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l 많은 사람들에게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는 너무 부담스럽다. 대신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이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마귀처럼,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다.
l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듯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호의를 받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하늘에서 온 표적을 그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l 그들은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결정적인 증명을 원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저항하셨듯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것도 행하지 않으신다.
l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나아온 이후, 우리는 여기서 사두개인들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연스러운 동맹관계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들의 입장이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한다.
l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성종교를 대표하는, 즉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사하시는 권위 – 이는 이스라엘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 에 그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l 그러므로 표적에 대한 그들의 요청은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날씨를 예측하기 위해서 하늘을 읽는 방법은 알면서도 정작 시대의 표적들을 해석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신다.
l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설령 그들에게 하늘에서 온 표적이 주어진다 해도 그들이 그것을 읽을 수 없을 것임을 시사하시는 것이다. 그들이 표적을 요청하는 것은 자신들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임을 보여줄 뿐이다.
l 그들이 음란한 것은, 그들이 율법과 결혼한 척 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의 삶은 그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세대가 악할 수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긴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타락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말해주는 참된 통찰이다.
l 요한복음은 표적에 대한 복음서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은 믿음을 강요하는 표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믿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에 대해 경고해 주었다(요 11:45-46)
l 표적에 관한 요한의 이해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표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에 대한 해설이다.
l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요구하는 표적 없이, 다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표적만을 원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어떤 표적이든 그 가치는 그 표적이 자신을 어떻게 가리키느냐에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신다.
l 사실 ‘시대의 표적’을 읽는 방법을 아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읽기가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기독교인들은 일간신문을 읽으면 시대의 표적을 읽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l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일간 신문을 읽고 그것에 적응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일간신문에서 제안되는 것보다 다른 대안적인 시대의 읽기를 제안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같은 일간 신문을 읽어야 한다.
l 시대의 표적을 바르게 읽는 것은 오늘날 정당성을 가진 이야기들에 저항할 수 있는 교회를 요구한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종종 만일 우리가 히틀러 같은 사람을 맞닥뜨렸다면 그가 악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측면세서, 독일의 교회는 미국의 교회가 그랬던 것보다 신학적으로 더 놀리정연한 교회였다.
l 그런데도 독일의 교회는 히틀러가 부상하는 것에 대해 적절하게 도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독일의 기독교인들이 실패했던 것은, 마치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스스로를 미국의 기독교인들이라고 가정하듯이, 그들이 스스로를 독일의 기독교인들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l 국가주의에 물든 교회들이 시대의 표적을 신실하게 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l 시대의 표적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 즉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이제 요나의 표적 아래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관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난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도전이기도 하다.
l 예수님께서는 앞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행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셨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무리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은 행해야 하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권고하실 것이다. (마 23:2-3)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산상설교에서 보았듯이, 온전한 삶을 요구하신다. 진리를 보기 위해서, 그 나라의 표적을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습득한 미덕으로 바르게 형성되어야 한다.
l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진실함의 습관을 습득해야만 한다. 앎과 미덕은 분리될 수 없다.
l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표적을 주시기를 거부하신 것에는 기독교인들이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관한 심오한 함축이 담겨있다.
l 우리는 복음의 진리는 그 진리를 인식하는 데 요구되는 삶의 종류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실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진리와 우리가 사는 방식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앎을 우리의 삶에서 뽑아내 분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복음은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다.
l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음란한 시대에서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예수님께 하늘의 표적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전복되어야 하는 필요성이 제외된, 인식할 수 있는 표적을 원한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우리에게 다른 표적 주기를 거절하신다. 요나의 표적은 죽음의 표적이자 죽음이 폐배하는 표적이다.
l 요나는 물고기에게 삼켜지고, 삼일동안 물고기 뱃속의 어두움에 갇혀 있었다. 물고기는 요나를 소화할 수 없었고, 그를 하나님의 마지못한 예언자로 토해 냈다.
l 예수님 역시 죽음에 넘겨질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요나를 삼킨 물고기 같이, 아버지의 뜻을 신실하게 행하시는 그 죽음의 주님을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앞서 십자가 처형을 암시하시면서 요나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12:38-42). 하지만 이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분의 부활의 표적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임을 시사하신다.
l 왜냐하면 그 표적은, 그분의 탄생의 표적과 같이, 십자가에 의해 구속되는 세상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을 요구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떠나시고, 먹을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린 제자들과 마주치신다. 바리새인들 및 사두개인들과의 만남 바로 직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l 제자들은, 우리들 대부분처럼, 말귀를 못알아 먹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옛 시대와 관련해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이 속한 세상을 통제하려는 몸부림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도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l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가 말하고 듣는 방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얼마 안되는 빵과 물고기로 오천 명 또는 사천 명을 먹이는 것을 그들이 보았음을 상기시키신다.
l 심지어 그들은 무리를 먹이고 남은 음식도 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언급하실 때 빵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가리키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없었을까?
l 마태는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항해서 자신들에게 경고하신 것이었음을 이해했다고 말해주시만,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l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그분께서 죽임 당하실 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기 때문이다.
l 마태복음 11장부터 마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더불어 이스라엘 도성과 지역을 따라가게 하면서,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 가르침, 그리고 그분의 사역이 산출하는 논쟁들에 관해 증인이 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가시사랴 빌립보 지역에 들어가실 때 예수님과 함께한 우리의 여행은 이제 절정에 이른다.
l 그 이름이 시사하듯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이스라엘과 이방 세상의 경계에 있는 도성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곳이 여기다.
l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대답한다. 이런 반응들은 예수님께서 예언자의 전통에 서 계시다라는 공통된 전제-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전제-에서 비롯된다.
l 따라서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전통에 속한 사람들의 견해를 보고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레미야와 동일시하는 것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곧이어 예수님께서도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한 선지자로서 보여준 것과 똑 같은 슬픔을 표현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서는 바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앞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실 때 사용하신 것처럼,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실 때 3인칭으로 인자를 언급하시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로 이어서 하신 질문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님께서 인자에 관해 물으실 때 그것은 자기자신에 관해 묻고계시는 것임을 알려준다.
l 더욱이 예수님의 질문이 제자들을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요, 비유를 설명해준 사람들이며, 파도를 잔잔케 하고 물 위에서 걷는 기적을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l 시몬이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몬과 함께 배로 돌아오셨을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식별했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한 제자가 예수님을 메시아, 곧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분, 그분 홀로 적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고 인식한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메시아 – 왕이지만 쉽게 인식되지 않는 분 – 로 인식한 요나의 아들 시몬을 칭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팔복에서 묘사한 사람들과 같이,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신다.
l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나온 소리는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 규정했다.(마 3:17). 이번에는, 아들의 소리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l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신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혈육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l 시몬은 어떤 직관적이거나 신비한 지식에 의해 예수님께서 메시아심을 배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몬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것을 배운 것은 그가 자신의 제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의 계시는 없다. 마태복음은 계시가 아니다. 오히려 시몬과 마태는 계시이신 예수님의 증인들이다.
l 시몬과 마태 없이, 성경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증인들은 계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증거하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시몬과 마태는 그들이 증거한 것에 참여한다고 말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참여는 단지 에수님께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l 예수님에 관한 시몬의 인식은 그의 정체를 변화시킨다. 그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새 이름인 베드로, 즉 반석이란 이름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베드로에게 주어진 과제는 교회의 선물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잃지 않도록 섬기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대신에 우리는 교회를 받았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식의 복음 이해는 종종 예수님께서 곧 임할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 시대의 도래가 지연되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결코 예상하시지 못한 기관을 창출하셨다고 가정하게 한다.
l 하지만 처음부터 예수님의 선포가 지닌 묵시적인 특성은 분명했다. 그 나라의 가까움은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설립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살 수 있는 한 백성을 자신에게 모을 것을 요구한다.
l 교회는 이와 같은 새로운 창조가 첫 번째로 낳은 것이다. 베드로는 교회의 종이다.
l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가 세워질 반석으로 삼으셨는데,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지옥이 그분께서 세우신 것을 파괴하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렇게 세워질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l 교회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하거나 교회의 존재를 보장하려고 하는 것이 베드로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임무는 교회가 메시아를 증거하는 자신의 사명에 참되도록 유지케 하는 것이다.
l 그 증거는 거룩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요, 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면 서로 기꺼이 대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마 18:15) 교회는 폭력에 대해 대안이 되는 고백과 고행, 화해를 실천함으로써만 평화의 교회가 될 수 있다.
l 베드로에게 위임된 열쇠들은 교회에게 주어진 열쇠들인데, 이 열쇠들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에 매우 취약해지게 된다. 베드로는 제자들과 분리되지 않으며, 교회와도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베드로는 교회안에 거하면서, 교회가 예수님에 대한 증거에 참되도록 책임을 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증거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일치의 근원이 된다.
l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 분명히 로마주교의 특별한 지위와 관련된 본문이다. 마태복음 16장18절에 관해 해석한 글들은 성경에 있는 그 어떤 본문보다도 많다.
l 이 구절에 관해 그렇게 많은 글이 쓰인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책임에 어긋나는 것이다. 베드로의 과제는 자신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증거하는 것이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울 반석과 베드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맞닥뜨릴 때, 우리가 교황권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중에 베드로의 의미는 복음서를 읽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교회가 성육신 교리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된다.
l 베드로는 교회에게 서로 다투기 위한 수단들을 제공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죽음의 문들,the gates df hades, ‘음부의 권세’로 번역함-역주 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일치의 직분the dffice df unity-시공을 가로질러 세워진- 을 받은 것이었다.
l 베드로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갈등을 겪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그와 같은 교회가 없다면 구원도 없을 것이다.
l 베드로는 기독교인들에게, 시공을 가로질러 교회와 세상을 예수님께서 메사아, 즉 그리스도시라는 실재에로 안내하는 데 결코 실패한 적이 없는 한 증인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이름이다.
l 문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그렇게 섬기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세우셨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 어떻게 그런 섬김이 실현되어야 하느냐에 있다.
l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죽임으로써 그들의 하나됨을 배반하고, 또 거룩을 위한 부름을 배반할 때, 베드로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들이 부름을 받은 목적에 실패하는 것은 분명하다.
l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나라는 평화의 나라, 화해의 나라이고(마 5:21-26),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한 대안을 창조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l 베드로의 과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듯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군대 없이 그 존재를 유지하는 교회의 신실한 시민이 되도록 부르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반석으로 시몬의 이름을 바꾸신 후,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시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강하게 명하신다.
l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손에 의해 큰 고난을 겪고 살해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는 것이 요구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마 10:38), 이제는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에 기꺼이 동행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심지어 죽음에까지라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l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분의 죽음에까지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베드로는, 자신의 새로운 신분을 짐작한 듯, 예수님을 한 쪽으로 데리고 가서 책망하기 시작한다.
l 베드로는 자신의 과제가 예수님의 사명을 성공시키는 결과물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염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님께서 죽음을 알리시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낙심시킬 수도 있음을 두려워한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반석인 베드로는,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책망하고 배반하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지만,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새로운 신분으로 충만해서 예수님을 꾸짖는다.
l 그는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지게 될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뒤따른다.
l 이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교회의 시작이지만, 이후로도 교회의 삶의 전반에서 수없이 모방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l 교회는 베드로에게서 우리의 신실함은 죄의 고백과 더불어 시작됨을 배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교회를 포기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과 세상에서 신실한 증인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정확히 믿는다.
l 그러나 또한 우리가 서 있는 반석으로서 베드로를 지닌 교회는 너무나 자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제일 먼저 배반하는 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l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패배하고, 로마의 도움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새로운 다윗,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식별했다.
l 그러나 패배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베드로에게 승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분명히 자신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데도, 그것이 베드로를 안심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활은 베드로가 기대하는 승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시고, 그를 사탄으로 규정하신다. 베드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라는 집단의 편에 섰다. 교회가 세워지는 바로 그 반석인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의 걸림돌이 된다.
l 베드로는, 마치 마귀처럼(마 4:3,6),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거나 스스로를 죽음에서 구원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난하신 것, 즉 그가 하나님의 일보다 인간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영적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l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깨닫는 데 실패한 것에 동정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성육신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후 이천 년을 지나면서, 교회는 이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는 데 계속해서 실패한다.
l 이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마치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야만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를 예수님께서 확인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떤 희생이라도 반드시 그분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지는 십자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이어야만 한다.
l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 그분이 아니시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l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당신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라 십자가에까지 가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l 만일 당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당신은 당신의 형제 자매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염두에 두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l 만일 당신이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자가 아니라며, 베드로를 교회가 세워질 반석으로 삼지 안을 것이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더한 것, 곧 제자들에게 죽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도성과 마을로 다녔지만, 이제 그분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서 있는 시간의 묵시적인 특성에 간해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제자들과의 이와 같은 특별한 대화의 결론을 내리신다.
l 인자, 곧 유일하게 심판하실 권리를 지니신 공정한 심판자가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맞닥뜨려 견디실 것이지만, 그분의 죽음은 죽음에 관한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한 심판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이미왔다.
l 이것은 모든 시간을 재해석할 것을 요구하는 시간의 재창조recreation이다. 예수님 앞에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를 볼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복음서 서두에서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간’이라는 마태의 주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l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정확하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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