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12장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예수님과 침례요한
l 예수님의 신분은 쉽사리 인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침례요한도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래 기다려 온 그분이신지 아니면 그들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여쭤보게 한다.
l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 때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다. 그런데 요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가 이런 판단을 재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요한은 감옥에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도시들에서 메시지를 선포하시고 있음을 듣는다.
l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둘 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전하기 위해서 왔다. 하지만 요한과 예수님의 회개 요청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았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l 따라서 실패에 직면한 요한은 아주 당연하게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당신께서 가까이 오신 그 나라의 대표시냐고 묻는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질문에 다시금 자신의 사역의 열매들, 즉 눈먼자들이 보고, 다리 저는 자들이 걷고, 나병환자들이 깨끗함을 받고, 듣지 못하는 자들이 듣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가난한 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진 좋은 소식을 듣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심으로써 대답하신다.
l 예수님을 포로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가리켰던 자신이 지금 감옥에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l 요한은 헤롯에게 율법을 준수하라고 촉구한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다. (마 14:1-11). 그러나 예수님과 요한이 율법에 대해 같은 이해를 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l 마태는 요한이 바리새인들처럼 자주 금식하는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줬다(마 9:14-1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금식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면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먹보에 술주정뱅이라는 명성을 얻게 했다.
l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요한에게 자신이 광야에서 설교했던 회개와는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해명해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의 열매들에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요한에게 대답하신다. 자신을 먹보요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9)라고 말씀하신다.
l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촉발된 권세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 요한에게 가장 좋은 대답이다.
l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에만 주의를 환기시키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또한 무리들과 요한으로 하여금 요한이 누구인지 이해하도록 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들이 듣기 원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 광야로 나간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키신다. 요한은 분명히 우세한 여론에 따라 자신의 메시지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l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궁정에 사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 광야로 나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보다 그들은 선지자를 보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다.
l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선지자보다 낫다고 주장하신다-오직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주장이다. 예수님의 논증은 절묘하다. 요한이 선지자보다 나은 것은 그가, 선지자 말라기가 말한 대로 (말3:1),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전령으로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선지자들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알리는 독특한 직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l 그는 엘리야다. 말라기 4장5절은 엘리야, 곧 죽지 않고 하늘로 오려진 선지자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보냄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요한이 엘리야인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기 때문이다.
l 요한만큼 위대한 사람이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요한이 가장 작은 자가 된다. 왜냐하면 요한은 모세처럼 새로운 시대의 언저리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l 헤롯들은 요한에 의해 알려진 그 나라를 폭력으로 굴복시키려 할 것이지만, 그 나라는 그렇게 압도될 수 없다. 침례 요한이 체포되어 처형될 수 있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이지만, 요한이 선포한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평화로 말미암아 도래할 것이다.
l 그 나라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을 요구하는 어떠한 평화의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그 나라는 예수님, 곧 사랑을 통해 폭력을 극복할 권세를 가지신 분이다.
l 그러므로 예수님께 걸려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복되다” (마 11:6)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형태를 취하셔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공유하도록 초대하신다.
l 게다가 현재의 정권에 지분이 없는 사람일수록 예수님께서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연주하는 피리에 맞춰 춤출 준비가 되어 있다.
l 그들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려 하는 것에 절망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애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시장에 않아 있는 사람들, 매일 교환이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번성하는 사람들은 침례 요한을 미친 사람으로, 예수님을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l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집단적인 기획이다.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권세의 일들을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신다. 심지어 만일 고라신과 벳세다,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권세의 일들을 소돔이 목격했다면, 그 도시가 회개하고 살아 남았으리라고 말씀하신다.
l 그러나 이 도시들-비뚤어진 정신상태의 집단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심판의 날, 곧 엘리야가 알린 날이 이 도시들에 임할 것이며, 그것은 소돔에서 일어난 일보다 더 무서울 것이다.
l 예수님께서 권세의 일들을 행하신 도시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신 것은, 우리 같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을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차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잘 될 것이라는 사랑의 복음을 듣기를 원한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l 이스라엘 도시들처럼,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선지자들로 인식하는 것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신분으로 바꿔버렸다. 당연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권능의 일을 행하신 도시들에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심판을 받을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l 그러나 복음은 심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좋은 소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심판을 통해서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마법에 걸린 우리의 상태에서 자유로올 수 있는 삶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l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의 비밀을 감추시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시는 것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하심으로써 일을 더 꼬이게 만드신다.
l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어린 아이들을 이용하실 것이다(마18:1-5) 오직 어린 아이들처럼 되어야만, 오직 어린 아이들처럼 겸손 해져야만, 우리는 그들을 하늘에서 가장 큰 사람들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총명함과 지혜는 종종 우월함이라는 우리의 환상을 지속하기 위해 고용하는 권력과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l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예수님과 서로에게 의지하는 초보자들이요, 바울의 용어를 빌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듣지 못하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 보지 못하는 자, 가난한 자, 고난 앞에서 소망조차 끊어진 자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l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일부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에 아버지께 감사하신다. 예수님. 곧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분께서 그분의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l 기도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간의 관계에서 핵심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성령님을 통해 아들에게 현존하시는 아버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하시는 기도를 엿듣는 특권을 누리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라고 부르짖는 데서 가장 강렬하게 표현되는 친밀함을 드러낸다.
l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다. 그리고 그분의 기도는 우리를 신앙의 가장 심오한 신비인 삼위일체로 이끈다.
l 더욱이 마태복음에서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는 요한의 선언과 공명한다.
l 요한 못지않게 마태도 이 예수님께서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아버지심을 알게 해주는 아들이심을 알려준다. 아들께서는 자신이 택한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나타내실 것이다.
l 아들께서만 아버지를 계시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임의적인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아들이신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l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은 어린 아이들처럼 피리를 불 때 춤추기를 배우는 것이다. 피리에 맞춰 춤추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그 춤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 춤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어서지 않는 것에 의아해 한다는 뜻이다.
l 적어도 그들은 권세에 의해 억지로 일어서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오직 우리가 춤의 경이로움을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간절히 나누고 싶어하기 때문에만 일어난다. 그래서 윌리엄스는 초청에 귀 기울이는 것을 배우자고 제안한다.
l 이것이 예수님께서 지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는 쉼이다. 그분께서 모두에게 제공하시는 마음에서부터 오는 온유와 겸손이다. 이는 ‘팔복’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들의 전형이다
l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멍에를 지고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고 배워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우리가 그분의 멍에를 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께서만 지실 수 있는 멍에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지셨기 때문이다.
l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멍에를 함께 질 수 있도록 만든다. 심지어 그것은 쉬운 일이 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멍에는 아무런 쉼도 주지 않는, 우리가 지고 가는 짐에 대해 환영할 만한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l 이것이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하신 대답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오실 분, 이스라엘의 메시아시다.
l 그분께서 가져오시는 나라는 세상의 폭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온유와 겸손의 나라다. 하지만 그 나라의 온유함은 해와 별을 움직이는 사랑이 이 사람 안에서 발견된 사랑과 같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l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스스로 그분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신 후, 그분께서 말씀하고 행하신 모든 것이 논쟁과 저항을 일으키는 것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배척
l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쉼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곧바로 안식일, 곧 쉼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날에 관한 논쟁에 연루되시는 것은 오히려 적절하다.
l “그때에” 마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기 시작한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행위를 해명하라고 예수님께 항의한다.
l 바리새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제자들은 “그 때에,” 즉 안식의 날이자 쉼의 날에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l 물론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자들 편에 선다. 우리는 신약을 읽을 때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로 구분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자들은 분명히 좋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소위 그들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정당화되어야 만했다.
l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너무 쉽게 비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안식일은, 창세기로부터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에 그 근원을 둔다. 안식일은 선물, 즉 시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시간의 선물이다. 그분의 쉼에 참여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초청하신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가 시간에 맞춰 제 때에 창조되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게 주신 선물이다.
l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5장 15절을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5) 따라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에는 분명한 정치적인 증거가 있다.
l 바벨론 유배 때에, 곧 땅과 성전을 약탈당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겔 20:2)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주셨음을 상기시키신다.
l 그래서 안식일, 곧 하나님에 의해서 방향 지워진 이스라엘의 방식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른 시간에서 살도록 강제하려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l 따라서 안식일은 바벨론 유배 때든 외세의 통치 아래 있을 때든 모두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l 예수님께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의 주의를 사무엘상 21장 1-7절로 돌리신다. 거기서 다윗은 그의 배고픈 부하들에게, 제단을 섬기기 위해 금욕적으로 성별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떡을 주라고 제사장들에게 청한다.
l 다윗은 그의 부하들이 일반적인 성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께 헌신된 사람들을 위해 구별된 떡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방식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를 수 있는 것은, 다윗의 부하들처럼 그들도 새로운 다윗인 자신에게 충성함으로써 성별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신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주장을 끝내시지 않고, 바리새인들의 관심을 민수기28장 9-10절이 요구하는 것, 곧 제사장은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안식일에도 일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돌리신다.
l 예수님께서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 가지 모델을 제시하신다. 곧 자신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 역시 권위있게 생각하는 본문에 호소하신다. 하지만 이 본문을 잘 읽게 될 경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의 지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l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믿기 힘든 주장을 하신다. 시간은 예수님의 부활-곧 제7일을 예수님의 수태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절정이 되게하는-로 말미암아 재편될 것이다.
l 예수님께서 논쟁하시는 방식과 성경을 사용하시는 방식은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 존재 자체가 그들의 세상에 도전이 되시는 분 앞에 자신들이 서 있음을 명백하게 알게 한다.
l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자신이 창조의 시간을 새롭게 판단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하시는데, 그럼으로써 성경이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에 관해 열쇠가 되신다.
l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이 이스라엘의 성경을 읽기 위한 해석학적인 열쇠임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l 바리새인들, 곧 자신들의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버린 자들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쨌든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세상과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 바꾸시는 근본적인 변형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중이다.
l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장6절을 인용하시면서 제사가 아니라 자비가 이스라엘의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런 주장은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오그라든 손을 가진 한 사람을 발견하시자 마자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l ‘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이 합법적이냐고 묻는다. 마태는 ‘그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의 표시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속했다고 볼 수 있다.
l 그들은 만일 자비가 요구되는 것이라면, 안식일에 치료를 하는 것도 합법적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다른 주장을 하심으로써 반응하신다.
l 그러나 이번에는 상식을 사용하신다. 만일 누군가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한 마리의 양-그가 소유한 단 한 마리의 양-을 구해내는 것이 허용될 진 대,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그보다 얼마나 더 중요하겠는가?
l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감추고 있던 손을 내보이라고 하시고는 그의 손을 고쳐 주신다.
l 안식일을 둘러싸고 있는 쟁점들은 바리새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서 그분에 맞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고 보고한다. – 이는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들의 주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될 불길한 전개다.
l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기 원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그들과 싸우려고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마태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의 대립을 원치 않으시고 떠나신다고 말한다.
l 비록 예수님께서 물러나시긴 하지만, 그렇다고 보내심을 받은 목적을 포기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변호하시기를 거부하시는 것이다.
l 거짓이라는 폭력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유일한 무기는 그분께서 받으신 것 이자 그분 자신이기도 한 진리다.
l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좇는다. 그들은 모두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로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치료하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사 42:1-4)-이방인들에게 정의를 선포하실 분에 관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l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삶의 중심에 있는 직무들offices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정확히 알아차린다. 즉 그분께서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신 것이다.
l 여기에 계신 왕께서는 무력으로 통치하시기를 거절하시는 분이요, 여기 계신 제사장께서는 희생당 하시는 분이요, 여기에 계신 선지자께서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크게 소리치지도) 아니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l 더군다나 이러한 직임들을 성취하는 것은 소망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고 정의가 가능하게 됨을 의미한다. 정의에 반대하는 커다란 적은 냉소주의와 절망이다.
l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새로운 창조로 말미암는 목적이 우리의 삶에 주어졌다는 종말론적인 신호가 되시기 때문에, 소망을 가져오신다.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l 예수님께서는 논란을 피하시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 휘말리시게 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기 때문이다.
l 무리들은 그렇게 귀신들린 자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윗의 자손임에 틀림없다고 추측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다시금 이러한 치료를 예수님께 대항하는 음모를 꾸밀 기회로 간주한다. 그들은 오직 “귀신의 왕 바알세불”만이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l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대항하는 이번 음모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적을 잘 아시고 그들이 발설하지 않는 고소거리에 반응하신다.
l 예수님께서는 어느 나라든, 심지어 그것이 사탄의 나라일지라도, 스스로를 대항해서 분열되면 망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l 만일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예수님을 정죄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퇴마사의 사역에도 같은 시험대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만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축출하셨고 그들도 그렇게 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인정한다면, 그들은 또한 예수님께서 오직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신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만일 그런 일이 행해졌다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줄 알아야만 한다.
l 하나님 나라가 확실히 현존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이미 강한 자를 묶어 놓지 않았다면 사탄과 대적해 싸울 수 없다고 주장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강한 자, 사탄을 결박하셨는데, 그것은 사탄의 근거지에서 기꺼이 사탄에게 복종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다.
l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을 대면하셨고, 사탄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것에 복종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이기셨다. 그분께서는, 이사야 49장 24-25절에서 말하는 대로, 사탄의 전투 규정들을 거부하심으로써 강력한 포로를 사로잡았다.
l 사탄의 집은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약탈당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미 약탈당했다. 이것은 우리가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다 가질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
l 우리는 사물의 존재에 대해 사탄이 이해하는 방식을 가지고 사탄과 싸울수는 없다.
l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왜냐하면 용서는 단순히 우리의 죄가 우리를 대적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용서는 사탄의 통치에 대항하는 대안 공동체를 일컫는다. 그런 공동체는 오는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현존한다.
l 용서받는 것은 예수님께 모여드는 것이다. 용서받지 못하는 것은 유실된 자들the lost의 세상으로 흩어지고 유실되는 것이다. 신성모독이란 성령님께서 이 사람이신 예수님께 부여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회개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세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이다.
l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냈다면서 신성모독으로 자신을 고소하려는 사람들을 꾸짖으신다. 즉, 그들은 한 가지를 말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고 고발하시는 것이다.
l 선한 나무와 악한 나무는 그것들이 맺는 열매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열매를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독사들은 자기들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하는데 능숙하고, 따라서 악에서 선을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판의 날, 곧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부주의하게 말한 모든 말에 책임을 지게 될 때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l 말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화났을 때 우리의 말을 훈련하도록 가르치셨고(마5:22-26), 맹세를 금지하셨고(마 5:33-37), 공허한 기도를 싫어하셨고(마6:7), 판단하는 위선적인 말을 정죄하셨고(마 7:4-5), 거짓된 신앙고백을 참지 않으셨고(마 7:21-22), 자신을 분명하게 부인하는 듯한 말들의 사용을 무시하셨다(마 12:2)
l 예수님께서는 말이 오용되는 것은 ‘우리의 보물’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호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 때문에도 거짓으로 말한다.
l 이 모든 것은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 가운데 하나가 말에 ‘주의하기care’임을 보여 준다. 말에 주의하기 위해 주어진 직임들 중 하나가 신학이라 불리는 것이다.
l 신학은 그리스도를 따라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돕도록 부여된 훈련과정으로서, 진리이신 그분을 증거하는 데 요구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l 진실한 언어는 사라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지속적인 주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주의 깊은 말로 구성된 시들, 곧 종종 기도-특히 수세기에 걸쳐 시편을 노래하면서 그들의 기도를 연마한 수도자들의 기도-의 형식을 취한 시들 없이는 살 수 없는 이유다.
l 그러나 신학자들은 종종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를 불만족스럽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우리에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도록 부추긴다.
l 특히 교회의 지위와 교회의 믿음이 문제시되는 시대에서 살아갈 때, 신학자들은 이런 왜곡에 더욱 취약해진다. 너무나 자주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신앙의 언어가 지닌 문제들이 그들로 하여금 교회가 믿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그들의 지적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l 그런 정황에서, 곧 기독교인들이 얼마간 그렇게 살았다고 우려되는 정황에서, 복음의 과묵함은 우리를 불만족스럽게 한다. 우리는 복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해주기를 바란다.
l 틀림없이 그런 연구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따라서 그것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주석에서 시행하는 마태복음의 읽기는 마태의 과묵함을 존중하고자 한다.
표적
l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필사적으로 표적sign을 바란다.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자들을 고치시고, 저는 자들을 걷게 하시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자들의 청력을 회복시키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오심을 들었다.
l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표적을 바란다. 급기야 나중에는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구할 것이다(마 16:1)
l 마태복음을 따라 여기까지 온 우리 역시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그들에게 약간의 보험이 주어지는 것이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l 하지만 우리는 마귀도 광야에서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던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l 어떤 종류의 표적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분명하지 않다.
l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형이상학적인 비품의 일부가 되실 수 없고 오직 이 사람, 예수님께로부터만 발견되시기 때문이다. 터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동일한 인격이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l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성경, 특히 요나서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대답하신다. 마치 요나가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일 밤낫을 보냈듯이, 인자도 “밤낮 사흘동안 땅속에”서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l 에수님께서는 요나서를 사용하신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예견케 한다. 그러나 부활조차도 우리가 스스로 깨끗하지 못한 영들을 없앨 수 있음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l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내쫓으셨지만, 그들은 또 다른 곳에서 쉴 장소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나 자주 귀신들은 그들이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와 번식하고, 그래서 그들이 거하는 사람은 그들이 원래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나빠지게 된다.
l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이 그분께서 임하신 이 세대에 일어날 것이라고 시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시는 그분의 사명은 그들이 지금 성령님의 사역에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저항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가족
l 예수님께서 아직 무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분과 얘기하기 위해서 밖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예수님께 전해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제부터는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라고 주장하신다.
l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며, 모친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부르심으로써 가족애에 도전하셨고(마 4:18-22),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부친을 장사하기 위해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을 거절하셨고, 다가올 박해 속에서 형제가 형제를 부인하고,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들을 반대하여 일어나고,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들을 죽음에 몰아넣을 것이라고 예견하셨다.(마 10:16-23,34-39)
l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가족이 재구성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녀들이다. 그러나 이제 한 공동체가 세워졌고,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부모가 되고, 형제와 자매가 되도록 부름 받는다.
l 하나님 나라는 증거와 회심에 의해서 자란다. 그러한 성장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자매들과 형제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임한 그 나라의 경이로움이자 위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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