 사람하고는 논쟁을 해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맞는 부분은 다 증거지! 그러고 안 맞는 부분은 두고 봐야 해. 이런 사람은 이길 수가 없는 일인 거죠.해서 우리 같이 보시는 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과학은 접으세요. 과학은 우리 성경 연구하는 사람들이 낄 영역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지질학자나 천문학자나 생물학자나 과학자들에게 맡길 일이지 우리가 낄 일이지는 않을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진화론 같은 이런 학문이 있지 않습니까? 이거 과학의 영역입니다. 이거를 우리 신앙 가지고 손쉽게 평가하거나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그래서 혹시 함께 보시는 분들 가운데 진화론을 거부하시는 분들도 있겠고 진화론을 받아들인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졌든 간에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게 되었는지 이건 것들을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걸 말한다는 걸 기억하시면서 성경에 나오시면 좋겠습니다. 본인의 과학적인 신념이 어떤 것이든 그게 관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거 내려놓고 알아서 개인적으로 간직하고 연구할 거면 또 연구하고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을 과학으로 맞추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학으로 성경을 공격하는 일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가령 제가 "요즘 참 저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혹은, "요즘 저는 하나님 은혜인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 그것을 과학적으로 당신의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말해봐!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이겠습니까? 그런 것 처럼 창세기를 과학으로 판단해서도 안 되고 창세기를 과학에 맞춰서도 안 되고 이것 우리에게 참 필요한 일이겠다 싶습니다.
[#구약과친해지기] 창세기 #2 : 정체성!! 우리는 누구인가? 왜 멸망했는가?
창세기를 읽으려고 할 때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사실, 이 이야기는 참 여러번 여기저기에서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제일 만만한 게 그렇습니다만 이순신 영화가 제가 지금 이 영상을 제작하는 시즌에 이순신을 다룬 '한산' 이라는 영화가 개봉 중입니다. 생각했던 만큼 흥행하지는 못했다고 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 같은데 하여튼 굉장히 많은 수가 본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이순신 장군을 다룹니다. 이순신은 조선 중기 사람입니다. 근데 이순신을 다뤘다고 해서 이 영화가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냐? 아닙니다. 조선 중기의 이순신을 다루지만 2022년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인 거죠. 이거 대번에 구별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 입니다.
창세기가 천지창조 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 창세기가 그때 쓰였나요? 창세기 마지막은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 창세기가 그때 쓰였나요? 그렇지 않겠죠. 가령 우리 창세기 다음에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출애굽기 당시에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 그때 쓰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이것은 한산이라는 영화가 이순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조선 중기에 기록된 거야! 만들어진 거야! 이렇게 표현하는 거랑 똑같은 허망한 논리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해서 창세기가 천지창조 때 쓰이지 않았고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때 쓰인 것도 아닐 거고요. 그다음에 창세기,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모세와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대를 다루지만 그때 쓰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또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제가 아직 한산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자주 하는 판에 일단 한산을 꼭 봐야 한다 싶긴 합니다만 아직 못 봤는데 명량은 봤습니다. 수많은 본 사람들이 명량에서 그리는 이순신하고 한산에서 그리는 이순신이 다르다고 해요. 이순신은 한 사람이에요. 그냥 이순신은 조선 중기에 존재했던 실제 인물이지 않습니까? 근데 그 실존 인물 그 사람이 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기록했던 난중일기나 다른 자료들을 이욯해서 명량과 한산은 전혀 다른 이순신을 그려내고 있더라는 거죠. 뭐가 달라졌나요? 이순신이 바뀐 게 아니라 이순신을 다루는 시대가 바뀐 겁니다. 명량을 만들 당시에 그 제작자와 그때의 관심 지금 한산을 제작할 때의 제작자와 우리 시대의 관심 이런 차이들이 똑같은 동일 인물 이순신을 꽤냐 다르게 그려내는 것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실린 내용은 정말 하나님이 세상을 이 땅과 하늘을 만드신 사람을 만드신 이야기부터 요셉의 애굽 시절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같은 분들이 옛날에 정말로 존재했던 사람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근데 아브라함이 오늘 하루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는 밤에 일기 막 적어놓고 그때는 이런 글자가 인류에게 존재했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구요. 그다음에 그런 글자들을 제대로 기록하고 본존할 뭔가가 있었을까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창세기의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우리가 왜 어려운 한자 말로 구두 전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입에서 입으로 전다래서 가령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앉혀놓고 옛날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이랬단다 저랬단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전해져 갔을 겁니다. 당연히 이 이야기들은 하나님 말씀이니 뭐니 전혀 그렇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라면 아이들한테 가령 우리 한국 사람들이 우리 전래동화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전래동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등 이런 것들을 아이들한테 이야기할 때 똑같은 그림책을 보고 아빠가 야기해줄 때 하고 엄마가 이야기해줄 때 하고 똑같은 내용이겠습니까? 않그럴 겁니다. 이야기하다가 막 들어가요 더 재밌게 하고 생생하게 하느라, 막 들어가요,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이 들어가잖아요. 왜냐하면, 구두로 전해지다 보니 이게 오늘날 우리가 무슨 주기도문을 달달 외워서 전달하고 주기도문을 딱 쓰인 뭐가 있잖아요. 몸통이 딱 있으니 정확하게 전달이 되겠지만 옛날이야기들은 그렇게 정확하게 입에서 입으로 이런 거 자체가 불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이게 하나님 말씀 아브라함이 75세 하나님 부름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났더라가 이건 하나님 말씀이야 일점일획도 바꾸지 말고 그대로 전달해, 그래서 막 외우다시피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다. 이런 일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일 겁니다. 이런식으로 창세기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전달되면서 더 들어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빠지기도 하고 또 들어가기도 하고 이런 변화들이 생겼겠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에 가서 글로 기록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 글이 기록되는 시기에 이 신앙 공동체가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이야라고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 글은 바뀌지 않아요. 바뀌지 않고 딱 고정된 채로 두고두고 전해지는 이런 일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해서 창세기의 배경은 조선 중기에 이순신처럼 천지창조부터 애굽에서 요셉까지 이런 상황을 등장인물들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창세기는 처음부터 입에서 입으로 수많은 변화들을 겪으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거고요. 최종적으로 이 창세기의 내용들이 이거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은혜이고 특별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지고 확정되고 그때부터는 고치지 않게 되고 추가하지도 않게 되는 그게 언제냐? 빨라야 바벨론 포로기일거다는 것이 오늘날으 창/출/레/민/신 5권의 책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거의 공통된 견해라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은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바벨론 포로기 즉 주전 587년 경에서 부터 주전 420년 경에 지금과 같은 형태로 글로 쓰여져서 확정되고 특별한 지위를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의 형편 등을 아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자 이 백성들은 자기들이 처한 현실을 고통하고 괴로워하면서 충분히 슬퍼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왜 망하였는가를 반성하겠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럴때 이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뭐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십년 후에 돌아오긴 하지만 더 이상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인체로 돌아오고, 우리가 살아가는 땅이 이방이 다스리는 것이고, 임금도 국가도 사라진 상태에서 그럼 우리는 뭐지, 나는 뭐지 하는 정체성,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묻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모세오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정체성입니다. 더 이상 국가로 우리를 규정할 수 없고, 나라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땅으로 만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우리도 살지만, 페르시아의 정책으로 이방인들도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사라지고 나자 그럼 우리를 규정하는 것이 뭐지? 땅이 아니라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 하나님의 은혜, 그럴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가지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또 하나가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 종되었던 집에서 건져내셨고 그의 백성 삼으셨다.
조상들에게 주신약속(창세기), 애굽에서 종되었던 우리를 구하셨던 하나님(출레민신) 이것이 우리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과친해지기] 창세기 #3 : 창세기에는 '00'가 없다!
뿌리를 찿고자 하는 노력, 그래서 거슬러 올라간 것이 창세기, 사람은 우리 하나님이 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받은 존재구나.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이거 창세기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 양반들 조상들 이야기를 하는데, 이 양반들 특징이 뭔가요 영웅이 없어요. 근데 우리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우리 알잖아요 허물많은 사람들, 지금 나랑 별로 큰 차이가 없어보이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존경하는 사람은 요셉이지만, 자기랑 동일시 되는 사람은 야곱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허물많은 사람' 입니다. 21세기 지금 읽어도 놀라운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으면 우리가 누구이다라고 제시된 사람들이 너무 작아요, 특히 아브라함 같은 경우 75세게 길을 떠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99세 100세 되니까 자식을 못낳아요, 이러는 거 보니까 우리랑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노년에 부름받는 아브라함, 이게 말해주는 건 영웅따위는 필요 없다는 겁니다. 80세 부름받은 모세, 나이든 노인으로 표현되는 바 사람의 힘, 사람의 재주, 사람의 실력 사람의 능력 이딴거 하나도 필요없다는 거죠
창세기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우리됨은 우리의 잘남이나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대단함이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 그게 포로기를 살아가던 또 식민지인 이 땅에 다시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려하는 사람들이 나누고 싶은 것라는 거죠 우리 작아도 된다. 우리 망할놈의 나라 따위 없어도 된다. 우리 볼품없어도 괜찮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을 봐라, 이러했던 사람들인데 근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지 않느냐. 우리 괜찮다 언제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한 걸음 나가기 이거 말하고 싶은 책이 창세기입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키워드는 나그네 입니다. 창세기는 다 쫓겨나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은 거기서 마저도 또 동쪽으로 떠나가고, 아브라함은 멀쩡히 살던 데를 또 떠나고, 떠나와서 가나안 땅에 와서는 머물고 사네요, 야곱은 이동하여 또 저 멀리 메소포타미아에 갔다가 다시 이동, 이삭도 계속 우물 찿느라 계속 이동, 요셉은 급기야 애굽으로 이동 창세기 전체가 나그네 낫선 땅으로 가고, 이거 딱 뭔가요 포로기를 살아가는 이스라엘인 거죠. 창세기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의 '떠돔' 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실수와 허물이 많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가시는 지 그것을 창세기가 보여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키워드를 가진 창세기 나그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참 중요한 표현이겠구나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땅을 나그네로 어떻게 우리가 믿음으로 걸어갈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더라.
창세기는 주어진 책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형성된 책이다. 만들어져 가는 책이다. 그러니 창세기를 읽으면서 포로기의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필이면 여기다가 넣었을 까? 그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것을 계속 상상하면서 창세기를 읽어 볼 만하다 싶어요
창50:20 만민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 우리의 모든 고초는 우리를 통하여서 만민을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미리 보내심 이거 창세기가 독자와 청중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그때 사람들은 잘 알아들었을까? 이걸 잘 알아들었다면 열방을 향한 이스라엘이 되는 건데, 그것을 또 못알아들으면 또 어떻게 되나요? 예수 믿고 나 복 받는 삶, 예수믿는 기독교인은 복을 받고, 예수 않믿는 사람은 쫄닥 망하는 삶, 이런 못되 빠진 배타적이고 자신만 구원 받고 살라고 하는 쓰레기 같은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선민은 왜 선민이냐 그들을 통하여 열방을 회복시키는 하나님 그게 선민입니다. 열방이 않겪는 그 고통을 지는 겪어요, 열방이 흘리지 않는 그 눈물을 지는 흘려요 이게 선민입니다. 세상이 웃을 수 있도록 피눈물 흘리며 길을 가는 사람 그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뜻이지 않겠습니까? 요셉이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창세기 50장에 형들을 향해 나누는 요셉의 말이 딱 그점을 간결하게 요약해 주고 있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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