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iar History/기독교역사

기독교 역사

Four Seasons Daddy 2020. 12. 5. 21:30

역사

고대 기독교

초기 기독교 예수 팔레스타인지역에서 활동하였다는 때와 그의 십자가 처형 이후[주해 1]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동서교회의 분열 이전까지의 기독교를 말한다. 초기 기독교는 베드로, 파울로스와 같은 사도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지만 특정한 조직이나, 교리, 건물 등이 없었고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으며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4]는 주장이 있는 반면,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지역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었고,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를 것을 교훈하였으며 배교자 혹은 부도덕한 신자에 대해서는 경고하거나 제명해야 됨을 각 회중들에 권고하고 편지한 내용 그리고 교리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 연로자들의 회의가 소집된 일, 또한 요한에 의해 기록된 요한의 묵시록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교리 일치 여부와 역사, 행위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 등 신약 성경의 정립 과정을 보면, 이미 기원 1세기에 매우 체계화된 조직과 교리가 형성되었으며 완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5]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6]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였으며[7],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 로(

)를 그린 후 전투에 승리하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8]

316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9]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일곱 공의회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첫 일곱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중요 신학적인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교였는데, 이것은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교회신학적 배경과 교리, 교회 조직과 예식 등을 정비하였음을 보여준다.[11]

 

고대 후기 기독교의 분화

 콥트 교회, 아리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초기 일곱 번의 공의회 과정을 통해 보편교회주의(공교회주의)가 만들어짐에 따라 이들과는 다른 신학을 가져 이단으로 배척된 교파들은 분화되어 서로 독자적인 전파와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된 이후에도, 칼케돈 공의회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공인하자 단성설을 주창한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보편교회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였고, 689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자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선교를 통하여 당나라까지 기독교를 전파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2]

 

중세 기독교

기독교의 전파

중세 초기 서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동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기원후 423년 성 파트리치오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고 하며[13], 5세기 후반에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서유럽 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14], 잉글랜드에는 600년 경 켈트족의 기독교 전파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598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였다.[15]

820년대에서 830년대 초, 브레멘 함부르크 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 사업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16]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 무렵이다. 동로마지역 교회인 동방정교회 키릴로스 메토디오스 형제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 대모라바 왕국 등의 동유럽 국가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선교를 위해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의 내용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이 문자가 키릴 문자의 기원이다.[17]

 

교회의 대분열

로마제국의 천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4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으로 자연스레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1세기까지 기독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로마,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의 5개 지역의 연합체였다.[18] 하지만 서로마제국 지역의 왕권 강화와 7세기 이후 동로마제국에 대한 이슬람의 침략, 로마지역 교회의 독립적 활동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중심의 연합체와 로마교회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분열의 기점으로 로마제국의 교회 중심 대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대주교(대감독)와 로마 교회 대주교 간의 상호 파문 사건이 일어났다.[19] 동서 로마 지역의 교회 대립 이후,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당시 로마교회의 제4차 십자군이 기독교 지역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 점령하기까지 하였다.[20] 이는 로마제국 연합교회의 네 지역 교회와 로마지역교회의 완전한 단절을 낳은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2002년 1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이 1204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를 점령함으로써 동방정교회와의 관계를 완전 단절시킨 것을 공식 사과했다.[21]

 

종교 개혁

16세기에 들어 서방교회가 지배하던 서유럽 북유럽에서 서방교회 종교개혁 지지파와 반대파의 대립과 분리가 발생하였다.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 서방교회 제도권 세력은 로마 가톨릭 천주교회로, '개혁 지지파'는 개신교회로 분리되어 서방교회가 여러 개의 교단으로 구성되는 교단 교회가 되었다.[22] 이로 인해 유럽 각지에 16세기에 서방교회 개혁 지지 세력인 복음 중심주의 개신교들이 형성되고, 개혁 반대 세력인 교황중심주의인 조직과 기구 중심의 천주교회와 서로 분리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전통에 따라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리했지만,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의 부정 부패에 대한 인문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의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당수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허나 최종적으로 가톨릭 성직자의 부패와, 성경의 해석에 대한 논란, '면죄부'(대사)의 폐단 등의 이유로 인해서이다.[주해 2] 특히 당시 가장 큰 논란을 부른 것은 교황청의 정치적 자금과 바티칸 증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 문제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죄는 고해성사로 용서가 되고, 다만 잠벌을 보속을 통하여 갚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을 면죄(대사)라고 하는데, 현대에는 주로 기도나 선행 등을 보속으로 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 지방에 선포되었던 면죄(대사)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둘째, 적어도 지정된 일곱 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양발,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셋째,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세번째 조건이다. 가난한 자는 헌금을 대신할 수단이 있다고 명시를 하였고, 교황 역시도 "헌납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 ."라고 언급했으나 대사를 악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성직자가 등장하고 곳곳에서 면죄부 전문 판매원이 출현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23] 이로인해 발생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153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하였다.[24] 헨리 8세의 수장령은 같은 해 잉글랜드 교회 내의 주교에 대한 임명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선포한 주교서임법과 함께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공식화 한 것이었다.[25]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신부였다.[26] 평소 그는 다섯 솔라에 의지하여 오직 성서와 진실한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27]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당시 로마 가톨릭의 대사 남용을 비판하였고, 이후 종교 개혁 운동을 하게 되었다.[28]

루터와는 별개로 프랑스 리용출신의 장 칼뱅은 1533년 성경의 잘못된 해석을 이유로 가톨릭에 반하여 로마 가톨릭을 떠나 칼뱅주의 교회의 신앙을 출발시켰다.[29] 1536년 3월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30] 칼뱅은 이 책에서 이중 예정설과 같은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다. 칼빈은 장로교회 개혁교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영국성공회의 신학(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정립하는데 사용되었다.

로마 가톨릭은 반종교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스스로 자정 노력을 하는 한편, 기독교의 확산에 탄압으로 대응하였다.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가톨릭 신앙 교리의 명확한 한계를 정립하기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31]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 찬성파의 협상을 거절하고, 찬성파과 반대파를 구분지어 서방교회는 통합되지 못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찬성파와 반대파들은 격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위그노 전쟁[32], 30년 전쟁[33]과 같은 종교 전쟁을 치렀다.

 

근대 기독교

대항해 시대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가 세계 각국과 무역을 하는 한편, 식민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 역시 세계로 전파되었다.[34]

한편, 16세기 이후 19세기까지 개신교에는 침례교, 퀘이커, 감리교 등 다양한 새로운 교파가 세워졌다.

 

현대 기독교

소련 치하에서 억압을 받았던 러시아 정교회 페레스트로이카이후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다.[3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과 로마 가톨릭교회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개혁되었다.[36]

19세기 동안 미국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부흥운동이 있었다. 대각성운동이라고도 불리는 부흥운동은 D.L. 무디, R.A. 토레이, J.W. 체프만 등의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일어나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37] 이들은 초교파적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38][주해 3]

20세기에 들어 기존의 신학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 자유주의 신학[39], 해방 신학[40], 기독교 근본주의[41] 등의 신학들이 영향력을 키웠다.

또한 갈라진 교파간 대화와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42]

 

한반도 전파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초기에 '야소교'(耶蘇敎), 곧 예수교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에서, 당시 청 제국에 와 있던 로마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국제 수도회 조직 가운데 하나인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를 '야소교'로 표기한 것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43]

한반도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시기는 천주교가 당시 조선에 전파되었던 시기(1784년)로 본다. 그외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설로는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예수회의 전교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설과[주해 4], 경교 신라에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주해 5]

한국의 천주교는 이승훈 북경에서 천주교회 세례를 받은 이후 자발적으로 전파되었다. 선교사나 성직자의 선교활동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례는 조선이 유일하다.

1885년 개신교회인 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 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로가 선교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걸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정교회가 전래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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