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Matthew(마태복음)

마태복음 Stanley hauerwas (short - cut) - 7장 교회의 방식

Four Seasons Daddy 2023. 5. 19. 17:14

마태복음 7장 교회의 방식

 

판단에 대한 가르침

 

l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신뢰하면서 살기 위해 구성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l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세상을 하나님의 세계로 바라보고 수용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되라고 부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물이 되기를 배우라고 부름 받은 것이다.

 

l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다시 만드는 것보다, 새와 백합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임을 부인하는 삶의 방식을 지속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l  본회퍼에 따르면,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지닌 비범한 성격을 묘사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세상에 대해 가시적인 대안이 되는 것을 수반한다.

 

l  반면 마태복음 6장은 제자들이 부름 받은 단순하면서도 감추어진 삶의 성격을 보여 준다. 이 두 장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제 예수님께 속하기 때문에, 그 전에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분리되기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l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세상 사이의 경계는 아주 명백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계는 서로 스며들 수 있다. 마태복음 7장은 이렇게 서로 스며들 수 있는 가능성이 어떻게 협상되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l  제자들은 무리들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구별되었다는 것이 그들에게 특별한 권리가 있다는 뜻인가? 제자들은 특별한 권세들, 기준들, 또는 재능들을 지님으로써 그런 선물들을 받지 못한 사람들 위에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인가?

 

l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제자들의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분리하고 비난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오해가 제자도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만 했다.

 

l  제자들은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판단한다면,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판단 아래 놓일 것이다. 그들 자신이 남을 판단하는 검에 의하여 망할 것이다.

 

l  불의한 사람들에게서 의로운 사람들을 나누듯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들을 나누는 간격은 급기야 예수님께서 그들을 나누는 것이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을 연결시키는 결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의로움은 오직 그 결속에만 의존하고 결코 그것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l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제자들이 그들에게 좋은 대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들을 제자로 만드시는 것은 그들의 삶을 위한 새로운 기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곧 중보자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 자신이다.

 

l  제자들이 판단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필요한 모든 판단이 이미 내려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그들 스스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배반하는 것이다.

 

l  그러므로 악을 인식했을 때 취해야 할 적절한 자세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문자적으로 “(우리)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도록 훈련 받지 않는다면, 선명하게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눈은 그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l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시야vision-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들을 거명할 수 있게 해주는 용서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시야 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이유다.

 

l  내가 당신을 즐거워해야만 하는 힘을 얻는 수단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수단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그들과 같이 사람이신 분(딤전2:5), 그리고 또한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영원토록 복 받으시는 분(9:15)받아들이고 나서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l  그분께서는 우리의 육체와 연합하신 분이요 내가 너무 약해서 취할 수 없었던 음식이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만큼 충분히 겸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간적인 연약함이 어떤 교훈을 가르치게 되는지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l  아우구스티누스는 판단하는 것이 우리를 장님이 되게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에 대하셔는 본회퍼가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판단할 때 나는 나 자신의 악과 다른 사람에게 임한 은총에 장님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제자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와 죄책에 대해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l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내가 판단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 곧 십자가에서 드러난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 용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나와 같다고 인식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강제하지 못하게 만든다.

 

l  예수님처럼, 우리는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 부름을 부인하도록 허용할 수 있는 인내를 지녀야 한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을 복음에 순응시키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제자들은 인내하고 비폭력적이 되기 위해서 훈련 받아야 한다.

 

l  왜냐하면 복음은 저항을 모르고 존중하지도 않는 정복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연약해서 사람들에게 무시되고 거부되는 고난을 당한다. 말씀에 대해 굳은 마음들과 닫힌 문들이 있다. 말씀은 그것이 맞닥뜨리는 저항을 받아들이고 참아낸다.

 

l  그러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함으로 훈련 받는 것이다. 이런 훈련은 우리 자신과 서로서로 간에 평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진 창조물로 사는 것을 우리의 의지가 거부하려고 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l  제자들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경고나, 그들에게 주어진 것조차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소는 그 나라가 왔음을 전제한다.

 

l  교회와 세상 사이의 차이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자의 차이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차이는 영역이나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반응의 차이다.

 

l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고자 했던 방식대로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이란 단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우리에게 주신 방식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이 시간을 사용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뿐이다.

 

l  제자들이 가진 유일한 이점은 그들이 그들의 죄성을 인식할 수 있고, 그러한 인식하에 그들이 공동체를 통해 용서하는 삶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l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들이 받은 것을 모독하기만 할 뿐인 사람들에게 거룩한 것 또는 위대한 가치가 있는 것을 주지말라고 말씀하신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 시작하신 나라가 거절될 수 있음을 인식하신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

 

l  대신 그 나라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구하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치실 필요가 있었듯이, 마찬가지로 문이 열리도록 구하는 것도 가르치셔야만 했다.

 

l  악한 자들도 그들의 자녀들에게 적합한 선물들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좋은 것들을 주시는 아버지께 오직 그분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선물을 기반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l  우리는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우리는 용서에 의존하고 용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받기 위해 용서를 구하는 것은, 공동체가 받음으로써 살아가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우리를 부르신 삶은 하나님과의 갱신된 연합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절이 그분과의 관계를 결정짓게 하는 것을 거절하셨다.

 

l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에 따라 구하는 것을 훈련 받고 있으며, 그 구함은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방식의 일부가 된다. 희생은 아마도 그런 삶이 수반하는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희생은 그렇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상호관계의 선물로 작동한다.

 

l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그러나 이는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오용하는 세상에 도전하는 급진적인 정치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전형이라는 것은, 제자들은 그들의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확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l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심지어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교사에게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관해 시험 받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대답하신 것에 놀라지 않는다.

 

l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l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황금률의 명제에 내포되어 있는 것, 즉 이웃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하게 하신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전제다.

 

l  율법과 선지자는 이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렬하게 현존하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강렬함을 두려워한다.

 

l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친밀함을 두려워해서 거대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에게 가까이 오셨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 긴 여정을 수행하지 않아도 됨을 발견한다. 오히려 긴 여정은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가혹한 길이다.

 

l  이 여정은 제자도라 부르는 노정에서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쉬울 것이라고, 또는 많은 사람들이 그 길에 함께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여정을 수행하도록 유도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그 문은 좁고 그 길은 험하다. 더군다나 그 여정은 자신들을 동료여행자라고 가장하는 데 능숙한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더욱 힘들게 된다.

 

l  본회퍼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말한다.

 

l  예수님의 진리를 증거하고 고백하지만, 이 진리의 원수, 곧 그분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를 예수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그것은 좁은 길이다. 따르는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만, 비무장한 채 적을 맞닥뜨리고, 해를 가하기보다 불의의 고난을 당하는 것을 택하는 것-그것은 좁은 길이다. 다른 사람들을 약하고 잘못된 존재로 인식하지만, 그들을 결코 판단하지 않는 것,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지만, 돼지 앞에 결코 진주를 던지지 않는 것-그것은 좁은 길이다. 그것은 감내하기 힘든 길이다.

 

l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회퍼는 말한다.

 

l  그렇다 하더라고, 만일 우리가 그 길에 놓여 있는 위험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만일 우리가 길을 잃을 것이 두려워 예수님께로부터 눈을 떼어 바닥만 본다면, 우리는 길을 잃게 될 것이 확실하다.

 

l  우리는 그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 문이요 그 길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을 버리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본회퍼는 우리가 하늘 나라와 세상 사이를 운행하는 넓은 길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수사적으로 묻는다.

 

l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분께서 걸어가셔야만 하는 길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 오리라고 기대하시지 않는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자신을 따라올 사람들 중 몇몇은 거짓으로 따라올 것이라고, 심지어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쉽게 정체가 밝혀지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셨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짓된 사람들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열매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 좋은 열매를 구성하는지 배워야만 함에 틀림없다.

 

l  예수님의 설교는 참된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하는 윤곽을 제공한다. 분별에 대한 예수님의 권고에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믿는 바가 참되다고 믿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중요한 함축이 있다.

 

l  최근에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참되다고 믿는 바를 왜 믿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혹은 이웃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너무나 자주 우리가 믿는 바에 관한 진리를 세우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들은 우리의 믿음의 진리를 우리가 사는 방법에서 분리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민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우리가 결단코 할 수 없는 것이다.

 

l  우리가 믿는 바에 관한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우리의 두려움에 따른 결과다. 게다가 우리가 믿는 바를 우리가 사는 방법과 분리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문화적으로 설립된 기독교에 깊이 뿌리 박은 습관이다.

 

l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은 참되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적인 기독교의 강제적인 성격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은 누구든 성찰을 통해 믿는 것이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열매로 우리가 알려질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럼으로써 기독교인의 믿음의 내용을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에서 분리하려는 모든 시도를 불가능하게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l  기독론과 제자도는 상호적으로 함축되는데, 이는 기독교인의 믿음의 진실함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서 분리되어 추상화 될 수 없음을 수반한다.

 

l  그러므로 그분을 주님께서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분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도 충분치 않고, 그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것도 충분치 않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만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l  이것은 이 시대 안에서 우리에게 인내할 것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 종종 참된 선지자들로부터 거짓 선지자들을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자원 없이 우리를 남겨 두지 않으셨다.

 

l  우리는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긍휼히 여기는 자들, 마음이 청결한자들, 화평하게 하는 자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을 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참되게 사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표식이다.

 

l  더욱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진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공동체는 그들이 믿는 것이 참된 것인지를 계속해서 재확인할 필요도 없다.

 

l  만일 그들이 확신에 차서 기쁘게 살아간다면, 진리가 무엇인지-오직 유일하게 진리이신 분을 증거하는 것- 보여지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리는 증거들 없이 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l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삶들에서 분리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삶을 아버지와 공유하시기 때문에, 오직 그분께서만 진리실 수 있다.

 

l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 외에 진리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것들에 근거해 행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역경들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토대 위에 그들의 삶을 건설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곧 그분의 백성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핍박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실제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은 피할 수 있는 위협에 필연적으로 노출되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제자들은 세상을 향해 다른 대한-불신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수적이라 생각되는 거짓말에 기반한 세상의 폭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l  그런 세상에서 진실된 사람들은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신의 거짓말이 폭로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l  하지만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을 듣는 사람들은 설령 그들의 반응으로 인해서 위협에 노출되더라도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l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고 위로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서로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배운 한 백성의 일부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웅이 되라고 그들을 부르시지 않는다.

 

l  그분께서는 산상설교에 묘사된 삶들-그렇게 살면 하나님과 서로서로를 의존하게 만드는-을 살아감으로써 배우게 되는 제자가 되라고 그들을 부르신다.

 

l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분께서 누구시며,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와 분리될 수 없다. 그분의 삶이 그분의 설교의 주석이고, 그분의 설교는 그분의 삶의 예증이다.

 

l  그분께서는 우리의 존경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 가르치신 것, 곧 그분께서 누구시냐는 것은 오직 우리의 삶만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l  그분께서는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서 가르치신다. 더군다나 이 권위는 그분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기를 요구하시는 데까지 이른다(16:25)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의 목숨을 요구할 권위가 있으시다. 그리고 그것이 산상교훈의 모든 말씀에 깃든 권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