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Galatians(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 박영선 - 제3장

Four Seasons Daddy 2022. 2. 25. 10:36

 

 

갈라디아서 3:23~29

 

거기서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자

 

l  기독교 신앙을 어떤 원리로나 구체적인 실천의 방법으로 설명하고 추적해가는 것은 분명하기는 하나, 안목과 균형에 있어서는 신학적 인도함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l  갈라디아서는 신학적인 설명과 시각을 요구하기 때문에 혼자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는데는 어려움을 격습니다.

 

l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기위해서는 어떤 것을 해야되느냐 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이 무엇이냐,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실천이나 명령으로 요구하는 순종과 헌신을 위하여 예수가 누구이길래 기독교신앙에서 어떤 위치와 근거가 되길래 라는 신학적 질문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l  26절 신자의 정체성이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가능하다 하는 것과 그래서 28절 하나라는 평등한 내용을 다룹니다.

 

l  예수그리스도로 실체화되는 믿음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요구와 본질이 주인공으로서,실체로서 예수그리스도로 집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l  정체성으로 가는 이 가르침 우리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믿음아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예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듭니다. 예수한분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l  우리는 예수외에 다른 것으로 기독교 신앙에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다른 것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보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l  신자라는 정체성은 예수로만 충분합니다. 신자다우냐 하는 문제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신자라는 정체성은 예수그리스도 그 외에는 필요치 않다 입니다.

 

l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찾아오심이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으로 허락된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성실하신 약속에 근거하시는 것이며, 그 약속의 실체가 예수그리스도라 하는데로 모여지는 것입니다.

 

l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것은 실천적인 문제로 접근하면 늘 우리를 흔듭니다. 신자답냐와 신자이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l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는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것은  우리의 자격,조건,노력,소망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l  28절 신앙의 차원에서 평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을 논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별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 하는 말씀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면 예수를 믿기 전부터 우리는 다 평등하다 입니다.

 

l  3:9-11

 

l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선택보다도 우선하는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우리는 사실 믿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l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신앙적 차원에서 약간 경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평등하다. 물론 신앙의 높낮이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식구요 한 형제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l  이상하게 그 배타성이 기독교 진리를 성립시키는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이라는 면에서 배타성이 되지 않고,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의 배타성이 된다 말입니다.

 

l  기독교 외에 구원이 있느냐 하는 문제와 다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이 것은 배타적입니다. 예수 이외는 다른 이름을 구원을 위해 주신 이가 없습니다.

 

l  그러나 예수를 주신 것이 우리의 요구나 준비와 상관없는 문제였다면, 믿는 자는 은혜를 입은 자요, 믿지 않는 자는 아직 은혜를 못 입은 자일 수는 있어도, 그 둘 사이의 평등함을 나는 믿고 너는 믿지 않는다라고 우리가 차별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l  이 것은 아주 큰 문제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경멸과 적대감은 너무 큽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l  이러한 경멸과 적대감은 내가 받은 은혜가 나에게 어떤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구별성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구원받을 만한 요소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대하여 경멸의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l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만으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가 보면 이런 놀라운 결과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순교가 있고, 겸손이 있고, 섬김이 있습니다.

 

l  우리는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것에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도 몸을 낮추는 자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도록, 양보하도록, 겸비하도록, 낮춰지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다 아멘합니다.

 

l  그러나 사실은 뼈속 깊이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것이, 우리가 은연중에 타종교를 약간 비하함으로써 우리가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 혹은 표현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l  그것이 타 종교와의 문제가 아니라, 뿌리깊이 예수를 믿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사실은 그 믿음과 은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 끼리는 그나마라도 하는데, 사회에 나가서는 못하게 됩니다.

 

l  믿지않은 사람들에게는 당신 먼저 믿어라, 그 다음에 얘기를 하자 만 있지, 믿지 않는 자와 만났을 때, 믿는자가 가지는 은헤를 입은 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배타성이 가지는 진정한 평등성을 이해하고 있는 자로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l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외형적 차별성을 가지고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를 구별하는 것이 믿음의 선택이나 결정이라는 시각에서 갈리어지지 말고, 기독교만이 가지는 예수안에서만이 허락되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다운 모습이라는 배타성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l  3:12-15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은 믿어서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믿기전에, 알기전에 용서하신 것입니다.

 

l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

 

l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물론 성도들에게 하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신자들간에 문제이기는 하나, 사회까지 발전해야만 하는 것으로 요구받고 있습니다.

 

l  누구를 만나시든지,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 차별은 이 시대의 모든 차별을 다 쓴 것입니다.

 

l  여러분 세상에 나가시면 누구를 만나든, 어떤 형편의 사람을 만나도 우리가 괄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배타성이 있습니다. 예수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이 평등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l  예수 이외에 다른 조건을 삼으면 어찌되었던 사람은 차별이 생깁니다. 잘난사람과 못난사람의 차별이 생기는 법입니다. 예수안에서만 이 차별이 철폐됩니다. 왜그렇습니까, 십자가가 모든 입을 막기 때문입니다.

 

l  율법아래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율법의 인도속에서 우리가 모두 십자가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잘나고 우월하고 가능성이 있어서 십자가를 찾아올 수는 없습니다.

 

l  여기에 오늘 갈리디아서에서 배우는 율법과 은혜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율법은 은혜와 언제나 대척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율법이 우리를 은혜로 이끌 수 밖에 없고, 은혜로 오면 율법을 사랑으로 묶을 수 밖에 없습니다.

 

l  거기에는 어떤 조건이나 자격을 가진 구별도 차별도 우월감도 멸시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l  3:12절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있다면, 당신이 신앙인이라면, 그런 이야기 입니다. 쉽지 않은 가르침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가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시각으로 분별로 알게 됩니다.

 

l  3:16-17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으로 갑니다.

 

l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신실하신 약속에 의한 예수안에서의 구원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앞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낙심할 수 없습니다.절망할 수 없습니다.

 

l  우리가 이 나라에 살고, 이 시대를 살면서 정치를 비판하고, 교육을 비판하고가 교회에서 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신앙에 있어서 도와주는 것도 못되고,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l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은 신앙이 그 시대에 어떻게 교묘하게 우리를 속일 수 있는냐라는 영적인 문제로서 분별에 들어갈 수는 있어도, 정치를 왜 이따우로 해 하는 것은 강단에서는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래서, 우리민족성은 이래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하는 문제는 여러분속에서 엄연하게 존재하게 됩니다.

 

l  이 나라가 정치가 잘되고 경제가 왕성하면 무엇을 할려고요, 그래야만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성경에 처럼 유대인이여야하고, 헬라인이여야 할 필요가 무엇에 있습니까

 

l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예수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여야 합니다.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의 문제가 아니고,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의 문제도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만이 가지는 진리 자유 생명 그안에서의 관용 사랑 이 문제에서 배타적이여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되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l  요일 4:7-10

 

l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죽이시는 것과 당신이 죽는 것과 어느것이 더 큰 희생입니까. 성부하나님은 성자하나님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사랑합니다.

 

l  우리는 사랑은, 우리의 신앙은 왜 우월감과 경멸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는냐 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배타성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예수안에서 부르신 이가 누구신지를 아는 문제가, 거기에 참여하는 문제가 예수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배타성이라면 그럼 보이셔야죠

 

l  예수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만들어 내셔야지요.

 

l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시험은 무엇이냐 하면, 정면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종교중에 하나로, 종교에 속한 한 아류로 우리를 폄하한다는 사실입니다. 다 진리를 찾고, 구원을 찾는 종교 그 중에 하나 히브리 민족이 만든 종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l  그것이 억울하시고 분하시면 고함을 지를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우리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십시요 그것은 예수만이 보이신 것입니다.

 

l  요일 4:11-12

 

l  어느때나 하나님을 본적이 없으신데,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나타내시냐 하면 예수안에서 나타내셨고, 예수안에서 부르신 그의 백성들안에서 나타내십니다. 무엇으로 사랑으로 입니다.

 

l  모든 신자들이 자기가 서있는, 자기가 만나는 오늘이라는 일상이야 말로 신앙인에 있어서는 최전선입니다. 어느 자리 어느 경우에서도 여러분은 세상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땅끝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이며, 예수안에서 허락된 것이며, 그 외에 다른 조건과 이유는 없습니다.

 

l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근거이시며 우리의 신앙을 성립시키는 분이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그안에서 허락한 무한한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이 삶을 사십시요

 

 

 

갈라디아서 3:01~05

 

성령시대 하나님을 찿아가 누리십시요

 

l  오늘은 성령을 받은 일과 그것이 율법에 근거한 것이냐 믿음에 근거한 것이냐 하는 일종의 사도바울의 추궁을 읽습니다. 얼핏보면 우리와 무관한내용 같고, 실생활과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굉장히 실제적인 내용이고  분별해야 될 중요한 내용입니다.

 

l  사도바울에 의하면 신약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은 성령시대를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논하면 감동적이고 초월적인 면에서 일차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전혀 그런 차원에서 성령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결하여 성령을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l  성령을 받은 것이 너희의 행위로 인하여 받은 것이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l  이 질문의 중요성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나타나고, 14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풀어 냅니다.

 

l  2:14-21 요엘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l  여기 나온 말세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신약시대를 말합니다.이 시대는 이전 시대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것이 특별하게 특징지워지는 시대로 구별됩니다.

 

l  이 성령을 허락하신 것은 베드로의 설명에 의하면 너희가 보는 이 현상은 성령이 임하여 나타나는 방언이라던가, 특별한 하나님 임재의 현상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요엘 선지자로 예언케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l  1:3-5

 

l  사도바울이 성령강림사건을 인용하여 갈라디아교인들보고 너희가 믿음을 갖고 있고,성령안에서 살게 된 것이 너희가 기도해서냐, 아주 더 구별하자면 너희가 믿은 것이 조건이더냐, 하나님이 약속에 의해 주어진 것 아니냐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려 해서 주신 것 아니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조건을 삼아서 입니다.

 

l  2:29-33

 

l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심과 부활이라는 대속사역과 부활생명으로 인하여 허락된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신 선물이 바로 성령이였다.

 

l  너희가 누리는 신약시대,성령시대라고 말하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계속되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시대요 이 작정은 특별히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개인의 영혼에 찾아오시고,개입하시고,임재하시는 시대이다가 골자 입니다.

 

l  3:1 라는 말은 너희가 보았다, 역사적 사실이다에 초점이 있는 것이아니라, 예수가 죽어서 이 시대가 열렸다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2절에 율법과 믿음을 대조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이유와 조건이 너희안에 있었더냐, 예수안에 근거하더냐, 생각해보라 입니다.

 

l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을 논할 때마다, 믿음은 늘 믿는자의 열심이나 진실성에 초점이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과 내용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그 내용은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l  예수그리스도로 근거하여 성령이 허락되었고,신약시대가 열려고,우리의 구원과 신앙이라는 것이 성립되었다. 너희 안에 조건과 근거는 없다 입니다.

 

l  3:5 성령시대라는 것은 하나님이 근거가 되시고, 이유가 되시고, 그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임과 동시에 성령께서 주인이 되시는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l  율법과 믿음을 첨예하게 대조시키는 이유는 우리로부터 시작하여 결과된 우리가 만들어낸 조건에 받은 보상으로서의 제한을 벗어나는 시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시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무한한 시대, 신적 약속과 충만의 시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는 시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 우리가 만들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는 시대이며,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시대라는 것이 초점입니다.

 

l  3:3 무한함과 영원함으로 허락된 것을 어떻게 규칙과 한계속으로 제한하려고 하느냐, 무한이 가지는 충만과 부요함으로 가야지, 그것이 어떻게 다시 우리의 규칙속에 사로잡히는 율법속에 들어올수 있단 말이냐 라고 말합니다.

 

l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l  이 시대는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가 믿는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로의 죽음으로 보여진 하나님의 주도권의 시대이다. 하나님이 하자는 것을 해라 입니다.

 

l  내 소원을 종교,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수단으로 얻으려고 하지말고,나의 뜻과 목적과 내용을 그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놓아라 성령을 좇으라 입니다.

 

l  성령님의 분명하심과 충만하심이 하나의 측면이지만, 보다 중요한 건 성령님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믿음이지만, 그러나 그 믿음을 완성시키고, 승리케하고, 부요케하는 내용은 성령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계십니다.

 

l  14:7-9

 

l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십니다. 그의 주인되심에 순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살지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데, 내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위합니다.

 

l  14:13-18

 

l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루에도 열두번 예수를 부인합니다. 13번째 우리는 돌아 설 수 있습니다. 율법이 도입되면 그것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인과율을 넘어서 계십니다.

 

l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무때나 누구에게나 찾아오시고 복을주시고 응답하시고 기도하지 않은 것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누구를 비평하여 확인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찾아가 붙잡아 누리십시요. 성령시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허락된 은헤의 시대입니다.

 

l  창조주가 피조물에 손에 의하여 피조물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어느곳에서도 모순 뿐입니다. 그 십자가로 성령이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있고, 여러분의 참석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5~14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끄시는 은혜

 

l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자된 정체성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성을 다른 것에 팔아 먹지 마라,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l  우리안에 근거를 가지려 하거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신앙을 구원받은 신자의 신분을 확인하려 하지말라 입니다.

 

l  5절 성령을 받은 것이, 성령시대가 열린 것이 너희가 한것이냐,너희의 근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l  예수님 만이 성령시대를 열었습니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근거이십니다. 6절에 성령시대를 사는 신자들에게 허락된 축복과 특권의 시대이지만,우리가 열지 않은 것 같이,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허락하셨다는 것을,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는지를 다시한번 확인하여 보라 입니다.

 

l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롭다함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을 조건과 자격을 제시하지 못했다하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l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라는 것은 믿음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 그렇듯이 우리에게 허락된 결과가 자신이 가진 조건위에 서있지 않은 법칙을 얘기할 때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위와 구별되는 율법과 구별되는 믿음입니다.

 

l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같이 저를 의롭게 여기신 이가 하나님이신것 같이 성령시대를 여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이루신 일이지 우리안에 근거가 없다. 를 다시한번 확인시킵니다.

 

l  7절 신자된 정체성은 어디있느냐, 내가 신자가 맞느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사랑하는 그 대상이 내가 맞냐, 이런 약점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네편이냐, 정말 내 하나님 아버지시냐, 여기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l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에 자손일 줄 알지어다, 자기에게 조건이 없거든 하나님의 자녀인 줄 알지어다.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요, 하나님께 복을 받을 일을 한 것이 없는데요. 제가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묻는다면, 너 내가 아들을 주었을 때 나에게 요구했었느냐,

 

l  5:8

 

l  우리의 불안은 우리에게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심은 내가 그 은혜를 아무리 반복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한번 은혜를 받고 그 다음부터 은혜가 필요없는 사람이고 싶으시죠, 하나님이 그렇게하지 않으십니다. 은혜로시작해서 은혜로 마치십니다.

 

l  우리가 자신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근거를 가지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서 벗어납니다

 

l  8절 창12:3절 말씀을 인용함, 땅의 모든 족속으로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조건과 자격위에 서있는 복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른 하나님의 은혜라는 조건 위에서 모든 족속들이 구원을, 복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며,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l  또 한가지 중요한 부분은 우리에게 책임과 연결되는 부분인데, 우리에게 조건으로 책임을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우리가 우리를 만드는 것과,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능력과 목적치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은혜라는 말을 씁니다.

 

l  여러분이 여러분 마음에 드는 어떤 신앙적인 만족을 시켜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정직한 것,성실한 것,근면한 것,온유한 것,예의를 지키는 것,기다려 주는 것 이런 것 다 훌륭한 덕목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시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l  복음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고, 그의 자격과 조건을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과 소원을 넘어서는 신적 작정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인간의 구별과 차별과 경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렇게 작고 제한된거이 아니다 입니다.

 

l  율법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세상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인의 정직함이나,성실함 등의 그 어떤 것 보다 더 나아갑니다. 왜 예수를 믿는지 세상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l  그것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문제이고, 하나님의 약속속에 있어야만,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알도록 얘기 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l  에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했다는 것을 늘 돌아 보아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자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l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큽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부름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격없슴의 죄책감과,하나님이 함께하실까 하는 의심이 따라 붙습니다. 그 믿음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작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l  믿음에는 이 불안함과 의심의 궁면이 꼭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결론이 13절과 14절에서 나옵니다.

 

l  십자가가 없는 믿음의 확인은 거짓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여러분이 고난과 절망속에 위치하는 것은 은혜의 하나님의 신비한 인도하심이 됩니다.

 

l  성경에 가장 중요한 내용들,신앙의 본질된 내용들은 절망가운데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그의 뜻을,작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까지 왔다면, 우리의 믿음은 기특한 것입니다.

 

l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예수안에서 찾아오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좌절,죄책,소외,무능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극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극복하고 찾아오십니다.

 

l  우리가 하나님이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부등켜 안으셨다고 하시는데, 여러분은 내가 찾아가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나를 만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l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가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찾아오십니다.

 

l  우리가 주를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내려와 우리를 부등켜 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모든 한계를 초월한 교제를,연합을,사랑을 여기 성경에 선포하십니다.이 부름과 초대에 여러분들이 붙잡혀 와 있는 것입니다.

 

l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떳떳한 신앙을 가지려다가 하나님을 놓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여 여러분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십시요 그리하면 예수그리스도안에 허락된 하나님의 모든 신비하고 위대한 은혜와 믿음 안에 있는 축복들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l  여러분의 인생을 괴롭히는 모든 자책감에서 여러분을 구할 것이며,세상의 위협과 시험앞에서 하나님이 여러분 편을 들고 여러분을 품에 안고 계시다는  확신속에 살아가는 신자의 인생이 되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5~22

 십자가의 비밀

 

l  율법과 은혜 다르게 이해하자면 도덕과 은혜로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l  13:14 -16 네 자손으로 티끌 같게 하리니..

 

l  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l  아브라함과 약속은 예수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약속한 것이라 입니다.

 

l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식으로 부르는 자의 대표자가 된다 입니다. 아브라함식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한 근거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작정으로 불러낸 자들의 대표자, 모범사례입니다.

 

l  아브라함식으로 부를자는 땅에 티끌처럼 많을 것이며 바다에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거기에 속합니다.

 

l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싶은 말은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은 율법이 생기기 전이다. 우리가 무슨 조건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약속이 먼저 있슴으로서 은혜가 하나님의 작정과 신적의지에 근거하고 있다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l  약속이 우리의 행위적 근거보다 우선하며,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근거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로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약속과 그리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l  그럼 19절 율법은 무엇이냐 입니다. 율법은 모든 원인결과 법칙을 가능케하는 인간 행위입니다. 그럼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라면 우리에게 율법이 왜 필요하냐 라는 질문입니다.

 

l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으로 모든 사람을 죄아래 가두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성립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오므로 인하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부각시키며, 은혜로만 우리 모두를 몰았다는 것입니다.

 

l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다른데로 초점이 흐려지거나 다른 곁길로 세는 것을 막게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를 죄아래 가두고 묶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랍니다.

 

l  율법은 은혜로 우리를 몰기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l  3:19 – 20 율법으로는 살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킵니다. 절망가운데 은헤를 구하는 곳으로 우리를 몰고갑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에게 답이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확인시킵니다.

 

l  3:21 하나님이 율법이라는 범주를 벗어난, 한계를 벗어난, 즉 기적의 길을 여셨다. 그것이 십자가 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십자가를 벗어나서는 절망과 파멸외에 다른 것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중립지대란 없습니다.

 

l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가장 놀라는 일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우리자신의 감각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예수 믿는자의 혼동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늘 화평하고,확신에 차고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l  신앙이 약속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서 예수안으로 돌아오라, 예수 밖에는 방법이,구원길이 없다하여 우리를 예수안으로 붙잡아 매는 것입니다.

 

l  신앙인들은 나는 왜 이럴까,에 그 위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율법이 어디로 우리를 몰고가나요, 예수로 몰고갑니다. 예수가 없다면 방법이 없구나, 예수가 나를 위하여 죽었단 말인가.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가 맞는가, 그가 사망 권세를 이겼단 말인가, 그가 나를 위하여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었단 말인가,이것을 자꾸 되뇌어야 합니다.

 

l  5:8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믿음의 결과가 아닙니다. 내가 붙잡은 예수가 아니라, 나를 붙잡은 예수입니다. 하나님 베푸신 사랑은 이유와 조건이 없는 것이다 입니다.

 

l  은혜와 율법의 관계가 무엇인가, 은혜는 율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입니다. 율법이 소망을 만들어 내거나, 사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은혜를 구하게 만듭니다. 도와주십시요. 비명을 지르게 합니다.

 

l  비명을 질렀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신게 아닙니다. 비명도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울면서 기도한 것이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l  22절 율법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우리로 구원으로 인도하는데, 율법은 구원을 만들어 내어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확인시키므로 은혜로 몰고 갑니다.  

 

l  6:6-11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음이 완성되었다 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근거가 되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법 아래로 불리어 온다는 뜻입니다.

 

l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자신이 근거를 가져야 되는 인과의 법칙에서 모든 인류를 죽게 만들고, 그 죽음에서 벗어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의 유일한 자격,조건,이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되는 구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되는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l  6:12

 

l  은혜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는데, 은혜는 율법을 세웁니다. 율법은 은혜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비로소 구원받은자의 정체성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l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안에 거하지 않으면 심판과 정죄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와 내 이웃을 정죄하게 만듭니다. 예수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적극적인 즉 생명이 그 힘을 발합니다. 생명이 진리안에서 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입니다.

 

l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율법을 구원의 조건이 아닌 구원을 받은 자의 당연한 실력으로 성취되어지고, 책임되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l  신자들의 도덕성은 예수안에 있는 거듭난자의 다름입니다. 예수를 닮는 자의 다름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가고, 격려로 가고, 위로로 가고, 겸양으로 가고, 온유함으로 갑니다.

 

l  그런 차원에서 율법이 은혜에 종속되어진 것을 봅니다. 은혜가 율법을 완성시킨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결코 은혜를 성취시키지 않습니다.

 

l  사랑은 완전한 차원이 아니고 완성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를 근거로하여 나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다루시기를 기다리고 넘겨주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l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십시요, 무엇을 점검합니까. 여러분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요, 회개를 통해 자신의 양심과 기대에 떳떳하고 싶은 것입니다. 완전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l  신앙은 참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모자라지만, 내 신앙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무엇인들 못해주실까 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십시요.

 

l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그 크기를 아신다면, 고통스럽지만 그 표정이 변하여 웃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승리라는 것은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고 웃으십시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바라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