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을 갖는 근거
빌립보서 2:01~04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그 마음이 가장 아슬아슬했을 것입니다. 이제 막 세워진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없는 상태에서 신앙이 어린 초보자들끼리 어떻게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지킬 수 있을까.
빌립보교회도,바울 자신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타난 결과들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와 다르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에 능력이나 결과가 아니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형통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하고 계획을 잘 세워야 하고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들은 다 이차적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 된 것을 깨지 마라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하는 본질적 내용은 바로 한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마음이란 일치하거나 같은 생각을 하라는 의미의 한마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 그 하는 것으로써 하나 된 것을 깨지말라고 합니다. 본문은 심지어 2장1절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을 할 때라도 하나된 것을 깨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신앙적인 권면,충고,교훈,지적 또 사랑의 무슨 위로, 사랑으로 말미암은 격려,호의, 성령의 무슨 교제,긍휼,자비,이런 것들을 할 때도 꼭 기억해야 할 바는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진심이 통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런 중요한 일을 할 때도 우리가 하나된 것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 있느냐, 그 권면은 너희가 예수 믿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을 지키고, 그것 때문에 생긴 이차적인 것을 마치 본질인 것처럼 여기고 싸우지 말라,
사랑의 위로가 있느냐,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고, 예수가 본질이다. 그래서 사랑을 얻게 된 것이다. 그 순서를 잊지 말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13:1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사랑은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열심도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 의욕과 명분에 붙잡혀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옳고 신비한 데 붙잡혀 있지 않고 예수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옳은 것 위에 서 있지 않고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은 은혜 위에 있습니다. 무책임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음은 인간에게 없다.
빌립보서에는 ‘한마음’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반복하는 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자기 하나를 담아낼 한마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음으로 유일하게 예수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한 성가대에 앉고, 한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으며, 가장 중요할 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오셨는가를 살펴보면 이제 한마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마지막, 2장 서두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빌립보 교회교인 여러분, 여러분이 한 교회에 모이게 된, 그래서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공통분모가 무엇입니까, 그걸 지키십시오. 다른 것 때문에 그걸 깨지 마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자기 의를 넘어서는 것임을 누누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믿고 배우게 된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다른 차이와 다른 구별을 다 무효로 만드는 너무나 크고 영원하고 무한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각 개인이 확인하였습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서로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다른 일에 어떤 차이를 보인다 할지라도 이 기본적인 것을 놓치면 다른 무엇으로 우리를 유지한다 해도 옳지 않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무슨 권면, 사랑의 무슨 위로, 성령의 무슨 교제,긍휼,자비, 이것을 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서로 기다려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기다려줘야 합니다.
롬15:1-6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한다고 합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되는 것은 여기에서 뿐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는 점에서 한마음과 한 입입니다. 그 한마음과 한 입에 모든 것을 쓸어 담으셔야 합니다.
롬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이것이 한마음과 한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마음과 한 뜻을 옳은 것, 옳은 일에 세우려고 합니다.
성경은 자꾸 우리더러 죽고 지라고 하는데, 목청을 높여서 하나가 되자는 것 때문에 얼굴 붉히고 돌아선 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에 들게 하려고 옳다는 것을 내세워 나 좋으라고 묶는 것인지,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묶기 위하여 내가 나의 욕심과 뜻을 접는 것인지 물어보셔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한마음이 되라. 하나가 되라. 네가 져서 하나가 되라. 기다려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받으신 것처럼 하나 된 것을 지켜라. 옳다는 이유로 둘이 되지 마라. 속이 너무 불타는 것 같으냐,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불이 붙어서 땀을 흘려 그 불을 끄셨느니라, 라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
롬12:1-5
우리는 전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분입니다. 한 사람이 건강해지려면 신체 각 부분이 종합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머리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인 되심 아래 사는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수혜자입니다. 우리는 통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스릴 능력이, 책임질 실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은헤를 입은 자의 기쁨과 감사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각자 자기 역할, 자기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답답합니다. 이러다 어떻게 되려는 것인가, 이대로 가면 망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왜 우리는 죽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붙잡고 있어야 하고 내 뜻과 내 생각대로 되어야 안심하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성경의 중요한 내용 대표단어인 사랑,믿음,겸손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우리는 도무지 모르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빌2:4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주라는 뜻입니다. 옳은 게 전부가 아닙니다. 상대방을 내 마음에 들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가기 위하여 내가 기꺼이 기다려주고, 눈높이를 낮춰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감옥에 같힌 바울은 자신이 풀려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가 없는 상황에서도 무엇인가를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상황이나 빌립보교회가 당면한 어려움에 의해서도 방해받을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이 가진 가장 중요한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감사와 기쁨, 예수를 믿는 위대한 존재가 되어 가는 것, 바로 이것을 놓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읽고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확인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이 약속한 것들은 모두가 다 참으로 명예롭고, 위대하다는 사실입니다. 양보하는 것, 지는 것, 기다려주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 같은 눈에 보이는 결과들을 만들기 위한 세상적인 힘,세상적인 능력은 나도 죽이고, 상대도 죽이고, 서로 망하고, 서로가 비정해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신앙고뱅의 위대한 힘을 누리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기 설명
빌립보서 2:05~08
그리스도 찬가
교회사 내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하나의 시와 찬송으로 고백하고 선포한 구절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채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범이 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그분의 찾아오심이 이런 식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자기 뜻대로 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그런 동등됨을 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주고 소비하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 역할을 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본체의 본질이라고 이해했고, 그렇게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등되는 것은 7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집니다. 종의 형체를 가진다는 것은 종의 특징적인 속성을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종은 자기 생각과 자기 선택이 없는 자입니다.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예수는 모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준다는 명백한 목적 때문에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버리셨습니다. 남보다 우리한 점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
우리는 본성상 어떤 대상을 우리가 이해하기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누구에게는 율법이 되고, 신비가 되고, 능력이되고, 권력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두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수단이거나 어떤 목적을 위한 저장소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 지금 이 그리스도 찬가라는 별명이 붙은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 구절들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혹은 예수를 믿는 자로서 얻게 되는 유익이나 받을 수 있는 보상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 구절들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기독교 신앙을 가능하게 한 그 구원과 복음, 그 복음과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가 어떤 분이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이해해야 복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음에 초점이 있지 않고 예수에 초점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선택이나 결정이나 회심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누구냐를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야, 그 다음에 선택이나 결단,순종,헌신,감격,소망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성경의 증언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부끄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가장 큰 헌신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우리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죄인 된 인간이 가지는 죄의 본성에 내재한 무서운 부패를 직면하지 않고 예수를 이해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통치자인 신이 통치를 받는 시민의 자리에 내려옴으로써, 신이 피조물인 우리 위에 군림하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인간을 섬기는 일과 같다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십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그리스도께서 어떤 큰 업적을 이루려고 애쓰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치러 오셔서 맹렬히 십자가를 지려고 애쓰신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인류에게 당신을 다 맡기자 인류는 그를 죽여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오신 것이지, 죽으려고 오셔서 그 목적을 위하여 맹렬히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죽기 위한 방법으로 낮추심과 겸손하심과 비우심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다 낮추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자 우리는 그를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이 죄인 된 인간을 위하여 죽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자기 설명의 한 중요한 특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득하고 섬기기 위해 오셨지만 우리는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심과 종이 되심과 희생을 통해 설득하려 했지만, 우리는 설득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하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까지도 받아들이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보면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는 우리가 누군가와 의견 충돌을 일으킬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죽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될 리가 있겠습니까. 설교한번으로, 성경 한 번 읽고 기도 한 번 해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늘 반복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주기까지 복종하십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고, 자살, 자결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노,절망하여 죽어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과 낮추심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어지는 어떤 보복을 죽는 자리까지 받으셨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로마서 8장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게 됩니다.
비우고 낮추고 순종하고 죽는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결국은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무릎 꿇는 항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핑계를 댑니다. 내가 긍정하고 내가 인정하고 주장하고 싶은 기독교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사이의 갈등을 말입니다.
롬 15:1-7
한마음과 한 입, 한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본 받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지시는 분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담당하고 큰소리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찾아오신 예수요, 우리 손으로 죽인 예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힘이 되었고 자랑이 되었고 자기주장의 근거가 되었지. 이렇게 비우고 낮추고 순종하고 죽는 기독교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상대방을 감싸 안는 싸움
로마서 15장6절에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한 뒤에 그 다음 7절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라고 합니다.
상대방을 내가 감싸 안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믿음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가 망한다든가 이런 것은 교회에 효과가 없다는 식의 말들은 전부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오늘날의 교회는 세상과 별차이가 없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예수는 현실을 보상해주는 예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쉽게 어떤 윤리적 덕목들을 채우자는 게 오늘 말씀의 주제가 아닙니다. 겸손이나 순종이나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내고 찾아오시는가, 우리를 대접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실천에 가장 우선하면서도 전부인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여러분이 이해하는 한 어떤 결단일 수도 있고, 경험일수도, 우연일 수도, 잘 모르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는 있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식으로,곧 그 본질대로는 믿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시고 전 인생에 걸쳐서 점검하시고 말씀에 붙들어 매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주앞에 나아가 다시 무릎 꿇어 깨우침을 구하는 오늘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영광
빌립보서 2:09~11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 찬가라 불리운 말씀을 살펴보았씁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비우심,순종하심,죽으심이 가지는 하나님의 자기 설명이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자신의 특성을 확인했습니다.
높이심을 보상으로 오해함
9절에 처음에 “이러므로”라고 되어 있어 마치 앞에 있는 희생 때문에 뒤에 이런 보상이 주어진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말씀은 그 앞에 있는 길을 통해서만 이 영광의 자리에 간다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섬김을 받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가치로 인정받는 것이 섬기는 것이요, 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들이 잘못사용되고 있고, 또 보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우리의 이해에 매우 큰 걸림돌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우리의 소원과 가치를 묶어야 합니다. 이 점을 우리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9절 말씀에 나오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뚜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과의 자리는 이러한 희생을 통한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희생의 궁극적인 자리로 가야 하기 때문에 희생과 겸손과 낮춤으로 들어가야 그 궁극적인 자리에 갈 수 있다는 말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밤낮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제가 헌신했으니, 이렇게 제가 희생했으니, 보상해 주십시요 이런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이게 아니라 희생과 낮춤과 억울함과 지는 것의 끝까지 가야 합니다. 지는 자리에서 시작하여 그 지는 것의 끝인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낮추심 속에 드러나는 영광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신 것이 예수를 최고 영광의 자리와 최고 권세의 자리에 두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여기에 예수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비우시고 낮추시고 순종하여 죽는 길로 들어가 그 자리에 올라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관념이나 이상이 아니고 구체적 인생 속에서 역사적으로 증거되고 선포된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예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의 인간 이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가 모든 것의 열쇠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 역사 현장에서 한 인격으로 구체화되어 한 사람의 인생으로 실현되고 증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아갈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고 그 길을 구체화 할 수 있는 힘을 가집니다. 그래서 11절에 있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말이 됩니다.
장차 온 세상과 역사의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섬김과 봉사라는 특성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온전함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엡1:3-6
여기 ‘영광’이 나옵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안에서 허락하신 구원이요,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와 세상에 대한 목적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획인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은 군림하시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영광이 아니라, 당신을 낮추어 오히려 우리 밑에 와 인간을 떠받드는 섬김과 봉사와 낮춤 속에 드러나는 영광이라고 합니다.
부르심에 항복한 자의 삶
엡 1:7-10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간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역사와 세상과 우주까지 구원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고 영생의 나라를 이제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나라로 부름을 받으며 부활생명으로 새 몸을 입고 영원히 주의 품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구원입니다.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의미는 어떤 영웅이나 어떤 능력이 많은 위인에 의해서 통일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주기 위하여 당신을 비우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그의 전 생애를 바쳐 순종하여 죽음으로 끝내신 예수로 통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요 영원한 나라요 우리에게 약속된 영생 복락의 나라입니다. 무엇을 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우리에게 요구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가지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복주시기 위하여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로 부르신 사실 앞에 항복한 자로서 마땅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라는 말씀을 따라 삽니다.
아직 악한 권세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현세에서부터, 보잘 것 없는 지금의 우리 인생에서부터 우리에게는 지는 길, 낮추는 길, 고난을 감수하는 길, 순종과 겸손과 희생으로 걷는 길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길의 궁극적 완성으로 우주와 역사를 구원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끌고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 고난, 억울함을 조건으로 삼아 보상받으려고 합니다. 마음에 억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지금 참고 있지만, 나중에 천국 가면 보자. 너는 아마 지옥 가 있을 텐데, 자꾸 이렇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 인생과 현실에서 만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 깊이 울분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르는 길, 그들이 아직 믿지 않아서 ㅇuffu 있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는 감사가 없습니다. 믿음의 싸움이라는 영광된 부르심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좀 더 있다가 믿으시겠습니까. 이 길은 위대한 길입니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 길입니다. 이 길의 궁극적 완성에 천국이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광이 있습니다. 다른 것을 행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허락받지 않습니다.
요 17:21-24
여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영광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성자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tjfhff 내어준 그런 관계라는 뜻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영광은 성부 하나님이 당신을 성자 하나님께 내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예수님에게 주신 영광을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몽땅 내어주심으로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자신을 내어주는 신앙의 길
롬 15:5-6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를 본받아 뜻이 같아지고 한마음과 한 입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주장,자기고집,자기권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싸움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자기를 주는 것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뜻입니다.
언제 여러분이 이것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각각의 경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그래서 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가 기도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dho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진짜 기도해야 할 제목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은 아직도 죄가 나를 주장하고 있는 길이요, 예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길이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의 뜻을 모르는 길입니다.
많은 이들이 웁니다. 그런데 울고는 끝입니다. ‘울었다’로 끝나는 것은 안 됩니다. 고쳐야 합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힘들고 잔혹한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에 물들어 있고 붙잡혀 있고 변하지 않는 존재인가에 대하여 여러분이 평생에 걸쳐서 놀란 것 보다 더 많이 놀라셔야 합니다.
더 많은 은혜를 구하셔야 합니다. 나라와 국가를 위하여 기도할 틈이 없을 만큼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길로 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아닌 다른 길로 걸어서는 하나님이 약속한 자리, 하나님의 영광을 만날 수 있는 자리로 갈 수 없습니다.
발2:5-8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여전히 자기의 자존심과 권세를 확보하는 것으로 여기도 있다면, 여러분은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고 질 수 있고 낮출 수 있고 그래서 상대방의 처분에 나를 맡길 수 있어서 십자가에 죽는 자리까지 갈 수 있는 길 위에 여러분을 세우셔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지 않고는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충성할 믿음과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기도가 반복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안에 행하시는 하나님
빌립보서 2:12~16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 찬가라(빌2:5-11) 불리운 말씀을 살펴보았씁니다. 그 구절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범과 그 길을 통한 영광의 승귀,곧 높아지심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이 오늘 본문말씀인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떼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렵고 떨림이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부재를 전재하고 주는 교훈입니다. 본문에 나온 것처럼 나 없을 때에도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다음에 나오는 “너희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하나님의 종인데, 어이없게 감옥에 갇혀서 벌여놓은 일들을 하나도 뒷감당하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문제에 대하여 마음 깊이 당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진정한 신비를 이해하게 됩니다. 바울이 나가서 충성하고 봉사할 때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잡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그것이 지금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의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여, 당신들의 교회는 당신들과 내가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의 신앙에 책임 있게 순종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했는데, 소아시아권에 있었던 많은 교회들이 부흥과 쇠퇴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부흥과 쇠퇴, 어느 쪽으로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유익하게 했지 손해 보게 하지 않았다고 증언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니 내가 살아 돌아가 유익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이 주인임을 아는 것이 더 필요해서 나를 감옥에 붙들어 놓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빌립보 교회를 책임지는 자로서 충성이라는 측면에서 마땅히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지만, 내가 전권을 쥐고 있고 운명을 죄우하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인은 아니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빌2:15-16 “이는 너희가 음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이 자랑은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붙잡혀 있고 예수가 너희의 주인이고 예수가 모든 것임을 나를 통하여 너희가 깨우치고 더 분명하게 되어서 내 자랑이 있게 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입니다.
나 없으면 안 된다가 아니라 예수가 모든 것이라는 것을 내 덕분에 알았다고 고백해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특혜가 주어지지 않는 길
설교자가 성령에 붙잡혀야 되는 것처럼 듣는 사람도 성령에 붙잡혀야 합니다. 성령에 붙잡히는 것을 간절히 사모해야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조작할 권리는 없습니다. 서로가 은혜를 구하며, 강단에 서고 의자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교회와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또 우리의 운명과 인생의 내용에 대하여 권리를 가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은혜를 입은 자들이요 은혜를 구해야 할 자들입니다.
골1:24-29
사도바울이 얼마나 충성스럽고 성실하고 겸손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사도인가 하는 모습이 부각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근거로 다시보면 24절“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투옥으로 말미암은 그의 부재는 빌립보 교회로 하여금 진정한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이를 위해 바울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맡은 막중한 사역 때문에 어떤 특혜가 주어지지 않는 길을 걸음으로써, 사도바울은 교회가 가지는 모든 약속과 축복들의 근원이 누구에게 있는지 밝히는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에 맞고 여행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일들을 감수하면서도 찾아다니는 일로 하나님의 종노릇을 하는 동시에, 붙잡히고 원치 않는 고난 받고 어려움을 겪어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을 빌립보서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가 가지는 그 절절한 표현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러한 고백이 일반적으로 여러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우리 모두의 고백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에게 어떤 특혜를 주어 현실의 고통을 면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로서 믿지 않는 자와 구별되는 보상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소원합니까, 자기 자신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자랑스러운 것인지, 또 이것이 영원한 보상과 연결되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도바울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로라”골1:24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우리 믿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며,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인이 누구이며 그 내용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 속에서 이 고난을 잘 견디고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신자 된 책임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사실 신앙을 이기적으로 쓰고 있는 것에불과합니다.
골2:1-5
바울은 고로새 교회와도 함께 있지 못합니다. 바울의 부재가 가져왔을 엄청난 혼란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적지 않게 우왕좌왕하고 불안해했을 것이 분명한데, 사도바울은 담대하게 이 말을 합니다.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본다. 이 구절은 아마 “… 질서 있게 행하고… 믿음을 굳건히 가져라”라는 내용을 기원형을 이렇게 기원형으로 이렇게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조건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여러가지 조건들을 주십니다. 정치,결제,사회,교육,문화,국방 같은 사회적 조건들이 있고, 또 지도자와 교회구성원들의 수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보면서 깨우치는 것은 그 중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할 수 없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허락하시는 데에 용이한 조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골2: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송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은 그 앞에 있는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에 이어 나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빌2:5-8
이 엄청난 신적 성의와 능력과 희생과 낮추심과 섬김은 신이 할 수 있는 어떤 힘,권력,기적,분노,심판보다 더 크고 더 나아간 것입니다. 사랑,용서,구원이라는 데까지 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신의 공정함이나 전능함보다도 더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사랑하기 위해 당신의 어떠하심을 그 아들로 증언하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녀로 삼으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돌려놓고 여기 교묘한 말로 송이는 인간적인 기준, 조건, 능력, 소원 같은 것들로 대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참 신비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에서 그 신비한 문제를 이렇게 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누구에게 복종합니까. 그리스도께 복종하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복음의 내용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1:27 권면의 반복입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같은 말은 2:12절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Edpeh”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빌1:27 “…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명하고 있습니다.
빌2:5-11 소개된 그리스도의 복음, 곧 자기를 비우시고 종이 되시고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사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교회가 지켜야 하고,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힘써서 두렵고 떨림으로 지켜야 할 구원인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를 소원하라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적인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의 덕목이 없다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집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어떠한 정의 평화 대의 도덕 헌신 성실함도 기독교가 말하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정말 마음에 분명하게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을 다 걸지 않고는 지킬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행하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다 함께 일시에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신약의 서신서를 보면 문제가 없는 곳에 보낸 편지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 때문에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치고, 교회가 그것만 못한 것으로 그 본질이나 내용이나 목표를 바꾼 일 때문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심지어 갈라디아서 같은 경우에서는 사도바울이 분노하기까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빌2:13-1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아주셨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참을 수 있습니다. 참아주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는 낫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자기가 가장 못났다는 것을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실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인이 되어서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정말 소원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러이러한 보상을 주십시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빌2:1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리로 부름을 받았으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갖는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은혜와 무한한 행복을 깨우치기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생애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로 세상을 이기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추ㄱ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길
빌립보서 2:12~18
신앙을 지킨다는 것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섬김과 순종과 죽음은 하나님이 예수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영광을 주기 위해 세우신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추고 순종하고 섬기고 희생하고 죽는 것이 가장 값진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바울은 그가 있든지 없든지 혹은 그의 도움을 받거나 말거나와 상관없이 언제나 할 수 있는 일, 즉 죽어 나가는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16절에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하는 것은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은 자기를 전제로 드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제는 제물을 바칠 때,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행위를 말합니다.
제물을 드릴 때, 그 위에 피를 대신하여 붉은 포도주를 뿌림으로써 제물이 드려지는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기꺼이 전제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것은 단순히 포도주를 뿌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반드시 바쳐진 제물 위에 부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바쳐진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듯이 자신의 피를 뿌려서 제사를 온전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바울이 기쁨으로 소원한다는 말씀입니다.
빌1:3-5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어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과 자신들의 교회에 대한 책임을 넘어서서, 사도바울의 사역에 깊이 참여하였습니다.
7절 그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사도 바울을 염려하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또 함께 걱정함으로써 그의 어려움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부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지금까지 빌립보 교회는 여러 혼란과 걱정과 위기들에 대해 사도바울과 아주 긴밀하게 묶여 있고 책임을 인식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빌 2:17
내가 죽는다면 그 죽음은 너희가 나의 복음에 참여하는 길에 절정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희생,곧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잇는 그 길에 들어왔다. 따라서 지금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 또는 복음으로 나와 동역자가 된 너희의 헌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완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죽어나가는 일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죽음을 통하여 절정에 이르고 온전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차피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그와 빌립보 교회가 긴밀하게 협조한 내용이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는 사역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빌4:4-6
사도 바울은 내가 죽어나가면, 이것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에서 하나의 전제같이 될 것이다. 내 피를 뿌리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사는 자들인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길
세상에서는 이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기기 위해 인간이 인간 아닌 것으로 되기를 작정하라고 요구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세상을 잃고 우리의 목숨까지 잃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인간으로 살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남을 위하여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안에서 증거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의 길을 가는 것에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기꺼이 모든 것을 걸 것입니다.
골3:12-17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이라는 조건 속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을을 옷 입고”피차 용서하고 사랑을 더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에 요구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도무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15절”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라고 함으로써 이러한 일들은 세상 시각을 가지고 하면 못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예수의 평강은 무엇입니까. 기꺼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의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하 바로 이러한 평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질 때, 처음에는 어떤 특별한 경험이나 이해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보다 크신 주인이라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병을 고쳐주거나 현통한 길을 열어주는 등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것을 알리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누구신가를 알리신 다음에는 당신의 뜻을 우리 안에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소원에 답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붙들어 하나님이 목적하신 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길인지를 반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시키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안은 고통이 면제되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대한 길입니다.
골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하여 모이며 권면하며 증언하며 교제합니다.
롬12:10-13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신앙인들이 서로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더 나아가
롬12:14-21 무시무시한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세상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요구요 빛과 생명의 임무를 갖고 있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신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교회오면 서로 편을 들어주십시오 교회 안에서는 억울한 일을 좀 안 당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 진심이 통하고, 또 연약한 것이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함께 죽음의 길로 가는 자들이지 않습니까
함깨 죽음의 길로 가는 자들
예수 믿는 일에서 가장 큰 시험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잘났는가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같이 죽어나가는 인생을 사는 동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도망가지 마십시오. 누가 신앙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 칼질을 하면서 도망가지 말고 제발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다 도망가면 칼만 남을 것이 아닙니까. 교회를 따뜻하게 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너희는 나와 죽음의 길을 가기로 한 동지들이다. 내가 죽을지라도 겁낼 것이 없고, 내가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다 죽음의 길로 가는 일에 동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이 길은 영광스러운 길이다.이 길은 감사한 길이다. 오늘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광된 길로의 부름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라면, 얼마나 더 넉넉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넉넉해지십시오. 웃으십시오
사도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드리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빌립보교회의 희생과 섬김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 바는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동지입니다. 우리가 명예로운 인생을 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또 우리 교회가 명예로운 교회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부족과 다름을 용납하고, 서로 끌어안고 서로 편을 드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라고 아는 여러분의 교회 신앙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디모데
빌립보서 2:19~24
빌립보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때 도움을 주어야 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함께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바라보며 많은 걱정을 하였지만, 정작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유지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일로 인하여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젊은 후계자 디모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디모데를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우리는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정확ㅎ 모릅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디모데의 부족함을 걱정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딤전4:12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말씀은 디모데의 앳돼 보이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 추축을하게 합니다.
고전16장에서는 내가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낼 텐데 저를 두렵게 하지 말라 하는 권면까지 나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음에 적잖이 부담을 갖게 하는 후계자였을 것입니다.
디모데전후서는 바로 디모데에게 남긴 편지인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임무를 디모데가 이어줄것을 확신하고 권면하고 격려하는 서신입니다. 디모데는 신앙적 경력에서나 삶의 경험에 있어서 바울이 사역할 당시의 다른 사역자들과는 거리가 있고, 아직 다 완숙하지 못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확신
바울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합니다. 그는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반대파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스승을 들자면 스데반일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베드로 같은 설교의 결과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냥 돌에 맞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거기도 사도 바울이 자라납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그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다 성령이 충만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그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 나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나를 이런 식으로 스데반의 뒤를 잇게 하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담전 1:12-16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대하게 생각하거나 능력 있는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은헤로 부름 받은 줄 알았고, 그 은혜를 증거하러 다니는 자 이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훈련시킨 것은 하나의‘반전’이었습니다. 바로 스데반이 아니고 바울이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준비된 스데반은 죽이고 박해하던 바울은 교회의 책임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그 반전의 의미를 그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은혜다.하나님이 하시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능력이 아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충서이다. 이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디모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를 살펴보면 디모데를 보내는 바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능력이 없을 수도 있고 준비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를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핵심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내내 우리가 보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모든 행동에 제한을 받고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그가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유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로 보게 하였습니다.
고전 2:1-5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나아가서 그 교회를 세우며 그들을 복음으로 불러들였을 때, 그가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내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얼마나 많은 항복을 부러일으킬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들을 만나고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고 믿는 종으로서의 자리를 이탈하는 것을 가장 걱정했습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이 믿음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말미암은 그의 능력과 열심과 진실하심과 자비와 긍휼로 너희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너희가 제대로 알아보기를 바라고, 나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심이 가려지는 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느다는 것입니다.
섬김으로 복음을 증언하게 하심
고전 2:6-10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나아가 전하는 이 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것이요,하나님의 일하심과 목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어떻게 대하시며 우리를 위한 어떤 뜻과 목표를 갖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 성령만이 우리를이해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할 수 있다 입니다.
고전 2:13-15
이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자기 실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그 공을 백 퍼센트 성령께 돌리면서도, 사도바울은 자기가 종이 된 이유를 16절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사 죽으신 그 마음입니다.
빌2:6-8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설득은 강요가 아니며 억지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는 내용은 늘 전부 하나님께 속한 일로서 우리의 일반적인 지혜와 노력으로 알거나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자하나님을 보내어 육신으로 찾아 오사 종의 형체를 가지고 자기를 낮추시고 우리를 섬겨 죽음의 자리에 이르는 길로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십니다. 우리가 내용을 만들거나 한 영혼을 변화시키는 권능을 가졌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면서 오히려 섬김을 통해 이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친히 그리 하신 것처럼 섬김을 통해 이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종으로 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며 비우며 낮추며 죽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헌신이 감동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과 겸손과 진심이 상대방을 납득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윤리이고 도덕입니다.
이 신비에 속한 것, 생명에 속한 것, 영생에 속한 것은 다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가 오셔서 인간의 죽은 영혼을 깨워 일으키시지 않는 한 아무도 복음을 이해하거나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때, 먼저 구원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그 귀한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허락하셨는가를 몸으로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도록 하십니다.
섬기는 자의 삶의 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다. 그것은 영생에 속한 것이요, 영광된 것이요, 하나님의 신성으로 초대하는 참으로 복된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종들을 불러 세우시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의 종들에게는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제시했고 또 우리를 어떻게 대접했느냐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그래서 그는 데모데를 보낼 수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너는 가서 망신을 당해라. 업신여김을 당해라,라고 이야기하고 보냈을 것입니다. 물론 상대방 교회에는 저를 두렵게 하지 말라고 고린도전서에 기록한 것처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는 너는 참고 견디고 주께서 그리 하신 것처럼 네 십자가를 지고 매일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나는 매일 죽노라하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세상 앞에 나아갈 때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 내용의 진실성을 드러내다든지 혹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여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제시했는지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이 우리를 어떻게 항복시켰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책임입니다. 그러니 목소리를 낮추시고 웃으시고 오래 참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자로 섭니다. 그것이 디모데를 보내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바울의 이해입니다. 자기가 사도 된 일에 대한 이해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이며 교회에 대한 그의 배짱입니다.
이런 신자들이 되어 세상 앞에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씩 웃어서 한번 보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있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에바브로디도
빌립보서 2:25~30
에바브로디도를 받으라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돌려보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 빌립보서 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아마도 바울을 돕기 위하여 빌립보 교회에서 특별히 보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의도는 에바브로디로를 보내어 투옥 중인 바울을 위로하고 도울 뿐 아니라 이후 바울의 남은 사역에서도 계속해서 그의 동역자가 되어 그를 돕는 것이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아마 죽을 만큼 큰 병에 걸려서 모두의 걱정을 자아냈고, 이제 바울은 그를 빌립보 교회에 다시 보내기로 합니다. 빌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이렇게 많은
칭찬으로 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 2:29-30
바울이 걱정하는 겁니다. 저를 기쁨으로 받으라 하는 당부를 하는 것은, 말하자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돌아온 에바브로디도에게 가질 당연한 의심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에게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고서 그를 기쁨으로 받으라, 그가 죽기까지 충성했다는 것을 잊지 마라, 하며 빌립보 교회에 당부를 요청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적으로 탁원한 어떤 포용이 빌립보서에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간절한 표현을 사용해서 빌립보 교회와 베바브로디도 양쪽 모두에 어던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매우 애씁니다. 25절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여기 사자라는 표현은 사도라는 말과 거의 비슷한 뜻입니다. 또 초대 교회에서 주 안에서 형제 된 자라는 표현은 같은 신앙고백을 한 믿음의 동지를 말합니다.
실패자에게도 찬사를
에바브로디도를 데리고 있을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할 수 없이 보내야 하는데, 이 일은 어찌보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어떤 실망이나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이런 형편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면서 일종의 찬사를 그에게 붙여서 보냅니다.
이 찬사는 아무런 말썽 없이 사건을 무마하자는 의도에서가 아니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표현이라고 느껴집니다. 같이 일할 수는 없게 됐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경멸하거나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모습이 보입니다. 또 바울 자신의 결정에 대해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이 맞고 명분 있는 일을 하고 자랑스러운 일에 도움이 되었을 때만 이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어서 같이 있을 수 없는 때에도 이 찬사를 보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걱정은 결국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무서워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 두려움을 누군가에게 퍼붓는 겁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의 실력 없음에 대한 일종의 비명입니다.
여러분이 법벌 떠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모든 책임을 여러분이 져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자 그 짐을 다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이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은혜를 하락하십니다. 지면 그만인 세상에서 지는 것이 최고의 경지로 요구되는 신앙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죽는 것이 최고인 기독교 신앙이 있다면, 실패와 오해와 무능함이 왜 겁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안에서 에바브로디도에게 주었던 찬사들을 동일하게 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넉넉함을 보일 수 있는 신앙의 근거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신앙 근거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의 찬사 속에 에바브로디도는 온 힘을 다했고 목숨을 걸었다.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 때문에 우리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고백이 깃들어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를 돌려보내야 하면서도 이런 찬사를 보낼 수 있고,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으며 그 잘못으로 상대방을 비난하지도 않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깨우치게 된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관대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고 아무도 정죄하지 않고 찬사를 보낸 수 있는 이 신앙의 핵심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은 결국 책임을 떠넘기는 분노 이외에 다른게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건 기독교 윤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이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 속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과를 만들어 내고, 그러기 위하여 능력을 촉구해야 하는 세상의 방법과 달리, 상대방이 무능한 것을 감수하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당신이 나와 같은 교회에 다녀서 감사합니다.
신자가 얼마나 넉넉함 가운데 있는가를 바울이 감옥 속에서 깨달았음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넉넉하고 모든 성과를 보았고 원하는 것을 만들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어던 것도 사용할 수 없는 갇힘 속에 붙잡히자 비로소 그의 영혼이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 기적의 실체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바울의 마음을 품으셔서 이 용서와 찬사와 감사와 겸손과 넉넉함을 누리는 예수 믿는 복된 삶을 살기 바랍니다.
'Meditation on Bible > PHILIPPIANS(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 박영선 - 제1장 (0) | 2023.12.13 |
---|---|
빌립보서 이해 (0) | 2023.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