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기도의 실천
자선에 대한 가르침
l 우리의 빛이 다른 사람들 앞에 비추어져야만 한다고(마5:16)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자선이 비밀리에 베풀어져야 한다고(마6:1)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l 제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그들 앞서 가시는 그분을 계속 기대해야하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의 의로움은 자신들로부터 감춰져 있다.”
l 우리가 경건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도록 하라는 예수님의 책망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어떻게 따르는지가 그분의 가시적인 백성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결정적이라는 것도 중요함을 시사한다.
l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즉 그분 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l 본회퍼가 “진실한 사랑의 행위는 항상 나 자신에게 감춰진 행위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옳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우리의 사랑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l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제자도로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에서 비롯되는 압도적인 자기 망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선을 베풀라고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로움을 위해서도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가능해진다.
l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덕을 획득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선물들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으로 이해되는 이유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것만 할 수 있다.
기도와 금식에 대한 가르침
l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에 주목하게 하신다. 기도는 완벽한 활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밀히”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그러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은밀히” 보상해 주실 것이다.
l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알게 해오셨던 한 분께 기도하도록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기도이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기도하기를 배운다. 이러한 기도, 곧 예수님의 기도는 은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지께로 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알려지게 하며,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배우기를 원하신다.
l 만일 우리가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조차 기도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l 왜냐하면 그들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들이 기도하는 신이나 신들에게 감동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하기 원하는 동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기도는 바르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l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도록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를 아시는 한 분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7)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l 따라서 기도에 대한 첫 수업은 아버지라고 호칭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모든 묘사를 훈련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며, 편재하시고, 전지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다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어떤 묘사도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호칭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거나 의미있는 것은 없다.
l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의 의미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의 아들의 희생을 무시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신학은 기도에서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l 비록 우리가 은밀히 기도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과 더불어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결코 혼자 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자의 성령님에 의해서 “아바 아버지”(갈 4:6)라고 부르짖으라고 가르침을 받은 자녀로서 기도하기 때문이다.
l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에 연결되고,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주위에 모인 모든 성도들의 연합communion과 함께 기도한다.
l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서 4장 14-16절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히 4:14-16
l 우리가 예수님께서 배운 이름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모며”는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기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l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소집되고, 성화되고, 구별되고, 임명되고, 거룩하게 된 자들로서 그렇게 한다.
l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곧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앞에서 자기 얼굴을 감추었던 그 하나님(출3:6)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가시화되는 삶을 살라고 위임받는다.
l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통해 그분의 창조물을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토를 적으로부터 되찾으셨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승리하신 영토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는 자들이다.
l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된 분열, 곧 하나님 나라라고 불리는 분열이 계속되기를 기도한다. 그들은 그 나라가 도래하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도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와 죽음의 권세에 의해 지배당하는 이 세상의 나라들이 끝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된 승리의 시작과 끝 사이에 살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 나라가 오기를 기도할 수 있다.
l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우리가 성만찬의 예식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라고 단언하면서 가장 적절하게 기도하는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전투를 위해 요구되는 기도다.
l 나아가 복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께서 뜻하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하실 것이다.
l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도록 교육받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뜻들, 곧 세상의 뜻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다.
l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도를 무찌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실 것이다.
l 그것이 일용할 양식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할 때에만 우리가 일용할 양식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해진다.
l 예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체가 없다면, 우리는 안전과 보장을 확보하기 위해 헛되게 노력하면서, 자원들을 비축하고 저장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당연히 아무런 위험 없이 살려는 우리의 노력은 불의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근심스럽게 만들고, 우리가 결코 충분히 가지지 못하리란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마 6:19-21)
l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마귀가 예수님께 제안했던 빵이라면, 우리는 결코 충분히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신다 (마 11:4) 왜냐하면 그분께서 일용할 양식 그 이상을 구하지 않는 한 백성을 존재케 하셨기 때문이다.
l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백성의 공동체는 또한 우리의 빚debt을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용서해 줄 수 있는 공동체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 기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l 기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간구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간구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빚진 자라는 것을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l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받는 것을 배우는 것은 매우 힘든 수업이다.
l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용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willingness를 요구하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요청한다.
l 용서받고자 하는 태도willingness는 화해가 시작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l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을 배우는 것, 실제로 우리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서를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고, 예수님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새로운 현실, 새로운 백성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l 그러므로 예수님과 더불어 기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 세상의 권력들과 벌이는 그분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의 마지막 청원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의 때에 들지 않고 악한 자로부터 구출되기를 요청하신다.
l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가르치신 후에 또한 어떻게 금식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기도와 금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간구하기를 배우는 데 필수적인 훈련이기 때문이다.
l 금식은 우리가 누구를 섬기는지를 발견하게 해준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황제를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도 듣게 될 것이다 (마 22 : 15-22)
재물에 대한 가르침
l 부자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고 제안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시도해 왔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매우 분명하시다. 재물이 문제다. 자본주의는 재물의 생산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제 시스템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다
l 공중의 새와 백합화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시는 예수님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깨서 제자들을 부르신 삶의 아름다운 단순함을 생각하게 된다.
l 만일 우리가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진실되고 아름다운 것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 주어지는 것이지,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l 산상설교의 내용은 그것을 말씀하신 분에게서 분리되어 추상회될 수 없다. 이제 우리가 소유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유일하게 우리에게서 소유를 몰수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오셨기 때문이다.
l 우리에게 오늘 고생이 족하니 내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권고는 단지 좋은 충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특성을 반영해 주는 지혜다.
l 부족함이 아니라 풍부함이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돌보시는 표식이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살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은, 결코 충분한 것은 없다는 가정에 의해서 구성되는 공포로 가득 찬 세상을 창조할 수밖에 없다.
l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작은 자비의 행동들로 서로를 돌볼 시간이 있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에는 제한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부족함이 아니라 풍부함이 하나님의 나라의 표식이다.
l 그러나 이 풍부함은 그들이 하나님과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백성들의 삶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야 한다. 그런 신뢰는 혼돈스러운 삶에 저항하는 비이성적인 몸집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의 특성에 대한 증거다.
l 따라서 예수님께서 새와 백합화에 주의를 환기시키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주셨다는 것을 즐겁게 인식하면서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우리에게 알도록 하셨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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