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ACTS(사도행전)

사도행전 1부 처음교회-박영선목사

Four Seasons Daddy 2017. 11. 12. 20:22

사도행전 1부 처음교회

사도행전 1부 처음교회.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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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에 남겨지다(사도행전 1:6-14)  

머리말  1장1절~5절     예수의 승천 6절~11절   


                                             
예수님이 승천한 현실 

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제자가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1:6) 이제야말로 기대했던 하나님나라가 보란 듯이 선언되고,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아니요”(1:17)
     
 예수님을 처음 믿고, 기쁘고 감동스럽고 모든 문제가 문제로 느껴지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사실 때문에 눈물이 펑펑 나고, 평생을 이렇게 기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는 한 달이 채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아니 도대체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기쁘게 해주시더니.” 사도행전 1장의 제자들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사도행전은 여러분의 기대와 상상 속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현실을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답답해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한 현실이라는 것을 놓치면 우리에게는 원망과 치성 외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 이 현실이 하나님이 요구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우리는 제대로 된 신앙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과 어떻게 마주쳐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가 필요한 시대 

 떠나가신 주님, 약속과 하나님의 뜻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 그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데 부활하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계시지 않는 현실에 처한 성도들에게 남겨진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이기도는 분명히 우리가 보통 하듯이 무엇을 받아내기 위한 응답용은 아닐것입니다.
그런 응답용이였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줄 필요도 없이 주께서 부활하시고 다 해결하셨어야 맞습니다.

 죽어도 좋다는 말은 결사각오가 아닙니다. 죽는 것이 끝이아닌, 죽음을 극복한 부활이 있습니다. 그 부활은 죽으면 살려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나는, 죽음이 최고의 권력인 세상이 아닌 세상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최고의 무기는 기도입니다 

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과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환경 속에 살아갑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다는 말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신 방식, 예수께서 가지신 인생에 대한 이해, 예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목적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권력이나 윤리가 아닌 실존 

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셔서 교회를 이루십니다. 교회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칭하는 신약시대의 이름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님 안에서 불러서 예수님과 묶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합니다.

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되고, 그래서 예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가서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가지는 우리의 가장 큰 오해입니다. 

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 증인이 되어 그것을 전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전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허락하셨다”였습니다. 우리 먼저 믿은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전해서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성립되었습니다.

 우리가 사람들을 붙잡고 예수님 믿으라고 강요하는 데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라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과 환경과 사회와 배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 아직 이 세상을 전부로 아는 구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앞에서 먼저 믿은 자들이 ‘부활 생명을 가진 자는 무엇이 다른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무엇을 목적하는 삶을 사는가’ 하는 차원에서 구별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믿은 자의 사명입니다.

 아브라함은 창세기에 이렇게 등장합니다. 아무런 정치적 사회적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그네가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인생을 살지만 그가 복의 근원입니다.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그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빛이고 소금입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나 그랬듯이 신자는 이 삶을 사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믿음의 보상은 멀고 세상의 협박은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을 평생합니다.

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쓸모 있는 인생을 살았는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가를 아는 자리에 오면 그것이 신자 인생의 답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보상을 삼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 너머에 복이 있습니다.

 우리가 싸워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보상받거나 증명받으려고 하지마라. 세상 속에서, 그들 앞에서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살면서, 그들에게서 우리가 다르다는 증언을 받아내라.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해서 네 위치를 확보하지 마라, 숨기고 감추어지고 세상에 떠밀려가는 속에서 억울함과 누명과 오해와 욱여쌈과 비난 속에서, 세상이 전부가 아닌 사람으로 살라, 그들이 우리를 보고 왜 그들과 다른지 묻게하라.

 ‘너희가 보고 있는 이 예수는 올라가심을 본 대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신앙의 내용을 너희 삶에서 순종해라’이렇게 사도행전은 시작합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사도행전 1:15-26)  

사도의 보충 12절~26절


 2장의 성령감림 전에 열두 사도 중의 한 자리를 보충하는 일을 합니다. 바로 맛디아를 사도로 뽑습니다. 맛디아를 뽑는 일이 제자들이 행한 첫 번째 실천이 됩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는 데 있읍니다 

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일을 수행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첫걸음을 뗐다는 의미입니다 

 결정을 한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유인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권리입니다. 이 일은 동시에 분명히 순종적인 일이기도 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행한 순종적 행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요 결심이요 선택으로서 자유권이기도 합니다 
  

자유의 본질은 진리 

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그 가치를 행사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 예수가 없는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그가 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 붙잡혀 있습니다. 예수를 모르면 생명이 없고 진리가 없고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도, 만들 수도 없고 유지할 어떤 것도, 완성할 어떤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 자유인은 가치 있는 존재로서 선택권을 가집니다. 의존적이고 누구에게 붙잡혀있는 정도를 지나 본인이 자신의 결정을 행사할 권리를 가집니다. 그 권리는 그가 가진 신분과 가치의 높이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가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순종이라는 것과는 병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선택권을 하나의 권리로 가지지만, 그 선택권이 자유의 본질은 아닙니다.

 자유의 본질은 진리입니다. 가치와 생명의 문제입니다. 진리에 속할 때 비로서 선택권을 가집니다. 순종이란 이 가치, 곧 생명의 근원이시요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말합니다.거기에서만 가치와 생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유는 선택권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선택권은 가치와 생명을 가지지 않고는 존재할 수도 없고 행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 자유를 초대교회가 제일 첫 번째 반응으로 행사하는 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부활 생명의 권세를 행사하고 그 혜택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정하여 책임지기로 합니다.

 선택과 순종이 위에 설명한 것처럼 말로는 병존이 가능한데, 실제 신앙생활을 해보면 선택과 순종 사이에는 늘 긴장과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실패가 끝이 아님 

 고전 2:1-5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부활 생명으로 가는 영생의 축복이자 약속으로 우리에게 보상하시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안주신다는 말입니다. 약속하고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시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오해나 반대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하거나 주를 위한 열심을 이뤄내기 위한 능력이나 성공을 구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고 책임도 아니고, 내가 약한 그때에 주께서 강하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인생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초대교회는 맛디아를 사도로 뽑습니다. 맛디아를 뽑아서 그에게 모든짐을 떠넘겼다거나, 맛디아에게 능력이 있어서 그를 뽑아 모두를 안심시켰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부활 생명을 사는 자들이 기쁜 순종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심한 것입니다

 실패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완벽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활 생명을 허락한 자녀라는 약속과 실제적인 능력 속에서 존재합니다.

 예수께서 죽으셔서 끝난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무엇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부활의 길이었던 것같이 우리의 실패와 부족은 결단코 하나님의 일과 그의 영광과 그의 자녀로 사는 우리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손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견디는 삶 

 이 일을 이렇게 말로 이해하고 선언하고 믿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긴 이 신약시대가 아버지께서 정하신 완성의 날까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보류된 시간이라는 것,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골로세서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살아내셔야 합니다. 인생은 고난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마음이 평안하고 감격스럽고 좋아서 미치겠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넉넉하게(건강,지위,재산 등) 주시지 않는 현실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무엇을 살아낸다는 것일까요? 여러분 각자에게 준 시간과 공간의 자리입니다. 누구의 남편이고 아내이고,아버지이고 누구의 어머니이고 하는 그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수님 안에서 본 자, 십자가로 부활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자녀, 그 부활 생명의 증거와 약속과 축복을 받은자, 그것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로서 이 세상이 주는 현실적 위협과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 살아내는 것입니다.

 하루하루의 괴로움을 견디셔야 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세상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영원한 나라를 알고 있는 자로서 반응하십시오.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견디는 겁니다.

 신자로서 산다는 것, 자기의 인생을 신앙으로 책임진다는 것은 무엇을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입니다. ‘내게서 이가시를 빼주십니오”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를 여러분이 감수하셔야 합니다.

 그러니 멋있게 하려고 하시지 말고 오늘 주어진 삶에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사십시오.우시고 신음하시고 그리고 기도하시면서 그 자리를 지키시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만드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이천 년 역사의 증언입니다.

 초대교회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냄으로써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과 지혜의 인도함 속에 맡기십시요.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앞에 믿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여러분의 삶에 직면하십시오. 도망가지 마십시오. 앉아서 울고, 앉아서 화를 내시고, 그 자리를 지키시면 하나님이 거기에서 기적의 나무를 키우실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다(사도행전 2:1-13)  

성령의 강림 2장1절~13절

                              
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초점과 우리의현실적인 필요가 달라서 중요한 신앙의 문제가 되곤합니다

신약시대를 여는 증거

 “그 후에 내가 내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욜 2:28-30상)

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라’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성취된 예언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의 임재가 기능과 직무로 제한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님이 신약시대를 여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인류를 하나로 묶다.

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사건 ->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 -> 성령께서 이 일을 맨 처음에 하십니다.

 하나님과 단절되고, 공멸을 면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흩었던 인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사 우리로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로 묶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묶으십니다. 이것이 성령 강림의 역사적 의미입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확증

 약속했던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 세상 역사가 윤회하거나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직선으로 전진하고 있고, 그 뜻의 성취를 위하여 진행되고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인생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일을 해결하여 무슨 답을 만들어내어 위대해지거나 쓸모 있게 된다거나 하는 것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주실 만큼의 열심과 목적을 가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의 참여를 배우고 채우고 증언하고 누리고 사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가 이 약속을 우리에게 하나 더 허락합니다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회개를 촉구하다(사도행전 2:14-21)

베드로의 복음증거2:14~36    교회의탄생 2:37~47


 베드로가 일어나 성령강림이 가지는 의미를 설교하는 대목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요엘서 2장에서 예언한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고, 우연이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세의 증거

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창조의 영광과 약속의 완성으로 승리하는 날이 있다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직선적으로 가고 있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한 시간이요 역사입니다.

 예언이 증거하는 바가 바로 인류와 역사에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최종 목적지가 있다. 하나님이 지금 목적지를 향하여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의 증거로 지금 성령 강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을 따라 오심

 ‘ 이 성령의 오심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결과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종말을 향하여 역사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의 완성, 구원의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모든 영혼을 찾아오십니다.

 성령 강림을 현실에 대한 해답으로 찾기에 급급합니다. 장래일을 말하며, 예언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며, 장차 있을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의 영광, 부활의 영광을 확인하는 것으로 가지못합니다

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불안을 털어주시고, 필요를 채워주시고 하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이 아니란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하십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에 물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미했고, 하고 계시고, 이미 충분한 성령의 사역은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 ‘간절히 해서 된 게 아니라, 간절히 하면 하나님이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에 응답을 주신다. 간절해서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 간절함 때문에 쓸데없는 것에도 응답을 해주시는 자상한 분이시다. 당신이 간절히 했어야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쓸데없는 기도였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회개는 커다란 깨달음

 회개란,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자리와 운명에서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으로 돌아서서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나아와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씻어내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 세례가 무엇입니까? 물 세례는 우리가 죄인이고, 죄를 씻어내야 하는 부패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예식입니다. 결례입니다. 불 세례는 그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예수님뿐이라는 의미입니다. 불세례는 성령세례인데 성령세례는 하나님과 연합된 자, 곧 구원으로 부를 수 있는 분의 세례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

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에서 사는 신자의 현실에 대해서 배울겁니다 사도행전 3,4,5,장 기본은 동일합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 우리 인생 속에서 지금 우리가 가지는 가장 행복한 특권은 인생이라는 길을 예수님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이다(사도행전 3:1-10)

베드로와 요한의 활동 3:1~26


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친 기적의 사건

두가지 기적

 예수의 이름 하나로 앉은뱅이를 일으킬수 있다는 것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참으로 복된 약속입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예수 안에 있다. 그것은 분명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쪽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래도 우리가 기대하는 굉장한 능력과는 조화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하면, 감수하고 순종하고 희생하는 쪽으로 가니까 굉장한 기대, 욕심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함께 자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또 이스라엘 백성의 거부가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과 연결되어야하는가? 사도행전3장의 중요한 논제입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 복음이 능력이라고 증거합니다. 능력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능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능력이라고 하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이 먼저 떠오르지 죽음을 떠오를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논리적인 진행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의 진행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초대교회에 그리고 두고두고 하나님이 일하실 모든 교회에 알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을 설명합니다

 요엘2장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 이 예언은 말세에 관한 것입니다. 말세에 하나님이 그 영을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이였습니다. 즉 성령강림은, 이 세상 역사가 그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끝판에 다가와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 세상은 우리가 이해하듯이 스스로 존재하거나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주권자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계획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시간이요 과정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세계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류를 죄 가운데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로 하셨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창조의 완성을 성취하기로 작성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따라서 성령의 오심은 종말의 최종적 증거입니다. 동시에 그 증거자, 성령은 그 종말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임의 약속과 계획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성취를 위하여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기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정상으로의 회복

 영화로운 하나님의 창조목적,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거부하고 반대하고 발악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그 사람은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은 일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를 한것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라는 신분과 인생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운명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시작된 표적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은혜로 주어진 구원

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거부하고 우리가 원치 않았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겁니다. 참 놀라운일 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됐다니! 영생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니!

 땅 끝까지 가라. 제자를 삼으라. 그러나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주시는 명령이요,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 우리는 땅 끝까지 가는 것을 정복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복하되 힘을 가지고 큰소리치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나와 보니 땅 끝까지 떠밀려 갈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했던 예수

 이사야 53장1-3  예수님은 영광과 권세를 두르고 오시지 않았답니다. 아무도 그가 그렇게 중요한,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분인 줄 몰랐습니다.

 우리의 거부와 외면과 죽임이라는 방법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어떤 가능과 불가능의 효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성품과 직결된 용어로 쓰인 능력입니다.”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13)

 그의 볼품없는 성육신, 죽임을 당하시는 그 고난들로 일하셔서 이루셨습니다. 그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과 그 목적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하잘것없음, 실패, 막막함, 한계, 뭍혀 있는 것같은 상실된 존재감,또는 그런 자리 같은 것들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능력을 행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신자의 특권입니다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가 무슨 뜻입니까? 어디까지 밀리던지, 땅 끝까지 쫓겨날지라도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 걱정마라, 그렇게 읽으십시오



권력으로 맞서지 않다(사도행전 4:23-31)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 4:1~31       초대교회의 공동생활  4:32~37


 사도행전 4장과 5장 초대교회가 받은 어떤 기적과 또 어떤 핍박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세상 권력의 핍박

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는 권세가 세상 정치 지도자들의 권력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가 꼭 알고 이해해야 하는 내용이라 이렇게 사도행전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 어느 시대나 교회가 가지는 큰 위협과 시험 중에 하나가 세상 권력보다 더 큰 힘으로 세상 권력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현실의 어려움이나 시대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해결하고 또 하나님께 요구하는 방식은 세상의 위협과 적대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예언되어 있고, 초대교회도 실제로 그 형편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이해하고 승리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승리

 우리는‘예수’라는 표현이나 믿음,진심 같은 명분적인 것들을 구호로 삼아서 그냥 스스로를 몰아갑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열심에 답을 주셔야한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하나님을 막 강요하는 듯이 보입니다.
 그러나 우리의 진심이나 믿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말이냐면, 그냥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방향도 실제 내용도 없는 것이 될 때가 많습니다. 
 기독교 용어에서 ‘진심’,’믿음’ 등을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이 늘 전제되어야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구체적인 찾아오심이 예수님입니다

 그의 죽으심은 세상이 그를 반대하고 죽여버리는 것까지 감수하신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 양보하심입니다

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고 해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 세상, 궁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이기는 방식이 믿음입니다. 

 마태복음 16장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이십니다. 

 예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체적으로, 현실로, 육체로 시간과 공간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의 낮아지심, 찾아오심, 죽으심 그리고 승리하심, 이 모두가 그분의 약속,의지 능력, 목적, 방벙에 대하여 우리가 믿는다는 말에 실제적인 권능을 주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고백,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 위에 있습니다. 이 고백위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십니다. 우리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우리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이해했던 예수님과 예수님에 의해 허락된 교회입니다

권력으로의 유혹

 교회는 어느 시대나 바로 이 권력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고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로 이기는 것보다 힘으로 이기는 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권력이기를 바랍니다.

 큰 교회건축문제,세습문제 등으로 욕을 먹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항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확인하는 청렴,정직,공평 이런 것들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이야기입니다.

 잘못을 안 하는 것이 전부인 것같이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험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겁을 내는 것이 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책임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감수해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안 하고, 욕 안 먹고 세상에서 점수를 받으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사단법인,재단법인 같은 단체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 초대교회에는 기쁨과 찬송과 능력 그리고 유무상통이 있었답니다. 재물에 대해 이기적이지도 않고 욕심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교회에 오면 재산 다 팔아서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지자는 그런 말로 들립니다 

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기도하시고 시험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을 주겠다’ ‘나는 세상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게 하러 왔노라’ 이 싸움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됩니다. 

 세상은 그의 힘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은 그 예수를 일으켜 부할시키십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승리, 죽음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과 권능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싸움이 계속됩니다. 

 이 싸움은 오늘날 돈으로 표현됩니다. 돈은 세상 권력을 대표하는 성격을 가집니다. 돈으로 대표되는 것,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돈은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을 대표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것 중에는 세상이 가진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능력과 감격과 증언 속에는 이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이 싸움 위에 서 있습니다

헌금은 예배 행위

 이 싸움은 사도행전 5장으로 넘어가면서 심한 핍박으로 이어지는 현실속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그 사건의 의미와 가장중요한 본질을 증언합니다.

 헌금할 것 중에 얼마를 감추었다고, 약속한 것을 다 내지 않았다고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아나니와와 삽비라가 헌금을 내겠다고 했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헌금이란 무슨 행위일까요? 성수주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날을 구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와 그를 경배하는 날로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고 있는 자입다’하는 고백입니다  헌금은 ‘이 세상이 보이는 권력과 질서 앞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 아래 있습니다’하는 것을 증언하는 표입니다

 헌금은 중요한 예배행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마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 중에 얼마를 교회에 기부하는 것같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기명으로 드리는 헌금에서 제일 잘  나타납니다

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 아무개가 우리의 모든 권세와 궁극적인 권위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시인합니다’하는 고백입니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더 큰 권력의 일부를 떼어서 교회를 돕듯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버렸습니다.

 세상은 현실적 힘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우리가 가진 힘과 다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고백이 우리 현실과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영원과 운명을 쥐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이 세상의 권세를 하나님이 부활로 이기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그런 신앙인으로 현실을 힘 있게 사시는 우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억울함을 받아들이다(사도행전 5:17-32) 

아나니아와 삽비라  5:1~11  사도들에 대한 박해 5:12~ 42

 

 사도행전 5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앉은뱅이를 예수이름으로 고친결과로 생긴 부정적이고 곤란한 결과를 받게 되었다는 차원에서 놀랍습니다. 예수를 증거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채찍질해서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제자들은 그것을 기쁜 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

 기독교 신앙은 다만 도에 관한 것도 아니고 소원에 관한 것도 아니고 다만 치성과 진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요 우리가 자초한 죽음의 자리까지 쫒아 들어오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 사도행전 5:41절에 제자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이해는 다만 어떤 신앙적인 헌신과 비장함과 장렬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를 이해한 기독교인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희생이 아니라 순종

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은 메시아를 하나님이 버린 자라고 생각했답니다. 

 어느 시대에나 교회는 자기가 존재하는 시대의 사회와 세상 앞에 도전을 받습니다. 세상이 가려고 하는 타협의 위협과 시험을 당하고, 동시에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교회가 좀 잘해서 세상에서 욕을 안 먹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해도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다른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교회가 도덕성에 있어서 완벽하면 세상이 지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쓸모 있다고 해서 세상이 호감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세상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말을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 사도행전 5장에서도 예수라는 이름에 권력자들은 질색합니다. 다 예수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방식, 신앙을 가지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름 앞에 순종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입기 전에는,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과 화목과 교제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 빌립보서 2:5~11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 모든무릅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 희생이라는 말 속에는 내가 나의 권리를 포기했다. 그래서 손해를 자초했다는 가치가 크게 부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희생하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치가 이런 마땅한 권리,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여 가지는 덕목으로 이해되면 큰일납니다.

 예수님은 희생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길로 가셨습니다. 그 순종이 희생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희생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 사도행전 5장에서 제자들이 고백하는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이해는 그들이 능욕 받는 이로 인도함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순종하는 길로 이해하고,능욕,오해,억울함 같은 것들은 문제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 믿고 나서 사실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과 영광을 영광을 포기하고 내가 사는 날 동안 내 인생과 내가 사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소원하는데, 하나님은 아무 답이 없으십니다, 왜 답이 없을까요?

 예수님은 세상이 자기의 죄와 권력으로 예수를 죽이는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 들어가 죽으셨습니다. 억울한자리,능욕의자리,오해받는자리입니다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증거가 부활입니다. 

 그 부활을 만들어내는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그들은 능욕 받는 일이 이제 겁이 안 나는 것입니다. 세상은 끝까지 예수가 누군지를 몰랐고 우리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것을 받아드렸다는 것입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붙드심

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에서 예수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냥 죽어버리십시오, 병신이 되십시오. 각오 같은 것은 하지 마십시오. 각오는 꼭 각오한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 순교란 장렬하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병신이 돼서 죽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고문도 당하고 죽는데 왜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느냐?’ 그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죽어나가는 것입니다.

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그가 믿는 하나님이 없는 것같이, 저가 스스로 속아서 저 자리에 온 것같이 그렇게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가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명예요 기적이라는 것을 초대교회가 알았고, 그 유산 속에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인가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 우리는 모든 기도에 하나님이 한번도 답을 안 주셨는데도, 하나님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 우리가 선택이기 이전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신비한 하나님의 붙잡으심으로 우리가 여기에 붙들려 와 있습니다.

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붙잡아 낸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광스럽다거나 자랑스럽지 못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게 붙잡혀 와 있습니다.

 고후 4:7~1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 우리는 살기 위하여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존재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그 위협 앞에서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그것으로 내가한다. 그것으로 내가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행전 5장의 선언입니다.

 제자들은 주의 이름을 인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면서 물러 나옵니다.

 ‘과연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맞는가? 내 인생이 쓸모가 있긴 한 건가? 이게 뭔가? 여기에 붙잡혀 있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넘겨진 기독교는 나라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무슨 훌륭한 사람들이 가르친 것도 아니고 죽어 넘어간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된 것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신자의 자기 정체성과 우리의 인생과 현실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입니다. 이 승리를 하십시오.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 우리가 처한 자리는 하나님이 정한, 붙드시고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에게서 부활의 승리를 만드신 그 능력으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실 것이요,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결국 꿇게 하실 것입니다. 그 힘 있는 신앙의 승리가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을 아는 감사로 사도들의 고백에 동참하는 오늘 우리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구제가 복음을 대신하지 않는다(행6:1-7) 

일곱집사의 임명(6:1~15)


 일곱집사를 뽑아 구제하는 일 등을 그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직접 말씀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선언

구제의 오용

 구제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이 은혜에 속한 것임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구체적인 형식입니다. 그럼에도 구제는 그것 자체가 복음을 대신할 수 있는 대표적 형식은 아닙니다.

구제는 하나의 표적

 구제를 하면 그것이 하나의 표적이라는 것을 서로 알아야 합니다. 행하는 자와 보는 자가 ‘저들은 누구기에 저렇게 하는가’하고 따라 들어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행하므로써 우리의 책임을 여기에 다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요 말씀을 잘 해서 모두 납득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았듯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길에 오셨습니다 

 마찬가지로 교회란 결국 예수님의 뒤를 따라 죽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역사와 운명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싸움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책임을 다른 것으로 떠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원으로 책임지기

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같이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는 겁니까? 그 책임의 중심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한사람이 가지는 신앙고백과 신앙 행위가 교회라는 공동체로 모이면 관계성이라는 폭을 가지게 되고 차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가지는 진정한 내용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참여하십시요

 우리가 맡은 일과 우리가 하는 고백의 진정한 내용의 자리에 들어오십시오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는 이름이 갖는 본질에 
직면하십시오

                                  

 

말씀을 살아내다



 말씀을 맡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왜 구제와 함께 등장해서 성경이 이본문을 남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씀 사역은 인생 전체

 말씀을 맡는다는 것을 사도행전 6장에서의 구제와 비교해보면 이렇습니다. 말씀을 맡는다는 것은 한 인간의 전체, 존재의 전체와 인생을 신앙으로 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구제는 다만 하나의 선행입니다. 구제는 내 호주머니에 있던 것을 하나 꺼내주는 정도고, 말씀을 맡는다는 것은 나를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와 내 인생을 내혼아야 합니다.

 우리 모두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기도하는 것으로, 짬을 내서 봉사하고, 짬을 내서 전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가 삶일 수 없고, 성경 보는 것이 삶은 아닙니다.

 삶이라는 것은 내가 시간을 구별하여 어떤 임무에 나를 잠시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자가 가진 어떤 숙제들입니다. 누구의 자식이 되고, 누구의 부모가 되고, 어느 나라에 태어나고, 어떤 상황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내 지위, 내 위치, 내 책임, 네게 주어진 어떤 도전앞에 서게 됩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의 약속과 당신의 목적과 원하시는 내용을 시간과 공간과 육체와 인생속에 담아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말씀을 맡는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동일한 환경과 조건속에 살면서, 세상과는 구별되는 삶의 기준과 방법과 가치와 선택을 담아 내야 합니다. 그것을 담아낸다고 해서 그 일들이 해결된다든가 개선된다든가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를 안 믿었을 때는 자기 힘으로 해결해야 했던 것을 예수 믿어서는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않고 예수께 기도해서 해결한다고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싸움입니다

 세상 사람들이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기는 싸움밖에 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면, 우리는 질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로서 짐을 집니다.

 우리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기도와 신앙에서의 응답은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다. ‘어떻게 되겠지’.막연한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신앙의 깊이와 크기와 상관없이 모든 신자의 근본적이 어떤 근거이자 힘입니다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납득시키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아무런 가진 것도, 보장된 것도 없지만 고린도 교회 앞에 섰다는 이야기입니다.

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과 우리의 인생에 들어오신 것같이, 모든 권세와 영광과 힘을 놓아 두고 한 인생으로 들어오신 것같이 그렇게 신자들이 세상 속에 보냄을 받습니다. 

 하나님이 아무것도 주시지 않은 채로, 그래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가진 것도, 자랑할 것도, 증거할 것도 없는 모습으로 세상 속에 이렇게 버려지듯이 보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

 빌립에게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0-11)

 ‘행하는 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에 기간에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고 가난한 자를 다 부자 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환자를 다고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하십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일을 다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십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것이요” (요 14:12)

 우리에게 그 길을 걸어오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다 죽어나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 우리가 충성과 영광과 가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보내진 자리를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지지고 볶는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사십시오. 자기 자리를 지켜 자기 인생을,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인생을 사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 예수를 믿는다는 말 속에 감추어진 이 하나님의 일하심,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라는 이름이 가지는 성육신의 고난과 희생과 순종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 우리가 휼륭해지고 우리가 능력이 생겨서 하나님을 도우려고 하지 마시고 그의 일하심과 부르심과 신비한 십자가의 비밀에 순종하십시오

쩔쩔매며 걷는 인생

 히브리서 5장에 예수라는 이름이 가지는 구체적인 인생의 고통,고난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

 말씀이란 그것을 삶으로 담아내는 것입니다. 삶이란 함께 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외면할 수 없는 실존들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오신 것같이 보냄을 받는 신자의 임무입니다.

 예수께서 실제 인생을 사셨다는 것 구름 위로 날아다니시지 않고, 인생 속에 들어오시자 이 고난을 겪으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를 일삼을 수 없다. 우리는 말씀에 전념하리라’ 그것은 어떤 학식이나 지위나 직책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 거기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예수의 이름의 영광이 있고 성도들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십시오 그것을 지켜내는 교회 되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을 사십시오 약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사십시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사도행전 7장:49~53)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7:1~60,8:1~4)

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의 설교

 7장2절에서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하여 설교를 시작하고 마지막 60절에 돌에 맞으며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죽습니다. 적대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심판을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설교의 공통적으로 하는 지적은 ‘너희가 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지 않고 반대하고 거부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통적인 지적이 나오는 까닭은 ‘지금 너희가 예수를 죽인 것과 나를 반대하는 것도 동일선상에서 반복되는 고집이다’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희가 오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7장9절 요셉을 시기하며 팔아먹은 일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 거기에서 이스라엘을 만드셨다. 27절 이스라엘은 모세를 반대하고,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절했다.47절~50절에 너희들이 결국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겨서 나라가 망했다

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거나 우리가 이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거절로도 일하시는 하나님

 스데반의 설교에서 요셉은 형들이 시기하여 팔아먹은 동생이지만 시편105편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보낸 하나님의 뜻의 실천입니다 이둘은 같이 갑니다. 우리의 순종과 충성과 헌신으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반대와 몰이해와 거부,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일을 행하십니다.

죽음을 통과해야 가는 길

 세상을 항복시키려고 들지 마십시오. 세상을 이해시키려 들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책임을 쉽게 회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받은 세가지 시험중에 하나는 사탄이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온 천하를 보여주며 말하기를 ‘내게 절하면 천하를 네게 주겠노라’ 그럽니다. 예수님의 답은 “사탄아 물러가라. 다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복종하라”였습니다. 사탄을 꺾고 심판하고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권세의 싸움을 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백셩을 불러내러 왔다

 사탄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의, 이 시대에서의 그의 권세, 반대와 핍박과 유혹과 시험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의 생애를 살아간 것이 결국 십자가 죽음입니다.

 그의 자녀가 된 것을 인하여 세상의 위협을 극복하고 타협을 거절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갑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습니다

 우리도 무지와 반역 속에 있었을 때, 예수님이 찾아와 기꺼이 우리 손에 죽으신 것처럼 내가 보냄을 받은 시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그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 속에서 우리를 죽여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내가 존재하고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