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Stanley hauerwas (short - cut) - 10장 파송

Four Seasons Daddy 2023. 5. 23. 15:44

마태복음 10장 파송

 

열두 제자의 파송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소환하셔서 더러운 영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라 불리게 될 시몬에서 시작해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가룟 유다로 끝나는 열두 사도의 이름을 알게 된다.

 

l  비록 사도 개개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당시 성공한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들은 적은 믿음의 사람들이지만,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다.

 

l  우리는 그들 중 몇 사람, 특히 베드로와 유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아주 다른 방식으로 베드로와 유다는 둘 다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다.

 

l  마태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방법은 그 이야기를 안다는 것만으로는 누군가를 신실한 제자로 만드는 데 충분치 않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배반하도록 유혹받게 되는지를 배우고, 나아가 그 수업으로부터 신실한 교회가 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발견해야만 한다.

 

l  따라서 제자들의 평범한 특성은 그들의 과업을 물려받은 - 교회가 스스로를 사도들의 전통에 서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바른 것이다-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신호다.

 

l  사도가 된다는 것은 에수님의 전령이자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하늘 나라천국가 가까이 왔다라고 전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우연이 아니다.

 

l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하고, 귀신을 쫓아내라라고 임무를 주신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우리에게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하라고 요구하신다.

 

l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보아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운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라고 가르치신 것을 수세기에 걸쳐 예증하는 증인들의 반열에 의해서 결정된다.

 

l  기독교는 그것을 구현하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배울 수 있는 철학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곧 진리라는 것이 이론상으로알려질 수 있는 진리였다면, 우리에게 사도들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l  하지만 복음이 알려지는 방식은 다른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되는 한 사람에 의해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로 제자들을 소환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소환된 제자들은, 우리가 그 나라의 전령들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우리를 위한 증인들이 된다.

 

l  제자들은 인상적인impressive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기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명이자 우리의 사명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과 그 나라에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l  열 두 명의 제자들이 있다는 것은 이 새로운 공동체가 이스라엘 백성과 근본적으로 연속선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신다.

 

l  예수님께서는 지금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신다. 열두제자들은 이방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보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만 가도록 임무를 부여 받는다.

 

l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열방들에게 빛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라는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을 받았다.

 

l  우리는 어떤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그 나라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 현존함을 믿는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접붙임을 받는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셔서 그들이 열방들 중에서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신다. 오직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야 제자들은 모든 열방들에게로 보내심을 받을 것이다(28:19)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매우 세부적인 지침을 주신다. 그들은 사역을 위해 어떠한 돈도 받아서는 안 된다. 돈이나 의복을 지참하지 않고 가볍게 여행해야 한다. 그들을 영접하는 마을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어야 한다. 그러나 환대하지 않거나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지체해서는 안 된다.

 

l  우리에게 선포하도록 부여된 복음은, 우리의 증거를 받는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적절한 증인이었는지를 물어야만 함을 요구한다.

 

l  복음은 그것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복음이 아니다. 따라서 거절은 복음이 신실하게 구현되지 않았다는 표시일 수 있다. 증거하는 사람의 특성은 그들이 증거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해야만 한다.

 

l  제자들은 그들의 메시지가 어떻게 예증되어야 하는지와 관련된 엄격한 규칙과 더불어 보내심을 받는다.

 

l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들을 부자로, 권력자로, 편안히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께 받은 권위 외에는 처분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고 명령받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는 데 방해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l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하시고, 아무 근심걱정 없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혹은 어떤 것이든 세상적으로 좋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보다 그들이 약속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더 이상 사망의 권세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나라에 있는 생명이다.

 

l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데서 발산되는 기쁨이 예수님의 소환을 아직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백성은 그러한 기쁨을 위해서 창조된다.

 

l  기독교의 복음전파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간에 제자들의 사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주신 가르침은 참되다. 교회는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규모가 커지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교회는 사도적이 되라고 부름을 받는다.

 

l  숫자나 신분이 아니라 신실함이 교회의 증거를 형성하는 특징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가볍게 여행할 수 있도록 교회의 짐을 덜어주고 계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l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움직여야만 한다. 만일 그들이 거절당하면,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음 집이나 마을로 옮겨야 한다. 그 나라는 거절을 통해서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거절과 박해에 대비해 그분의 사도들을 준비시키신다. 그들은 이리들 한 가운데로 보냄을 받은 양들이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어리석은 자로 일컬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l  그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진하다. 지혜를 갖는다는 것은 때론 순진함의 상실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도들이 구현할 순진함은, 가난한 자, 온유한 자, 애통하는 자를 칭찬하는 산상수훈처럼,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l  오히려 순진함은 성령님의 무기들로 세상적인 권세들에 도전하게 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에게 있는 불가피한 연약함이다.

 

l  교회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더 많이 증거하기 위해서 강제를 동원하는 것은 그것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분명히 나중에 자신이 당할 대우를 예상하시면서- 회당의 지도자들이 그들을 매질하기 위해서 통치권력 앞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그들은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참된 말이 성령님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할 말을 준비하지 말라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요구다. 하지만 총독들과 왕들의 폭력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그런 권력들에 직면하도록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예수님의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l  총독들과 왕들은 폭력적으로 자신들을 전복시키려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오히려 그들이 직면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들을 두려워하기를 거부하는 한 백성의 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된 말을 가능하게 한다.

 

l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말은 그 나라에 대한 증거가 요구하는 바로 그 연약함에 의해 가능해진다. 어떠한 힘도 압제를 대항함에 있어 참된 말보다 더 강력하지 못하다.

 

l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그 나라, 제자들이 전하도록 임무를 받은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나라는 죽음에 의해 창조된 모든 나라들에 대해 대안이 되는 나라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미가76-7절이 예견하는 것처럼,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가 자녀들을 팔아 넘기고, 자녀 들이 그들의 부모들을 멸하기를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렇게 죽음의 왕국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들은 에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반응을 예상하라고 가르치신다, 죽음의 왕국, 죽음을 두려워함으로써 합법화된 폭력으로 통치하는 왕국은 죽음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오신 이 사람에 의해서 도전 받을 것이다.

 

l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는 분열이 명백해지는 첫 장소는 다름 아니라 가정인 것처럼 보인다.

 

l  총독들과 왕들이 사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충성으로 인해 가족들까지 분열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벌어지는 분열은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사명만큼이나 실제적이다.

 

l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검도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죄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하여 혼을 뚫어서 하나님의 눈 앞에 모든 것을 발가벗겨 놓는다고 기록한다(4:12-13)

 

l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권세들의 거짓과 기만을 드러내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게 하는 진리의 무기다. 기독교인들에게 방어무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폭력의 원천이 되는 망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시다. 세상에 의해서 제공되는 수단들을 통해 삶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목숨을 찾고자 한다며,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잃을 준비를 해야만하는 것처럼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자기 희생을 그것 자체로 선한 것으로 권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그분께서만 우리의 생명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신다.

 

l  예수님을 따르는 것,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에서 모면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는 가혹하고 무서운 사랑이지만, 또 한편으로 생명 그 자체를 가능하도록 하시는 분의 사랑에 의해 훈련되는 사랑이기도 하다.

 

l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한 마을에서 핍박을 당하면 다음 마을로 피신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께서 오리라”(10:23)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들에게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 이것이 묵시적인 시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l  인자께서 오셨지만, 그분의 사역과 그분의 생명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그 사이의 시간은 인내하는 한 증인, 한 백성에 의해 구성된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제는 그 나라가 존재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10:22)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견디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드러난다.

 

l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도 영접하는 것이라고 확언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끝맺으신다.

 

l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게 하신 분을 부인하는 것보다 더 깊은 죄는 없다. 제자들과 우리는 예수님께 소환되어 우리가 행해야할 선한 사역을 부여 받는다. 이 사역에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상, 우리의 의로움이 있다.

 

l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행하신 일은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다고 해서 실행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우리의 신실함이 아버지께 중요하다는 것이다.

 

l  구원은 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 나라의 일부, 곧 제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대한 우리 반응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확실히 아무도 우리의 것을 얻기위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

 

l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 상상할 수도 없는 우리의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초청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이다.

 

l  우리는 제자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대한 사명을 이행했는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기를 마친 후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11:1), 즉 그분께서 제자들을 보냈던 곳과 똑 같은 도시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고 듣는다.

 

l  제자들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 과제가 성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서 행하라고 들은 것을 행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대로 행하라고 들은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l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에 신실하는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의 소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