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ROMANS(로마서)

로마서 4부 그러므로 형제들아

Four Seasons Daddy 2019. 3. 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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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로마서 12:1~3

 

                                             

구원으로 말미암는 기회

 

l  로마서 1장에서 11장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서 가지신 목적,의지,그리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적 개입,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구원이라고 합니다.

 

l  로마서 12장에 이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여 새로운 국면에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2장은 우리가 살아야 할 새로운 인생을 열어 줍니다.

     

l  신앙적 실천이란, 한 사람의 마음에 신앙이 들어가서 그가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고 거기에 황복하여 스스로 그 길에 들어서야 가능한 것입니다. 강제력으로는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예수가 너희를 위해 죽었으므로

 

l  복음에 대한 설명으로 출발해서 인류는 전부 죄 아래 있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 1장 18절부터 3장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부연설명할 것 없이 이는 인생을 살아 보면 모두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

 

l  인생에는 해답이란 없습니다, 역사와 인류의 운명은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사나 싶었는데 살아보니 이 길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결책을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은 나 자신을 고칠 힘도 내게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깨닫는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l  인간과 인생에 대해 아직도 낙관하고 있다면, 3장21절의 ‘그러나 이제는’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3장21절 기독교 신앙은 이런 놀라운 반전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습니다.

 

l  하지만 우리는 이 놀라운 반전을 맞이한 다음에도 여전히 두려움과 의심이 남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에 붙들려서 왔는데 예전보다 나아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답이 없어 보이는 현실의 연속입니다

 

l  롬 6:4-7

 

l  ‘그러므로’는 ‘네가 믿었으므로, 네가 변화되었으므로’가 아니라 ‘예수가 죽었으므로’입니다. 예수가 죽어 네 신분과 운명과 지위를 바꿔 놓으셨다,예수가 죽으심으로 네 죽음의 운명을 당신의 죽음에 함께 묻으셨다.예수가 부활하심으로 네 운명을 부활과 승리로 바꿔 놓으셨다.

 

l  하지만 이런 것들을 알아도 우리는 자주 지치고 맙니다. 잘 사는 것 같았는데, 문득 보면 다시 제자리 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8장1절에 다시 나옵니다.

 

l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l  예수는 이미 완성된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데, 이 일은 어떤 공식에 대입하는 것처럼 기계적 작업이 아닙니다. 구원의 적용은 우리의 실존 곧 우리가 처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자유 의지로 선택하고 망설이고 외면하고 항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각 신자들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구원인 것이죠

 

l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해 온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9장부터 11장까지의 주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해서 복음이 이방으로 넘어갔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은 망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한 바울의 답을 보았습니다.

 

l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것을 누가 막겠는냐,하는 것이죠,11장 마지막에 이런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l  롬11장33절

 

l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받아 주시는 심판자 정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표현으로 하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용서하시며 돌이키시고 회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산 제물로 사는 삶

 

l  우리는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놀랍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폭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감격스러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백과 찬양 후에 로마서 12장의 이런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l  이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의지인 줄 이해하겠습니까? 오래 참으시고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그로 피 흘리게 하사 죽음을 관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부활 승리가 자비입니다. 셩경에 나온 표현으로 하면 ‘피 흘려 구원하셨다’

 

l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

 

l  ‘산 제물’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 죄인 된 인생과 신자 된 인생을 어떻게 나누는가를 현실 속에서 누려 보고 증언하고 살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구체적인 네 인생에 담아 내는 그 명예로운 길을 걸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l  구원의 영광을 사는 것은 보상이나 상대적 우위가 아니라 진정한 명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산 제물은 ‘삶으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l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기독교인이 되려면, 당연히 바쳐야 하는 어떤 희생,헌신,열정,책임과 같은 것들을 강요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누리며,죄악이 관영하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 생전에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영광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l  이 일과 대조되는 것이 2절의 ‘이 세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12장2절에 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에서 보듯 분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위협과 유혹이 무엇인지 계속 확인해야 합니다.

 

l  이 이겨야 하는 싸움, 이 분별의 싸움을 예베소서에서는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l  엠 4:17-24

 

l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열심을 내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구원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l  세상에서는 이해 관계나 자기 의를 증명하는 것 말고는 도덕이나 법의 용도를 모릅니다. 세상은 법도 자기를 위해서 쓰고 도덕도 자기를 위해서 쓰지만, 우리는 법이든 도덕이든 양심이든 상식이든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된 자의 영광으로 그것들을 씁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l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준다는 말씀이 아니라,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 가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고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l  믿음에서 나오는 증언과 자랑으로 인한 강요는 우선 표정부터 다릅니다. 자신이 고백과 증언이 되면 표정이 좋고, 강요가 되면 표정이 무섭습니다. 복음을 이해한 사람은 좋은 표정을 짓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자꾸 놓칩니다.

 

l  엡5: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l  성경은 여러분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으라고 합니다. 사랑을 받으라.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실 것입니다. 신령한 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l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인생과 너희 존재에 이 구원의 진정한 증언을 담고 살아라, 구체적인 인격과 생애 속에 담고 살아내라, 이는 영광스러운 길이니라, 그것이 구원이니라 아멘입니다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로마서 12:1~3

 

 

구원으로 허락된 가능성

 

l  로마서 12장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장까지의 내용을 전제하여 ‘그러므로’라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보았으니, 그러므로 이 허락된 구원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곧 삶으로 드리는 제사로 살아 내라는 말씀으로 귀결된 것입니다.

 

l  이어서 2절에는 분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 믿고 사는 인생이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과 어떻게 다른지를 다만 도덕성이나 기능으로 확인하지 말고 정체성과 명예로 확인해라. 떠밀려 살듯이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지 말고 영광인 줄 알고 살아 내라고 합니다.

 

l  3절에서는 그렇게 사는 우리의 인생이 많은 제한 속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l  출 19:1-6

 

l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아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구원을 받았는지 보았으니 너희는 내 백성이 되어라, 그 영광을 누려라, 내게 순종하고 내 약속을지켜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소유, 곧 내 보물이 되라고 하십니다.

 

l  이루어진 구원과 허락된 은혜를 보전하고 되갚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영광을 누리며 살라고 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l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이 구절은 책임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새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는 대목입니다.

 

l  구원과 새 생명은 예수께서 피 흘려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자꾸 감상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또 여기에 감정적인 동기 부여를 하려 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예수께서 정말 값비싼 대가를 실제로 치르시고 준 기회입니다.

 

l  목적을 기어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열심이 들어 있는 것이 우리가 받은 인생, 새 생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장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l  빌 2:5-8

 

l  이것들을 추상명사로 메꾸지 마십시오. 눈물,감동,각오,헌신,희생과 같은 단어로 묶지 마시고, 이 단어들이 실체가 되어 각자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구체성으로 주어진 제한

 

l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예수의 죽음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런 죽음으로도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직면하는 현실적 조건입니다

 

l  예수는 그 시대 메시아로 오셨으나,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가장 처참한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부활과 구원과 회복과 영광을 만들어 내십니다.

 

l  성경은 예수께서 제한 속에서 살아가셨다고 이야기하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는 막상 이 제한을 벗어나 쓸모 있고 싶고,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l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특별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잘못하면 잘못한 대로 벌을 받습니다. 그들은 결국 망해서 바벨론 유수를 겪은 후에 돌아왔으나 결국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습니다.예수가 오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거부하여 나라를 잃고 이천 년을 헤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봐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l  바울이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 자신하는 것은 이방인이 아무 조건 없이 구원받은 것을 보았기에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이것이 로마서9장에서 11장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l  구약은 이스라엘이,선민이,제사장 나라가 실패한 이야기이지만, 신약은 구약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잇고 있습니다. 신약은 구약으로 도달할수 없는 자리를 드러냅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이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의지와 무한한 은혜와 광대한 능력이 드러납니다.

 

l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시나 당신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순종하는 자리에 오십니다. 순종하는 자리란 제한의 자리를 말합니다. 신자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의 한계나 제한을 방해물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l  성경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조건과 한계, 또한 소원만큼 주어지지 않는 능력과 기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우리가 볼 때 이것은 제한이지만, 하나님께는 이것이 제한이 아니라 구체성인 것입니다.

 

l  시편90:1-12 모세의 기도

 

l  모세는 사십 년의 광야 생활에서 인간의 온갖 못난 모습을 실컷 봅니다. 그렇게 인생을 보낸 후 나온 탄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인간은 다 헛되게 살아갑니다.그렇게 못났을 수가 없습니다.바보 같습니다’

 

l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여기서 다 죽어비리고 말, 아무것도 아닌 이런 자들을 위하여 왜 그 엄청난 이적을 행하셨습니까, 무엇 하러 열가지 재앙은 내리셨습니까,왜 구름기둥을 보내셨습니까, 왜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까, 왜 사십 년 동안 만나를 주셨습니까. 하나님, 이들이 그토록 귀합니까.이 바보들이, 이 못난 것들이, 하나님께는 그렇게 소중합니까,라는 탄식이자 고백입니다

 

l  얼핏보면,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도매금으로 다루어 구원하신 것 같지만, 사실 하나하나의 인생을 각각 부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도매금이 아닌, 우리 각각을 부르셨다고 해서 부름받은 우리의 자리가 남보다 우월하거나 눈부시지 않습니다.

 

l  오히려 감추어지고, 삼켜진 익명의 자리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익명의 지위로,자기 자신도 납득이 안 되는 참으로 억울하고 연약하고 무능한 자로 사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이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예수 믿는다는 말을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l  능력이 있어야 하고, 유용해야 하는 기능적 차원에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면,하나님은 절대 확인시켜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야기입니다.

 

주어진 조건을 감수하는 삶

 

l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마라, 이는 만만치 않은 말씀입니다.여러분에게 주어진 조건을 갖고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는 복이 될지라

 

l  우리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물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재현해 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 우리의 실패, 우리의 무능까지도 다 합해서 말입니다.

 

l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예수 안에서 잘 해석해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이고, 죽음이 부활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겁 날 것이 없습니다.

 

l  갈6:1-6

 

l  기독교 신앙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은 이웃과의 관계,이웃과의 조화 속에 있습니다. 율법의 요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처럼 기독교인의 이웃에 게 중요한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l  관계를 떠나 독립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때는 인격이 없는 추상명사에 매입니다. 사랑, 정의, 평화, 감동, 행복, 이런 것과 묶이면 옆 사람과 상관없이 독립적 가치를 주장하게 됩니다.이런 단어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떠나 다만 명분이나 가치에 불과해지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l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관계를 위한 독립된 인격’이라는 데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짓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복수로 등장하십니다.

 

l  갈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기 몫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자기 몫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l  나의 자리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 몫을 할 수 없습니다. 각각 자기 일의 귀중함을 알고서 자기 짐을 져야 합니다.

 

l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믿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한계, 즉 여러분의 구체성을 감수하십시오. 한계는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시고 웃으십시오. 그 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로마서 12:3-13)  

 

 

은혜를 받은 자답게

 

l  로마서 12장은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란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혜를 가르킵니다.

 

l  너희는 하나님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역사하셔서 이 구원을 이루셨는지도 보았다. 너희 인생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l  구원받은 자의 삶이란, 신자답게 살자, 옳은 일을하자, 쓸모있게 살자와 같은 구호와 개념에 붙들려 사는 삶이 아닙니다. 이 삶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던 인간이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l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이 담아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한복판을 깨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당신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보았으니,그분이 목적하시며 우리에게 살아보라고 하시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l  롬12장2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살아보면 세상이 거짓되다는 사실을 압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그 어떤 보상을 받게 되더라도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특별히 허락하신 각자의 삶

 

l  3절에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 삶의 구체성을 표현해 주는 구절입니다.

 

l  각각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 네 인생을 다른 사람의 삶을 구경하듯 살지마라, 삶이란 각자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나’는 ‘나’일 수밖에 없는 구체성으로 성경의 이 약속을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채우고 경험하고 누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l  골 3:15-17

 

l  이 말씀에는 ‘감사’가 돋보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넉넉하지 않으면 감사는 나올 수 없습니다. 감사는 쥐어짠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넘처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만족해야 할 수 있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붙잡히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l  성경은 ‘너,이겨야 해’라고 말하지 않고 ‘괜찮아, 너 충분하다’라고 말합니다. 고후 12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는 기독교만이 줄 수 있는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은사의 핵심

 

l  고전 12:28-30

 

l  모두가 똑 같은 은사를 받지 않는다. 모두가 똑 같은 조건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괜찮다, 각각 자기의 조건과 은사가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라, 모두에게 유익이 되게하라,그리고 너 자신에게 유익이 되라

 

l  그리고 이리로 끌고 갑니다.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여기서 더 큰 은사란 더 큰 능력이 아닙니다. 더 크게 유익이 되라는 뜻입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한 후에 사랑이 나옵니다.

 

l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라’로 사랑을 설명합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다, 사랑은 능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이 사랑이 아니다, 쓸모 있어야만 유익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열이 사랑이 아니다, 담담하게 지켜내는 것이 사랑이다

 

l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합니다. Long-suffering,입니다. 오래 참는 일, 오랜 고통입니다.왜 고통스러울까요? 재는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있나 와 같은 생각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하나님 손에 맡기고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손잡고 우는 것이 아닙니다.

 

l  모든 은사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 같은 것도 불렀고,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한계를 알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일이라고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면, 우리가 원하는 다는 지위, 다른 조건을 가진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l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일 속에서 사랑이란 각각의 한계를 특권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선택받은 특권을 누리는 삶

 

l  롬8:12-17

 

l  우리는 모두 구체적인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영광은 고난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외적 고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한계로 말미암은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못난 것도 우리에게 유익을 끼칠 것입니다. 영광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l  이 영광은 지금껏 설명한 것같이 명분이나 도덕성이라는 가치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자유입니다.죄에게 굴복하지 않고 영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l  우리의 조건, 우리의 상황,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자 된 영광이고 특권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 삶에도 멋진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다만 승패에만 집착하며,이기기 위하여 영혼과 인생까지 팔아 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져도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l  우리만이 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패배 속에서 부활 승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도 우리입니다.

 

l  엡4:25-29

 

l  사 42:1-8

 

l  내가 원래 목적한 것으로 너희를 채울 것이다, 내가 내 아들 안에서 이룬 것으로 너희의 존재와 삶과 운명을 채울 것이다. 그러니 용서하는 자로 은혜를 끼치고 감사하는자로 살아가십시오.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특권입니다. 그 인생을 사는 복된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14-21)

                               

 

삶으로 드리는 제사

 

l  오늘 본문의 권면은 로마서 전체 맥락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말에서 ‘그러니 이제부터 도덕적으로 살자’로 바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l  오늘 본문은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l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 삶으로 드리는 제사는 예수를 믿는 것이 다만 이해나 관념, 이상이나 진심이라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바쳐지는 한 인생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l  이러한 ‘삶으로 드리는 제사’를 위해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여 분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l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살아가면서 거듭 확인하고 즐겨라, 그런 이야기 입니다

 

 

맡겨지 배역에 충실하라

 

l  롬12장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다(롬12:3)

 

l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l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양보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라는 신앙의 권면이 아닙니다. 신앙적 분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과 나를 묶어 무엇을 담으신다, 만들어 내신다. 그러니 나는 내 역할을 하겠다는 분별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l  인생은 두 부류로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원망과 분노만 남는 사람과 웃음과 감사가 남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이 웃음과 감사가 남는 인생은 기독교가 아니고서는 만들 수 없습니다.

 

l  내가 너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 곧 영광의 길로 불렀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무엇을 선택하는 권리인 줄로만 착각합니다. 선택하는 특권으로 인식하는 것이죠.

 

l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에게는 다른 아무런 가치가 없고 다만 내가 할 것인 것 말 것인가, 하는 선택만이 인간의 가치를 드러내는 유일하고 특별한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선택은 그것이 어떤 선택이든 다 못난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l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부활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살것이다, 내 나라에서 살 것이다.예수 안에서 내가 그것을 완성했다 이 일은 결단코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이 구원을 네 인생이 주어진 그 구체적 자리에서 앞당겨 적용하여 영광의 인생을 살아보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입니다.

 

l  7절,8절에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는 완벽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로 역할 분담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l  각자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명예로운 덕목을 나열한 것입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명예로운 일과 영광된 일을 해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영광을 택하라, 그 이야기 입니다.

 

 

웃을 수 있는 신앙

 

l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은 분노하지 마라, 보복하려고 하지 마라, 악한 역할을 맡지 마라, 남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네가 맡은 명예로운 길을 포기하지 마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l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표정을 짓는 일은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부름받은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 할 수 있습니다.

 

l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 정도로는 놔두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소원처럼 다만 만사형통으로, 자존심 세우는 것으로 끝나게 하시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l  신28:1-6

 

l  하나님이 우리 인생 전체에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약함,무지,그 모든 실수가 오늘의 나를 만들며, 그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l  작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며 거룩하시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너는 배우다, 그러니 네 역할에 충실하라

 

l  성경의 이런 권면이 근거하는 전제를 모르면, 권면은 다만 매뉴얼에 불과하게 됩니다. 자꾸 상대방더러 “기도 안 하고 뭐해?”라고 지적하게 됩니다. 얼굴에 웃음이 사라집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l  자기의 인생을 실제로 살아내지 않는 것은 주제넘은 짓입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내실 것입니다. 잘잘못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와 기적과 은혜와 긍휼의 대단원의 막이 내려질 때가 올것입니다.

 

l  빌 2:12 -14

 

l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하고 두려움으로 하라, 하나님의 진정성을 인정하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쉭게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의 지혜를 놓치지 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놓치지 마라.

 

l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것같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주장하는 가치나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고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빛을 감출 수 없듯이 거스르는 이 세대와 어두운 세상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걸어가며 누비고 사는 삶입니다. 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l  그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마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너는 영광된 길을 걸으라, 명예로운 길을 택하라, 악역을 맡지 마라,네 명예를 살아라, 너는 충분히 가진 자다, 예수가 널 위해 죽었다 라고 하십니다.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 13:1~5)

 

 

l   로마사 13장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고,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말씀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에 이어서 등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l  선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행할 것인가, 하는 맥락에서 ‘권세에 대한 복종’이 등장한 것입니다.

 

l  어떤 사건의 맥락은 시간의 전후 관계뿐만 아니라 공간적 틀에 따라서도 형성됩니다. 공간적 틀이란 무대나 그릇에 비유할 수 있는데,구조,체계,조직,관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건 것이 로마서 13장에서 말하는 권세입니다.

 

l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권세를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말은 이렇게 이해됩니다. 모든 컨텍스트는 내가 만들었다, 그러니 이 안에서 너희가 텍스트를 담아내라, 이런 말씀입니다.

 

컨텍스트의 의미

 

l  ‘컨텍스트(context)’라는 말은 이미 여러 학문 분야에서 사용해 온 전문용어입니다. 제가 말하는 컨텍스트는 문맥일 뿐만 아니라 그릇이기도 하고 무대이기도 합니다.

 

l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내게 절하라와 같은 시험들이었는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컨텍스트 밖으로 나가라, 곧 한계를 벗어나라는 유혹도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l  성육신이란 무한이 유한속에, 제한된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왜 있어야 했을까요? 로마서 12장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에서 출발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l  반면 우리는 삶으로 드리는 것보다는 삶에 종교적 색채를 입히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기도,성경읽기,주일성수와 같은 몇 가지 실천적 항목들로 신앙을 축소하여 이해랄 뿐, 삶, 일상,하루,실존 전체를 바치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l  성경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삶이라는 컨텍스트속에 우리가 믿고 고백한 텍스트를 담아 구체적인 것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l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분별하라고 합니까?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합니다.

 

l  우리가 태어나서 맞이하는 사회,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시대,관계,지위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들어 있는 이 컨텍스트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정의나 진리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담아내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지혜로 허락하시는 컨텍스트인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l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조건도 우리로 실패하게 하거나 절망하게 하여 우리를 끝장낼 수 없습니다. 그런 컨텍스트는 없습니다.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로마서 13:5~7)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는 권세

 

l   로마사 13장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틀과 그 구체적 방법을 소개하고 거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1절은 신자들이 자기가 사는 시대의 정치권력과 어떤관계에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논란을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l  ‘위에 있는 권세’란 컨텍스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컨텍스트란 문맥, 정황뿐만 아니라 배경, 무대,틀,그릇이라는 의미까지 담아내어 컨텍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개념은 ‘텍스트’입니다 텍스트는 본문이지요

 

l  부모는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분입니다. 부모가 있기에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모란 이처럼 우리의 기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부모는 우리의 컨텍스트인 것입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정권과 사회질서도 우리에게 컨텍스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

 

l  예수의 성육신은 예수님이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말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실망스러운 현실 속에 있듯이, 예수는 당시 몹시 나쁜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로마제국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대에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피지배 계급의 한 사람으로 들어오신 것이죠

 

l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어떤 영적 지도자도 없이 사백 년을 지내옵니다. 알렉산더가 세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 후, 이스라엘 민족은 그 위하에 있던 장군의 통치를 받으면 그리스의 문화와 종료를 강요당합니다. 억울한 형편의 피지배 계급으로 사는 일이 계속됩니다.

 

l  투쟁 끝에 잠깐 독립했지만, 다시 로마 정원에 붙잡힙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 태어나 이쪽의 의심도 받고, 저축의 의혹도 사면서 아슬아슬한 생애를 살아갑니다. 예수의 이런 생애는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결국 죽음으로 끝난 그의 공생애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l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자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이삭의 하나님에대해서는 그 내용이 자 떠오르지 않습니다.

 

l  이삭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 백 살에 얻은 자식입니다.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야 낳습니다. 왜 자녀를 낳으 수 없는 나이에야 이삭을 주셨으까요? 이삭은 아브라함이 만든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식을 왜 주셨을까요? 아브라함이 만들 수 없는 것, 하나님이 약속하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후손을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l  아삭 없이 그냥 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구체화되지 않습니다. 이삭은 구체화하기 위해서 주신 아들입니다. 이브라함이 이삭을 만들어서 그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의지로 만들어집니다.

 

어떤 컨텍스트도 괜찮다

 

l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조건,환경,정황,수준,이런 것이 모두 그릇이되고, 하나님은 거기에 텍스트가 담기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위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지위. 그 독특한 컨텍스트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l  컨텍스트에 휘둘리지 않을 실력을 가진 사람은 오직 텍스트를 갖고 있는 이들 뿐입니다.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하나님이 텍스트를 담아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들만이 말이 안 되는 재난과 불행과 위기와 의심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l  우리의 삶은 컨텍스트를 개선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텍스트를 담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텍스트를 담으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셨듯이 죽음을 뒤집을 수 있는 기적을 우리도 누리게 하시며,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궁극적 승리를 우리를 통하여 구현하십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부각되는 구원

 

l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처한 컨텍스트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으 만드셨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어떻게 텍스트가 컨텍스트에 들어왔는지가 요셉의 삶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발견됩니다.

 

l  컨텍스트가 훌륭해야 텍스트가 멋있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고 합니다지나가는 사람들은 밭 속에 파뭍힌 것이 보물일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밭에 버려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보석이었습니다.  

 

l  여러분의 지위와 현실을 납득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고함밖에 지를 것이 없고 원망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l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의심과 배신과 조롱과 헛된 기대속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랴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인류 모두를 위해 역사의 궁극적 완성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도 그렇게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아 힘으 내는 여러분의 인생과 존재와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 13:8~10)

 

 

하나의 컨텍스트에 불과한 권세

 

l   로마서 13장1절에서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므로 권세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힘을 가진 권력이면 무조건 하나님의 손길이고 그분의 뜻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당연히 아닐 것입니다.

 

l  지금까지 확인해 온 대로 권세는 하나의 컨텍스트에 불과합니다. 특정한 시대의 정권이나 사회구조는 컨텍스트입니다. 컨텍스란 문맥, 정황, 그릇,틀 등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하는 말이라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l  자연도 컨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자연이 모든 것인 양 생각하는 사조가 있습니다. 바로 자연주의 입니다. 자연주의는 허무주의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을 채운 모든 생명은 결국에는 죽어 버리고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l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정황을 극복하거나 바꾸는 일을 삶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담아낼 텍스트가 있느냐는 질문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l  성경이 ‘너희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권면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진 차원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답을 신자는 가지고 있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컨텍스트를 연장하시는 하나님

 

l  열왕기상 19:9-18

 

l  여기 칠천 명은 정결하여 가려 뽑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컨텍스트 속에 감춰진, 삼켜진 것 같고 아무것도 아니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컨텍스트에 사로잡힌 것같이, 무대위에 있으나 무대에 삼켜진 것같이, 무대 위에서 그렇게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야말로 컨텍스트에 텍스트가 담기도록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l  컨텍스트 속에 텍스트ㅡㄹ 담기 위하여 하나님은 컨텍스트를 유지하십니다. ‘이게 뭔가’하며 한숨짓는 현실 속에 하나님이 담아내시는 기적과 구원과 자비와 능력과 거룩하심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l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 하시는 일에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채우려고 하는가를 보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억울함을 역전하는 것은 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손해보지 않았다는 고백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l  그래서 오늘 본문처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지게 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너희’는 자신이 처한 컨텍스트 속에 텍스트를 담으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그 자리에서 겪는 인생의 억울함을 컨텍스트를 원망하는 것으로 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거기서 오히려 텍스트를 담아냅니다. 그런 길을 채우는 구체적 실천의 덕목이 사랑입니다.

 

l  악을 제거하면 선이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악을 제거하면 공이 남습니다. 악은 선의 부재입니다. 적극적 선이 사랑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이웃에게 기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그렇게 옆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하지, 어떤 윤리와 법에 매달려 대상이 없이, 사심 없는 원칙만 남는 것은 못할 짓입니다. 창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무성함과는 전혀 무관한 말라비틀어진 것입니다.

 

멋진 시민이 되라

 

l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오래참는 것입니다. 고통을 참고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저 인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덕목이나 명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고통을 주는 그 사람의 존재와 인생을 가치 있게 여겨야 참을 수 있습니다.

 

l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그를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나요? 한 시대의 권세와 질서와 구조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컨텍스트에 불과한 것에 겁을 내지 마십시오. 그 안에서 사는 자가 되십시요.

 

l  시간이 걸립니다. 아슬아슬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사고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아슬아슬함 속에서도 하나님이 텍스트ㅡㄹ 담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l  예수는 붙잡혀 죽습니다. 그보다 놀라운 사고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절망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류와 역사를 뒤집으십니다. 모든 인류와 각 개인의 생애를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활 생명을 가져 사망으로 끝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l  그러니 무대에 올라가십시오, 올라가서 자기 역할을 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로마서 13:11-14)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l  우리는 로마서 13장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틀,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권력 싸움 말고는 목적과 의미를 부여할 데가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여 복을 주려 하신다고 하는 믿음과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너희가 속해 있는 정황과 구조 속에서 너희의 역할과 자리를 지켜라.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5,6절 조세도 바치라고 하십니다.

 

l  로마서 13장은 컨텍스트르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컨텍스트를 텍스트로 오해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대나 사회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거룩한 목적을 부여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조건을 개선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중요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으면서도 이처럼 보잘것없는 지위와 무력한 역할을 현실로 허락하신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l  마 16장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의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라는 존재와 자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컨텍스트 속에 넣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l  중요한 임무를 맡았으니 그에 합당한 중요한 지위를 가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살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죽어 버리면 그만인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그것이 우리가 컨텍스트 속에서 부여 받은 지위와 역할 입니다.

 

못난 인생 속에 본문을 담으시는 하나님

 

l  위는 매주 교회에 나와서 “주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이것을 개선해 달라고 구하며, 희망에 찬 어떤 답을 얻어 가려고 매주 기대하는 얼굴로 왔다가 실망한 얼굴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합니다.

 

l  이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번도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 같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진심,선,종교,임무라는 이름으로 안심을 얻고 자존심을 채우고 싶어 할 뿐입니다.

 

l  이런 우리에게 그렇게는 못하시겠다고 보여주신 것이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l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는 대체 무슨 기도이며, 무슨고백이며 무슨 탄식이까요? 모세의 고백은 이스라엘에 대한 불평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이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습니다.

 

l  하나님, 이 못난 것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으 베푸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호렙 산에서 만나주셨고 사십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습니다. 우리의 발이 부르트지 않고 우리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저들의 못남은 다만 실패로 끝나는것입니까, 하지만 저들의 못남과 실패 속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요, 못난 인생에게도 퍼부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신실하심과 능력을 찬양합니다.

 

l  그들의 생애를 모든 인류와 후손에게 유익으로 남기시며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요, 이 못난 것들 속에서 직접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본문은 해처럼 어찌 이렇게 크고 밝은지요,라고 모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l  죽어가는 못난 인생,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이 하찮은 인생 속에 하나님이 본문을 담으시겠다고 하십니다.세상은 본문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l  본문이 되려면 죽음을 극복해야 하는데, 세상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거기에 무슨 풍성함이나 깊이가 있든 그저 헛된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l  오직 우리만이 본문을 가집니다. 부활을,용서를,회복을,승리를,영광을,영생을 이야기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 인생 속에 담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자꾸 컨텍스트에 관한 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l  사 53:1-2

 

l  이것은 예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무엇을 담으셨습니까? 죄를 씻어 주시며, 죽음으로 끝날 인생을 부활로 승리케 하시며, 하나님을 떠나 폐허가 된 인간의 심령에 찾아오시고 그와 화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입니다. 그의 모습으로 이것을 만드십니다

 

l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게 나타났느냐,이렇게 예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보입니다. 우리도 이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러 세상의 조건, 현실,구조,틀,배경,무대 속에 넣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만이 본문을 담을 수 있는 하나님의 손길이 된 것입니다.가서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와 역할을 감당하십시오

 

반복되는 하루에 담기는 텍스트

 

l  빌립보서 3:10-14

 

l  이 길에는 마치 벽돌을 쌓아서 세우는 것 같은 공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성취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넣어 두신 컨텍스트다 본문을 담으려고 이 컨텍스트를 주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l  엡5:8-10

 

l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의 인내와 성실과 겸손과 믿음으로만 빚어낼 수 있는 깊이 있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시험을 받습니다. 너는 어떤 존재냐,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 열심히 예수 믿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그래서 사람들이 너를 알아주더냐, 라고 매일의 현실이 우리에게 와서 도전합니다.

 

l  여러분이 나 살기 편안한 컨텍스트를 달라는 기도 말고 텍스트를 담아내는 존재가 되어 컨텍스트를 감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십시오  엡 5:15-17

 

l  매일 여러분의 삶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십니다. 주님이 일하십니다. 단지 아직 내 눈에 안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더 큰 하나님의 일하심을 담아내는 인격

 

 

l  신자 된 우리의 삶은 보이는 것으로 보상받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으 아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감수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혹은 뚫고 나가 극복할 실력이 없다는 이류로, 예수 믿는다는 말을 똑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는 신안고백은 거짓이 될것입니다.

 

l  엡 5:18

 

l  술 취하는 것은 생각 없이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술 위하는 것을 왜 방탕하다고 할까요? 술 취하면 깨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간과 맡은 역할과 책임이 마구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을 넋두리나 하고 분노하는 것으로 소비하지 마십시오

 

l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하여 여러분의 삶을 다만 착함, 겸손함 같은 소극적인 것에 멈추지 말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더 큰 일하심을 담아내는 인격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당한 현실을 인격으로 감수해 내십시오.

 

l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기적을 이루시고 있음을 인생헤서 확인하십시오. 어떤 조건이나 어떤 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만나십시오 성경에서만 이 기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현실과 인생에서 이 기적을 누리시며 이 일에 주인공이 되는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죽은 자와 산자의 주

 

                                                  (로마서 14:1-12)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

 

l  로마서 13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에 허락하신 무대와 환경과 정황 속에서 실제로 주어진 우리 자신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하나님이 그 안에 담으시는 텍스트를 담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본문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말입니다.

 

l  그런데 신양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내용을 로마서 14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초대 교회 당시는 로마제국이 통치 하던 때 였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야 하는냐 아에 안 먹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4장에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15장에서는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의 대비가 나오는데,여기에서 바울은 어느 한쪽을 편들어 줄 의도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l  5절에는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토요일을 성일로 지키는 자들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성일로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도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l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두 가지 모두 사활이 걸린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로마서 14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1절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져야

 

l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의 대비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한 심판권은 하나님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l  롬 14:10-12

 

l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말고는 신앙의 내용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말고는 그 밖의 문제에서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들 각자의 신앙을 다른 방식으로 확신하는 셈입니다.

 

l  삼십 년 전인 부흥기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가 붙들고 있던 것은 컨텍스트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주일성수 문제가 대표적이었죠. 주일 성수, 술 담배 안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온 바로 그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선지해장국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우리도 고민했었죠

 

l  이제는 대부분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날 이미 먹어버렸으니까 그렇겠지요. 신경 쓰지 않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텍스트를 담는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이제 좀 더 커지고, 좀 더 깊어진 데 있을 것입니다.

 

l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어떻게 묶이는지를 알았다면, 또한 컨텍스트에는 공간과 틀만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요소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따지는 앞서고 뒤서고 하는 문제는 컨텍스트일 뿐입니다. 지금은 우리 뒤에 있는 연약한 이가 장차 어떤 본문을 담을지는 우리가 알 수도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l  사회에서는 법이나 윤리 도덕이나 유용성이 아니고서는 묶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와 달리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로 묶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 깊고 넓고 더 놀라워야 합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회는 교회가 가진 분명한 명분과 확신 때문에 사회보다도 더 경직되고 융통성 없이 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하는 정죄가 더 심하기도 하지요

 

l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져야 합니다.전부를 담으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대, 지금의 현실, 자신의 지위 그리고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이웃 안으로 우리가 직접 들어가야 합니다.

 

모두를 하나로 묶으시는 예수

 

l  롬 14:7-8

 

l  이 말씀에 대해 ‘아멘’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관심과 표현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한국교회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가장 유명한 행위는 새벽기도와 헌금이었습니다. 이는 각자의 충성과 신앙을 드러내는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l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넓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열심히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 말고 그 다음에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에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 바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실제 우리 삶의 현장에서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성도의 현실과 일상이라는 자리까지는 넓어지지 못했습니다.

 

l  그러니 우선 가장 급한 것은 지금 이야기하는 ‘앞서고 뒤서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롬14:7-9

 

l  강한 자와 약한 자 정도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 자와 죽은 자는 예수 믿은 자와 안 믿은 자입니다. 이 둘을 다 예수 안에서 묶으시려고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모두의 주가 되시려고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모두의 주인이 되려고 하신답니다.그러나 본문은 이러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l  본문 로마서 14장은 구체적으로 신앙의 삶을 살기로 한 자들에게, 즉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는 자들에게’하는 이야기입니다. 생명과 사망이라는 묶을 수 없는 간격을 묶으시는 예수라는 것을 기억하여 신앙생활을 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l  빌1:3-6

 

l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여기 있습니다. 구원을 주신 이가 구원을 완성하시며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를 교리적으로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l  신앙의 성패는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미 약속하였고 목적하신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고 완성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입니다.

 

l  우리의 인생, 우리의 고백,우리의 운명이 예수로 확인되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을 분명한 증거로 삼고 있다는 것을 언제든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 신앙이란 같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모두 마음이 같고, 뜻이 같고, 표현이 같고, 척하면 알아듣는 일사불란한 신앙 행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웬수들과 같이 서있는 것입니다.

 

l  ‘저 사람은 왜 교회 나올까’하는 질문이 나오는 정황속에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이를 살아낼 실력이 없으면 교회는 힘을 잃습니다.

 

조건을 기꺼이 감수하라

 

l  에베소서 5장 18절-21절

 

l  성령 충만은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피차,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 하는 복종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면서 제이 많이 하는 고민이나 항변이 있다면 “하나님, 어떡하라고요”일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다는 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l  부부란 무엇일까요? 평생 일치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부부는 감수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대안이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만들어 내십니다.

 

l  신기한 점은 부부로 살면서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아내 하나 만족시킬 수 없는 남편으로, 남편 하나 믿고 살 수 없는 아내로 도망갈 수 없게 인생에 새삼스레 묶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크고 위대해집니다. 이를 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컨텍스트입니다.

 

l  하나님이 바로 여기서 일하시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립니다. 오늘을 살아 냅니다. 자기 역할을 소중히 여기며 보이는 지금의 정황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귀 기울여 순종합니다.

 

l  우리는 컨텍스트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잠시 도망갈 수 있습니다. 안 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조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l  그것이 예수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별 없이,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에 담긴 깊이와 넓이 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또한 믿고 있다면, 우리가 살아내지 못할 컨텍스트란 없습니다.

 

l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과 현실과 지위를 불평하고 비교하고 다른 쉬운 것으로 확인하려고 들지 말고, 각자의 조건에서 억울함과 막막함과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을 견디면서 기다리십니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l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종종 순종이나 인내로 대체됩니다. 왜 그런 말을 쓰는지, 왜 시간이라는 개념이 동원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성숙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l  따뜻한 눈을 가지는 것,무슨 일이든 감수할 수 있는 것,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 이 지점에 오면 그런 것들을 아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보이는 것, 편안한 컨텍스트 같은 것으로는 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l  하나님은 매일 텍스트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21) ‘아멘’하시고 기대에 찬 하루하루를 위대하게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로마서 14:13-22)

 

 

배타적 자기 확인을 넘어서

 

l  로마서 14장은 사람들 간에 신앙의 특징과 선호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권면합니다.

 

l  롬 14:4

 

l  우리가 보기에 ‘저건아닌데’싶은 것도 아닌 채로 끝나지 않으며, ‘이렇게 해야 맞는데’라는 답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주께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세상 속에서

 

l  우리는 당연히 일반 규칙인 법과 도덕과 윤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할까요?이에 대해 성경은 그들을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을 믿고 기다리라고 이야기합니다.

 

l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가 ‘나 하나만 남아 도망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엘리야 생각에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누군가가 보이는 세력으로 존재해서 나서야 하 것 같은데, 보이는 지위를 가진 자는 자기 하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 위와 같은 하소연을 합니다.

 

l  그러나 하나님은 칠천 명이나 남아 있다고 말씀하시죠. 여기서 칠천 명은 숨어서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정치력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고,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의 왕을 세우라고 합니다 컨텍스트가 계속 이어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이끄실 것입니다.

 

l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텍스트를 담은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신자 개인이 컨텍스트에 어떻게 기여하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l  신자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웃 앞에서 텍스트를 담아내는 역할입니다. 즉 남아 있는 칠천 명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면할 수 없는 모든 교인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교회라는 이름을 빌어 컨텍스트를 바꾸어 그것으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는 시험에 빠지지 마십시오

 

l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며,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말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확인하여 ‘나는 너와 다르다’로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존재인 우리야말로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l  여러분은 여러분을 세우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야하며, 그 하나님에게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야 합니다. 롬 13:10

 

l  윤리나 도덕으로 하지 마시고 사랑으로 하십시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지는 것이며, 상대를 위하여 기다리는 것이며, 양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랑의 짐을 지는 것 때문에 신자의 인생은 고단합니다.

 

l  예수를 믿은 우리의 인생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의 짐을 지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l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있어서 우리의 이웃이 살 만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l  사실 이러한 명령은 기독교인이 순종해야 할 당연한 요구인데도 무시되고 늘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는 합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전도,선교,봉사,구제와 같이 종교성을 띠는 행위로 쉽게 때워 버리고, 자신의 신앙도 그런 활동으로 얻은 안심과 만족감으로 학인 하려고 합니다.

 

l  말이 안 되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있어서 누군가는 흙탕물을 밟지 않고 나를 딛고 걸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영광의 자유

 

l  롬 8:18-21

 

l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합니다. 썩어지죠. 홍수가 있고 가뭄이 있고 지진이 있고 폭풍이 잇습니다. 그렇게 자연재앙이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이처럼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l  이 자유는 단순히 무엇을 선택하는 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생명이 마음껏 크는 것,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자랑과 기쁨이 가득한 거룩한 자리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조물들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l  예수를 믿고 나면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을 자유롭게 시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생긴 자발성으로 예수를 뒤좇아, 기꺼이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간 것처럼, 내가 사는 이 시대의 현장과 이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보듬어 안고 살 수 있게 됩니다.

 

l  우리는 경쟁하고 후벼내고 정죄하고 꺾어 넘어뜨리는 존재가 결코 되지 않으리라, 말이 안 되는 상대방의 원망과 공격을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움에서 나오는 넉넉함으로 다 쓸어 담으리라,하고 사는 것입니다.

 

l  이 명예를 모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가 무엇인지 이제 안다면, 그리고 이 자유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아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사랑은 더 이상 명분이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정도에 머물지 않게 될 것입니다

 

l  빌2:5-11

 

l  이 하나님의 자랑이 보입니까? 나는 이런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양보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손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입니다. 여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믿음안에서 아무래도 좋은 인생

 

l  어떤 컨텍스트라도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개혁주의 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앙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이해가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어제 깨닫고 결심하고 행한 것으로 완료되지 않습니다.

 

l  매일 다른 하루 속에서 오늘의 신앙으로 사는 이것이 개혁주의 입니다. 오늘이라는 그릇에 다시 그것을 담아내십시오 내일은 내일 또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입니다.

 

l  단번에 다 뜯어 고치자는 그런 간단한 구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루를 더 살게 하셨다면, 하루만큼 더 담으십시오. 오늘 깨달은 것을 오늘 담고, 내일이라는 시간, 더 나아가 세월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여러분이 아는 텍스트를 담으십시오.

 

l  오늘 겪는 모욕과 실수를 감내하고 용서하고 극복하리라고 결심했더라도 그 다음날이 되면 어제와 똑 같은 결심을 반복해야 합니다. 어제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철없는 것들의 모욕과 무례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다만 힘만으로 장악한 컨텍스트에 의지하여 세력을 잡은 자들의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다시 감내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l  갈 6:9-10

 

l  선을 행할 때에 낙심할 만큼,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이 구절은 시사합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물론 원하는 보상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체가 위대한 일임을 알지 못한다면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l  고전 15장 57절

 

l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이고 우리가 우리를 만난 이웃들에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당신의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어, 라는 말씀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전해질 것입니다.”아무 데라도 상관없어. 아무래도 괜찮아”라고 고백하는 이 명예와 자랑이 여러분의 인생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서로 받으라

 

                                                  (로마서 15:1-7)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인생

 

l  로마서 14장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15장에 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권면에 이릅니다.

 

l  사람마다 죄인으로 태어나 하나님 없이 살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과 세상이 만들어 내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보며,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영광과 궁극적 목적을 예수 안에서 확인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l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인생은 내가 선택한 만큼 책임을 지거나 보상을 받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비참한 삶에서 빠져나와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사게 된 것을 누리는 영광의 삶이며,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l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인류를 부르시는 구원의 역사를 펼치고 계십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계속될 텐데 여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짐을 서로 지라

 

l  갈 6:1-5

 

l  옳고 그름이 전부가 아니며,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전에 그리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인류가 하나님 앞에 거역하고 멸망을 자초했을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기다려 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l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계시니 지체 중 누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그 짐을 나눠서 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은 동료가 되라,이웃이 되라, 가족이 되라는 것입니다.

 

l  처한 현실과 상황 바깥에서 서서 심사위원이나 해설자 역할을 하지 마시고 들어가 그 팀의 일원이 되십시오

 

 

성령충만

 

l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지만 나 편하게 해 달라는 것밖에 할 기도가 없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나 좀 편하게 너는 내 말 잘 들어라’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게 됩니다.

 

l  엡 5:15-21

 

l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술 취하는 것은 가장 불신항적인 행위를 대변하고, 성령충만은 가장 신앙적인 모습을 대변하는 것같이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비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l  세월을 아끼는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는 문제 곧 날마다 ‘오늘’을 사는 문제입니다. 오늘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반복되는 일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별별일이 다 생기는 인생의 무대입니다.

 

l  신자의 인생이든 불신자의 인생이든 다를 바 없는 먹고 살기에 바쁜 일상, 그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이 오늘에 별의별 일이 다 생깁니다. 가정에도 끊임없이 일이 터지고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l  또한 오늘은 내가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곳으로 나를 보내시는 날입니다. 어느 나라에 태어나고 어떤 신분과 처지 속에 사는가는 하나님이 정하셨고 우리를 그리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l  그런데 이것을 감수하지 못한 채 왜 이런 현실이 벌어졌는가, 왜 이런 조건과 정황을 주시는가,라고 답답해 하기 때문에 술에 취하여 시간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l  술 취하지 말라는 에베소서의 말씀은 시간을 헛되게 흘려 보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허송세월하지 말고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고민하면 지혜를 얻게 되고 답을 얻게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고민하여 죽어나라는 이야기입니다.

 

l  우리가 지금 있는 자리가 성령이 이끄시는 자리, 성령이 함께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l  우리에게 현실은 싫고 억울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곳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거기서 여러 이웃과 묶이도록 보내십니다. 그들의 짐을 지도록 보내십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 쓸만한 사람이 없더라도 여러분 하나 있으면 되는, 그런 괜찮은 사람이 되십시오. ‘소돔과 고모라’사건의 아브라함이 말했던 ‘의인 열 명만 있으면’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보냄 빋은 우리자리

 

l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를 여러분 편한 식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함께 묶여 있는 이웃이 인생의 가장 큰 장애며 짐이 된다고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이웃과 함께 있는 그곳이 하나님이 일하시기 위해 여러분을 보내신 자리입니다.

 

l  여러분과 이웃을 그렇게 묶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서 그 짐을 감수하십시오. 어떻게 감수 할 수 있으까요? 답 없는 인생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l  그러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라고 합니다.

 

l  우리가 어떤 형편을 겪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데까지 가야합니다.

 

묶으심에 붙들려

 

l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 우리 마음이 편안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깊고 넙지 않습니다. 늘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하지만 그 속에서 순종하는 것 입니다.

 

l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먼저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허락하셨기에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l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았고, 그 은혜를 입었고, 그 명예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나를 묶겠다는 순종을 하십시오.

 

l  나는 왜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나는 왜 마음에 계속 다른 생각이 들까, 나는 왜 온전해지지 않을까, 이런 오해가 우리 발목을 잡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무흠하고자 하면 자기를 닦고 또 닦느라 삶을 실제로 살아 내지 못합니다.

 

l  할 수 있는 만큼 하십시오. 할 수 있는 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오늘 하루를 제대로 살아 내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때만 밀고 결벽만 떨다가는 실제로 멋지게 살아 내는 일은 못하게 됩니다. 우선 여러분 옆에 있는 이웃에게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일, 따뜻한 눈으로 이웃을 격려하는 일부터 하십시오

 

l  고전 2:1-5

 

l  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전한다고 했을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만들어 주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안다.너희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설득하고 설명하고 감동을 줘서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뛰어들어 갈 수 있다.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가지고서 들어간다,라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l  아브라함도 그렇게 삽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떠나서 왔다 갔다 하다 죽습니다. 왔다 갔다 한 것이 전부인 그렇게 산 아브라함으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

 

l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l  왔다 갔다가 전부인 인생, 그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사람들이 그런 아브라함을 보고서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삶에도 은혜를 주십니다. 왔다 갔다만 하면 됩니다

 

l  예수가 보이신 길로,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지는 것 같고 망하는 것 같은 십자가의 길로 하나님이 은혜를 담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그러니 마음 놓고 사십시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십시오

 

l  여러분의 삶의 모든 조건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예수로 말미암아 인류와 역사의 운명을 자신에게 묶으신 능력에 붙들려 있음을 기억하시고 이를 살아내는 기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로마서 15:22-33)

 

 

바울의 사명과 고민

 

l  22절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어 그곳에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은 매우 고무되어 있습니다.

 

l  로마는 당시 제국의 수도였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 인류에게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이해하였으니 그로서는 당연히 로마에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여러가지 일로 몸이 묶여 로마에 가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편지를 먼저 보냈는데 이 편지가 로마서 입니다.

 

l  바울이 가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지는 스페인입니다. 23절 이하에 바울은 로마에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쓸 당시 그는 예루살렘에 가야 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선 편지부터 보내게 된것입니다.

 

l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야 했던 것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은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l  이 헌금을 전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해서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에 다녀온 온 뒤에 충만한 기쁨을 갖고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는 이 일을 왜 이렇게 중요하게 여길까요?

 

l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것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l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불러 이루려 하셨던 궁극적 목적이 예수일 거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것이 구원의 길인데, 예수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무효화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l  이런 이유로 바울은 터키나 그리스에 해당하는 곳에서 선교여행을 할 때에 언제나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들로부터 살해 위협도 받았습니다.

 

l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이며,그가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하신 구원을 모든 인류에게 배푸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l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이방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과 또한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을 한 일을 아주 큰 사건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사렘 교회와 이방 교회가 모두 예수 안에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선민과 이방인

 

l  하나님이 전 인류를 구원하시면 될 것을 왜 유대인만 따로 선민으로 부르셔서 이토록 복잡한 문제가 생기게 하신 것일까, 하는 질문이죠.

 

l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한 것같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도 선인과 악인,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잘난 자와 못난 자로 나누고 계십니다. 이런 현실이 로마서 15장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l  우리는 선민입니까. 이방인입니까. 우리는 잘난 사람입니까, 못난 사람입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잘 풀지 않으면 우리는 현실에서의 우리의 지위와 조건을 늘 오해하게 됩니다.

 

l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으로서의 자랑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이기 위해서 입니다. 롬15:7

 

l  이방에게는 안 주시고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약속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다 지키심으로 당신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선민에게 충분히 증명하셨습니다.이것이 선민이 누린 혜택입니다.

 

l  롬15:9-12

 

l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구별하여 저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저들에게 약속을 주셔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그들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하나님의 분명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l  이방 곧 약속을 받지 않고 특별한 관계 속에 있지 않아 마치 외면당한 것 같은 이들에게도 다 복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긍휼과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임을 보이시려 했던 것이죠

 

l  선민과 이방의 차별이 우리에게는 옳음과 그름, 잘남과 못남의 구별로 다가오지만, 하나님은 선민에게는 하나님의 분명하심을, 이방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l  하나님께서는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을 통하여, 하나로는 다 드러낼 수도 다 담을 수도 없는 당신의 분명하심과 무한하심, 약속에 신실하심과 은혜 베푸심을 인류 역사에 보이셨다는 것을 로마서는 말하고 싶어 합니다.

 

l  시편 8:1-9

 

l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영광을 감격하면서 쓴 시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영광을 사람의 발아래 두십니다.

 

l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치십니다.

 

배역을 감당하라

 

l  하나님은 우리와 일하시겠다고 합니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갖고서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다 드러내시지 않고 우리만큼만 갖고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게 됩니다.

 

l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여유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지 못하여 밤낮 조건이나 힘에서 우위에 서고 싶어하고, 상대를 무릎 꿇려 자기 편한 방향으로만 해결하려고 듭니다.그래서 늘 고함만 지르게 되고 늘 인상만 쓰다가 헤어집니다.

 

l  고전 4:1-5

 

l  각각 자기의 일을 하라, 자기의 조건으로 현실을 살아라, 그리고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맡은 배역에 충성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 하십시오. 실제로 살아보고 해보십시오. 그래서 나아지십시오. 후회하고,성찰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l  못난 짓밖에 한 것이 없는데도 휼륭해지는 것, 이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분명함에서 넉넉함으로

 

l  고전 13:4-7

 

l  사랑은 상대방으 존중하는 것이며,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강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 그를 내 옆으로 보내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 다물고 사는 것입니다.

 

l  롬 12:9-21

 

l  여러분의 분명함을 상대방과 나를 배타적으로 구별하는 데 사용하지 말고, 넉넉해지는 수단으로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그 분명함이 모두를 포용하고 모든 것을 감수하게 하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라는 이 말이 모두를 참아낼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보이십시오

 

l  롬 13:7-8

 

l  이것은 예의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예의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지혜와 신비와 그분의 신실하심을 인정하는 데서 나옵니다.

 

l  현실과 정답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방향도 없고 목적지도 모른 채 다만 명분만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가 분명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길로 나아가면서 우리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로마서 16:01-27)

 

 

위대한 조연들

 

l  로마서 16장 1절-16절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들을 호의적으로 소개하여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이들을 기억하고 함께 감사를 나누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l  “역사에는 위업과 주인공 같은 위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일들과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것으로 역사와 현재라는 현실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의심하거나 거부한다고 역사가 바뀌지 않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과 외면이 미래를 결정한다.그렇다면 다만 체념하거나 외면하여 비겁하게 살 수는 없다’이것이 로마서 16장의 이야기입니다.

 

l  17절-19절의 권면은 단순히 지키기만 하면 되는 행동지침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로마서 전체의 큰 그림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접속사 두개입니다. 3장21절 그러나, 12장1절 그러므로입니다.

 

l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는 넉넉한 관용과 베풂이 신앙의 본질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3장21절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된 신자의 인생입니다.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운명, 자초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자비와 긍휼의 넉넉함으로 우리를 권하십니다.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영광된 존재로 복된 인생과 운명을 살라고 권하시는 것입니다.

 

l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언급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신앙의 분명함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으라, 그러니 그 분명한 신앙을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것으로 축소하지 마라, 타인을 정죄하는데 골몰하지 마고 오히려 마음껏 열어 두고 신자의 삶을 살아 내라. 이런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드을 나열하는 것입니다.

 

l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지지만,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결코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전부 예수로 권하신 존재요, 운명이라고 합니다

 

연약함이 가지는 깊이

 

l  롬 12:14-21

l  여러분, 자신의 조건에 대하여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기에 무엇을 담으시는가 가 중요합니다. 욥기에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 낮은 하나의 눈을 가질 뿐이다’라고 합니다 밤에는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해야 메시지를 담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안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신비가 여기 있습니다.

 

l  이사야 53:1-2

 

l  에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며, 누가 보내셨는가, 어떤 약속의 성취인가, 인류에게 어떤 운명을 만드셨는가, 이런 것들을 신적 의지와 약속으로 확인시킵니다. 특히 그의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인가를 보이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자주 놓칩니다.

 

l  빌2:5-9

 

성육신으로 드러난 성의

 

l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구약에 근거한 유대교 전통에서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데 왜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길까요.

 

l  예수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 설명의 구체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설명의 구체성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알 수 있게, 볼 수 있게,이해할 수 있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의와 하나님의 내어주심,내려오심이 예수에게 있습니다.

 

l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체적 통치와 은혜의 내려오심에 대해 내가 믿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려오심과 찾아오심을 우리는 예수로 갖고 있습니다. 예수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 설명과 자리 자랑은 모두 우리를 품는 데 있습니다.

 

l  우리 중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의 품 안에 드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육신입니다.

 

l  이사야 53:3- 6

 

l  우리 때문에 억울한 짐을 지셨다.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 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그 못난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자초한 채찍에 맞는 자리까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그 비난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l  이런 미련함과 무지함이 평생 저를 붙잡아 늘 억울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제게는 진심이 있는데 제 꼴이 이게 뭡니까, 이것이 제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l  하나님은 우리가 품고 있는 이 원한과 원망 앞에 이렇게 마씀하십니다. ‘너는 악역을 맡지 마라’해결해 주시지는 않고 그렇게 말씀만 하십니다. ‘너 그 자리에서 웃어라’ 그러시는 것입니다.’거기서 웃어라, 너는 그 자리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한 역할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영광이 드러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명예로운 길

 

l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해결하는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영광된 역할로 살아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조건과 우리의 처지를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l  롬 12:2 - 3

 

l  엡 4:25-32

 

l  예수를 믿는 인생을 사는 것은 그 영광과 명예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상황이 억울하면 웃으십시오. 침묵하고 양보하십시오. 여러분이 평생에 다른 것으로 얻지 못했던 명예를 갖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