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장 변형
변화산 사건
l 인자가 오셨다. 우리는 변형되심transfiguration에서 그분의 영광을 본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극적인 대화가 있은 지 육일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신다.
l 거기에서 그분께서는 변형되어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 옷은 희게 빛난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나타나 그분과 함께 대화한다.
l 베드로는 이러한 광경에 압도되어 그들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위해 거처할 곳 세 개를 세우겠다고 제안하지만,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중에 구름이 그들 위를 엎고 구름으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얼마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 이 산에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l 이것은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영광이다. 이분께서는 바람과 파도에게 명령하시는 분이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이며, 보지 못하는 자들, 말 못하는 자들, 걷지 못하는 자들을 치료하시는 분이다. 이분께서는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이다.
l 하지만 이분께서는 또한 우리를 위해 죽음에 복종케 되시는 분이다.
l “육일 후”는 창조 자체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예수님의 변형은 일곱째 날, 곧 하나님께서 쉬셨던 날로서 지난 육일 간의 사역을 완성하는 날에 일어난다.
l 그 쉼의 날은 우리가 완전한 일치 안에서 하나님을 누리도록 초대받은 온전한 활동의 날이다.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해의 광채와 같이 빛나는 날이라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와 똑 같은 광채는 계시록에서 요한에게 보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예견한다.
l 예수님께서 변형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시작한다. 곧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는 죽음이 없을 것이다(계 21:1-4)
l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인자께서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시는 승리하심에 상응하는 영광을 목격한다. 그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이 놀랍지 않은가?
l 어느 누가 주님의 영광을 볼 준비가 되어 있을까? 당연히 제자들은 두려워한다.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소유물이 생산해내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하시지만,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l 예수님을 보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제자들 역시 십자가의 피로 씻겨졌기에 가능한 순교의 빛나는 흰 옷을 입게 될 것임(계3:5)을 뜻한다.
l 예수님께서 변형되실 때, 제자들은 인자의 영광을 엿보게 된다.-이분께서는 일곱째 날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마지막 날에 아버지와 함께 계실 아들이시다,
l 요더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우주론과 세상의 문화 안에가 아니라 그 위에 자리하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주권 아래에서 우주의 참된 의미와 일관성이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l 골로새서에서 권세는 단순히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본래의 목적 안에 제자리를 찾는 것으로 바르게 기술된다.
l 요한계시록에서 우주와 역사의 합리성, 곧 로고스logos는 단순히 폐위되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업적을 비추는 일을 하게된다.
l 제자들이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후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l 예수님의 만져주심은 의미가 있다. 그들을 만져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에서 들린 음성에 의해 아들로 선언되신 바로 그분께서 살과 피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신다. 이분 안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
l 변형되심은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창조를 알린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아직 모든 것이 완전한 것을 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본다.
l “육일 후”는 예수님을 창조의 일곱째 날에 위치시킬 뿐만 아니라, 모세와 더불어 모세가 증거막과 법궤에 관한 지침을 받은 산에 위치시킨다.(출 24:15-18)
l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를 함께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지만, 오직 모세만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다(24:1-2) 이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의 변형을 목격하는 특권을 받은 것을 훨씬 더 놀라운 것으로 만든다.
l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의 변형을 목격하는 특권을 받은 것을 훨씬 더 놀라운 것으로 만든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함께 하자고 요구하시자만, 거기에서 그분께서 고뇌하실 때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 한다.(마 26:36-46) 만져주심을 요구하는 그들의 필요는 계속될 것이다.
l 모세는, 종종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초대되었던 것처럼, 산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으로 들어간다, 그 구름은 주님의 영광이다. 모세는 빛나는 얼굴을 한 채 그 구름을 떠난다(출 34:29-35) 이번에도 구름이 산에서 제자들을 둘러싼다.
l 그러나 예수님의 빛나심, 예수님의 변형은 구름이 산을 덮기 전에 임하는 영광이다.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여 빛을 발하는데,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서 결국 광채가 사라졌다고 말한다(고후 3:7)
l 그러나 예수님의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산에서 그 구름, 곧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예수님을 둘러싼다.
l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나온 음성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 규정하면서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 그 음성을 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l 이번에 변형되신 산에서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나온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까지 듣는다.
l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합류하심으로써, 그분의 유산이 모두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배워왔던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돌보셨다.
l 왜냐하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자신을 불러내신 분을 바르게 경배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l 모세는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적합하도록 증거막과 법궤를 축조하는 방법을 산에서 배웠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새롭게하고 변화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삶을 변형시키신다.
l 변형transfiguration은 대체replacement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예수님에 의해 야기된 나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l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와 더불어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서 계신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자들에게 넘겨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것은 종종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운명이었다.
l 그러나 이번 선지자의 운명은 예전의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떤 예언자들과도 다르다. 이 선지자, 곧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약속이 열방에게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삶의 전형을 그분의 백성에게 보여주신다.
l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의 엄한 꾸지람을 받고 겸손해져서 이번에는 예수님께 결정을 맡기면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을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말한다.
l 그러나 베드로의 제안은 그가 모세와 엘리야, 곧 하나님의 선한 종들이 지금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함을 암시한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의 육신이 하나님의 임재의 공간이다.
l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바라는 것처럼, 한 곳에 제한되실 수 없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야만 하고 제자들도 그분과 함께 가야만 한다.
l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메시지가 ‘교묘히 만든 신화들’에 근거하지 않음을 청중들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 변형에 호소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선언하심을 들었다(벧후 1:16-18)
l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독자들에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격려한다.(1:5-7) 베드로는 만일 우리가 신실하게 ‘그의 말을 듣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특성들을 알려준다.
l 그들이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산에서 그들이 보았던 환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신다.
l 제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만 한다는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왜 그들이 침묵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l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그가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대답하신다. 그 대신 그들-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엘리야에게 행했다.
l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제자들이 이제 막 그 변형을 목격한 분-역시 불의한 사람들의 손에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그제야 제자들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마 11:14), 세례 요한이 다시 온 엘리야였다는 것을 이해한다.
l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분의 운명에 대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해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도록 도왔을 수 있다.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은 모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작동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l 오히려 이스라엘의 회복은, 권력에 관한 정의를 비롯해, 모든 것에 관한 완전한 재조정reorientation을 수반한다.
l 메시아의 도래로 인해 시작된 그 나라는 세상에 대한 대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한 백성을 존재케 함으로써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한다. 그와 같은 백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엘리야와 요한에에 의해 알려진 나라가 도래했다는 증거로 좀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l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보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l 다시 예수님께서는 무리와 맞닥뜨리신다. 이번에는 한 사람이 무리가운데 나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는 발작이 너무 심해 자주 불에도 뛰어들고 물에도 뛰어드는 자기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한다.
l 그 사람은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그들은 아이를 치료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와 같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를 참아야 하느냐고 혐오스럽게 반응하신다. 그분께는 이전에 이 세대가 표적을 열망하는 것 때문에 혐오감을 표현하셨다.
l 이번에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시는데,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축귀의 권세를 그런 표적을 제공하는 것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권세의 오용이 그들로 하여금 그 사람의 아들을 치료할 수 없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소년을 자신에게 데려 오라고 하신다. 그분께서 귀신을 꾸짖으시자, 소년은 즉시 치료된다. 제자들은 은밀히 와서 왜 그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는지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그러셨듯이, 그들이 ‘적은 신앙’을 소유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l 그들의 신앙이 적은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대한 신실함은 표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그들에게 권세를 주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l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는 겨자씨의 신앙이다. 그 신앙은, 예수님께서 겨자씨의 비유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마 13:30), 큰 나무를 이루고 심지어 산을 옮길 수도 있다.
l 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께서 배반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지만, 제삼일에 살아날 것이라고 다시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예측했듯이, 제자들은 이 소식에 크게 낙심한다.
l 예수님께서 배반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은 소년을 그런 지경에 이르게 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그들의 무능과 결부된다.
l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한 표적이 되시는 방식으로 승리하실 것을 계속해서 기대한다. “제삼일에 살아나는” 것은 아직도 그와 같은 승리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산을 움직일 수 있는 겨자씨에 담긴 승리다.
성전세
l 예수님께서 대표하시는 승리는 그분께서 가버나움에 도착하셨을 때 분명해지는데, 우리는 그곳이 예수님께서 한동안 머무셨던 곳이고(마4:13), 베드로가 살았던 곳이라는 것(마 8:14)을 안다.
l 성전세를 징수하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그의 선생이 세금을 내느냐고 묻는다. 이런 전략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 계속해서 접근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l 하지만 단순히 베드로가 가버나움에서 잘 알려진 인물일 수도 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모든 유대인 남자들처럼 성전을 지원하는 의미에서 매년 세금을 낼 것으로 기대됐다.
l 비록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셨는지 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l 그들이 집에 도착한 후에, 예수님께서는 세금 징수원들에게 한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신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상의 왕들이 공물을 그들의 자녀들로부터 받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지 물으신다.
l 베드로는 왕들이 그들의 자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받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에수님께서는 자녀들은 세금에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베드로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l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분의 창조물에게 세금을 부과사실 권리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황제에 의해 징수되는 세금에 대해 질문을 받으셨을 때 근본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l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이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자들이나 세금을 내는 자들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부인 베드로가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고, 그것의 입에서 그들 두 사람을 위한 성전 세금을 지불하기에 충분한 동전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l 어부로서 베드로의 기술은 이제 그 나라를 위한 특별한 방법으로 동원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나라를 위한 어부들이 될 것이고, 그들은 그 과제를 그들의 일상생활의 기술들로 수행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l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에 봉사하는 위대한 일들을 행하기를 당연히 열망한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봉사가 열망하는 결과를 보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l 우리는 그 입에 동전이 있는 고기를 잡기 위해 낚시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적일 수도 있는 이웃과 평화롭게 살기 원하는 기독교인의 바람에 관한 모든 설명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그 입에 동전이 있는 고기들을 잡도록 도우실 수 있고, 또 도우실 것이라는 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면 이해될 수 없다.
l 기독교의 비폭력에 관한 모든 설명들은 기적에 의존하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는다면 이해될 수 없다.
l 기독교의 제자도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신실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고, 또 계속해서 주실 것을 우리로 하여금 신뢰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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