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 18장 교회

Four Seasons Daddy 2022. 12. 7. 14:29

마태복음 18장 교회

 

l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규정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두 번(16:21; 17:22)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죽고, 제삼일에 부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l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그분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20:19)

 

l  이러한 선포들은 그 즉시 놀라지만 그들의 형성을 위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던, 제자들이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비추어 어떤 부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을 가르치신다.

 

l  마태는 그 때에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지 물었다고 전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으러 간다고 발표하셨음을 생각할 때 놀라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l  만일 그들이 곧 죽을 사람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지 왜 걱정하는 것일까? 그분의 죽음을 예상하면서 제자들은 그분께서 떠나신 뒤에는 누가 자기들을 이끌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걸일까?

 

l  마태는 이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신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린 아이들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가 대표하는 바를 아주 분명하게 규정하신다. 우리가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 위계질서와 관련해서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기꺼이 시간을 내어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l  어린 아이에게는 획득된 신분이 없다. (그녀)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마리아는 메시아를 낳았지만, 그녀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녀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한 어린 아이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드러났다.

 

l  예수님, 곧 마리아의 어린 아이는 이후로 어린 아이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환영받아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어린 아이들을 죽일 수 있는 아주 어두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을 영접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l  어린 아이들에게 내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내하는 사람들이 될 것을 요구하시며, 어린 아이들을 환영하고, 품고 키우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 나라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재구성된다.

 

l  작은 자들은 분명히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지만, 그들은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에 충분히 겸손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엘리트 중에서 부르시지 않고, 신분status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부르셨다.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들 중 하나처럼 제자라는 선물을 신분과 바꾸려는 유혹에 빠진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습관들을 깨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하신다. 제자들은, 우리 자신들처럼, 불안해하고 우리가 세상에서 어느 곳에 있는지알고자 한다.

 

l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 습관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신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반영한다.

 

l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는 것은 예수님께서 굴욕을 당하실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굴욕 당함이 없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작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길을 찾기란 힘들 것이다. 굴욕 당함은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에 정확하게 붙여진 이름이다.

 

l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존재여부를 타인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과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시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겸손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l  모든 미덕들과 마찬가지로, 겸손 또한 글자 그대로 전혀 가식적이지 않은 한 공동체의 일부가 됨으로써 가능해지는 선물이다. 가식은 한 백성이 신분게임을 할 시간이 없도록 하는 선한 일을 행할때 극복될 수 있다.

 

l  누가 가장 큰지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주신 대답은, 그들의 질문은 그분께서 세우시는 종류의 공동체를 거부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작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인내심을 가진 백성은 작은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몸의 일부분들을 쫓아낼 수도 있어야만 한다.

 

l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때로는 교회가 만일 어떤 손이나 발이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붙잡거나 걷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그것을 잘라 버리는것이 낫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l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극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함께 사는 방식이 그분의 사역을 통해 임한 구원에 결정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우신다.

 

l  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는 손과 발, 눈을 반드시 잘 다루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은 또한 그 무리에서 잃어버릴 수 있는 작은 자들 중 어느 누구라도 잃지 않으려고 해야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셨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서로를 위해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흔 아홉 마리를 뒤로 하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서시는 목자시다.

 

l  그분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잃은 자를 돌보기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l  잃은 자를 찾는 것은 제자의 사역-그들 스스로가 발견되도록 허락하는 자들을 찾는 것-으로 규정될 것이다.

 

l  잃은 양의 비유와 작은 자에 대한 예수님의 우선하심은 동등한 존엄성이라는 현대적인 전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모두 잃어버린 자를 선호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낸다.

 

l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l  예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은 최대 다수의 선을 위해 누군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어떤 논리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사역,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인내는 작은 자들이 돌봄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열망을 구체화한다.

 

l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야에서 놓치시기를 거부하시듯, 우리도 그들을 시야에서 놓칠 수 없다.

 

l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잃어버린 자들 또는 작은 자들의 공동체를 위한 지침을 주신다.

 

l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걸림돌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지 알려 주신다. 만일 교회의 다른 구성원이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혼자 그에게 가서 그(혹은 그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에게 찾아가볼까 생각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l  오히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고 믿는 사람에게 가서 그를 대면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

 

l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자 정상적인 반응은, 이런 과정은 대부분 우리의 사소한 갈등들에 대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l  작은 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공동체, 잃은 양들을 돌보는 공동체는 서로의 죄를 묵과할 수 없는 공동체다. 왜냐하면 죄를 묵과할 때, 공동체는 그분의 아들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서 결정되는 은혜의 삶을 구체화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l  다른 구성원이 저지른 죄는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 교회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l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형제나 자매를 대면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분쟁과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지에 관해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l  이 사람들은 서로를 너무나도 강렬하게 사랑하는 백성이어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것-또는 억울함을 숨기고 있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위험을 절대로 무릅쓰지 않는 사람들이다.

 

l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믿는 사람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들 외에 한 두 사람을 더 데려가서 말해진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l  만일 그 구성원이 여전히 듣지 않으려고 할 경우에는 전체 교회에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만일 죄를 범한 사람이 교회의 말조차 경청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세금 징수원이나 이방인, 즉 더 이상 예수님께 부름 받은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손과 발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듯이, 그분의 새로운 백성은 그를 제명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암시하신다.

 

l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5:43-48),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대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모두 해주라는 가르침(7:12),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22:39) 등과 불일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l  하지만 제명은 사랑의 행위다. 제명은 누군가를 교회에서 내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걸림돌이 되었고 또 되고 있음을, 그러므로, 이미 교회 바깥에 있음을 알도록 도우려는 시도다.

 

l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개요적으로 말씀하신 절차는 제자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과 그것이 지닌 의미를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못할 것이고, 그 후에 그들은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사로잡힐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문제는 그런 갈등이 제거될 수 있느냐에 있지 않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갈등을 다룰 것이냐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갈등이 무시되거나 거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 죄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름 이 공개되도록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신다,

 

l  기독교 제자도는 갈등에 직면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수립하신 평화는 단순한 폭력의 부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진리에 기반하며 진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비폭력적이다.

 

l  진리 없는 사랑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듯이, 예수님의 형제자매 사이의 평화에는 환상이 없어야만 한다.

 

l  하지만 우리는, 진리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장 알고 싶지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진리가 구원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어떤 진리든, 특히 예수님께서 진리이신 경우는, 그것이 구원을 성취하는 것만큼이나 구원을 방해한다는 것을 안다.

 

l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죄로 하여금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신 것이다.

 

l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서로 도전하지 못한다면, 사실 우리는 서로를 죄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화해를 위한 지난한 노력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얼마나 사랑하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l  베드로는 걸림돌로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함축하는 바를 이해한다. 그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전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는다.

 

l  우리는 베드로의 질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무제한으로 용서하는 것은 좋은 분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용서가 항상 제공된다는 전제 위에서 대체 어떤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까?

 

l  베드로의 질문은 그가 죄의 피해를 당했던 사람임을 전제한다. 그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권세를 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에게 그가 용서받는 것에 괸해 배워야 함을 상기시키신다.

 

l  에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 만일 아버지의 용서에 제한이 있다면, 베드로는 더 이상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l  기독교인들에게 서로를 용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요구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l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이 지닌 정치적인 특성은, 왕에게 진 자신의 빚은 용서 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진 다른 동료의 빚은 용서하기를 거절한 종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분명해진다.

 

l  왕은 용서하지 않은 종의 행동을 알고 나서, 그가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고문에 처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는 말씀을 듣는다.

 

l  만일 우리가 서로서로 우리의 죄들과 대면할 수 있는 평화의 사람들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먼저 용서 받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받은 자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l  비유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용서는 판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하는지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근거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행해져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l  그분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우리의 과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서로에게 예증이 되게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l  여기에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우리의 능력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떠한 죄도 숨기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그 길을 따라 예수님께서는 이혼, 소유, 그리고 위계질서를 다루는 문제들에 관해 제자들을 계속해서 가르치실 것이다.

 

l  우리는 예수님께서 진실한 그래서 화해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에 놀라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