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15장 요한의 죽음, 예수님의 기적, 그리고 논쟁들
l 마태는 예수님에 대해 말해오던 이야기에 갑자기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삽입한다. 이 복음서 내에서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는 유일한 이야기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아주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l 요한의 살해 사건은 권력과 성, 음모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 곧 예수님께서 도전하시는 세상이자 그것에 대해 대안이 되시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l 마태는 그냥 “그 때에” 헤롯이라는 분봉왕이 예수님에 대한 보고를 듣기 시작했다고 말해준다. 마태는 그를 “분봉왕”이라고 부름으로써, 비록 이 헤롯이 자기 아버지에 비해서는 훨씬 약한 권력을 지녔지만, 세례 요한을 체포하기에는 충분한 권력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 역시 중음의 정치에 잘 단력되어 있다.
l 헤롯은 요한이 자신의 형제인 빌립의 아내, 곧 헤로디아와 결혼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정죄했기 때문에 요한을 체포했다., 레위기 18장6절과 20장 21절에서 형제가 그의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은 금지되는데, 이는 그런 결혼은 근친상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l 요한은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고, 율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왔다. 그래서 그는 권력자들이라도 가까이 임한 그 나라의 요구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l 그러나 헤롯은 무리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했다. 나중에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한 요한일지도 모른다면서 의심하기까지 한다. 이런 의구심은 헤롯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l 헤롯이 무리를 두려워하는 것은 헤롯 통치의 특성을 나타낸다. 권력의 자리에 앉은 많은 사람들이 마치 그들의 권력이 절대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잡은 권력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l 헤롯은, 자신들의 욕망에만 책임지면 된다는 환상을 지탱해주는 위치들을 차지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조성된 비현실적이 세계에 존재한다. 그런 세상은 헤롯의 생일 파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파티에서 헤롯은 헤로디아의 딸이 추는 춤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한다.
l 마태는 헤롯이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에 결코 기뻐하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헤롯은 맹세를 했고, 그래서 만일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생일 행사에 참석한 손님들의 인심을 잃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헤롯은 큰 쟁반에 요한의 머리를 가져와 소녀에게 주라고 명령한다.
l 마태는 주변 사람들의 전제presumption에 의존하는 권력자들의 불안정성을 묘사했다. 즉 권력자들은 단지 소유한 척 시늉하는 권력을 소유해 놓고서는 그것을 자신들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통치하는 사람들에게 획인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l 권력자들은 강하게 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파괴적인 절망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더군다나 그 절망은 종종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불안정성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l 예수님께서는 헤롯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신다. 그분 또한 통치자시다. 그분 또한 그분의 권세에 매료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분의 통치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위로서, 그분 스스로를 희생하셨듯이,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권위다.
l 예수님께서 권력을 행사하시는 것은 결코 어떤 불안전성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확신하시는 분으로서 통치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왕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죽이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어 자신의 평화의 나라에서 자신과 결합하도록 하신다.
l 요한의 죽음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체포를 들으셨을 때처럼(마4:12), 배를 타고 광야에 혼자 있기 위해서 물러나신다. 하지만 주변 마을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를 피할 수는 없다.
l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기도하시기 위해 혼자 있고자 하실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 시간에 왜 혼자 있으려고 하시는지 알려주시지 않지만, 요한의 죽음은 그분 앞에 놓인 싸움을 암시해준다.
l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그분께 주어진 잔이 그분에게서 옮겨지기를 기도하실 것임을 안다(마 26:39). 그런 겟세마네의 고뇌가 지금 홀로 기도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에 담겨 있다고 믿는 것이 불합리한 것만은 아니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해안을 돌아오셨을 때 자신을 따라온 무리를 보신다. 그분께서는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무리를 매우 불쌍히 여기신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이러한 예수님께로부터 동정심에 관한 일반화된 설명을 찾으려는 것은 부당한 시도다.
l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기독교의 방식은 그것 자체를 넘어 다른 목적으로 그들을 먹이려는 사람들과 구별된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따라서 그들을 먹이고자 하시는 그분의 바람은 오직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에만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l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자선의 방식이 그들에게서 권력을 얻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에는 폭력적인 방식도 있고 비폭력적인 방식도 있다.
l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방법을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모세처럼, 광야에서 불평하는 백성들을 먹이셨던(출 16장)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모세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 황량한 곳으로 다니는 무리를 먹이실 것이다.
l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것을 요약해서 보여 준다. 게다가 그것의 세부사항들은 음식과 말씀은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다섯개의 빵은 모세오경에 상응하며, 두마리 물고기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한다.
l 음식과 말씀은 정확히 함께 묶여 있다. 육신과 영혼은 엄격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그 각각의 조각은 빵과 물고기로 살 수 있는 우리 능력에 필수적인 것이다.
l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우리의 주의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과 피로 제자들을 먹이신 예수님께로 이끈다(마 26:26-29).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이 쪼개지는 것을 예상하시면서 빵을 쪼개신다.
l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빵 그 자체가 되실 것이다.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빵이 이스라엘의 갱신을 위해 열두 개의 바구니에 모아지도록 요구될 만큼 필요 이상으로 남은 것과 같이, 예수님의 몸 또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을 위해 결코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기적적으로 먹이신다. 심지어 훨씬 더 기적적인 차원에서 그분께서는 자신의 몸과 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교회를 먹이시기를 계속하신다.
l 그러나 그러한 도전을 구성하는 것은 그분의 기적들만이 아니다. 그분의 삶 자체가 도전이다. 그분의 기적은 보내심을 받은 그분의 목적으로서의 사역에서 분리될 수 없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창조자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가정을 선뜻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의지 때문이다.
l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음식을 먹이신 직후, “제자들을……배를 타고(자신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신 후,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듯이(출32:30-34),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 위로 올라가셨다.
l 그 때 제자들이 탄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거센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 오시자, 겁에 질린다. 사람은 물 위로 걷지 못한다.
l 예수님께서는 두려워서 소리지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이라고 확인시켜 주신 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다 I am” 라고 규정하신다.
l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으로 하여금 물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명령해주실 것을 요청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한 단어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물에 빠지기 시작한다.
l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베드로는 가라앉지 않을 때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하게 되자 가라앉기 시작한다. 예수님을 시야에서 잃어버릴 때,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두려워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것은 곧 우리가 생존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그러셨듯이,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구원해 주신다.
l 베드로는 때때로 충동적이고, “믿음이 적고,” 의심한다고 비판을 받는다. 베드로는 그 일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인정하면서 물을 가로질러 예수님께로 향한다.
l 베드로는 믿음이 적었지만, 적어도 그는 신앙이 순종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l 우리는 물론 베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의구심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의심한다. 우리의 두려움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
l 우리는, 헤롯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상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희망하면서 우리의 욕망들의 무게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l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곧 기적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이 예수님을 경배한다.
l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베드로로 개명하시고, “이 반석위에” 예수님의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고 선언하실 것인데, 이는 이 이야기를 교회론적인 함축과 깊이 관련되도록 한다.
l 교회는 그 나라의 방주다. 그러나 때로 교회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채 강풍과 파도에 위협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종종 해안에서 멀어져 폭풍우의 위협 아래 있게 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l 교회가 신실하다면 언제나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떤 사람들은 안전한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걷도록 명령을 받을 것이다.
l 이 세상의 권력들에 도전하는 교회는 예수님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 교회가 아니다. 그런 교회는 단지 예수님을 경배할 뿐이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바람과 파도에 휩싸인 채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경험하는 두려움이 결코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l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가 죽음에서 살아남거나 교회를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다. 그러나 우리 임무는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l 만일 우리에게 해야 할 선한 일이 있다면,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 ‘해야 할 선한 일’이란 경배의 또 다른 이름이다.
l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후 그분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알았다(마 3:17), 마귀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조롱했고(마 4:3,6), 가다라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했으며(마 8:29),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l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경배한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 배를 휘저으려고 위협했던 폭풍을 예수님께서 잠재우셨을 때, 제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바다와 바람에게 명령하여 자신에게 순종하게 할 수 있느냐고 궁금해 했다.
l 이제 그들은 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라고 말씀해오신 그분이심을 인정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를 경배했다(절했다)”. 제자들은 배우는 중이지만, 그들이 입술로 고백한 것을 마음에 새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l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 땅으로 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본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이 온 지역으로 퍼진다.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왜냐하면 그런 접촉만으로도 치유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l 예수님을 만지는 사람들은 모두 고침을 받는다. 하지만 예수님에 관한 평판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도전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다 -의 주의를 끈다.
l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거나 행하시지 않는 것보다는 제자들의 행위에 관해 묻는 그들의 초기 전략을 따른다.(마 12:1-8) 그래서 지금 그들은 왜 제자들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느냐고 따진다.
l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하면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말씀하신다. 부모님을 부양하는 대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주장함으로써 궁핍한 부모님을 부양하는 것을 회피하려고 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전통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율법을 조작한다고 비난하심으로써 형세를 역전시켜 자신을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공세를 취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논지를 납득시키시기 위해 무리를 불러, 더러운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제자들이 손을 씻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제자들이 신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의 여부다.
l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향해 주신 말씀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대답도 바리새인들을 불쾌하게 했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제자들, 곧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합법적인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l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 그리고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마 5:33), 말이라는 것이 종종 우리의 마음의 공허함을 무심코 노출시킨다고 말씀하신다. 마음 바깥으로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보다 우리를 훨씬 더 더럽게 한다.
l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리고 제자들과의 대화는 우리 시대의 교회 앞에 놓인 많은 논쟁들과 관련된다.
l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신앙을 칭찬하셨던 것처럼, 이 여인의 ‘큰’ 신앙을 칭송하신다. 예수님을 계속해서 조르는 그녀에게 ‘적은’ 것은 없다. 신앙의 대표적인 예는 기꺼이 간구하는 우리의 의지인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종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녀가 구한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러자 그녀의 딸은 즉시 치료된다.
l 이 여인, 이 무명의 가나안 여인은 우리를 위해 이방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의 선구자가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한 그녀의 대답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기 전에 먼저 기도하도록 배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l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리의 바닷가를 지나가신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사역이 시작된 곳 근처에 계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산상설교를 전하셨던 곳에서 가까운 곳일지도 모른다.
l 이번엔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설교하시지 않고, 그보다 자신에게 데려온 모든 사람들을 치료히신다. 무리는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 말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자들이 일어나고, 다리를 저는 자들이 걷는 것을 보고 놀란다.
l 그들은 오랫동안 기대해 온 나라가 이 사람의 사역 안에서 가까이 왔다고 인정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l 그들은 산에서 삼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는데, 이는 그들에게서 음식이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l 어떤 사람들은 마태가 왜 우리에게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전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우리는 오천 명을 먹이신 것에서 우리가 알아야하는 모든 것을 배우지 않았는가?
l 마태복음 전체에 있는 세부사항들과 마찬가지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이야기의 세부사항들도 교회를 위해 유익한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
'Meditation on Bible > Matthew(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 17장 변형 (0) | 2022.11.30 |
---|---|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 16장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0) | 2022.11.25 |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13장 하늘 나라의 비유 (0) | 2022.11.09 |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 11,12장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0) | 2022.11.03 |
마태복음 - 스텐리 하우어워즈 - 10장 파송 (0) | 2022.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