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부 이방전도
도망간 자리에서도 일하신다 사도행전 8:1~13 사마리아선교 (8:5~13)
빌립의 사역이 스데반의 사역과 중요한 대조를 가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담대함,성령과 지혜의 충만,백성들에게 받는 칭찬 그리고 결국 순교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미화되어서 신앙의 표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빌립을 소개받으셔야 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빌립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램 교회에 일어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사람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8:1)
사마리아로 도망갔다는 것은 빌립이 어지간히 겁을 먹고 도망갔다는 뜻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도망간 자리에서 두려워하고 비겁한 빌립과도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스데반 같아야만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라 빌립 같아도 쓰신다는 의미입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이는 네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어 그것이 나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벧엘과 얍복
벧엘 사건은 얍복 나루 사건보다 이십 년이나 앞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벧엘에서의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신앙의 길을 외면하고 자신의 인생을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기로 하여 이미 두 가지 기만을 행하고 이제 도망가는 중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찾을 마음은 전혀 없는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얍복 나루에서의 씨름에서 그를 축복하신 하나님, 야곱이 울며 간구하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면, 그 일이 있기 전에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하고 야곱에게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이 간 자리,빌립의 선택,빌립의 실력은 야곱과 방불한데 거기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스데반이 아닙니다. 우리는 빌립입니다. 우리는 야곱같이 우리의 연약함과 비겁함에 늘 휘둘리는 자이지만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못난 선택, 못난 현실, 실패 같은 것들이 우리를 흔들 수 없는 자라고 사도행전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데반으로 부르실 것이요 빌립으로도 부르실 것입니다 우리가 도망간 어느 곳엔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약속을 벧엘에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이루신 실존입니다. 찾아와 야곱이 걸어 망친 모든 실패와 배신과 좌절과 그 기만과 절망, 눈물과 탄식의 자리를 따라 들어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이미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우리를 만나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근거로 해서 통곡하고 낙심하는데, 그 전에 하나님이 먼저 만나셨습니다.
이스라엘,야곱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겨루어 끝까지 고집을 부렸으나 승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야곱의 반역과 거부를 받고도 예수님을 보내셔서 승리로 만든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서, 스스로 죽음으로 몰고 있는 인류를 위하여 그 죽음을 감수하심으로 부활 생명에 우리를 동참시키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귀한 줄을 아십시오. 유명해지고 능력이 많은 것은 신앙 세계에서 사람을 채점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일 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언제나 모든 일에 믿음을 가지고 자신할 수 있는 자로 살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특권입니다
죄인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다 사도행전 8:14~25 베드로와 요한의 파송 8:14~25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8:14
구원의 대상은
사도들이 가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했더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확인되었는가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구원과 동일한 구원을 하나님이 사마리아에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불순종하고 죄를 자초한 인류를 회복시키겠다, 그 모두를 내 은혜와 능력으로 다시 내 자녀로 붙들겠다는 약속을 대신할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약속이요. 이것이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의미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2~33)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성취, 이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해졌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은 그 감동과 그 충만함이라는 경험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증언,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약속의 구체적 실현의 증거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일을 확인하러 사도들이 옵니다. 사도란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이 등장하여 안수하여 성령이 임함으로써, 빌립에 의한 전도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마리아의 구원이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효과요 결과라는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
예수로 인한 보편성
예수님으로 인한 보편성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가 공동체를 이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얼마나 훌륭해졌느냐는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갖춰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3~30)
대적들에 대한 저주가 없습니다. ‘저들이 대적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그것은 저들의 몫이고 우리는 우리 몫을 하게 하옵소서. 손을 내밀어 병자를 낫게 하옵시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이 기도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 외에 준 것이 없습니다.’갈라디아서 5: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22~26)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유일한 사명입니다 서로 헛된 영광을 구하여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3)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전부입니다.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모두를 끌어안으시고 용서하시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느라고 성령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것들은 세상에서 값없는 것들입니다
“사마리아도” 다 보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납하고 예수님으로 인한 우리의 존재의 근거와 이유와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교회는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다 사도행전 9:1~22 사울의 회심 9:1~31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구원자시며 인류의 역사를 마감할 심판자십니다. 주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자격과 우리의 선의와 우리의 조건을 앞질러 하나님께서 그 뜻을 정하시며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능력으로 그 일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기독교 복음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 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이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그 아들을 내어주시는 종교입니다
바울의 회심장면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 사건의 객관성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그 철저하심, 그 완벽하심, 그 신적 의도와 성실함과 관철하시는 의지가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그 뒤에 오고 오는 세대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는 모든 사람은 바로 여기 증명된 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성실하심과 구원에 의해 결실되었다고 우리를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납득이 안 가서, 이해가 안 가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끌려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자발성과 넘치는 감격 속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불안한 마음에 붙들려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다메석 도상에서 사울을 마중 나와 그를 꺾으신 하나님이 매주,매일,매순간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예수
한 사람 아담이 실패한 것이 그 후손들에게 미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었다면, 한 사람 예수님이 그 공적을 그 후손에게 적용하는 것은 더 큰 하나님의 법칙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궁극적인 승리를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두가지 오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바울을 만나신 것같이, 아나니아의 기도에 찾아오신 것처럼 그렇게 일하심을 우리가 다 기억하고 우리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귀중한 존재인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요 인생인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소한 자리, 감추어진 인생이 얼마나 극적인 자리인 줄 기억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약함도 감싸신다 사도행전 9:23~31
변화된 사울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합니다. 사울은 밤중에 광주리를 타고 성을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는 사도들이 안 만나줍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주선으로 그가 회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제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그를 다소로 피난시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일하심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
사도 바울은 복음의 사자가 되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설명하고 증거하기 위한 어떤 수단과 능력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 했다고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더 깊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이해의 범위로 약화되거나 오해되거나 대체될까 봐 두려워하고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된다’ 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납득되지 않는 신앙 현실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자리에 있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
예수님은 기적으로 우리를 압도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를 감동시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가는 그 길을 내가 원하고 내가 정한 것이다. 너와 함께하고 있다 걱정마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납득이 안됩니다
‘그리하여’에 담긴 신비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9:31)
앞에서는 전혀 기미가 안 보였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이게 뭔가?’ 어떤 때는 믿은 것이 잘한 것 같기도 하고 감동도 있다가, 또 어떤 때는 전혀 아니고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이 구별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 온 유대와 갈리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아멘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우리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도 주께서 그 일로 일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자랑,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안에 있는 축복, 그것이 우리의 인생인 줄 아시는 자랑과 감사가 넘치는 인생 사시기를 권합니다.
사랑 받는 자녀로 삼으신다 사도행전 10:34~48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 10:1~16
고넬료를 방문한 베드로 10:17~33 베드로의 설교 10:34~48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을 잘 설명하는 장입니다
원인은 하나님께
이방에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저들의 자격, 저들의 시작,저들의 소원,저들의 어떤 노력에 따른 결과들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자격없고, 조건이 없으나 그들에게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원인이, 그 동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이 이야기는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하면, 예수님 당신이 우리를 친구로 대접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예수님의 가치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그 사랑에 있답니다
우리는 구원의 대상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그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 친구가 나를 얼마나 믿는지 알고 감격하는 것, 그것이 구원이랍니다.그것이 얼마나 광장한 것인지를 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신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우리랍니다
하나님은 넉넉하시다 사도행전 11:1~18 베드로의 변론 11:1~18
다른 조건은 없다
고넬료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범위가 유대인에게 제한되지 않고 모든 이방인에게, 말하자면 모든 인류에게 허락되었다는 증거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물세례를 주는 것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공식적인 고백이고, 하나님의 백성 된 가족이 되었다는 허락입니다.
성령강림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전성에 대한 증표입니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다 더 이상 다른 조건이 필요 없다는 하나님의 증표입니다.
교회는 열린 곳
교회가 교회로서 가지는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이 필요한 자라는 자기실체에 대한 이해와 고백입니다
‘교회가 왜 그러냐’에 대한 다른 문제에 깊은 성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것을 납득시켜서 교회를 유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해할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니 쓸모 있고 멋있음으로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열려 있음 ‘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믿노라. 그래서 내가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백하노라’ 하는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 책임을 어떻게 집니까? 공동체로 모여야 합니다. 각 개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 교회를 존속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입니다
연약함에 굴하지 않는다
교회는, 우리가 혼자 버티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으로 부른 존재입니다. 그 예수가 기다리고 계시는 시간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책임과 최우선 과제가 공동체로 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공동체는 늘 자발성과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서 있다는 것을 그 공동체의 핵심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설득하거나 설명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발언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발언하시는 모임.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뜻을 합쳐서 교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상징화하고 예식화한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있는 이유가 예수님이 죄인을 위하여 오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강림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실 뿐 아니라 창조한 세계와 존재와 운명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일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현실, 우리가 겪는 도전, 우리가 확인하는 우리의 연약함, 세상의 무서움, 그런 것들을 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그 속에서 나를 승리케 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형편을 아신다. 우리의 실수를 아신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일어나라’ 이것 이 말씀입니다
자기 일을 하며 기다린다 사도행전 11:19~26 안디옥 교회 11:19~30
본문은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안티오쿠스 이름이 붙은 지역, 로마가 통치하며 그리스의 문화와 정신을 그대로 승계, 안디옥은 로마인 헬라인,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9절,20절에서 스데반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헬라인에게도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그래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고 바나바가 진정한 복음의 열매들을 보고 큰 기쁨으로 저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다소에 가서 바울을 찾아 데리고 와서 둘이서 일 년 동안 가르쳤더니 사람들이 비로소 저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반세속성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당연히 헬라인 같지도 않고 유대인 같지도 않고 로마인 같지도 않다는 말입니다. 독특한 정체성을 가진다는 다는 것입니다. 독특한 정체성은 성경전체가 가르치듯이 반세속성입니다
세속성이란 그것 자체가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 예를들면 윤리,도덕,정의,평화,진리,양심 같은 것들로도 하나님 알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세속성입니다.
기독교가 반세속적이라는 것은 어떤 가치나 어떤 덕목이라도 그것이 예수님으로 묶여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를 부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빼놓고 진리와 정의와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건거를 빼놓고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또 자신의 사랑을 예수로 구체화하는 것을 빼놓고 사랑을 이야기해서 사랑이 매우 모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불러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치면서 로마서 12장에 사랑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롬12:1)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느 고백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보냈는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정말 산 제물로 왔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자리에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 손에 죽임을 당하시는 자리까지 자신을 내어줍니다.
산 제물로 드리려면 어떻게 합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고 자비를 베풀었다는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조건과 그런 선을 넘었는가 하면 세계사 속에 있는 어떤사건도 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다는 말로 너무 쉽게, 안도하고 내가 할 것은 다 했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는 그리스도인이라 말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다른 정체성
로마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봅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이해보다 크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희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너희가 걱정하고 의심하는 부분을 하나님이 쥐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커나가고 교회가 현실의 도전 앞에 그리고 주께서 주신 책임을 지고 서 있습니다.거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와 그 반응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고 인생을 산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배우는 것은 교회가 완전하지 안다는 것입니다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로 시작된 교회가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인류와 역사가 알게 되는 최종적 승리까지 유보된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예수님이 걸었던 죽음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교회의 현재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십시오.정치가 무엇이며,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것인가 등 신자들의 중요한 문제이긴하나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체하려고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믿는 데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구경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거기에 참여하셔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에 들어오십시오. 번듯한 일 말고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심판하는 자가 아니다
세상과 교회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가 문화를 다룰 때 획인했듯이 세상은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데 쓰고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없게 만들고, 우리는 어떤것으로도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데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 현실이 평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불편한 길을, 의심이 가는 길을 가면서 나를 괴롭게 하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우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성실하심을 믿고 순종함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신 긴 역사를 성경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심,궁국적 승리하심, 그의 백성에게 복주심, 그러니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하사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고백이 가지는 그 사실을 우리의 생애에 누리십시오
어떤 조건과 환경도 감수한다 사도행전 12:1~5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탈옥12:1~25
사도행전12장은 야고보를 죽인사건, 베드로가 붙들렸다가 천사가 구해낸 사건, 헤롯이 가이사랴로 가서 연설하고 큰 호응을 얻었지만 벌레 먹어 죽는사건, 이런 이야기 중에 결론적으로 24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12:24)
무대장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로마 제국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리고 그 복음을 증거하는 일의 무대장치로 생각하고 있지, 필수불가결의 어떤 조건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명분과 미명 아래 또는 어떤 공동의 분노 같은 것으로 묶어서 자기 주장을 하고, 세력을 넗히고 그래서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적으로 늘 비극의 역사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오해
교회는 국가가 권력을 쥐듯이 힘이 되어 상대방을 압제하여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쳐준 울타리속에서 사회적 기능을 하라고 하십니다. 권력을 가지려고 하지말고 동등한 조건, 환경과 위치에서 사회를 향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지금 써먹는 신앙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 사회에, 오직 이기심과 경쟁밖에 없는, 어떤 정의도 어떤 평화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인류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들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 희생, 양보, 얼울함을 지라는 것입니다
고후 6:1~10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자요 … 가난한 자 같은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너희가 가진것중에 세상권력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진리와 믿음과 소망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하나님은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개선시켜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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