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 하늘 나라의 비유
l 비유로 주어지는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형제요 자매이며, 모친이라는 그분의 주장(마 12:50)에 대한 주석으로 읽힐 수 있다.
l 당신은 출생으로 그리스도의 형제나 자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배움으로써 그분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이다.
l 비유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시기 위해 그분의 제자들을 교육시키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지 제자들로 하여금 분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신다.
l 그러므로 비유는, 산상설교처럼, 혈연적인 친족관계가 우리와 그리스도의 친족관계보다 더 확정적이라고 상정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만 하는지를 상상하는 데 언제나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l 마태는 예수님께서는 언제 또는 어느 집에 계시다고 말하지 않고, 오직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고소당한 그 날에 예수님께서 그 집에서 나와 바닷가에 앉으셨다고 말할 뿐이다.
l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오시자마자 큰 무리가 그분 주위로 몰려든다. 실제로 무리가 너무 많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연설하시기 위해 배에 올라타셔야만 했다.
l 따라서 무리는 예수님께서 배 안에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시는 동안 바닷가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전하시던 것과 아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한다.
l 즉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무리가 듣긴 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대상은 제자들인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어떤 비유들을 통해 무리를 가르치시지만, 정작 제자들에게만 그 비유들을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 비유들에 의해 드러난 세상의 빛 안에서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사역 초기에는 비유와 비슷한 비교들comparisons을 사용하셨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자신의 집을 짓는다고 말씀하신다.(마 7:24-27), 또한 옷과 포도주 부대에서 유추하여 새 것이 옛것에 쉽게 합해질 수 없음을 시사하시고(마 9:14-17), 깨끗하지 못한 영들은 물 없는 지역에서 집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하신다(마 12:43-45)
l 그러나 이제 에수님께서는 거의 조직적인 방식이라고 불리는 비유들을 사용하시고 그 사용에 관해 설명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왜 비유로 말씀하시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데, 얼핏 보기에는 다소 이상하게 대답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마 13:13) 하도록 예언하라고 이사야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지시(사 6:8-13)를 인용하신다.
l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선지자적이면서 동시에 묵시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편 78편1-3절을 인용하시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세상의 기초에서부터 감추어졌던 것들을 드러내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l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만드신 주님께서 동정녀의 태에서 발견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현존하셨던 것을 분명하게 나타나게 하시는 아버지의 비유시다.
l 그런 계시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이 사람, 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육신, 십자가로 기꺼이 가시는 그분의 의지는 하나님을 감추는 동시에 드러낸다.
l 그래서 비유들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그분의 사역의 결과인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데 필수적인 변화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
l 예수님처럼, 비유들은 형식에 있어서 묵시적이다. 비유들은 분명히 그것들의 묵시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극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그것들의 형식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증거한다.
l 새로운 시대처럼, 비유들은 구속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미 임한 구원에 상응하는 심판 또한 제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말에 천사들이 의로운 사람들로부터 죄인들을 분리해내고, 악을 행한 자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마 13:42, 49-50)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l 이것은 강한 표현의 말이긴 하지만, 또한 예수님께서 그분의 통치에 상응하는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오셨음을 기억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l 그러므로 비유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데 중요한 가르침의 형식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왜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라 하셨겠는가? 그러나 비유들은 전체적으로 복음의 특성을 예증해줄 뿐이다.
l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에 관해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종종 그러하시듯이, 그들에게 시편, 특히 78편을 참조하라고 하신다. 비유들은 우리가 조상들에게서 전해 들은 ‘어두운 속담들’이다.
l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속담들이 내포한 의미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이제는 비유들을 말씀하시는 분과 말해진 비유들이 하나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옛 것에 감춰 있었던 새 것을 드러낼 수 있는 하늘 나라의 서기관들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비유들로 말씀하신다(마13;52)
l 그러므로 비유들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가르침, 곧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심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마태가 신실하게 따른 가르침을 대표한다.
l 이에 대해 울리히 루즈 Ulrich Luz는 이렇게 언급한다. …. 우리는 거듭해서 예수님의 비유들은 단지 이론적인 것 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것들의 의미는 거듭해서 매일의 삶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지성에 의해 파악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살기를 요구한다.
l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어떻게 씨를 뿌려야 하는지에 관한 충고가 아니며, 밀과 가라지의 비유 또한 농부들에게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부에 대한 것이며 (마 13:22),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인내하지 못함과 예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인내로서 기쁨에 대한 것이다.
l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비유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비유로 가르치기를 선택하신 이유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비유들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시기 위함이다. 비유들은 마태복음 전체가 보여주듯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l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는 비유들 중 몇 가지만을 사용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는 모든 비유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비유들을 설명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만 하신다. 다시한번 우리는 기독론과 제자도가 예수님의 사역에서 분리될 수 없음을 본다.
l 제자들은 해석의 선물을 받을 것이지만, 그것은 힘들게 얻는 선물이 될 것이다. 비유들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제자들이 이해하는지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마 13:5).
l 그러나 그 “그렇다”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야 완전히 이해될 것이다. 제자들은 “볼”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빛에 의해서 눈이 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 멂blindness, 곧 비유들이 창의적으로 고안해 낸 눈 멂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씨뿌리는자의 비유
l 제자들은 그 나라의 씨가 뿌려진 좋은 토양이다. 우리는 그들이 좋은 토양인 줄 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좋은 토양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l 우리는 성령님의 돌보심 아래에 있는 제자들이 적합한 증인들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런데 제자들을 의미하는 토양이 비옥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설명하시기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음으로써 그 나라의 비밀을 받는 중에 있다.
l 그 비밀들, 곧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만이 알게 되는 비밀은 옛 것으로부터 새 것을 구별한다.
l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그 나라의 선포가 산출한 결과에 관한 묘사로 설명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응답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l 베드로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로마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권력 앞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주님께 신실하게 남아 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l 베드로는, 우리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준비되어 있어서 정작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너무 많이 준비되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분께서 어떤 메시아신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는 뜻이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이것은 제자들조차도 힘든 과정을 통해 배우는 교훈이다.
l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유럽과 미국에서 교회의 위상과 교인의 상실을 염려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주 다뤄지지는 않지만, 서양의 교회의 상황에 이보다 더 적절한 본문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l 우리가 죽어가는 이유는 아주 단순해 보인다. 제자이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것이 단순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l 부의 유혹 그리고 부에 의해 생산되는 세상의 돌봄은 아주 쉽게 우리의 상상력을 어둡게 만들고 질식시킨다. 그 결과, 교회는 복음의 가장 심오한 적인 감상주의sentimentality의 먹이로 전락하고 만다.
l 복음은 심판이 배제된 채로 단순히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기’ 위한 하나의 공식이 되고 만다.
l 너무나 자주 교회의 추락한 위상과 상실된 교인의 숫자를 회복시키기 위한 전략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요구에 직면하지 않고서도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
l 그들은 잠시 동안 “기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박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갱신을 위한 많은 전략들의 이런 얄팍한 특성은 그로 인해 생겨난 교회들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박해에 직면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l 이것은 미국이 처한 특별한 문제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어떻게 미국식의 생활방식과 긴장관계에 놓이게 하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l 이는 보수적인on the right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진보적인on the left 기독교인들에게도 참이다. 양쪽 모두, 종종 너무나 비슷한 방식으로, 자유가 제자도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l 따라서 나는 이 비유가 미국의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으로서 미국의 교회의 상황을 읽는 데 당연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급진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l 간단히 말해 미국의 교회는 깊은 뿌리가 자라날수 있게 하는 토양이 아니다. 부가 말씀이 자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우리는 부를 통해 더 많은 선을 행하는데 필요한 힘을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l 그러나 부는 오히려 그런 상상력을 가라앉힌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강요 받았던 것처럼, 오직 필요necessity만이 창조할 수 있다는 세상에 대해 대안이 되도록 강요 받지 않기 때문이다.
l 소유물에 의해 소유되어 있는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잃지 않은 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세상에서 종종 행동하기를 바란다.
l 예컨데, 얘수님을 따르려는 많은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기꺼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l 실제로 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교회는, 오히려 더 깊은 뿌리가 가능할 수 있도록 복음의 토양이 준비되는 교회일 수도 있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좋은 토양일지라도 아주 다른 결과를 낳는다(마13:8)고 말씀하시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보인다.
l 고전 12:5-11
l 교회는 다른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어떤 교회에서 참된 것은 다른 교회들에서도 참된 것처럼 보인다.
l 만일 비유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하고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제자가 되기 위한 시간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이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비유는 종종, 시대들 사이에 있는 이 시대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간 에, 타협한 교회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l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에 대한 이해, 즉 신의 도성과 사람의 도성에 대한 이해가 종종 이 비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이 비유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풀어내기 위해서 사용된다.
l 어떤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도성과 ‘사람’의 도성 사이에서 도출해내는 분명한 대조는 천사들이 가라지들을 모아서 불사르게 될 세상의 종말(마 13:40)에서만 도출할 수 있는 대조라고 주장한다.
l 그렇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l 이 악한 세상에서, 그리고 이 악한 시대에서 교회는 현재 당하고 있는 모욕을 통해 미래의 승격을 준비하고 있다. 교회는 두려움의 찌름으로, 슬픔의 고문으로, 괴로움의 곤경으로, 유혹의 위험으로 훈련받고 있다. 또한 교회는 오직 기대 안에서만 즐거워한다. 그리할 때 교회의 기쁨은 건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안에는 많은 배교자들이 선한 사람들과 섞여 있고, 두 종류의 사람들 모두, 말하자면, 복음의 저인망 안으로 모아진다. 그리고 바다에서처럼, 이 세상에서 두 종류의 사람들은 구분없이, 해변에 다다를 때까지 그물 안에 갇힌 채 헤엄친다 (아우구스티누스)
l 라인홀드 니버는 스스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서 있다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책임 있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타협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비유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l 니버는 이 비유를 죄짓지 않고 살려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적인 시도들을 정죄하는 데 사용한다.
l 니버에 따르면, 이 비유는 악의 특수한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특히 교회 안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너무 많이 섞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우리가 상처입지 않는 선에서만 그것들을 구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l 니버는 기독교인들이 일시적인 구별을 해야만 한다고 인식하지만, 궁극적인 구별은 결코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l 니버에게, 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실수할 수 있는 인간 존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인 척할 때 그 자신과 세상을 배신하는 것일 뿐이다. 교회는 죄가 많은 기관이다. 따라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기본적으로 겸손에 관한 것이다.
l 기독교인들이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교회의 안팎에서 사랑과 자기애가 “삶에 뒤섞여 있고, 어떠한 도덕 제도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 비유의 단순한 말씀은 모든 도덕가들의 지혜보다 훨씬 심오하다.
l 거기에는 창조력의 엔진인 자기애가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까닭에 정당화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역사를 살펴볼 경우, 우리는 그것이 창조력의 엔진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니버)
l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니버의 이해-확실히 폭넓은 해석-가 지닌 문제는 그것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설명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그런 읽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에 대한 이해에도 충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l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가 그 구성에서 섞여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될 수 없거나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이 행동하듯이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l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께서는 비천하게 태어났고 교육도 받지 못한 제자들을 택하셨고, 그래서 만일 그들 속에 어떠한 위대함이 있다면 그 위대함은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언급한다.
l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 한 사람, 곧 그리스도께서 선을 위해 그를 사용하실 수 있었는 데도, 악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게까지 관용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l 거룩한 복음의 씨를 뿌리신 후에, 그것이 그분께 속하는 한 그분의 육체적인 현존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뿌리시기 위해서, 그분께서는 고난을 당하셨고, 죽으셨고, 다시 사셨다. 그래서 그분의 고난으로써 우리가 진리 때문에 겪어야만 하는 것을 보여주셨고, 죄의 감면을 위해 그분의 피를 흘리셨다는 깊은 신비는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부활로써 우리가 영원히 희망을 품어야만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고나서 그분께서는 지상에서 사십 일을 제자들과 동행하며 보내셨고,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 후 열흘이 지나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셨다.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의 오셨음을 증거하는 가장 위대하며 가장 오해의 여지가 없는 표적은 모든 사람들이 열방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 교회의 하나됨이 열방 가운데 존재하고 그래서 모든 언로로 말해질 것을 보여주었다 (아우구스티누스)
l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분명하게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의 혼합된 특성을 위한 예수님의 정당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 비유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한 그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견디도록 격려하기 위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l 모든 비유들처럼,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묵시적인 비유다. 그러나 묵시적이라는 것은 마귀까지도 인내해야만 하는 교회의 필요성을 일컫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 유다를 인내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그 나라를 강제로라도 실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인내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그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해 말해준다.
l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교회나 세상에서 복음의 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인내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열방 가운데 교회가 존재하기를 기다리면 된다.
l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 관해 선포하신 것에 내재되어 있는 세상의 종말론적 특성을 전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상은 오직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셨기 때문에만 알 수 있는 것이다.
l 그런 관점에서 니버에게는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을 교회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알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
l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상응하는 미친 짓이 있다. 세상을 아는 것, 하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서두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l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뒤따르는 비유들은 세상의 참된 본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제자들이 견뎌야만 하는 방식에 관한 주석들로 제시된다.
l 하늘 나라는 겨자씨나 누룩과 같다. 왜냐하면 그 나라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the insignificant의 중요성the significance을 보라고 가르치신다.
l 예수님의 사역의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로마 당국의 관심 밖에 있는 존재다. 권력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단지 로마 제국의 후미에 있는 패배한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선지자일 뿐이다.
l 그렇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시작의 ‘작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주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런 관심은, 오늘날 우리가 서양 문명에서 그것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이 정당화된다고 제안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l 또한 그래서 우리가 기꺼이 작게 시작하려는 것을 적법하게 보는 것도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 비유들은 묵시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진행 중에 있는 근대적인 믿음의 예증으로 해석된다.
l 하지만 ‘작게 시작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뿐만 아니라 비유의 대한 그런 해석들은 그 나라의 특성을 왜곡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비유의 묵시적인 특성이 변하지 않았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열매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열매들은 팔복에 의해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l 세속적으로 성공한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가졌든지 간에, 소위 그 성공들은 너무나 자주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장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라는 과제로부터 교회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렸다.
l 왜 씨 뿌리는 자와 밀과 가라지 같은 비유들을 사용하시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은 이천 년에 걸친 기독교의 역사가 기독교인들의 신실함을 보장하거나 기독교의 합리성을 유지하는 데 충분치 않음을 의미한다.
l 그 나라의 묵시적인 특성은 소위 기독교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다. 기독교인들은 마치 모든 것이 이 사람예수님 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살아야만 한다.
l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셨고 또 예수님 자신이기도 한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반응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실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l 더군다나 우리의 반응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그 나라를 구성한다. 그 나라가 산출하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바위 위에 살고 그 결과로 하늘나라의 씨를 너무 빨리 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아주 다른 기쁨이다.
l 밭에 있는 보물의 비유와 값진 진주의 비유는, 우리가 하늘 나라의 기쁨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많은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를 발견한 경우, 그 나라의 보물이 있는 밭이나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팔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l 이 비유들은 전적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들의 이전의 모든 삶을 포기할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급되었다. 제자들은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으로 그들을 이끄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자들이 그렇게 ‘그물에 낚인’ 것이 다행임을 분명히 하신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그물이 가득 찰 때, 그것 또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천사들에 의해서 그 나라의 돌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내로 단련되었다.
l 교회의 과제는 타협함이 없이 인내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이해하냐고 물으시고,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한다.
l 그러나 우리는 이 “그러하오이다”가 시기상조인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옛 것과 새 것 모두를 그의 보물창고에서 꺼내오는 집주인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l 제자들의 “그러하오이다”가 역설적인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온전한 복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에 더 잘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l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가 어떠한 “그러하오이다”로 대답하든지 간에, 그것은 결과보다는 약속에 대한 “그러하오이다”가 되어야만 한다.
l 하늘 나라 비유는 그 나라가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창조하고 공간을 구성하는 나라임을 분명히 한다. 그 나라가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 안에 존재하고 공간을 차지할 것을 요구한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위해 하늘 나라의 물적인 실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비유들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많은 선지자와 의로운 사람들이 보고 듣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을 보고 듣기 때문이다. 정말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그 비유시다.
l 예수님께서는 비유들로 말씀하신 후에,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신다. 이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을 때는 권능의 일들을 행하셨다. 이번에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권능의 일들은 물론 그분의 지혜로 인해서도 놀란다.
l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목수의 아들이심을 알기 때문에 당황했다.
l 그러므로 마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얘수님을 배척한지라”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분의 치유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l 마태는 왜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다는 것을 안다. 그 권위는 예수님을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거나 권능의 일들을 행할 전문적인 자격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l 고향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대한 친숙함 때문에 예수님께서 목이 마른 자, 낯선 자, 헐벗은 자, 또는 죄수로 우리 앞에 나타나실 때 그분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l 우리는 예수님의 이미지라는 부담을 떠안고 있는데, 사실 우리를 사랑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가족을 사랑하도록 돕는 것, 우리보다 행운이 부족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 외에는 잘하시는 것이 없는 예수님보다 더 파괴적인 이미지는 없다.
l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다만 아주 희미하게만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일들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환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한 선지자로 봉사해야 했지만 정작 그들에 의해 거절당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위대한 반열에 자기자신을 자리매김하신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처럼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의 전형이 되셨다.
l 그 선지자는 스스로 말해진 말씀이 되셨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현실화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끝이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선지자들이 오실 것이라고 말했던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에서, 자신의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시는 것은 단지 한 이상주의자를 또 다시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구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을 거부한 것이다.
l 게다가 그분의 거부당하심은 섭리적이다. 구약에서도 종종 과거를 회상하면서 재앙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섭리다.
l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에서 거부당하시지만, 이 거부당하심은 이방인들이 언약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허락한다(롬 9-11).
l 그런 판단들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장래를 바라보면서prospectively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면서retrospectively 행하는 신실함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l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몇 가지 권능의 일들만 행하신다. 왜냐하면 어떠한 권능의 일이 행해지더라도 그것은 더 많은 오해와 거부로 이끌 것이었기 때문이다.
l 마태는 오해받고 거절당하는 것이 예수님의 운명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 심지어 예루살렘에서도 – 이해되고 수용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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