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ading Club/Stanley Hauerwas

덕과 성품 (인내 Patience)

Four Seasons Daddy 2023. 5. 11. 21:49

인내 Patience

 

l  나는 인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심되는 덕에 속한다고 생각한단다.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인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 사실, 그들에게 인내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아. 물론 그들도 용기나 끈기의 한 측면으로서 인내의 중요성 정도는 파악했을 수도 있지.

 

l  그러나 덕에 이름이 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단다. 한 사회는 스스로에 대해 들려주는 기본적 이야기에 의거해서 덕에 이름을 붙이거든 덕은 사회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 뒤에 밝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인내를 발견한 일은 우연이 아닌 듯해.

 

l  나에게는 인내의 덕만큼 중요한 덕이 없지만, 네가 앞으로 만날 그 누구 못지않게 나는 조급한 사람이란다. 나의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는 확실치 않다만, 분노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의 연료 같아. 나는 내 분노가 내가 아주 열정적인 사람,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열정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l  내가 세상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란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는 자리를 피곤해한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할 만해.

 

l  대체로 분노는 평판이 안 좋고, 사실 나는 부적절하게 화를 낼 때도 있어. 하지만 나의 조급함이 분노와 관련이 있다면, 이 생각은 분명 내가 앞서 보낸 편지들에서 암시했던 여러 덕을 이해할 실마리를 제공해 준단다.

 

l  많은 덕은 열정의 습관화를 필요로 하지. 덕의 역할은 열정을 통제하는 데 있기 보다는 우리의 욕구가 선을 행할 힘의 원천이 되도록 열정을 다듬는 데 있어. 그러니 분노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l  사실 정당하게 화를 낼 때도 많아. 하지만 우리가 표현하는 분노의 방향이 올바르려면 인내의 습관으로 다듬어질 필요가 있어.

 

l  나는 지금보다 더 인내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고도 남았을 만한 습관으로 다듬어지는 행운을 누렸단다. 어릴 때부터 조적공 일을 배웠거든, 벽돌 쌓기를 배우는 데는, 적어도 벽돌을 잘 쌓는 법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단다.

 

l  벽돌 쌓기를 배우는 일은 인내를 익히는 한 가지 방법일뿐이란다. 너는 읽기를 배우고 놀이를 하고 수많은 다른 활동을 하면서 인내를 배우게 될 거야. 인내는 시간의 습관이야.

 

l  습관에 몸을 입히는 건 시간이기 때문이지. 습관이 제2의 천성이 될 수도 있지만, 습관은 우리의 사람됨을 결정하는 근본 요소임을 기억해야 해. 우리 몸은 습관으로 빚어지기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잘 빚어져야만 한단다.

 

l  내가 조급하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데 인내보다 중요한 덕은 없다고 확신해. 이 확신을 갖는 일이 나에겐 쉽지 않았어. 우리의 삶을 사로잡은 불의 앞에서 인내는 기껏해야 자포자기하는 선택처럼 보였거든.

 

l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비폭력적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분쟁 해결의 수단으로서의 폭력 사용을 거부한 사람들이 세상을 견디기 위해 인내의 덕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단다.

 

l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표현한단다.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비폭력적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이유는 비폭력이 전쟁을 없애 줄 전략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고.

 

l  다만, 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우리는 비폭력 말고 다른 존재 방식을 상상할 수가 없다고.

 

l  기독교적 비폭력 때문에 어쩌면 더 폭력적인 세상이 될 수도 있어. 세상은 때때로 허울뿐인 질서를 가리켜 평화라고 부르면서 그 실체가 폭로되기를 원하지 않거든. 다시 말해, 세상은 질서 유지의 방법으로 종종 폭력을 정당화한단다. 그러나 허울뿐인 질서는 곧 위장된 폭력일 뿐이야.

 

l  그러므로 세상이 휘두르는 폭력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비폭력이라면, 세상이 이 대안에 폭력적으로 반응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지. 하지만 기독교적 비폭력이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의 가능성을 낮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전쟁이 없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야. 전쟁과 폭력이 쉽사리 타도될거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뿐이지

 

l  여러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런 태도를 무책임하다고 여긴단다. 비폭력에 헌신한다는 일은 악의 공범이 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비폭력은 복음의 핵심에 해당한단다.

 

l  하나님은 진압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의 반역을 물리치기를 거부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것을 보여 주신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지.

 

l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은 우리의 폭력을 폭력적 방식으로 중단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우리의 폭력을 압도했어

 

l  인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실증된 하나님의 관용을 가리키는 단어야.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처럼 되어야 해. 요한계시록 139-1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단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l  인내없는 사랑은 감상벽이 되고, 감상벽은 사랑과 달리 모든 덕을 조화롭게 묶을 수가 없거든, 사랑에 인내가 따르는 이유는 우리 삶이 다른 이들과 하나님에게 묶여 있음을 사랑이 말해 주기 때문이란다.

 

l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교회에서 성장할 테고, 또한 교회 구성원들을 보며 답답해할 거라는 점이란다. 너는 내가 그랬듯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화가 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해. , 용서하고 용서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야.

 

l  공동체가 교회를 이루는 데는 시간이 걸리거든. 인내로 이루어지는 시간이지.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너도 답답할 거야.

 

l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인내할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시간을 주셨음을 기억하려무나

 

l  우리가 인내할 수 있게 되는 통로는 다른 이들의 인내하는 사랑뿐이야. 그런 사랑이 지금 너를 둘러싸고 있어서 네가 인내를 습득할 수 있게 만들고 있어

 

l  우리는 몸을 입은 피조물이고 인내하도록 창조되었어. 나이가 들어 가면서 너는 너보다 큰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하는 많은 일을 하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그들이 너무나 손쉽게 하는 일을 네가 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겠지.

 

l  그들이 가진 능력을 갖추려면 그 일에 필요한 기술과 습관을 연습해서 익혀야해. 연습은 인내의 또 다른 이름이란다.

 

나는 어린이가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게 하시고자 하나님이 보내시는 선물임을 안단다. 우리가 서로에게 인내하는 법을 배울 날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