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
로마서 9:1~13
선택받은 이스라엘 롬9:1~18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
l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l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안에서 무한한 것이며 이 사랑으로 불가능할 것이 없다면 도대체 이스라엘의 거역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예수를 거부했고 아직도 그들은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데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저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가?
l 또 이스라엘이 거부한 일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떠한 실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꺾을 수 없다는 말은 대단히 귀한 복음이지만, 그렇다면 잘한 것과 못한 것이 아무 상관없다는 말인가?
l 이스라엘은 교회의 뿌리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역사는 기독교 복음의 뿌리였다, 이방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뿌리로 삼고 펼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었다. 이 뿌리 위에 우리를 세우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면 그 뿌리도 하나님이 보전하실 것이다.이런 내용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l 창 28:10~15
l 야곱은 갑자기 어딘가에서 붙잡혀 덜컥 불려나와 회개와 결심으로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전부터 예정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지나 야곱이 오도록 준비하셨고 그리하여 야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l 야곱에게 또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너를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너’가 바로 야곱입니다.여기에 아브라함도 이삭도 들어갑니다.
l 약속의 자녀에서 약속이란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신실한 성의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오해한 것같이 이방,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는 데에 쓰이지 않습니다.
l 롬9장13절에’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에서 선택이라는 말에서의 강조점은 선택을 받은자가 있고 버려진 자가 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스스로 버린 자들입니다.
l 하나님이 함께하신고 복을 주신 자의 인생과 그 끝이 무엇인가를 대조하하기 위해 하나님없이 사는 자와 하나님을 모신 자를 대조하는 것입니다.이는 운명을 가르는 대조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거부로 이방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l 하나님의 크신 인도와 많은 개입을 경험하는 특권을 누린 이스라엘마저 하나님을 거부하게 된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방을 불러내신 것을 보면, 이스라엘도 당연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결론에 바울은 도달한 것입니다.
모세와 요셉의 하나님
l 출 3:4~8
l 모세는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 민족의 억울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 사십 세에 자기민족을 위하여 일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를 편들어 주지 안하서 그는 실패했습니다. 애굽에서 도망처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냅니다. 이제 그저 팔십 먹은 한 목자에 불과한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l 여기에 등장한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개입이 보이십니까,하나님의 개입,로마서 9장에서 보는 약속과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직접행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 모든 존재 속에,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l 시105:16~19
l 지금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한 일에 뛰어들어 오셨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부와 무지와 배반에 들어오십니다. 직접들어오셔서 그것을 고치십니다.이것이 예수의 오심 곧 성육신입니다.
l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팔 한 번 불고 “어희죄를 다 사하노라”하며 말로 그렇게 끝내시지 않았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이 되어 우리의 인생에 뛰어들어 오셔서 죄가 권세를 잡고 있는 이 땅을 살아 내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거부와 오해와 멸시와 박해와 수모를 견디고 사셨습니다.그렇게 우리가 잘못 만들고 잘못 간 깅에 실제로 들어 오셔서 우리를 붙잡아 회복하십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
로마서 9:14~29
하나님의 주권섭리 9:19~33
성경이 말하는 선택
l 로마서 9장에서 11장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 자체로 외면될 수 없는 역사의 큰 부분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담대히 말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l 이스라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주제는 계속 이야기 해 온’선택’이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금석이 됩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주인인 아버지 하나님
l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이 은혜를 베풀기 위한 찾아오심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열을 나누거나 호불호를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이자, 그의 의지입니다. 은혜라고 칭하는 이유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l 로마서 3장21절 이하에서는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을 5장8절 이하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이루신 구원과 완성하신 십자가를, 또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은 더 높고 넓은 은혜를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8장 38절29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l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 은혜입니다. 다함이 없는 은혜, 베풀고 주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l 마20:12-15
l 눅 15:20-32
l 우리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바울의 관점을 통해서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의 뜻
l 왜 내가 이 조건과 환경 속에서 요 모양 요 꼴로 살아가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구체적 역할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마음껏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l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절대적 조건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자들이다, 선택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인생이라는 뜻이다. 선택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는 개입하고 누구에게는 개입하지 않고의 차별이 아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자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l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드러난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성의와 의지를 보라,
l 이스라엘 중에서도 결국’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여기서 남은 자란 다수가 아닌 적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성의와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신자가 서 있는 자리
l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붙드심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해서 여러분의 감옥이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이 감옥에서 낙원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옥이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을 갖게 됩니다. 믿음,사랑,웃음,희생,섬김이 생겨납니다. 이는 보상을 위한 조건이 아니고 윤리적 확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곳을 현실에서 실제로 드러내는 증거인 것입니다.
l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일하심,하나님의 경이로운 경륜과 인도를 여러분 각자의 생애에 붙들어 매십시오. 자랑할 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물과 한숨 속에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을 채우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막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고 타협하시지 않고 포기하시지 않는 지극한 성의이며 사랑입니다.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로마서 9:30 ~10:4)
행위로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 30-33
율법과 은혜의 문제
l 로마서 10장에서는 9장에 이어 이스라엘의 구원을 계속 논하고 있습니다.이스라엘은 예수를 거절했고 구원을 거부했으므로 당연히 구원에서 제외되어야 맞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약 내내 일하신 것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말인가,하는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l 우리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구원을 얻었는데 이것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그만이라는 말인가, 하는 질문까지 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l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스라엘은 당연히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거부가 그들을 통하여 증거될 복음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으나 약속된 구원이 이방에게까지 넘친것처럼 이스라엘의 배반과 거부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도 마침내 구원하실 것이다.
l 출 19:1-6
l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율법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먼저 주어집니다. “내가 애굽에 대하여 행한 일과 너희를 불러내어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것을 기억하라’가 먼저나옵니다.
l 너희를 불러낸 것은 다만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노예의 자리와 세상의 더러움에 짓눌려 있던 자리에서 너희를 꺼낸 것은 너희를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하고 너희에게 거룩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다,라는 말씀입니다.
l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 주어지는 명예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율법의 의도
l 율법은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면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는가에 대한 요약이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아주 세밀하고 자상한 설명입니다.
예수 없는 믿음
l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으로 자기 의를 강조하느라고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목표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영광으로의 부르심을 놓친 것같이, 이제는 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율법을 대신하여 조건으로 사용됩니다.
l 로마서는 이미 완료된 구원이 시간상 역순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예수의 필요를 알기 전에,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l 우리가 예수의 필요성을 알고 구하기 전에, 준비하기 전에, 알지 못한 때에 이루어진 구원을 로마서 5장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l 믿음은 행위의 법칙이 아닙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그때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시는 신적 방법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은혜’라고 합니다
l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고도 예수를 거절했던 것처럼, 신약시대의 교회는 믿음이라는 것을 들어 예수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모두를 기다려 주시며, 인간의 행한 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l 교회가 아무래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윤리적으로 못나고 성격적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지 때문에 그들의 열심이 교회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해 버리고, 밟아 버리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해서는 안 됩니다.
l 시편 51편은 이런 고백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짓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려놓지 않고 나를 고쳐 놓지 않으면 저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시온에 선을 행하소서,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소서,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이 쌓아 주소서, 우리가 쌓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시입니다.
l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적용한 죄목이 ‘신성모독죄’입니다. 사람이면서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했다는 것이죠. 자기네가 믿는 하나님을 예수가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심과 열심이, 그들의 의와 법이 얼마나 하나님과 상관없는지 예수 앞에서 그 정체가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l 여러분의 믿음과 서로를 향한 조언이 예수라는 이름과 결부되어 있는지, 아니면 분리된 채 심판을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맺혀지는 열매
l 자기 증명을 하려는 자들에게는 예수가 걸림돌이 됩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지켜서 구원을 얻게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지위와 명예로 부르셨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로마서 10:5~13)
조건이 아닌 은혜로 주어진 율법
l 오늘 본문에는 간사할 수 밖에 없는 은혜로운 약속이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11절의 말씀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1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l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l 롬10:5-7 예수를 모셔 내려오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고, 예수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무저갱에 내려가서 그를 끌어 올릴 필요 없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았을 때에 예수가 오셨다. 우리가 무능했으나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
l 롬 10:8 ‘그러면 우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l 신 30:11-14
l 여기서 말하는 명령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명령입니다. 율법과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이 멀리 있지 않다. 이는 깨달음이나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에게 주어진 것이다,네 옆에 있으며 네 앞에 있다.그러니 행하라, 이렇게 됩니다.
l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오해했고 그것은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율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근거한 것이라서 이런 오해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준 조건으로 보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심판받지 않으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런 식으로 들립니다
l 신명기의 이 말씀은 율법이 조건이 되어 이를 지킨 자에게는 구원이, 지키지 않은 자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나는 네 후손에게 하나님 되리라’는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소셔서 종살이를 그치게 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l 이미 구원받은 자리에서 알아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과 명예에 관한 이야기가 주어지는 때입니다.이렇게 주어진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l ‘공부해라’그 시절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에게 ‘너는 공부나 해.너보고 돈벌어오라고 하지 않을게.그러니 공부나 열심히 해라’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이말을 들은 자식은 ‘공부를 못하면 쫓겨나겠구나.공부를 잘 해야만 부모님의 자식이 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l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위대한 일이며 그 자체로 자랑입니다.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명예로운 인생을 살아갈 명예로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내용을 채울 수 없는 존재였으며, 따라서 당연히 영광스러운 삶도 살아 낼 수 없었습니다.
l 신명기 30장에서 율법이 네게 왔다. 이 말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같이 공부하려고 선생님이 오셨다’는 말에는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더 이상 껌 팔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공장에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교육의 원래 목적은 훌륭해지라는 것입니다.
l 율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지고서 훌륭해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율법에 걸려 넘어진 것이지요 로마서9장33절에서는 예수가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l 예수가 걸림돌이라는 것은 어떤 가치와 덕목도 예수를 통과하지 않은 것은,예수와 함께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의미입니다.
l 우리가 자주쓰는 덕목인 정의,평화,진리,진심,사랑 이모든 것이 예수와 함께하지 않으면,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예수에게 담겨 있지 않으면, 죽음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에게 허락된 영광
l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와 순종으로 율법의 영광을 실체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l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내어 주시는 영광,사랑하여 희생하시는 영광,우리를 향한 당신의 거룩하고 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요서하시는 영광입니다. 예수가 이 영광을 이루어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l 에수를 믿으면 손해도 많이 봐야 하고 양보해야 하니 단지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l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위협하고 도전하고 회유하는 현실 속에서 여러분이 하나 서 있음으로 믿는 자와 믿지 않은 자 모두에게 예수 믿는 자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l 죽음을 이길 힘을 갖고 있다는 것과 모든 부끄러움과 모든 욕됨과 모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신실함과 오래 참으심과 용서와 기적을 행하고 계심을 아는 자답게 걸어간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l 그래서 신명기30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신명기30:15-16‘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l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우리 앞에 두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타협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것이 더 쉽습니다. 떠내려가면 그만이기때문입니다.
l 엡4:17 – 19
l 윤리적 구별을 언급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본질은 허비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존재와 인생이 다만 낭비되고 소진되어 없어지고 마는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북음이란 무엇입니까? 없어지는 것입니다.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허비하는 삶을 살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l 엡5:18 ‘술 취하지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허비되는 삶과 채워지는 삶을 비교하는 구절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바래지고 소멸하고 썩어 나갈 수밖에 없지만, 생명은 자랍니다. 자라면서 채워집니다. 예베소서 전체에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l 엡 1:3~14
l 살아 있는 자,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들에게 허락된 것이 영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l 엡 3:14-19
l 살아 있는 생명의 영광입니다. 생명으로 나아가는 자와 사망으로 나가는 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너,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런 뜻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새 생명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l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l 우리는 무엇을 하느라 이런 값진 것을 놓치고 있을까요? 윤리적 완벽을 추구하려다 놓치고 있습니다. 나무가 자기에게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뽐내지 않은 채, 자기가 직선인지 아닌지에만 매달려 무흠하고 완벽하려는 싸움을 하느라 생명의 부요함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l 율법에서 그러했듯이 예수 믿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어떠햇습니까?시내 산에 이르자 율법을 받게 되듯이, 예수가 오시고 나서 우리가 지금 믿는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구원입니다.
l 롬 10:8-11
l 지금 실현되어 있다,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이미 오셨다. 우리가 좇아가 어디에 가서 찾아와야 할 예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벌써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이 일의 증인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오시면 믿기로 한 것이 아니라, 믿어서 이 자라에 나온 것입니다.
안심을 넘어 책임으로
l 신자들이 하는 가장 큰 오해는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을 의심하는 것이죠. 완벽하고 싶고 안심하고 싶어서 믿음을 누리지 못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 산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제는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l 롬8:1-2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l 예수가 오셔서 죽음을 깨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새 세상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제는 그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고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인도 받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 이야기 합니다.
l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받으리라, 네가 예수를 알지 않느냐, 그를 믿지 않느냐, 그렇지 않느냐, 너희가 어떻게 자유인이 되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는 결코 행할 수 없었던 현실,하나님이 부르셔서 자유인만이 누릴 수 있는 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지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l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 자발성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종의 신분에서는 이 자발성을 갖지 못합니다. 선택의 기회를 가진 자만이 자발성이 있습니다.
l 자유가 주어졌고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 자유를 꼭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데로 결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유가 있으면 권리만 주장하려고 하는데, 자유나 권리는 책임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l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일 안하고 쉬는 것밖에는 떠올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자유는 좀 더 성숙한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l 자기의 시대와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이해한다면, 책임을 기꺼이 지는 것이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모가 되는 것,시민이 되는 것,이웃이 되는 것,이 모든 것이 다 권리이게 됩니다
l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은 명예이며 사랑입니다. 오래 참는 것,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것,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온유하게 대하는 것, 기다리는 것,이와 같이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l 기독교 신앙의 가장 고급하고 핵심적인 특징은 책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명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십자가로 설명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율법의 마침이 순종과 죽음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l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길인지 모르면,우리는 신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예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l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 말씀을 통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늠름하게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이 세상 앞에 여러분이 가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책임과 자랑으로 누리기를 바랍니다.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
(로마서 10:14~21)
믿음으로 누구든지
l 계속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입었으나 예수를 거부한 한 민족의 운명을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를 못 박았고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희한하게 복음은 이방에게로 넘어갔습니다.
l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것인가, 이 질문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운명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입은 우리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l 하나님은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포기하실 수 있는가, 우리가 끝까지 반대하고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변개될 것인가,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그래서 이스라엘의 운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l 바울은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확신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으로 구원이 넘어갔다. 이 구원은 아무것도 아니며 무지한 상태에 있던 이방에게 허락된 은혜이다. 이렇게 무지한 자에게도 구원이 허락되었으니, 알지만 거부한 이스라엘에게도 은혜가 승리할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다,라고 단언합니다.
l 이 구원에 대해 로마서 10장은 ‘누구든지’라는 단어로 선업합니다. 11절에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또한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언합니다
l 여기서 나오는 ‘누구든지’는 ‘누구라도 괜찮고 아무라도 좋은’이라고 무한히 열어 놓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 뒤에 나온 ‘그를 믿는 자는’으로 묶여 그 범위가 제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l ‘누구든지’라는 말은 ‘믿음으로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율법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시사해 줍니다.
l 복음에 담긴 은혜의 무한함에 대해 들어도 우리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우리끼리 이상한 계급을 만들어 구별 짓습니다. 개나 소나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싫은 것이죠 이런 편협한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잘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l ‘누구든지’라는 말은,’믿음’이라는 말이 그랬던 것같이, 우리가 사는 인생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l 롬 10장 14-15절에는 믿기 위해서는 들었어야 하지 않는가, 듣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말씀을 전하려면 그를 보내신 구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이 질문은 믿음이 우리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온 것임을 가리킵니다.
l 복음은 밖에서 온 이야기입니다. 누가 보내서 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까? 보내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쫓아가서 만난 분이 아니며 우리가 지하에 내려가서 끌어올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었습니다.
l 이사야 52장 15-16절 ‘보내심을 빋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한 자들이 얼마나 귀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l 곧바로 이어서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고 아무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우리 손에 죽으셨습니다.
l 하나님은 그럴 줄 아시면서도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보내시고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신 후에 구원이라는 결과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인 우리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감싸 안아 부활로 반저하신 것입니다.
l 이것이 복음입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고 구원받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으 은혜로 새 생명을 얻은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내가 한짓이 무엇인지, 예수가 무엇을 이루어주셨는지를 깨달아 통곡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l 자신이 전에 얼마나 패역한 존재였는지를 알고,이제는 누구의 품에 안겼는가를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강요할 수 없습니다. 강요로는 회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품에 안기기 전에는 무엇을 갖다 대도 회개하지 못합니다.
l 그런데도 우리는 이 문제를 계속 오해합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을 오해합니다. 아무도 몰라보고 아무도 듣지 않고 모두가 거부한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신 예수
l 마 13:10-15
l 이스라엘 백성이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자기네 마음이 변할까 봐, 자기네 자부심이 무산될까 봐,자기네 가 알고 있던 것이 틀렸을 까 봐,계속 고집을 부린다고 합니다.그런 후에 이 말씀이 나옵니다.
l 마13:16-17
l 거부하는 백성들, 말 안 듣는 백성들, 자기들의 고집을 세우기 위하여 기를 쓰고 반대하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전하신 후에 우리가 믿는지 안 믿는지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우리가 듣는지 안 듣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일을 하신것도 아닙니다.
l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하고 반대하고 고개를 돌리고 기를 쓰고 반항하는 이들에게 주께서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또한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l 행위가 아닌 것,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당신의 은혜와 능력과 성실로 밀어붙이신것,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복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구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l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차별이 없는 은혜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실하시고 은혜롭고 자비하신 것이 우리는 싫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대로 갚아달라고 합니다. 계급장을 붙이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못난행동입니까.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l 한국교회는 이런 식으로 신앙의 참된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현실을 신앙으로 살아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신앙을 성적표로 확인하고 석차만 매기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l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보세요. 무엇이 겁나십니까? 세상이 교회를 욕하는 것이 검나십니까? 세상은 원래 예수를 붙들어 매고 죽인곳 아닙니까?
l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28장에 ‘나에게 순종하라.그러면 너희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다. 나를 거역하면 나가도 저주를 닫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는다’라고 하신 이야기의 끝자락이 신명기30장입니다.
l 신 30:15-20
l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복이며 명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다 저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l 세상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생명과복을 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저주와 사망뿐입니다. 신자가 되어야 비로소 이 선택 앞에 설 수 있습니다.
l 자유가 주어집니다. 너는 내 백성이다. 내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복이며 명예인지 알고 그 인생을 살기 바란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이는 책임이나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누구에게나 찾아가는 인생
l 이제 제 나이쯤 되면 인생이 짧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보냈는지 각자 한번 돌아보세요. 우리가 그토록 매진하고 매달렸던 것들 중에서 참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까?
l 세상이 거짓이라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세상은 사망밖에는 결실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얼마나 헛됩니까? 공부 잘해서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의 체면치레에 불과할 뿐 거기에 진정한 낙이 있습니까?
l 왜 여러분은 예수 믿는 명예를 아직도 모르십니까? 왜 밤낮 억울한 표정으로 다니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발에 생기 무좀 낫게 해달라는 하찮은 기도가 신앙의 전부입니까? 어쩌다 그런 가난한 신앙을 갖게 된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보면 스스로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 왜 깨닫지 못합니까?
l 성경은 예수가 죽으신 것은 우리라는 존재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노라. 이말은 너희 까딱 잘못하면 죽는다, 그런 협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l 나를 따라 이 길을 걸어라, 거절하면 그것이 얼마나 큰 손해이며 비극인지 알아라,그러니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나 없는 길을 간다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겠다, 나 없이 가는 길이 어떤 비극인지, 그길이 얼나마 허망하고 손해인지 내가 반드시 너한테 가르쳐 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l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우리의 반응을 뚫고 극복하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는 것입니다. 순서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이 길을 걸으면 구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읍니다.
l 여기는 홍해를 건너온 시내 산입니다. 자신이 얻은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 내는 것이 자랑인지를 모르면 안 됩니다.
l 이 자리는 ‘누구든지’되는 자리입니다. ‘누구든지’란 아무것도 아닌 자를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하나님이 찾아 들어와 그의 반응과 이해와 결단이 있기 이전에 구원을 베푸십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날 리 없다고 여겨지전 자리에서 말입니다.
l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53:1)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나타나신 모습이 우리으 기대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하고 오시는 이가 메시아일 리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죽어 버리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얼마나 굉장한 길인지 우리는 압니다
l 이제 하나님은 ‘누구든지’를 위하여 ‘누구든지’를 보내십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0장대로 15절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5
l 이 말씀에서, 사명에 불타는 열정적인 선교사가 기쁜 얼굴로 복음 전하러 뛰어가는 모습을 쉽게 연상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스데반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깁니다
l 그리고 그날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다 흩어집니다. 여기서 대체 무엇이 아름답습니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습니까? 쫒기는 발이며,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가는 발입니다.복음은 세계에 퍼집니다.
l 우리는 이런 것이 싫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있는 것이 싫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같지 않은 현실, 나 자신도 한심스러워 보이는 일상,떠밀려 가고 짓눌려진 인생이 분하고 억울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해 주세요, 지위를 주세요, 돈 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을 단지 저 자신만을 위해서 쓰지는 않을게요,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말입니다.
l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짓밟아서 보내십니다. 빈대떡을 만들 듯이 맷돌에 갈아서 보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보냄 받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보내어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찾아가십니다
7-10)
l 이를 개닫지 못하면 세상에 대하여 밤낮 떠는 것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l 요즘 이런 염려를 많이들 합니다. 이러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 아닐까요,하면서 다들 걱정합니다. 어느 교회는 어떻고 ..전전긍긍합니다. 이게 무슨 한심한 비명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 죽으면 기독교가 망할 것 같습니까? 이런 바보 같은 신앙을 도대체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시간 속을 살아 내는 인생
l 히브리서 5:7-10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l 예수께서 당신의 일을 어떻게 이루셨는지 보십시오. 모두에게 찾아가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께 요구하셨던 길이 무엇입니까?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가는 것,제한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알아보도록 공중에 전단을 날리고 하늘에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에 붙잡히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붙잡히는 것이죠
l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 매이십니다. 만날 수 있는 자들이 제한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만나십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아닌 자들 곧 ‘누구든지’와 함께 일하십니다.거기서 부활을 만드십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서, 죽는 자리까지 순종하셔서 거기서 반전을 이루십니다.
l 예수님이 공새애를 시작하면서 받으신 시험이 무엇입니까? 그 시험은 모두 시간을 초월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시간 속을 걸을 필요는 없잖아,돌을 떡으로 만들어라,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들어 줄 것이다, 내게 절하면 세상을 다 주겠다, 그냥 탁,이렇게 결론을 만들어라.
l 그러나 결과는 그런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채원지고 구체화하는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다.
l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약속을 주셨습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예수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생을 살아 내셔서 성취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길을 실제로 걸어오신 것입니다.실제로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l 그렇게 하셔서 우리에게 우리가 걷는 인생일 결심이나 결단으로, 돋 말로 때우거나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l 신자의 삶을 실제로 살아 내십시오.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듯이,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르듯이 말입니다
l 빌립보서 1:27-30
l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습니까?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입니다.복음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 복음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자들이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그러나 바울은 이것도 손해가 아니라고 합니다
l 고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의 무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인생의 어떤 짐을 지게 하시고 어떤 고난을 겪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며, 나를 실제적인 길로 밀어 넣으셨기에 생기는 흔적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구격만 하고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l 그러니 이 길을 걸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이 길을 걸으십시오. 세상이 주는 위협은 사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인생을 뒤집으시고 반전하셔서, 이 속에 은혜를 베푸시고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십시오
l 세상의 위협이란 너 현안하게 해 줄게,라는 시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l 오늘 본문의 결론은 한마디로 20절에 있슫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당신을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아가시고 묻지 않은 자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오늘 나를 이 자리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l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자와 내가 누구인가를 무러보지도 않는 자들 앞에 나를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막막하고 아무것도 아니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입니다
l 21절 하나님은 당신을 늘 거부하고 반대하고 배신하는 백성에게 종일 손을 벌렸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이 손입니다
l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우리가 그렇게 서 있습니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것 같고,나 혼자인 것 같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될 때마다 이 생각을 하십시오. 이 아무것도 아닌 자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내신다. 나는 찾지 않고 묻지 않는 자들에게 찾아가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손길이다,라고 말입니다.
l 그러니 명예롭게 사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생명과 복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외면하면 사망과 저주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
(로마서 11:1-12)
그럴 수 없느니라
l 11장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l 결국 다 구원하실 것이라면, 그들이 반역하고 실패하고 못난 짓을 하지 않도록 사전에 막으시지 왜 그때에는 개입하지 않으셨는가,그들로 실컷 못난 짓을 하게 놓아두신 다음에 다시 붙들어 내신다는 말씀은 도 무엇인가
l 롬 11:11-12
l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이방에게 복을 주셨다.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이방에게 복을 주셨다
반대를 허용하시는 이유
l 롬 9:14-18
l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구체적 진심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신간과 공간 속에 들어와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땀이요, 하나님의 손길이요,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깊은 얼굴입니다.
l 롬 5:8-10
l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했다면 예수의 부활은 얼마나 더 큰일을 하시겠는가, 이런이야기입니다.
l 회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고함지르고 주저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돌이켜 계속 가야하는 자리입니다.
l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이방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그들을 받아 주시는 용서의 은혜가 적용될 때에는 도대체 인류에게 어떤 영광이 주어질 것인가를 기대해 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서는 자리
l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천 년 전에 죽으셨습니다. 될지 안 된지 모르는 자를 위해서는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완료된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완성된 운명을 우리에게 적용하셔서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믿고 회개하고 순종하고 의심하고 실패하고 돌아섭니다.
l 이 모즌 일들을 거쳐 어디에 이를까요? 예수께서 주으셔서 이루신 역사적 완료의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여기가 믿음이 서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믿음을 오해 했습니다.
l 롬10:1-3
l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방식입니다. 우리는 늘 오해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식을 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도 우리의 순종이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l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이 예수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죄인을 당신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단 것, 그것이 믿음이며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l 눅 2:25-35
l 예수는 이스라엘의 영광이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지만 또한 비방의 표적도 될 것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오라.
l 불순종은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기서 당신의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자리에 나오라, 방황하는 피조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경탄과 억제할 수 없는 찬송의 자리로 오라, 이것이 로마서 11장의 결론입니다
l 롬 11:33-36
l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를 보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루신 일이 일으키는 경탄입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토록 묶어 주신 운명이 여기 있습니다.
l 여러분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책과 회개에 붙잡혀 있지 마십시오. 더 나아오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죽이고 거부했음에도 은혜를 주셨다면, 우리의 순종과 간절함을 통해서는 얼마나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 우리의 생애에 일어나겠는가, 이런기대와 소망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기바랍니다.
준엄하심이 있으니 |
(롬 11:13~24)
두려운 은혜
l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방에까지 퍼져 나갔으며, 이방을 구한 이 은혜가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와 거부까지 끌어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l 은혜는 우리의 저항과 거부와 무지와 못난 것을 극복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은혜를 값싸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l 롬 11:22
l 무서운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토록 고단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방치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할 때마다 하나님이 꾸중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l 그들을 버리시거나 외면하시지 않고 저들과 타협하시지도 않아서 저들의 역사가 고달팠던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논하려면 하나님의 이 원칙,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거룩함을 목표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이 목적을 타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l 갈라디아서 6장7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입니다. 계시록2:23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신 말슴도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원칙을 알게 합니다.
l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대원칙, 곧 ‘심은대로 거둔다’는 원칙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그 위에 은혜를 더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l 그런데 두렵다고 해서 공포심을 가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긴 의지와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기꺼이 순종하여 복을 누리라고 성경이 이 은혜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야곱,너는 포기될 수 없다.
l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환도 뼈를 치자 그는 엎드려 울며 복을 빕니다. 이 씨름은 하나님이 건 씨름이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터에서 마지막 피할 길만 모색하던 교활하고 한심한 존재입니다
l 이 압복 나루에 오기 이십년 전,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길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자기 인생을 오로지 자기 힘만 믿고 살아가던 교활하고 약삭빠른 야곱이 그의 이름대로 약탈자로서 살아가던 때에 하나님이 나나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l 네가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동서남북에 퍼져 나갈 것이며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이리로 돌아오게 하리라,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28장의 벧엘사건입니다
l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네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야곱이라고 이름을 대자 천사는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마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싸워이겼느니라’고 말합니다.
l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는 이상 너는 망하지 않는다, 너는 포기될 수 없는 존재다,라는 사실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야곱이 잘한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야곱을 가리켜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한 자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억울함과 바로의 거부마저도
l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은혜는 무엇입니까? 요셉의 이야기에 들장하는 인물들은 팔아먹은 놈,억울한 놈,이렇게 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무엇을 만드는지 보십시요 요셉의 형들은 팔아먹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억울해서 위대해지는 인생은 요셉입니다.
l ‘심는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받는다’는 대원칙을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놀랍게 영광과 승리로 만드는가를 보십시오.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건과 원칙 위에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거룩하심과 능력이 우리를 얼마나 깊고 찬란하게 만드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l 바로는 자기가 가진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와 이스라엘이 얼마나 굉장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도대체 저들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이토록 바로를 짓눌러 그의 권력을 깨고 그들을 구원하시는가. 바로의 모든 저항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스라엘의 존귀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는 결코 세상의 통치자도 주인도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던 애굽이 더 이상 인류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세우려는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l 더 나아가 바로의 실패로 모든 인류가 복음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온 인류를 위해 이스라엘이 준비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거역했으나, 그 일로 자기 후손을 구원하게 됩니다. 모든 인류속에 애굽까지 포함되니 말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실패로 일이 이렇게 될지 몰랐을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l 빌립보서2:5-11
l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굉장하며 십자가가 얼마나 고맙고 무시무시한 증거인지 이 말씀으로 깨닥기를 바랍니다.
손을 들이미시는 하나님
l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무게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어떠한 명예이며 영광인지 우리는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l 탕자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받아 들고 가출합니다. 그런데 돌아옵니다. 회개해서 돌아오거나 윤리적 조건을 갖추어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불효막심했다는 개과천선의 각오와 반성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하나도 먹을 수 업게 되자 ‘내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 들도 넉넉히 먹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l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 속에서 어떻게 하는지 구경하고 계시다가 우리가 당신께 헌신하면 그제야 우리 인생에 복을 주시고,거부하면 우리 인생을 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막막한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당신 곁으로 미는 자리입니다.
l 어떻게 밉니까? 세상이 거짓되었다는 것을 깨달아라, 네가 가진 것으로 는 너에게 답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아라. 이것이 탕자의 비유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l 세상에서는 이겼는데도 헛헛합니다. 가졌는데도 답이 없습니다. 노력했는데도 보람이 없습니다. 노력했는데도 보람이 없습니다. 인생이 이게 뭐냐,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오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답이 있는 것 같아서 오는 것입니다.
l 교회에 오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그래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까지 몰아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회개한것도 우리이고,허랑방탕한 삶에서 돌이킨 것도 우리니, 우리 힘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 긴 세월에 걸쳐 우리와 씨름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l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기적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의 의지의 결국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기를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없는 존재인 이삭
l 창22:15-18
l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까지 잡으려고 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그 헌신의 대가로 아브라함에게 큰 보상을 약속하셨다는 말씀으로 좆종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l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은 것이니 이제 이삭은 없는 존재입니다
l 창 22:!2
l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확인하게 하십니까? 이 아이는 원래 없는 존재다, 너는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느냐,라고 묻는 시험입니다. 내가 자녀를 잘 길러야 후손이 번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손의 번성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면 일어날 결과입니다. 그러니 기꺼이 이삭을 잡겠습니다,라고 하자 하나님이 ‘됐다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히신 것입니다잘못된 자리에서도 승리로 뒤집을 수 있다 죽음도 뒤집는다. 예수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아라. 이런 하나님의 자기 증언이 바로 성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l 내가 은혜로 어떻게 일하는지 보아라, 예수를 믿는 고백이 갖는 힘을 기억하라, 하루도 나 하나님이 손을 놓고 있는 날은 없다. 네가 지금 얍복 나루에 서 있느냐, 네가 감옥에 갇혀 있느냐, 네가 묶여 모리아 산애 있느야, 괜찮다, 내 은혜는 쉼 없이 모든 것 속에서 일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죽음을 부활로 바꾸는 나는 하나님이니라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니 로마서 11장은 이런 결논으로 마무리 됩니다
l 롬 11:33-36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
(롬 11:25~36)
거부로도 막을 수 없는 은혜
l 로마서 9장에서 11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다만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운명에 관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읂켸로 말미암는 구원은 어디까지 미치는가,하고 구원의 범위를 물을 때, 이스라엘은 중요한 시금석이 됩니다.
l 예수님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만 저들은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만 그들은 오늘에 이르도록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l 나도 이스라엘 백성이며 베냐민 지파이다, 이런 나도 사도가 되었다면 어찌 이스라엘이 완전히 끝났겠느냐, 저들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것인가, 이방처럼 아무 조건도 없는 곳에서도 구원이 허락되었으니 이스라엘의 거부도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스라엘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내리는 결론입니다.
l 31절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가두어 두심의 의미
l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l ‘내가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감싸 안았다’라고 고쳐 읽을 수 있습니다.
l 너희가 순종했느냐 불순종했느냐의 여부는 내 창조와 의지와 목적을 막을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l 성경은 인간의 어떤 선택도 창조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처럼 무엇을 만들어 낼 능력은 인간의 선택에 없습니다.
순종과 연결된 자유
l 성경에서 인간의 자유나 선택은 순종과 연결됩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고 합니다.
l 롬 6:19-22
l 우리 자신을 어디에 내줄 것이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의에 내줄 것인지,죄에 내줄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예수가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을 의에 내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와 부르심에 나를 맡길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전에는 없던 자유입니다.
l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복음의 중요한 선언은 이 자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을 살 자유, 죄의 종에서 벗어나 우리의 의지와 전인경을 동원하여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에 순종하는 자유, 바로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궁극적 영광입니다.
l 인간에게는 창조 세계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과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연광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l 이 순종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굴복이 아닙니다. 선택의 여유가 없는 굴종이 아닙니다,숙명이 아니고 기꺼이 자원하는 기쁜 의지입니다
l 마19:16-22
l 이 말씀은 부자에 대한 공격도 아니고 가난을 구제하라는 권면도 아닙니다. 순종은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으 문제입니다. 순종이란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열심이라는 말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l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예수에 대한 순종을 말합니다. 예수에 대한 순종이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가는 것,거기에 나를 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기쁜 헌신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에게는 이런 기쁜 순종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힘의 대명사인 재물에 이 청년도 묶여 있습니다.
l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어 가난을 구제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구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이런 추상면사나 명분으로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정말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합니다.
l 우리가 예수로 그 근거를 삼고 예수에 지탱하여 있지 않다면 우리도 부자 청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l 요 15:5-6
l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당연히 마릅니다. 순종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순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시지는 않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어서 선택할 수 있게 하십니다.
l 롬 10:1-3
l 이스라엘이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예수를 죽였ㄷ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를 죽인 의 이것이 세상이 만든 의입니다. 생명도,진리도,능력도,거룩도, 영광도 없는 것 그런 의가 예수로 말미암는 진정한 영광과 승리와 명예를 거부하게 합니다.
l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씀은 여러분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할 시간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마음껏 어리석게 구는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l 지금 돌이켜 보면,못난 우리의 실패와 어리석음과 무지와 방탕 같은 것들 것 모두 하나님의 품에 싸여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씀에서 보듯, 못난 우리의 선택,실력,행위,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감싸 안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푸려날 수 없게 하셨습니다.
l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바울의 근거이자 이유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l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교회에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대부분 별 이유없이 그냥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l 우리 모두는 예수를 믿을 생각이 없고, 교회에 나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신자의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l 욥 42:3-6
l 성경이 하는 이야기가 말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은 ‘보라’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우리의 역사입니다. 너희가 얻은 구원에 대해 너희에게 무슨 티끌만한 근거라도 있느냐, 있으면 어디 자랑해봐라, 하고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l 그때 우리는 욥처럼,바울처럼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제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아무 조건도 충족되지 않은 곳, 내가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펼치시는 줄 믿고 회개합니다. 주 앞에 나를 바칩니다. 내 이해와 내 능력 안에 안주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높이소서
'Meditation on Bible > ROMANS(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4부 그러므로 형제들아 (0) | 2019.03.01 |
---|---|
로마서 2부 그러나 이제는 (0) | 2018.03.31 |
로마서 1부 그로말미암아 (0) | 2018.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