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ading Club/Stanley Hauerwas

덕과 성품 (절제 Temperance)

Four Seasons Daddy 2023. 5. 15. 12:06

절제 Temperance

 

l  너는 겨우 열두살이잖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너에게 절제의 덕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삶의 모든 단계에서 여러 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단다.

 

l  물론 나이에 따라 덕이 다르게 보일 수 있기는 해. 서른 살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는 절제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가 분명 다르거든.

 

l  앞으로 네가 듣게 될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는 너는 무엇을 원하니?’일 거야. 이 사실을 너도 곧 깨닫겠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생각은 틀린 경우가 아주 많아.

 

l  우리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으로 매일 이어지지.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우리 삶이 그렇게 결정되어 버리면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자문하지 않게 될 수 있어. 여기서 절제의 덕이 의미심장해 진단다.

 

l  절제는 우리의 욕망을 형성하는 덕이기 때문이야.

 

l  절제의 덕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욕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 사실을 놓치기가 쉽단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인정하기가 어렵거든. 그것은 우리와 너무 밀착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행동의 진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해.

 

l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잘 인식하지 못하잖니. 그것은 그 욕망이 한결같고 근본적인 욕망이기 때문이야.

 

l  우리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들이 우리의 생존 욕구를 반영한다는 사실도 잘 알아채지 못하지.

 

l  먹는 것은 기본적인 일 중 하나지만, 종종 우리 삶에서 절제를 발휘해야 할 측면이기도 해. 절제하는 사람은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먹는 데서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단다.

 

l  내가 욕망 형성에서 절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흔히 절제를 욕망의 억압이나 부정과 연관 짓기 때문이야. 특히 일부 유형의 기독교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런 유형이라고 하면 아주 부당하게도 대부분 청교도를 떠올리지.

 

l  모든 즐거움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 청교도적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이유도 여기 있어.

 

l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열정과 욕망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생각하지. 그런 사람들은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 열정이 혼란스러워지면 우리의 삶이 생각보다 빨리 쇠락할 수 있다는 그들의 말은 옳단다.

 

l  그러나 통제 같은 말은 절제의 덕으로 욕망을 형성하라고 말하지 않고 욕망을 억압하라고 말한다는 단점이 있어. 통제와 형성은 아주 다르고,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해야 한단다.

 

l  사실, 열정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어. 이런 생각은 흔히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통제하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거든. 순전한 의지력을 발휘해서 세상을 통제하려는 방식으로는 우리의 욕망을 조절할 수 없어.

 

l  이런 시도의 바탕에는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에 굴복하면 영락없이 믿음이 약해지고 덕의 생명력도 약해진단다.

 

l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도 신실하게-덕스럽게-살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일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 이유지.

 

l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통제 불가능한 존재라는 뜻이고, 이것은 무서운 일이야. 절제의 덕은 우정과 공동체를 향한 욕망을 가능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두려움을 꺾는단다. 그리고 지혜는 서로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위협하는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게 해 주지

 

l  유대교 전통에서는 랍비들이 모든 적법한 쾌락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엄하게 심판하실 거라고 말한다더구나. 물론 무엇이 적법한 쾌락이라고 여기는지가 중요하겠지만, 랍비의 진술은 절제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잘 표현한 듯해.

 

l  절제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어야 할 것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다는 의미야.

 

l  물론, 욕망은 이것 혹은 저것을 원하는 것만이 아니야. 내가 말한 대로, 욕망은 삶 자체의 다른 이름이란다.

 

l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사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들의 목록을 제시한 후에, 행복한 삶은 온전한 삶에 있는 온전한 덕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가 옳다고 봐.

 

l  우리는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 욕망은 덕으로, 특히 절제의 덕으로 훈련을 받아야해. 절제는 올바른 것들을 올바르게 원하는 습관을 익히게 하는 덕이기 때문이지.

 

l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에 대한 많은 기독교적 이론에 영향을 끼쳤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욕망이 채워지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 필요해

 

l  그리스도인은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이 채워지려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채워져야만 하는 이들이거든.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기 원하시지.

 

l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기쁨을 두셔서 우리가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게 만드셨음을 인정하는 거야

 

l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여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야. 절제의 덕은 우리가 기탄없이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게 해 준단다.

 

l  행복해지고 싶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방법은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로 이해하는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심리적으로 또는 말 그대로 죽을 수 있어. 사랑은 우리가 아는 가장 기본적 욕구란다.

 

l  사랑의 요구가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을 거야.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비참해질 수도 있어. 엉뚱한 사람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l  절제의 덕은 기쁨을 빼앗는다고 자주 오해를 받지만, 사실 절제의 덕은 올바른 것들을 올바르게 사랑하도록 우리를 빚어 준단다.

 

l  좋은 삶을 위해서는 절제가 너무나 중요해. 절제는 늘 사추덕의 하나로 뽑혔지. 나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가 인내 같은 덕보다 더 기본적인 덕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단다.

 

l  하지만 잘 사는 삶을 위한 절제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구나.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절제는 현명한 결정과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갖추는 데 중대한 덕이지.

 

l  절제는 실제적 이유들 때문에 필요. 잘못된 욕망이나 제멋대로인 열정의 마법에 결려 있으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거든. 절제의 습관을 익히려면 우리 삶은 이성의 지배를 받아야 한단다. 하지만 이성 자체가 일종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이 사실은 모든 것이 좋은 삶과 이어져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지

 

l  너는 무엇을 원하니?” 너는 이 질문이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잖니. 그래서 우리는 흔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못 규정하고. 그 결과로 비뚤어진 삶을 맞이해.

 

l  절제의 덕은 우리의 욕구가 올바로 빚어질 때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발견할 시간을 준단다. 내가 너에게 권했던 많은 덕의 경우처럼, 매우 흥미로운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올바른 것들을 올바르게 원하는 능력에 필요한 인내를 자기도 모르게 습득하게 되고 절제가 습관이 될 거야.

 

l  이 시점에서 절제에 주목하길 바란 이유는 젊은 사람들이 욕망의 바다에 떠 있다고 생각해서야. 그들은 너무 많은 물건을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해. 하지만 종종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으로 욕망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단지 친구의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단다.

 

l  너는 곧 너는 무엇을 원하니?” 라는 질문에 직면할 거란다. 그보다 더 부담스러운 질문이 있어. 너는 네 삶에서 무엇을 얻기 바라니?” 그런데 이 질문들에 답하는 일은, 준비된 이후에 해도 된다고 절제는 말하지.

 

l  하지만 이 질문들은 나도 받는 질문이자 내가 자문해야 할 질문이야. 늙어 가는 나는 무엇을 원할까? 좋든 싫든-대체로는 싫단다- 나는 늙어 가고 있어. 내게 이 말은 십년 전에 갖고 있던 에너지나 힘이 없다는 뜻이야. 내 몸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픈 데가 많단다. 이번에도 불평하는 건 아니야.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지

 

l  그러면 늙어 가는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원할까? 오래오래 우리 집 마당의 풀을 깎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이 정도 야망이면 어떠니? 잔디 깎기는 육체에 만족을 주는 일이야.

 

l  습관은 신체적인 것이고 욕망도 그렇지. 잔디깎기는 내가 계속하고 싶은 여러 활동을 포함하고 있지만 내가 가장 바라는 건 그런 활동들이 아니야.

 

l  나는 더없이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남편, 아버지, 교사, 친구로서 유용한 할 일들을 받았지. 하지만 나는 계속 유용한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고 바란단다.  힘이 닿는 한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돌보시는 일에 모종의 역할을 감당하고 싶거든. 나 스스로를 절제의  덕의 귀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l  끝이 점점 가까워지는 지금에 와서는 내가 바라는 바가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한 사례가 되면 좋겠구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열정과 갈망이 가득한 삶을 갖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