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설교
산상설교 팔복
l 예수님을 존경하는 사람들과 에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그분의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산으로 “그에게 나아오는” 데서 드러난다.
l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그분을 따른다. 제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듣는 말씀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l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시내산에 오르게 하셔서 율법을 받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어 산으로 오라고 하시는데, 아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모세와 함께 산에 오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출 19:16-25)
l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산에서 예수님께 참여하려고 용기를 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님, 곧 새로운 모세께서는 제자들에게 둘러 쌓이셨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마치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위해 모세에게 가르침을 받았듯이 가르침을 받는다.
l 마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라는 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리중에 있는 사람들도 가르치셨음을 나타낼 수 있다.
l 그분께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다. 그들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들은 포기renunciation와 결핍want 가운데 살고 있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며, 유혹받는 자들 중에서 가장 유혹받는 자들이고, 굶주린자들 중에서 가장 굶주린 자들이다. 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다.
l 그분께서는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찾아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무리들을 보실 때, 그것은 그분께서 찾으시던 위대한 공동체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제자들은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여기 저기서 경청하는 자들과 믿는 자들을 발견할 것이다.
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무리들 사이에는 끝까지 적대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모든 분노가 제자들 위로 쏟아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절당할 것이다. 십자가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리스도, 제자들, 무리들-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의 고난의 전 역사를 볼 수 있다.
l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는 마태복음의 정황에서 분리되면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산상설교는 가르쳐진 내용들이 그것을 가르치는 분에게서 분리되면 율법이나 도덕이 될 수밖에 없다.
l 아마도 좀 더 정직한 대안적인 읽기는 이 설교가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그런 적용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식만 느끼게’ 하는 데 유용할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l 유대주의는 율법의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라고 제안하면서, 기독교를 유대주의로부터 구별하려고 한다. 개신교가 이런 읽기를 좋아한다.
l 천주교를 향해 기독교 형식을 띤 유대주의, 즉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를 부인하는 율법주의라는 눈길을 보낸다.
l 구속에 대한 충족설Satisfaton teories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주된 설명이 되어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설교가 묘사하는 제자도의 급진적인 특성을 회피하도록 해주었다.
l 이런 식으로 구원을 이해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산상설교가 더 이상 구원을 구성하지 않는 하나의 윤리로 전락하고 만다는 데 있다. 본회퍼는 그렇게 이해된 구원을 ‘값싼 구원’이라고 불렀다.
l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이 설교를 말씀하신 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설교는 시간 안에서 가능해진 새로운 시대의 실재reality다. 따라서 그렇게 설교하신 분에게서 설교를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l 산상설교는 이방인이나, 개혁가, 광신도, 교주로서 현실에 관계하신분이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실재reality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경험하신 분으로, 이전에 이 땅에서 산 어느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실재의 깊이를 공개적으로 밝히신 분의 말씀이다.
l 산상설교는 실재의 주님께서시며, 율법이신 바로 그분의 말씀이다. 산상설교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행동은 어떤 윤리적인 원리에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비롯된다
l 산상설교에서 말씀들은 예수님의 삶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이 산상설교를 해석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l 따라서 산상설교는 개인들에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심으로써 그 징후로 삼으신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산상설교는 영웅적인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한 백성의 헌법이다. 산상설교의 요구는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를 의존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l 그러므로 산상설교는 요구조건의 리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에 의해 그 주위에 모인 백성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그렇게 모이는 것이다.
l 본회퍼에 따르면, 교회가 이렇게 구성되는 것은 교회의 가시성을 요구한다. 소금이되는 것, 세상을 위해 빛이 되는 것은 교회가 가시적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l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가시성invisibility으로 도망가는 것은 부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이기를 원하는 예수 공동체는 무엇이든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일 수 없다.
l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주위의 문화와 자신들이 동일시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비가시적이 되려는 유혹을 받는다.
l 그러한 비가시성을 만든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코스탄틴주의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가이사와 동맹을 맺을 때 사용하는 전략을 묘사하는 용어다.
l 요더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기독교인’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바뀌었다고 놀랍게 관찰했다. 즉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예외적인 확신이 있어야만 했다.
l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이후에는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 예외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기독교가 지배층이 되면서 이교도들을 도덕적으로 강제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l 더 이상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과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 일치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성찰’로 바뀌게 된다.
l 콘스탄틴주의로 이동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 없이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였다는 것이 요더의 견해다
l 본회퍼에 따르면, 산상설교와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모든 시도들에 도전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l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더 이상 어떤 결정에 직면하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가능한 유일한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l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가시적인 신앙 공동체다. 그들의 제자도는 그들을 세상과 구분지우는 가시적인 행동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도가 아니다. 따라서 제자도는 밤의 빛과 같이, 평지의 산과 같이 가시적이다. 비 가시성으로 도망가는 것은 부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이기를 원하는 예수 공동체는 무엇이든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공동체일 수 없다 (본회퍼)
l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가시적이 될 수 있기 위해서 행한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제자들은 다르게 되기 위해서 다르게 부름을 받았다는 뜻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제자들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시지만, 그 다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 자신 때문이다.
l 가시성과 다름은 예수님에 의해 가능해진 삶의 방식으로 이끌린 결과다. 따라서 산상설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시대의 한 백성의 삶의 방식에 대한 묘사다.
l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한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복이있다’고 천명하신 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와 더불어 변화된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l 팔복들 각각은 선물의 이름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각각의 사람들이 각각의 복을 소유할 것이라고 전제되지는 않는다. 오희려 팔복에 거명된 선물들은 이렇게 다양한 선물들이 예수님의 제자도로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의 공동체안에 존재할 것임을 시사한다.
l 팔복에 대한 모든 이해의 원천도 예수님이셔야만 한다. 우리가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는 것은 예수님께로부터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람들에게 “이 마음…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할 수 있었다.
l 가난한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사람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세상의 노예상태에서 자유케 하는 가난의 종류를 발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근처에 당신을 놓아둘 수 있다. 더군다나 놓칠 수 없는 것은 그런 가난이 지닌 정치적인 의의다.
l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세상의 권력에 우리가 순응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재물 부, wealth-아주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l 팔복 중에서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것보다 더 기독론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이 행복, 심지어 평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포기하고 세상을 살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본회퍼, 2001,103)
l 더욱이 예수님처럼 제자들은 여전히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굳센 온유함으로 불의를 견딘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백성의 의로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까지 보여주신 용서에서 드러나는 자비로 인해 복이 있다.
l 자비로운, 긍휼이 여기는 자가 자비로움심,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나라에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가능해진 삶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l 덕은 그 자체로 상일 수 있으나 기독교인들에게 덕-팔복에서 제안되는 종류의 덕-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공동의shared삶을 칭하는 이름들일 뿐이다.
l 그러므로 팔복에 묘사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못 비난받고, 심지어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런 박해는 그들이 선지자의 전통에 서 있음을 가리킨다.
l 선지자의 직임은 이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 이 새로운 공동체에게 주어졌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표식sign이된다.
l 따라서 제자들은 잘못된 겸손의 놀이를 할 여유가 없다. 지나친 것은 위험하다. 십자가는 제자들의 사역 -이방인들에게 조차(마5:16)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선한 일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을 밝히는 빛이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요청하신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아야만 한다고 제안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 때문에(마15:1-9), 세부적인 것들을 강조하면서 정작 더 중요한 문제들은 무시하는 것 때문에(마 23:23), 탐욕과 자기 방종 때문에(마23:25-26)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하실 것이다.
l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로움, 거룩하고자 하는 그들의 올바른 열망은, 그들이 유배상태에서나 이방인의 세력에 점령당한 때에서조차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 남아 있으려는 시도였다.
l 하지만 빈번하게 이스라엘은 권력, 특히 로마의 힘에 도전하지 않으려는 방식으로 신실하기를 구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준수가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l 하지만 정확히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고자 하는 자들, 예수님의 제자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행하도록 또는 존재하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폭력적으로 로마를 전복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의 나라는 폭력으로 로마를 전복하려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로마의 폭력에도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l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나라는 체제 전복적인 것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 체제전복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로움이며, 그로인해 그분의 십자가로 귀결되는 체제전복이다.
l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옛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시지 않고 옛 질서 가운데서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한 백성을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l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세상을 위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책망에 뒤따라 나오는 그 대립antithesis은 다만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
l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이제껏 보아왔던 다른 어떤 사회와도 같지 않은 한 사회를 도래케 하기 위해서 그분의 말씀 주위로 사람들을 모으신다.
l 이것이 산상설교뿐만 아니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가시성visibility이다. 이 가시성에 관한 세부사항들이 일련의 대조를 이루면서 뒤따라온다.
l 게다가 예수님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들 서로간에 화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 화해는 화해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를 만든다.
l 따라서 예수님께서 형제 자매들에게 분노를 품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들과 화해하려고 힘써야 한다고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에 대해 놀라서는 안 된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화를 촉발시킨 상대와 더불어 화해하지 않고 제단에 나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l 누구든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화해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희생으로서 살인의 악순환을 깨뜨리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화해햐야 한다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화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마 18:15-20)
l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이 주관하는 재판정에 서로를 끌고 간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경고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서로간에 분을 품은 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책망하신 것과 그리스도의 몸에 대항해 행동하기보다 잘못된 일로 고통받기로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l 바울이 그들에게 이것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무엇보다 세상에게 세상의 정의와 다른 대안을 제공하는 교회가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l 그러므로 교회는 성찬을 받기 위해서는 죄의 고백과 고해, 화해가 필수적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어떻게 우리가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 채로 감히 화해의 잔치에 올 수 있겠는가? 그 하나됨에 주어진 이름이 사랑이다.
l 빵과 잔의 선물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고 또 서로간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찬을 받지 않는 편이 낫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의 거룩함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l 그분께서는 분노와 욕망이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를 위해 섬기도록 형성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라고 제안하신다.
l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된 공동체는 생물학적인 재생산으로 자라나지 않고, 증거와 회심에 의해서 자라난다. 독신과 육체적인 순결은 이방인 선교를 구성하는 실천들이다.
l 비슷한 방식에 질문은 이혼한 여성이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그런 여성이 재혼하는 것을 필요성의 문제로 삼지 않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l 서로 간에 진실되게 말하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진실되게 말씀드리기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기도하기를 배워야만 한다. 이것이 시편이 교회의 가장 위대한 기도서인 이유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하지 않고 기도하기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l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께 몹시 화내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화를 내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기를 거절하셨다는 것을 발견하도록 한다.
l 게다가 시편은 우리를 진실되게 말하도록 훈련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인정하게 하거나 적어도 우리의 죄가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l 교회를 구성하는 진리는 기독교인들이 요구받는 삶의 방식 때문에 세상의 거짓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팔복에서 들은 대로, 그런 백성은 박해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l 진리의 백성에게는 분명히 적들이 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그들의 적들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실 뿐만 아니라 보복하지도 말라고 하시는 그분의 명령을 훨씬 더 특별하게 만든다.
l 우리의 적들을 사랑하라는 요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가하려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과제는 산상설교 전체가 지닌 묵시적인 특성을 명확하게 해준다.
l 그렇게 사는 것은 인내를 요구하는데, 그 인내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어 우리의 시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우리의 죄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l 팔복에서 복이 있는 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인내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전혀 자비롭지 않은 세상에서 자비롭게 되기 위해 시간을 내는 사람들의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l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우리를 화나게 하는 자들과 화해할 준비를 하는 것, 결혼생활에 성실한 것, 진실을 말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적들을 사랑할 수 있는 시공을 창조해 내는 습관이다.
l 우리는 완전해지라고 요청받지만, 그 완전함이란 그리스도의 원수 사랑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완전함은 우리가 죄가 없다거나 분노나 성욕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l 오히려 완전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폭력에 기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분투하는 한 백성의 일부가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은 서로 진실을 말하는 것, 서로에게 약속에 신실하는 것, 화해를 추구하는 것을 배우는 습관들을 요청한다.
l 예수님께서는 악에 저항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령님의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그 무기들은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에 의해 형성되어야만 한다.
l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악에 승리하리라는 신앙을 발견한 사람들만이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약속이 있는 유일한 순종이다. 무슨 약속인가?
l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분의 승리와 함께 하는 공동체에 관한 약속… 고난당하는 사랑이 악에 대한 응징이요 악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오직 십자가에만 참되고 실재적이다. 십자가의 부르심에 의해서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들은 이러한 가시적인 공동체 안에서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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