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PHILIPPIANS(빌립보서)

빌립보서 - 박영선 - 제1장

Four Seasons Daddy 2023. 12. 13. 16:56

 

 

                                         빌립보서 1:01~02

                                            

빌립보교회

 

빌립보서는 로마 옥중에 갇힌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는 그리스에 있는 도시이고, 사도 바울은 지금 이탈리아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빌립보 교인들이 알게 됩니다. 이에 빌립보 교인들이 선물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병에 걸려 고생하고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그 소식을 듣게 된 빌립보 교회가 걱정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어 안부와 함께 에바브로디도가 회복중에 있다는 소식, 빌립보 교회의 사랑과 격려에 대하여 감사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것이 빌립보서를 쓴 당시의 배경입니다.

 

사도행전 16:6-15  이것이 빌립보 교회의 시작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앞부분을 보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나오는데, 그 교회들은 다 아시아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아시아라고 하면 보통 지금의 터키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터키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복음 전파는 이 터키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마게도냐라고 하면, 지금의 그리스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 로마쪽으로는 장차 갈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지만 처음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던 중에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환상을 보게됩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로마로 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놓고, 그 노정에 있는 마게도냐, 곧 그리스로 들어가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붙잡혀 로마 옥중에 갇히게 됩니다.

 

 

참다운 신앙의 길

 

빌립보 교회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분열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127절이하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현실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25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로 시작되어, 예수께서 어떻게 순종하여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하셨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소개되는 이유는 바로 지금 빌립보 교회내의 이 싸움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길이라고 소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잘잘못의 싸움 이상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1:12-18

 

바울이 잡힌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바울이 참다운 하나님의 종이 아니므로 하나님이 잡혀가게 하셨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잡혀간 일로 인하여 목숨을 걸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아무려면 어떠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이를 인하여 기뻐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사람이 신앙적인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가 어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 신앙으로 넉넉하게 괜찮아하고 넘길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속은 상하지만, 그 싸움을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아도 답답하고 붙잡혀서 애가 타는데, 거기다 억울한 오해까지  받으면 정말 불이 붙었을 것입니다. “그 싸움을 나도 겪고 있으니 너희도 이 길로 가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빌2:1-5절 입니다.

 

빌립보서는 따지고 보면 가장 어려운일, 참다운 신앙의 길을 간다는 것이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에 관한 이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잘 되는 자리, 또는 옳은 자리에 가기 위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의 신비와 힘

 

빌립보서는 시작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이야기 하므로써 기독교 신앙의 질서, 교회 안에서의 질서는 권력의 문제나 위계의 문제가 아니며, 협력하고 양보하며 신앙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라고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뒤에 나오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구절에서 감독들과 집사들을 같이 놓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당시 초대교회 감독들은 아마도 지배계층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재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도 신앙적이고 영적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감독들은 자유인이었을 것이고, 집사들은 종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 사회 권력자들인 감독들과 종들인 집사들을 나란히 언급함으로써, 교회가 과연 무엇으로 묶여 있으며 교회의 힘이 무엇이며 교회에서 분별의 기준은 무엇인지를 시작부터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내내 등장하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에는 빌립보 교회를 분열시킨 장본인들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장본인들에 대한 표현은 매우 험합니다.

 

3:17-19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할 만큼 곤란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속에 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놀라운일입니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 두 사람이 대표적으로 대립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아마 각각의 부류의 대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어느 편이 좀 더 상대적으로 나은가 하는 이런 것과 상관없이 양쪽 모두를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1절에는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로 불러낸 그의 백성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수를 머리로 주어 예수안에 붙들어 맨 그런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신비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의 대적자요,교회를 박해하던 자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아 가장 위대한 교회의 일꾼이 된 것같이 교회는 그런 신비를 만들어내는 곳이요, 생명을 키우는 곳이라는데 있습니다.

 

교회는 가족과 가장 비슷합니다. 예수의 피로 묶인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정죄하고 잘라내어 교회의 순결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 밖으로 나가는 자들, 예수를 외면하는 자들에만 적용하고 그외에는 교회가 견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기쁨이라는 표현이 빌립보서에 제일 많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기쁨을 고백하고 있고, 빌립보 교회에 기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4:4-5

 

이 기쁨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내 뜻을 관철하고 내 판정에 분명한 결과를 만드는 일에 대한 성취의 기쁨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바울 자신의 기쁨이 그렇습니다. 그의 기쁨은 고난속에 있는 기쁨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자기가 걷는 길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임을 아는 기쁨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표정과 행동, 분별과 판정 속에 분노가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 분노의 과정이 있는 이유는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일하심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를 보기 전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열심을 내고 진심을 가질 때 더 많이 분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 많으면 분노하는 단체가 되어비립니다. 정말 신앙이 좋으면 그것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쿠션 같아야 합니다. 단열재 같아야 합니다.

 

한 인간이 자라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를 품어 우리의 평생을 동해하시므로 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견뎌야 합니다.

 

3:7-13

 

사도 바울이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환난이 곧 끝나고 보상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이 환난이 모든 성도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환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기적과 풍성하신 은혜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가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모든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위의 에베소서 말씀이후에 교회에 대한 설명으로 엡 3:14-19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도 환난은 우리의 속을 깊이 파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접시 같은 용량밖에 안 되는 우리의 영혼과 인격을 깊이 파서 큰 항아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교회 안에서 이룬다고 합니다.

 

3:20-21 영광이 예수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이라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예수와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를 손해 보게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가 자라나며 유익을 얻으며 더 분명해지며 더 두터워지며 더 굳세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와 묶어 우리의 인생을 살고 세상 속에서 세상과 대적하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모든 부요하신 것들과 영광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영역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영광이고 특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 속에서 교회 공동체의 많은 믿음의 식구들로 인해 겪는 여러 일이 잠시 혼란을 주기도 하고 걱정하게도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지금도 함께하시며 우리를 격려하고 확인시켜주시는 증거임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빌립보서를 살펴봅시다.

 

 

 

 

 

 

 

기쁨의 근거

 

 

                                         빌립보서 1:03~06

                                           

기뻐할 수 없는 현실

 

본문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단어로는 감사,기쁨,복음,확신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전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내용을 대표하고 있지만,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은 로마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가 형통하고 상황이 분명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면, 감옥에 갇힌 사람이 이 단어들을 쓸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단어들을 쓰는 바울의 현실에 대한 이해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믿으라는 권면을 할 때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 예수 믿으면 평안을 얻는다.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는 등의 표현을 가장 즐겨 사용합니다. 물론 이런 말에 잘못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어떤 이해가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바로 이 신앙생활이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그 단어들을 사용하게 한다고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네 장의 서신 속에 기뻐하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뻐하라는 표현은 어떤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함께 기뻐하자는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기뻐하라고 말했다면, 그가 어떤 고난이나 위기나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어떤 기적과 해결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재판을 기다리고 있고, 그 판결이 죽음이 될지 석방이 될지 모르는 수감생활을 하는 중입니다.

 

바울이 그 당시 사회 치안법에 걸릴 만한 죄를 범한 적은 없지만, 그가 하는 일이 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분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로 유대인들과 생긴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유력자가 되면서 거기에 있는 다른 이방 이웃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공격하고 고소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실제로 자신이 잘못한 일은 없으나, 당시의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얼마든지 잘못된 희생을 치러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불분명한 상황에서 기뻐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유 있는 기쁨

 

빌립보서 전체를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이유가 바울의 현실 속에는 없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기뻐하라고 권고한 의미는 첫째로 자신의 상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앙적인 이해에 동참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둘째로는 바울이 처한 상황과 빌립보 교회가 처한 상황이 갖는 그 어떤 동일한 경험 때문에 기뻐하라고 요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마저 옥에 갇혔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기대를 해도 되며, 어떤 약속이 보장된 것인가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고 강하게 권면하기 위해 기뻐하라고 권면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정당해 보입니다.

 

따라서 그 권면은 그저 아무 해답도 없고 아무 조건도 없이 자기 자신을 격려하여 기쁨을 쥐어짜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서가 요구한 기쁨에 대한 이해는 무엇입니까. 빌립보서를 읽을 때, 우리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기대하고 세상이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기쁨이 무엇인가로 돌아오게 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판을 앞에 두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또 빌립보 교회가 가지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기뻐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잘 될 거야가 현실적 결과로 잘 될 거야가 아니라, 우리가 볼 때 실패 같고 가치없어 보이는 것까지 포함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어떤 신앙적 이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정할 수 있게 됩니다.

 

1:12-14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이유 없이 억울하게 투옥되는 것을 보자, 다른 사람들이 담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현실적 어려움 중의 하나는 자신에게 어려움이 왔을 때에, 이것을 자신이 잘못한 일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이 일이 생겼고 하나님은 잘잘못에 대하여 보상하시는 분이라는 생각, 내가 잘못된 길로 갔기 때문에 불행을 자초했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투옥으로 인해 누군가가 이러한 생각을 돌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돌파했습니까.

 

성공시대를 사는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들을 제일 괴롭히는 문제는 목회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이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꾸짖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므로 그분의 뜻에 맞으면 당연히 성공하고 형통할 수 밖에 없다는 발상은 사실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복 받고 잘 된다는 말은 신앙적 이해, 곧 십자가로 인한, 십자가로만 근거한 이해이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보는 보상원리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114절에 다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다수는 자신들의 신양생활에서 어떤 보이는 증거가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정당하다면 신자가 된 이후의 삶이 믿지 않았을 때와 전혀 달라야 한다는 식의 시험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닐까, 내가 무엇 틀렸기에 내 신앙 인생은 이렇게 어려울까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봐도 진짜 하나님의 종인 바울이 진실한 일을 하다가 역경에 처하고 고난을 받고 억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들이 보게 되자, 눈에 보이는 보상으로 확인하던 신앙의 어떤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쁨의 근거

 

이것이 결국 빌립보서에서는 빌립보 교회안에 있는 율법주의에 초점을 모으기 위해 등장합니다. 율법주의는 잘한 것이 분명히 보상받는다고 믿는 법칙입니다. 그것은 옳은 것이고 세상 어디에서나 통하는 도덕과 윤리입니다. 이 율법주의에서는 누가 그르냐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는 이상하게도 옳은 것이 옳게만 취급받지는 않습니다. 옳은 것도 신앙의 수준과 정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으므로 기꺼이 틀린 자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십시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렇다, 인자가 영광중에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잡혀 죽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일어난 여러 어려움 중의 최고는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가에 대한 신앙상의 혼란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보상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운 하나님의 종까지 붙잡힙니다.

 

아마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떨렸을 것입니다. 신앙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송두리째 흔들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어도 아무리 진심을 바쳐도 아무리 소원해도 답이 없으신 하나님 그리고 무시무시한 현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뿌리째 흔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6절에 나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기독교 신앙의 모든 근거와 소망은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성실하시므로 그가 우리를 붙들고 놓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어도 되는 이유는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가 기독교 신앙에서 늘 등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와 그 증명에서 예수의 성육신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사 죽이시는 것입니다. 8:32

 

우리 부모님, 한국 교회의 증인들, 곧 자기 자리를 하나님의 약속 아래서 살아간 이들이 지금 불안해하고 막막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내용의 근거가 무엇이었는가를 확인시켜줍니다.

 

그 훌륭한 누구, 순교자 누구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을 높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도 우리와 동일하게 불안했고 두려웠고 미심찍었고 의심했을 나날들을 무엇으로 견뎠는가 보니 바로 그들의 영혼의 닻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려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바울이 쓴 이유나 이 서신을 받은 빌립보 교인들의 정황은 우리의 현실과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기쁨이 무엇인지 아는 사도 바울의 신앙이란 그가 처한 현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극복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그것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싸움에서 배양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갖는 넉넉함

 

3:1-13

 

예수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구원, 아니 예수로 말미암은 전 인류의 구원, 예수로 말미암는 교회의 설립입니다.

 

교회는 조직과 기구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명칭, 예수 그리스도와 묶여 있다는 뜻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구약에서 민족으로 구별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렸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신약적 호칭, 예수 그리스도로 불러내어 그리스도와 묶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그의 백성에 대한 호칭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예수 안에 근거를 두셨고 예수 안에서 확인시키셨고 예수로 증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3:13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난이 너희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자 기독교 신앙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던 자리까지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놔버리셨다면 자신이 기대할 수도 없었던 놀라운 신앙을 가지겠다고 끙끙대며 과연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답답함은 서로가 분명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신앙의 어떤 자리까지 인도하시는 과정은 다 다릅니다. 순서가 다 다르게 오고, 관심이 다 다르게 와서 결국은 예수 안에서 서로 다 묶으십니다.

 

내 관심, 내 확인, 내 분명함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예수로 보이신, 예수로 인하여 묶으신 예수로 인한 약속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 사람의 믿는 과정이 관심이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예수님 안에 있는 무한하심, 무한한 진리,생명,감사로 모두 인도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우리의 인생 자체에 대하여 믿음의 눈을 가지고 넉넉한 마음을 비로소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기쁨입니다.그것이 감사요. 그가 가진 확신이요, 복음이 가진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힘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바로 이런 근거 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확인하여 여러분의 삶과 믿음과 현실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에 묶으시는 승리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

 

 

                                         빌립보서 1:03~11

                                           

교회란

 

3-4절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항상 간구한다고 하는데, 이는 묘한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고, 빌립보 교회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기도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빌림보 교회의 교인들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배경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바울과 묶어 주셨다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이들을 복음으로 묶으셨고,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은혜로 묶어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전했는데, 본인은 감옥에 갇혀있고 교회 안에 문제까지 생겼으니, 참 아슬아슬한 성황입니다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확신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속에는 승리와 결과가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어려움과 미숙함 때문에 마음에 많은 초조함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빌립보 교회 쪽에서 볼 때도, 바울이 중요한 복음을 전해주어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후 이렇게 맥없이 갇혀있는 것은 아마 큰 시험거리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빌립보서의 내용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복음으로 불러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은혜로 묶어 놓은 관계입니다. 모든 교회 공동체 회원들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 (1:7), 하나님이 너희와 나를 묶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떤 증거와 만족할 만한 보상과 상관없이,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기쁨으로 기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정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와 자신을 묶으신 것에 대하여 결단코 후회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기쁨으로 이 책임을 지고 가겠다고 말합니다.왜냐하면 빌립보 교회와 자신을 묶으신 하나님이 바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마음이 다 통하고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이 사랑,기쁨,감사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빌립보서는 이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시험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

 

마게도냐는 정치 사회적 환경과 정신적 배경이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많은 우상이 있고, 그 우상을 섬기는 반기독교 정신이 정치 사회를 비롯한 모든 것을 힘으로 붙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에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을 불러 놓고,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들리는 말들은 바울을 더욱 초조하게 했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바울이 옥에 갇힌 일로 인해 많이 낙심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속에서 이 편지가 감사와 기쁨을 논하고, 은혜와 확신과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에서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곧 하나님이 우리를 묶었기 때문에 나는 확신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승리할 줄 믿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은혜에 참여했다는 말은 그 주도권과 결정권이 빌립보 교회나 사도 바울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능력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고 부름을 받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하는 일에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같은 형편가운데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처럼 빌립보 교회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변명하고 화정하는 일에 빌립보 교회와 바울 자신이 동일한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있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며 감사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가지는 현실적인 불안감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하심과 은혜의 능력에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에 그 마음이 아슬아슬하셨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죽어야만 하는 것이 그의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은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쳐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십자가를지고 죽어야만 하는 일로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빌립보 교회를 지켜주시옵소서, 그들을 홀로 두지 마옵소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들도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기 아들을 보내신 그 은혜와 능력을 내가 믿습니다. 라는 기도가 이런 고백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우리는 가끔 은혜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놓쳐서 불안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 우리가 어떤 구원을 얻었으며 누구에게 부름을 받았는지를 놓치곤 합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가 ㅇㄴ혜 위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다만 자신의 진심을 증거하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진심을 증거하는 것에 동원하면 사람을 잡게 됩니다.

 

성경에서 옳고 그름은 사랑이라는 말 속에만 존재합니다. 그때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것같이 더 나은 자가 지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집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2:1-4                               

 

옳은 일을 할 때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2:5 , 2:6-8

 

우리는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자리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복음을 변명하고 화정하는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이냐를 현실적인 도전 앞에서 답해야 합니다.

 

너는 물러 설 수 있느냐, 망신을 당할 수 있느냐, 오해를 받을 수 있느냐, 억울할 수 있으냐, 라는 물음 앞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에게 죽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이것이 빌리보서에서 보는 초대 교회의 현실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유산

 

초대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늘 성령 충만하여 방언하고 전도만 하면 하루에 3,000명씩 모이는 그런 교회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고단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믿어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어야만 했습니다(고후11:26),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의 관대한 다신교를 부정한다는 이유로 고집스럽고 편협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오해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력했습니다. 정치 세력과 사회 앞에 무력했습니다. 호소할 데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카타콤으로 숨어들었고 우리하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고 나중에 발각되면 주을 수밖에 없었던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뿌리내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를 현실 속에서 증언해 냈습니다. 완벽하지만 권력을 가지지 않는 자들로,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자들로, 자신을 쳐 복종하는 자들로, 늘 끊임없이 회개 기도를 올려하 하는 자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거기에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빌 1:27-30

 

복음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 속에 있다는 것이 보상을 받고 세상보다 우월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복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전혀 다른 반응, 다른 분별, 다른 판단, 다른 결정, 다른 실천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정치적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대신 정치 권력의 근거가 되었던 당시 로마 제국의 정신에 대항하여 죽음으로 항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믿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죽어나가면서도 그 정신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빌립보서가 남긴 귀한 교훈이고 우리에게도 있는 싸움입니다.

 

멋지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

 

우리의 사랑이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변명이 되고, 또 남을 정죄해도 괜찮다는 식이 되어선 안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항복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깨십시오. 여러분이 사랑과 좋은 믿음을 위하여 평생을 기도해도 응답이 더딥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얼마나 그 마음이 참담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고린도후서에서 보듯이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한 그의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바울이 얼마나 절절하게 예수께 내 몸에 있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바울이 얼마나 절절하게 예수께 내 몸에서 단의 사자를 빼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기도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고 하십니다. 이에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멋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고백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멋있고 놀랍습니다. 이것이 어느 교회나 지켜야 하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자랑할 것도 많고, 자책할것도 많습니다. 개인의 생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잘한 것을 기억하는 것은 하수들이 하는 일입니다. 고수들은 못한 것만 기억합니다.

 

제가 받는 공격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지고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드러나게 하시고, 제 자신이 복음을 막는 일은 없게 하옵소서. 필요하면 저를 감옥에 넣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빌 1:7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고 안타까움이 되고 걱정이 되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한계로 인해 오히려 미안해 합니다. 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각자의 부르심과 허락하신 복음 속에 무엇을 감춰놓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까지 교회를 있게 한 능력입니다.오고 오는 세대에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앙고백이 있게 하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자리로 여러분이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부재1

                                         빌립보서 1:12~18

신앙과 현실

우리는 빌립보 교회가 만만치 않은 현실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아야 합니다. 빌립보서에 기쁨, 능력 같은 기독교 신앙의 긍정적인 것들을 선포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의 형통함을 근거로 선포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옥중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빌립보 교회성도들 같의 친분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들의 근심에 답할 필요를 느낀 것 이상으로, 자신이 옥에 갇히게 되어 발생한 현실의 문제, 곧 자신의 부재가 그들에게 미쳤을 영향에 대해 변명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무엇이며,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약속과 소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투옥은 기복성과 같은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들이나 현실적 안전 등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그가 전한 복음의 위대함과 궁극적 승리라는 약속과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에 지금 답을 써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예수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희생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에 의해 그것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으로 허락한 구원이 현실적인 우리의 기대 범위 내에 있는 보상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을 늘 경험합니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담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일종의 모순과 신비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처참한 죽음을 맞아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바울이 투옥되고 그의 삶의 대부분을 박해와 고난 속에 보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관관계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박해 시기만이 아니라 순교를 자청할 수 없는 평화기에도 발생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깊이 있게 읽으면서, 복음이 약속하고 예수 안에서 허락된 신앙의 약속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으면 평화기를 사는 신자들은 이중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은 현실이다라고 체념하거나 가장하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의 진심에 대하여 보상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현실을 다 바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게 됩니다. 무언의 항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뚫어야 합니다.

 

바울이 갇힌 이유

 

뜻밖에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잡히게 되자. 그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1:13)나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믿는 것이 다만 현실적인 보상만이 아니라, 이 현실적 가치들을 희생하고도 가질 만큼 귀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투옥과 고난으로 증언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복음의 진보가 일어납니까. 세상에 있는 것, 곧 현실적인 보상으로 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급한 불을 끄듯이 세상의 것들로 급한 고난을 면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결국 영원한 답이 아니라는 것을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짧은 인생에서 영원한 것을 지킬 힘이 없어서 늘 그것을 현실에서 잠시 잠깐 쓸 일회용 반창고하고 바꾸고 싶어 합니다. 늘 그 시험 앞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늘 지고 타협하고 돌아와서 웁니다. 세 번이상 울고나면 울 체면도 없습니다. 아우리 울어도 하나님이 답하시지 않으니까 그때 되면 막막해 집니다.

 

믿음은 의지가 아닙니다. 신뢰도 아닙니다. 감당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놔두시지 않는 어떤 것입니다. 외면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습니다. 지킬힘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우리에게 하나의 빛을 던져 줍니다. 바울이 붙잡히고 바보가 되자, 복음은 빛을 더 발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멋있고 자랑할 만해지면, 자랑할 만한 그것 때문에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가려집니다.

 

믿음이란 내가 지니지 않은 자격 조건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근거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믿음과 가장 분명한 복음도 그것이 자랑이 되려면, 누구를 억누를 수 있는 세상적인 공통분모를 가져야 합니다. 누구는 했고 누구는 못한 것으로 은혜 받은 것이 공로가 되고 자랑이 되기 시작하면 복음의 본질은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는 없고 믿음을 지킨 훌륭한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바울 자신을 위해서, 빌리보교회를 위해서, 초대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복음의 위대함을 제대로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을 감옥에 넣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들은 전부 값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신앙이라는 이름 속에서만 값진 것입니다. 신앙속에 들어오면 거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일만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나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은혜, 내 능력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가 선포됩니다. 나의 부족과 심지어 배반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책임해도 좋다는 식으로 끌어다 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죄성이 우리를 자꾸 시험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모든 것이며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우리의 자격이나 책임이나 실천과 상관없이 복음의 본질을 책임지고 계신다면 우리의 몫이 무엇이냐가 늘 시험으로 등장합니다.

 

복음의 진수를 설명하는 성경의 초점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죄성을 이 사랑과 대조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자기를 묶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그 결과가 있습니다. 바울의 증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놀라운 선언입니다.

 

바울은 매였고, 그가 매이자 복음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났고, 모두가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든, 시기와 질투로 하든 궁극적으로 전파된 것은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혼자 했을 때 맺은 열매보다 몇 배나 큰 하나님의 은혜와 그 결과가 놀라웎기에 바울은 기쁘고 또한 기쁘다고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랑하지 못하게 함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께 가는 인간은 없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에 까지 이끌어 가실 목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독특한 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나누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자리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 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일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 일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서 출발하거나, 우리가 가진 것으로 유지되거나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여러분은 가짜 목사를 구별하는 일에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헤를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충성하십시오. 한국교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밖으로 볼 때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말고 여러분이 몸담은 교회에서 책임을 다 하십시오 그것이 바울이 하고자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능력 있고 온전해서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시비를 걸 여지가 없는 존재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도 신앙생활을 너무 자기 성찰과 결벽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은혜와 능력의 신비보다 흠 안 잡히는 기준들을 너무 앞세우다가 무너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이상주의와 결벽주의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안하는 자리까지 몰고 가게 됩니다.

 

교인들이 받는 제일 큰 시험은 다니던 교회가 시끄러워지면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서로 비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유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받아야하는 비난을 받기 싫어서입니다.

 

 

훌륭한 교회를 가늠하는 기준

 

훌륭한 교회를 가늠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도들 각자가 자신의 신앙생활을 얼마만큼 책임 있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밖에서 인정을 받느냐,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사소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각자의 신앙수준과 형편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때는 도덕이고, 어떤 때는 능력이고, 감격이고,이해입니다. 그것이 한 바퀴 돌고, 그러면서 신앙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신앙의 진심을 받아주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여러분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 흠이 없으면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부패성과 기만을 다 들여다보게 되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도 교제할 수도 없고 참아줄 수도 없고 기다려줄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참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무디고 무능해서 스스로에 대해서나, 믿음의 식구들에 대해서나, 현실에 대해서 다 보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시간을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시고, 스스로를 감당하게 하시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을 보게 하십니다.그것을 봐야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오늘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 1:12-18

 

이 외침이 413절에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어떤 모든 것입니까.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바보가 될 수도 있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다 감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일을 실패하지도 중단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위력을 알기에 겁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 여러분을 분발하게 하느냐, 아니면 도망가게 하느냐를 오늘 물으십시오.

 

시험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 왜 이렇게 일하십니까, 라고 묻고 도망가라고 찾아옵니다. 그것을 이겨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도 손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빌립보서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예수 안에서 하락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여러분이 이 부름을 받은 자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생애와 현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나의 현실이 나를 더욱 담대하게 하며, 복음의 진수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못난 것과 눔물과 한숨과 고통을 통해 승리하게 하시고 유익을 주실 것이라는 확인을 받으시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지도자의 부재2

                                         빌립보서 1:19~26


                                            
빌립보 교회의 현실은 시기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때입니다. 복음이 이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교회들이 이제 막 세워지고, 연약한 성도들이 교회를 책임져야 하는 위기 속에 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책임을 져야 했던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바울의 부재로 말미암아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사도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하는 측면에서 그의 부재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신앙적으로 이해함

그는 자신의 투옥으로 인해 그를 아끼는 자들과 시샘하고 비난하려는 자들이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이런 식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나 연약함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과 은혜와 복음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런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19절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여기에서 ‘이것’은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된 그리스도를 지시합니다. 즉 복음의 신비한 능력, 기이한 하나님의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수를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로 인하여 복음을 허락하시고 목적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완성의 자리로 나를 인도하실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고난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승리케하시는 하나님, 그 복음을 맡게하시고 종으로 세운 자신의 인생과 운명을 결국 승리로 인도하실것이다 하는 강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실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을 주시고 그 아들을 보내신 은혜와 사랑과 그 뜻을 결국 승리하실 것이다. 내가 잡혀있으나 복음의 진보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현실속에서는 막막할 수 있고,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20절에서 나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심, 신실하시고 은혜와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내가 편을 들어 무슨 표가 나며, 내가 방해를 한다한들,내가 없어진다 하더라고 무슨 방해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예수안에 들어난 하나님의 작정과 일하심을 더욱 두드러지게 할뿐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과 온전하심에 대한 사도바울의 궁극적인 항복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일종의 체념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여 꺼내놓고, 어떤 눈치를 보려는 제안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죽을 각오까지 됐습니다. 하나님이 이래도 가만히 계실 것입니까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기왕에 죽을 바에야 멋있게 죽자. 나는 죽어도 좋다. 뭘 벌벌 떨고 사느냐.이렇게 쉽게 평범한 사람들의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 죽게 된 거, 멋지게 죽자 하는 장렬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한 이 고백의 귀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현실의 불분명함과 우여곡절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감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의 승리를 가지고 있으나, 슬플 때 울어야하고 기쁠 때 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좌우하는 권세를 갖고 있지 않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유일한 권세자에게 순종하며 살게된 현실의 어려움을 그가 자기의 육체로 겪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신앙을 지킴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킴으로 이 현실의 고난을 내 몸으로 다 받아내겠다. 나 울겠다. 나 비명 지르겠다. 하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빌립보 교회 교인들과 함께 나누자고 하는 것입니다. 26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현실 속에서 감내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에 순종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동일하게 요구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와 소망은 예수로 증거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복음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간절한 소망으로 갖고 있으나 지금 그 소망을 품고 걸어랴하는 현실에서 바울은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해야 한다는 것음 그의 마음에 가장 비겁한 생각이 드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고난이 무엇인지 배우라

우리는 확신, 선택, 결단, 헌신, 기쁨 등 이런 단어들을 너무 쉽게 사용합니다. 그것을 사용하면 마치 현실에서도 보상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확신하면 지금 현실에 평화가 오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진실하면 현실이 형통해질 것이라고 막연히 갖다 붙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런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고난과 부끄러움과 오해와 무력과 실패와 절망조차도 꺾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요 그것들을 다 담아내고도 남을 만한 크기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당함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고난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키고 격려할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고통을 연장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보다 믿음이 더 크다

기뻤던 때도 있고 슬폈던 때도 있고, 도대체 이게 뭔가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나 한 사람의 공감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점점 더 부각되어, 내가 쓸모 있어서 하나님 앞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이제 나 하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내 자리를 지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숨어 기도하겠다.

여러분이 오해받고 고난 받는 중에도 하나님의 더 크신 일하심의 궁극적 승리를 확인하고, 그 아득한 현실을 자신의 기대와 욕심으로 인해 내던져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눈물과 한숨을 삼키느냐 하는 것에 여러분의 자랑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신앙의 신비

기왕 죽을 것 멋있게 죽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예수님께서 이미 먼저 걸으신 길이요 요구하신 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라고 하신 길입니다.

우리가 보면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마음에 들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에 대해서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풍파와 시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꿰뚫고 나가는 것을 세상이 제일 먼저 알아봅니다.

우리가 아무런 보상도 누구의 동정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 안에서 우리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에 대하여 세상이 놀랍니다. 자신의 영향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 안에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있는 고난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손해 보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이 현실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헤를 믿음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길을 통하여 십자가의 승리,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승리가 전파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부끄러워서 담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현실일지라도 그 현실이 십자가의 길인 것을 기억함으로 시험에 지지 말고 변명하려하지 말고 체녕하지 말고 빨리 죽으려하지 말고, 웃고 극복하여 여러분의 신자 된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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