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Galatians(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 박영선 - 제2장

Four Seasons Daddy 2022. 2. 8. 12:37

 

 

갈라디아서  2:1~5

 

기쁜 순종으로 연결

 

l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은혜를 자유로운 권리로 책임지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l  사도바울은 바나와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골자입니다. 그 이유는 4절에 있는 것 같이 거짓 형제들의 기만 왜곡을 막기 위해서라

 

l  그리고 저들의 시험과 유혹 앞에 우리가 가진 신앙의 진리됨을 내가 사수하기 위하여 그리 했노라 라고 얘기하면서 저들이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우리로 억지로 종이 되게 하려 하였답니다.

 

l  자유와 종을 대비하면서, 자유는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어떤 책임을 수행하는 자를 말하고 종이란 억지로 시켜서 안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는 자라는 대비입니다.

 

l  이것은 디도의 할례 문제로 대표적인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도는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여야 겠지만, 그 민족으로 태어나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l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중요한 의무였고 자격이였고 조건이였습니다. 디도는 헬라인이였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l  어쨌든 기독교 그 뿌리를 구약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떤 연속성을 가지느냐 또는 어떤 불연속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l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할례를 받는다는가 율법을 지키는다는 것은 사실은 자격과 조건으로 요청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허락된 혹은 요구된 영광된 직무였습니다.

 

l  자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겐 하나님이 더 가깝게 당신을 나타내 주셨고 거룩함에 대해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저들이 그 직무를 그 영광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l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이방인과 자신들을 차별화 하는 데는 썼어도 즉 자기네들의 우월한 조건으로 자격으로 이해를 했지 그 은혜로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메시아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러 왔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l  16:1~3

 

l  디모데는 그 아버지가 헬라인임에도 할례를 주었고, 디도는 유대인이매도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

 

l  기독교의 복음은 종교적 제한이라는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원한 복음이라하는 사실입니다.

 

l  기독교 복음에 놀라운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질 수 없는 짐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제일 해가 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죄책감입니다.

 

l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점은 여러분이 어떤 잘 못에 처해 있더라도 회개하면 됩니다. 이걸 가볍게 쓰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해결책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있고, 이미 이루셨습니다.

 

l  기독교 신앙의 긍정적인 측면에서 또다른 놀라운 점은 우리는 사실 자기 하나를 섬길 실력도 없는데, 자기의 죄책을 가리고 자기의 자책을 벗어날 실력이 없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원과 이 신비한 능력을 섬 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l  고전 9:19

 

l  복음에 어떻게 참여하나요. 스스로를 절제하고, 희생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유로, 자기이익이나 자기 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l  6:17~21

 

l  우리를 의의 종으로 바치라, 우리가 누구에게 순종하던지 그것의 종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신앙을 판단하고 규정하고 소원하는 여러분의 신앙에 대한 책임을 보시면, 여러분이 자신에게 부과한 신앙적인 책임들이 영광스러우냐 이렇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l  영광스럽다는 것은 이웃과 같은 믿음의 동지들에게 그것이 함께 감사한 일로 받아들여지느냐 라고 물어보시라 그런 뜻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부과한 그 자유로운 결정들이 모두에게 감사 거리가 되는가 보라 이겁니다.

 

l  우리는 우리의 신앙, 복음의 진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준 은혜가 우리를 만족시키고 흘러넘쳐 내 이웃과 함께 나누기 충분한 자유로 기쁜 순종으로 연결되고 있는가 한 번 돌아봐야 되는 것입니다.

 

l  2:23

 

l  예수께서 안식일에 주인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안식일이 원하는 요구와 안식일이 제정되어 주려는 복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이 가지는 요구와 복에 완성이십니다.

 

l  예수님의 오심,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안식일로 요구되는 요구나 안식일로 제시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들에 완성이십니다. 그러한 면에서 보면 신자는 주인으로 서갑니다. 모든 신자는 그 삶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그 승리와 완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l  삶의 모든 정황과 모든 경우에 대하여 신자만이 하나님의 백성만이 그 삶에 대하여 올바른 답을 제시하고,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주인입니다.

 

l  우리를 희생해서라도 나누어야 할 우리의 신자된 진정한 의미와 가치들과 약속된 은혜를 나누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1~10

교회의 일치

 

l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 나온데로 유대로 부터 어떤 형제들이(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이것이 예수를 믿으면 된다라는 기독교신앙과 크게 충돌하여 문제가 되어 예루살렘까지 바울과 바나바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l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말은 그쪽의 사도가 더 권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올라갔다라는 말을 이것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l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올라갔다는 것은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과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 구별된건이 아니고 한 복음이다 그래서 내가 예루살렘교회를 찾아 올라간 것이다 입니다.

 

l  15:6-11

 

l  이방의 구원은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 백성으로 예수안에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처음 베드로가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방을 향한 복음의 첫 문을 연자는 오해의 소지를 없기 위해 하나님이 베드로를 쓰셨습니다.

 

l  15:12-21

 

l  우리는 구원얻는일에 다른 아무런 율법적 조항을 인간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복음에 내용에 일치하는 줄 아노라,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l  이러한 것 들이 조건으로 이 것만은 지켜야 된다는 아닙니다. 물론 해도 좋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입니다.

 

l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입니다. 음행을 하지 않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거룩으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이것들이 쓰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l  21절 유대인과 충돌하지 말자 입니다. 아직도 유대인 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구약으로부터 이어진 약속 속에 그 약속의 핵심인 예수를 믿는 복음을 전하는데, 쓸데없이 충돌하지 말자 입니다.

 

l  교회의 일치와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행15:20절의 내용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l  본문으로 돌아와 바울이 하고픈 얘기는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듯이, 나는 이방인을 위하여 복음의 사도로 부름 받았는데, 이방인을 위한 사도는 유대인의 사도보다 지위가 낮다라고 생각하지 마라입니다.

 

l  교회의 일치라는 것은 묘한 것인데 마치 할례를 요구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 것 같이 생각하지 마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복음은 공평한 것이요,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조건상 차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러 간 것이다.

 

l  이러한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하면, 이러한 문제들을 어느시대나 조금씩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만들고 있어서 입니다.

 

l  교회의 일치, 신자의 일치라는 것은 신자들간의 동의를 근거로 하여 일치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분 구세주로 하여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l  교회의 일치는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간에는 언제나 일체성이 있습니다. 근거적,그 목적성에 따른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유일하고 동일한 근거와 과정과 목적으로써 교회는 하나될 수 밖에 없습니다.

 

l  교회라는 곳은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보이는 공동체로 모인 곳입니다. 이 보이는 공동체는 물론 그 본질과 근거를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치를 그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l  인간의 한계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근거로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방향,근거,확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l  그래서 교회의 일치라는 말이 획일성과 완벽성을 가진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의견이 다를때, 취향이 다른 문제로 우리는 결단코 싸울 수 없습니다.

 

l  주일을 준비해서 오는 만큼 여러분의 복입니다.

 

l  교회안에서는 교회의 일치가 종종 충돌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말인지 알고 상대방이 듣자마자 감격해서 나도그래 하고 손을 잡는 것으로 일치가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l  그게 무슨말이야 난 달라 왜 나보고 뭐라고해, 내가 오늘 오죽하면 버선발로 여기를 뛰어 왔겠어, 라는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는데 교회의 일치가 있습니다.

 

l  이 사람의 고단함과 절절함이 예수를 향하여, 예수를 필요로 하여, 예수가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버선발로 여기를 오게 했구나 라는 것에 일치의 근거를 발견하는 것이지,

 

l  너 왜 복장이 그래, 너 태도가 그래, 너 기도하는데 눈 뜨고 있어,에는 싸움의 본질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싸워 보셨습니까? 얼마나 하찮은 일로 싸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l  2:6 - 10

 

l  유력한 자가 어디있냐 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고, 은혜를 필요로 한 자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사역이나, 바울의 사역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 사람이지, 우월감을 가지거나, 어떤 우선권 가진 사람이 아니였다. 그 이야기 입니다.  

 

l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현실적인 문제였고, 그것을 해결한 성령님의 간섭이 유지시킨 교회의 일치입니다. 4절 거짓 형제의 들어옴 조차도 교회의 일치에 도움이 되었지 손해보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l  우리는 교회의 일치를 조직,제도,이러한 것으로 이루어 내려고 해서는 않됩니다.

 

l  교회내에는 실제로 알곡이 아닌 사람들이 들어올수도 있고, 실제로 알곡이지만, 아직 꽉차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실력없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l  실력있는 사람이 그것을 감내해야지, 아무에게도 아무소리를 듣지 않는 완전한 규칙과 제도를 만들면 그 안에 아무도 살수가 없는 교회가 됩니다.

 

l  자신의 확인이 누구를 정죄하는 것 위에 서있는 만큼 불행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누가 마음에 안드시면 웃으십시요, 그리고 교회에 다양한 사람이 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요

 

l  고전 12:12 – 27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

 

l  이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신자됨을 확인하는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그것을 확인하고,그것으 누리시고, 그곳에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의 순종에 내용을 추적하십시요 그렇지 않으면 금방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그러면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l  고전 10:23-24

 

l  여러분 예수 믿어서 멋있어 진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요

 

l  고전 10:31-33

 

l  예수 믿는 우리가, 한국교회가 우리 시대와 사회 앞에 예수 믿으라고 목청껏 소리 질렀고, 고함을 질렀는데, 사람들이 보고 항복할 일은 미처 못따라 온 것 같습니다. 고함 지른 것 만큼 실력이 못따라 온 것 같습니다.

 

l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정말 대단하구나 라고 할 수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물론 윤리적이고 종교적이여야 하지만, 딱 만났을 때 인격적,습관적 모습이, 몸에 베어 있는 냄새가 그래야 됩니다.

 

l  예수 믿는 일, 평탄하다는 약속은 없지만, 불만이라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일은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을 놓지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증언할 다른 방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가지는 충분성

                                                  

l  갈라디아서에 등장하는 복음의 진정한 내용을 오해케하는 율법행위 특별히 할례로 대표되는 사건을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너무 이론적이고 쓸모없는 듯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에 약점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복음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깨우침과 뉘우침의 기회가 될수 있습니다.

 

l  11,12절에서는 베드로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닌 문제로 유대교의 율법 및 민족주의와 충돌을 없이하려고 자리를 피하는 장면입니다. 유대인이라는 것이 뭔가 하나님 앞에서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케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가지는 충분성을 손상시켰다.그것이 더 큰 잘못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l  15절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죄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l  믿음 문제가 즉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이 부분에서 강조되냐하면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라는 문제의 개념을 가지지 윤리적,도덕적,종교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l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주셨다는 이 기가막힌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 사실입니다. 내가 지식으로 노력해서 깨우친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더란 말입니다.

 

l  성경에서 믿음을 선물로,은혜로 주셨다는 것은 조건이 없다는데 모든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사실 받았다 그 이야기 입니다.

 

l  여러분이 신자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사실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현실이 증명을 합니다.

 

l  우리는 믿음을 우리의 노력을 다 동원해야 할 신자의 신앙의 책임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길들일 수 있거나,지배하거나,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l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드는 식으로 믿음을 사용해선 안됩니다. 나는 믿음을 가졌으니, 나는 기도했으니, 하나님은 답하셔야 합니다. 라는 조건으로서는 믿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l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줍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필요를 모르는 무지함에 처해도, 필요를 알지만 답할 수 없는 무능함에 있을 지라도, 여러분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l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여러분이 생산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l  믿음은 또한 자기긍정이 아닙니다. 신앙은 믿음,확인,격려가 아닙니다. 자신을 덧칠하거나, 자기안에 어떤 영성을 만드는 싸움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온것입니다.

 

l  믿음으로 라고 하는 말은 나에게 아무런 조건과 자격이 없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어코 하시고야 말, 복음으로 나타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신, 십자가로 증명하신, 성육신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우리 아버지 되시는 신실하심과 열심에 근거하여 그것을 내용으로하여, 우리가 믿고,알고,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l  6:1-2

 

l  그러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열심을 내며,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나옵니다. 무책임으로 귀결됩니다.

 

l  그때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참된 믿음은 책임을 가지며, 겸손을 가집니다. 우리가 만들지 않은 면에서 겸손해 집니다.

 

l  책임은 어떻게 나오는가, 믿음의 성공은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의 선하심과 기뻐하심을 목적하시고 이루시기 위하여 베푸시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독선을 버립니다.

 

l  독선을 버린다는 사람과의 관계로 비교우위를 점하는데 기독교 신앙의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l  하나님이 나를 목적하고 있어서 찾아온,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자신의 존제를 확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l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나를 찾아내고,구원하고,당신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사망의 자리까지 찾아오신 사실앞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인격은 없다. 라는 이유 때문에 책임을 만들어 냅니다.

 

l  신자의 책임은 우리가 아무것도 않해도 이 사랑은 주어진다 라는 무인격 무감정의 차원을 벗어난 인간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의 사랑과 찾아오심이라는 것으로 확인한 반응인 것입니다.

 

l  믿음은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의에 대하여,그의 신실하심과 그 진심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마지막에 꼭 순종으로 나타나고, 감사로 나타나고, 열심으로 나타납니다.

 

l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 표정이 다릅니다. 그 눈동자가 꿈꾸는 자와 같습니다. 사랑에 취한자의 믿음은 결단코 규칙이나,율법에 억매이지 않습니다.

 

l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로 세웁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자신이 사는 세상앞에 펼칠수 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15~21

 

믿음과 사랑의 자리로 부른 하나님의 능력

 

l  개혁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 입니다. 일반적 표현으로는 구원을 받는다.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받는다.

 

l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기독교 복음과 구원,실천 이런얘기는 우리의 구원이 무엇을 목적하느냐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l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구원의 경위,구원 받은자의 감동을 요구받게 됩니다.

 

l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이 되었다에 초점이 있습니다.

 

l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이 왜 예수를 보내어 당신을 구원하였느냐에 전 초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구원이 왔느냐가 아니라 예수를 보내어 왜 구원을 했느냐 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l  사도바울은 너희가 무엇으로 무엇을 위하여 부름을 받아 놓고 어디 출신이냐를 따지느냐 입니다.

 

l  교회공동체,신앙공동체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너는 어떻게 왔느냐, 너는 원래 무엇이었느냐 라는 얘기를 개인적으로 간증할 수 있지만, 한 순간에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신 것을 다른 것으로 대채되어서는 않된다 입니다.

 

l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은혜로 부른 것인데 은혜란 조건과 자격을 묻지 않은 은혜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예수 안에서 만들어 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능력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l  5:6

 

l  믿음과 사랑으로 부름을 받았다.입니다. 이것은 원래 방향과 목적이 없었던 우리의 생내적인 자질을 하나님을 위하여 쓰도록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생내적 자질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뜻을 이룰 아무것도 없는 자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이 되게하고, 사랑케하고 믿음으로 살게하는 자리로 하나님이 불럿다는 것입니다.

 

l  2:20

l  19절에 율법에서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내 능력과 내 의지에 근거로 해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방법과 수단과 내용과 목적으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께 위임하고 사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l  우리는 16절의 이신칭의 말씀이 부흥시대의 감동적인 회심,결단으로 자주 연결되듯이 20절 말씀이 마치 내가 그렇게 다 살아내지는 못하지만, 내가 믿음안에서 내 자신의 신앙을 다시한번 확인하노라 이런 감상적인 자기확인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l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용하면 오늘 본문이 하려는 말씀이 빠지게 됩니다. 19절에 있는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다 입니다. 나는 나를 부르신이가 주인이라서,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 입니다.

 

l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데 현실은 어디냐 하면, 천국이 아니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으나, 몸은 아직 육체안에 있고 세상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l  그래서 끊임없이 새 주인을 섬기고 사는 일을 보이는 세상이 나를 시험하고 유혹하고 위협하는 세상에 있지만, 그러나 나는 보이는 것에 굴복하지 않겠노라 입니다.

 

l  물질적인 확인,육체적인 확인으로부터, 영적인 거룩으로 부름을 받아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사는 자의 순종이라는 싸움을 또는 훈련을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에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지금 육체안에 산다는 데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불평도 의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 입니다.

 

l  하나님께서 예수안에서 우리를 불러다는 아주 큰 위력은 지금 내가 육체안에 있고 보이는 세상 가운데 당하는 모든 시련과 위협을 극복하는 힘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l  세상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고, 흔들 수는 있지만, 세상이 우리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안에서 이런 것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2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산다고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면 아무런 고통도 없고,의심도 없어야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l  우리는 믿음의 승리가 고민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날이 추운데 땀이 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의 위협과 시험속에 있는 것과 이것에 지는 것은 다릅니다.

 

l  공격이 묘해서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갈등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귀한 것입니다. 성경에 얘기하는 것은 우리는 육체 가운데 있습니다. 시련속에,시험속에 있습니다.

 

l  그러나 그 시련과 시험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문제에 손해 보는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안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l  죽음안에도 부활의 승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음에서도 부활생명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주인으로 섬긴자로 서있는 것입니다.

 

l  하나님이 거룩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사 우리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우리를 합당케 하기 위하여 예수안에서 부른 자들입니다.

 

l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육체 가운데서 늘 이 일을 확인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생명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인으로 섬기며 산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l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 사랑하고 믿으셔야 합니다. 믿음생활하십시요. 교회공동체가 사랑하고 믿음생활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마십시요. 다른 곳에 여러분의 관심과 신앙을 빼앗기지 마십시요

 

l  여러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기억하신다면, 오늘의 이 말씀이 늘 힘이 될것입니다. 아멘하고 무릅을 칠일이 매일 여러분의 현장에 계속될 것입니다.

 

l  하나님이 여러분 각 개인을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 안에서 부르셨다는 그 힘을 믿으시고 여러분의 육체안에서 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사는 이 일을 막을 자는 없노라 고백하시는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기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