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ion on Bible/Galatians(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 박영선 - 제1장

Four Seasons Daddy 2022. 1. 25. 12:46

 

 

                                         

갈라디아서 1:05~05

 

                                            

신앙고백의 근거 :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안에서의 은혜

 

l  갈라디아서의 갈라디아라는 지방은 지금은 터키, 당시에는 소아시아라고 불리우는 터키의 중부지방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위기가 닥쳐 와서 갈라디아서 라는 서신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l  사도바울이 급한마음으로 또 위기의식을 가지고 썻다는 것을 6,8절에서 나타난 것 처럼 강하고 단호하고 급박한 경고와 질책을 하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 입니다.

 

l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분노하게 하고 마음에 큰 위기로 느끼게 한 잘못된 기독교 신앙, 복음을 변질시킨 내용은 다른 신을 쫏는 다는가 혹은 다른 교훈을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자체를 변질시킨 것인데, 그 변질이 은혜에 행위를 덧붙이려는 문제였다.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l  기독교 신앙의 복음된 내용은 1절에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고, 4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것이다 라는 두 표현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l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다.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허락된 것이다라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근거로 밝히는 것입니다

 

l  기독교 신앙을 정리하는 신학적인 근본원리에 두가지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조하는 신학이 있고, 인간의 이해와 인식으로 부터 출발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l  뜻 밖에도 기독교 신앙은 믿는 것도 어렵지만 자기가 믿는 바를 정리하는 것도 사실은 어렵습니다. 인간은 자기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식론적인 출발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자기이해, 자기경험으로 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l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인간의 인식론과 경험을 근거로 한 신학을 주장하고,그 토대위에 신학을 정립시키고 있는 것이 큰 신학적인 흐름가운데 하나입니다.

 

l  그러나 제가 속하고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우리 신학의 원리와 내용은 하나님이 기독교 신앙에 근거자이시다. 그분이 시작하셨다 라는 걸로 신학을 세우고 있고 신학의 근본원리를 삼고 있습니다.

 

l  우리가 무엇을 논하려면 한 개인이 가지는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감격과 그 항복 정도가 증언에 힘을 주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보면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하여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그 사실이 얼마나 보편적인 진리이냐 또는 얼마나 큰 권위를 가지는 가 (권위라는 것은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더 큰) 내용이며 근거가 되고 신뢰 할 수 있는 것이 되느냐 하는 것이 이해한 것 보다 나중에 더 확인 해야 될 초석이 되지 않겠습니까.

 

l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 안에서 회심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고 구원받는 자의 감격과 하나님을 아는 기쁨과 허락된 신앙속을 걷는 삶의 신비, 감격 이런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l  그러나 그 감격이 정말 내 삶을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른 기독교의 신앙으로의 부름이 세상이 말하는 것 보다 더 크냐, 절대적이냐 하는 것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우리의 이해나 우리의 감격이라는 것은 사실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l  믿음의 초기에는 기독교에 관한 증언과 확인은 이런 감격과 이해 경험에 근거한 간증 들이고 또 나의 간증 들이 주를 이룰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느끼다시피 감동이라는 것은 그렇게 큰 힘을 오랫동안 발휘하지 못합니다.

 

l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 보다 더 큰 진리와 더 큰 견고한 더 큰 권위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그것이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지는 힘, 위협, 협박 보다 더 크냐 하는 문제는 쉽게 경험 되지 않습니다.

 

l  우리가 가지는 기독교 신앙의 첫 확인과 감동이 경험적이고 인식론적 인 데서 출발했다고 해서 그것이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세상 앞에서 내 감동이라는 것 내가 한 경험이라는 것이 삶에서 늘 확인되고 보상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쉽게 식고,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다 경험합니다.

 

l  그때에 우리가 더 깊이 확인하고 요구 할 수 밖에 없는 게 뭐냐하면 내 감격,확인,경험 들이 내가 감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큰 그 내용. 그 내용을 허락하시고 주관하시는 더 큰 믿을만한 근거속에 있지 않다면 나의 확인과 이해라는 것은 별게 아니라는 자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l  신앙생활의 우리가 가지는 모든 시험은 이것입니다. 내가 분명히 하나님을 만났고,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있는데, 그것이 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l  우리가 경험하고 감동스러운 나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구원과 신앙의 근거로는 확인될 수 없습니다. 그럼 진정한 우리 신앙의 근거는 무엇이 얻는가 할 때 하나님이 근거였다 이거죠 바울이 얘기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l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너희가 선택했고, 너희가 믿었고, 너희가 결정해서 시작됐고, 성립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생각 없었던 때에 하나님이 먼저 준비 하신 것이다 입니다.

 

l  영원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그의 은혜로 우리를 자기의 자녀, 백성을 삼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고백과 그 감격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l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기독교 신앙의 근거요. 신학의 근본원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라고 주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죠

 

l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맘대로 하신다 라는 하나님의 조작의 권리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만드신 이로써의 권위자시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베풀고 우리에게 사랑을, 신앙을 요구하시는 신실하시고 선하신 사실이 기독교 신앙을 가능하게 했다

 

l  그러면 우리의 확인과 감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당신을 나타내시고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를 자녀삼으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신앙고백과 감격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로 보는 것이 종교개혁가들이 이야기 입니다.

 

l  11:33 하나님의 주권

 

l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의 감격과 확신과 의지와 결정들은 우리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현실에 부닥칩니다. 내가 가진 믿음을 내 힘으로 시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l  여기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가지는 특별한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기독교신앙과 그 고백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사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허락하신 것을 간섭해서 이루어 승리케 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l  이것은 우리에게 왜 중요하냐, 우리는 이 믿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 해 놓고서도, 우리가 우리의 확신과 의지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내지 못하는 걸 보면 우리는 자꾸 규칙을 만듭니다.

 

l  이 규칙은 자기를 성찰하는데 쓰이면 좋지만 우리의 규칙은 자기 근거로 늘 작용하기 때문에 늘 경계해야 됩니다. 나는 열심히 기도해서, 나는 열심히 성경봐서 여기까지 왔다, 라는 근거로써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고, 그것이 근거로 작용하면 십자가가 많이 필요치 않은 존재로 독립하게 됩니다.

 

l  그곳에는 자랑이 생기고 은혜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됩니다. 당신이 신앙적인 어떤 경지 못가는 것은 신앙적인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다 당신이 부족한 탓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l  기독교가 힘을 잃는일은 무엇으로 당장 들어 나느냐 하면 자랑과 정죄가 늘어나며, 감사와 겸손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됩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더 깊이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l  그 은혜를 사모하는 데 있습니다. 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고, 나보다 뒤떨어진 신자에 대하여 결코 정죄할 수 없게 됩니다.

 

l  고전1:26 - 31

 

l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하는 것은 기도가 조건인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구하여 하나님께서 주셨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l  갈라디아서 11절에서 5절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안에서의 은혜 입니다. 예수가 모든 우리 신앙고백의 내용과 약속의 근거이시다 라는 얘기입니다.

 

l  나의 거룩함과 신실함은 예수 안에 있으므로 해서 나의 것이 됩니다. 누가 더 자신을 예수안에 넘기느냐에 따라서 예수 안에 있을 수 있는 것들 것 나의 것이 될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신비함입니다.

 

l  나에게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과 예수 안에서의 은혜 때문에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것은 실패와 파멸로 패배로 끝날 수 없다. 라고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l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고백이 그 내용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l  우리는 이 일들에 산 증인입니다. 처음에 여러분이 시작한 기독교의 신앙의 감격,확신 들이 여러분을 지탱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때의 확신이 시시작한 것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입니다.

 

 

 

 

 

 

갈라디아서 1:06~10

 

복음의 본질이 나의 신앙고백의 실천으로 순종

 

l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허락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주신 구원의 복음이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에 관한 것 입니다.

 

l  복음의 진정한 본질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였다는 것하나님이 불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문제라는 두가지 본질입니다..

 

l  사도바울이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우리안에 근거를 갖고 싶어한다는 것이 본질적인 죄성입니다.

 

l  우리에게서 근거를 갖고 싶다는 이야기는 교만이나 자랑한다라는 것보다 훨씬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시고, 주인되신 것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안에 가치가 있는 것, 자기의 필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l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에 결과되는 것은 사망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을 만드시고 하신 경고입니다. 저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입니다.

 

l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는 것으로 내용을 삼거나, 목적을 삼으면 우리는 영원할 수 없고, 하나님이 목적하신 영광에 이를 수 없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믿지 않는자와 믿는 자의 차이입니다.

 

l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온전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의 자리로 부름받고 있고, 그렇게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것이지요

 

l  인간은 수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 한데로 죄값입니다. 죄란 하나님 없이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영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기독교 복음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l  우리는 다른 종교를 비난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도 부활과 영생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증명된 죽음에서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로 증거한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모든 종교는 구별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인 것입니다.

 

l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입은 복음에 은혜는 하나님 앞에선 나 입니다. 거룩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에 순종하는 자세로 서있가 라는 문제입니다.

 

l  사도바울은 복음이 가지는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 복음이 가지는 능력이 결실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지옥갈 것을 천국으로 간다는 이야기 힙니다

 

l  예수그리스께서 사망의 그늘진곳에, 흑암의 자리에 찾아온 것 같이 그리고 우리를 땅 끝까지 보내신 것 같이 우리가 태어난 곳이 나 살기 편하고 나 가만히 있어도 되는 환경과 조건으로 보냄을 받은게 아니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진노의 자녀며,심판받을 족속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l  우리의 삶에 모든 고단한 것들은 환경의 잘못이나, 시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그 곳에 예수그리스도가 오시듯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빛이고 소금인 것입니다.

 

l  여러분은 모든 짐을 떠안으셔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l  우리는 이 부분에서 복음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불만은 다른 것 입니다.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무한이 유한으로 오신 것입니다.

 

l  하나님의 우리의 이 무거운 갑옷을 벗겨달라고 우리는 기도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시기를 저도 소원합니다.그러나 우리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걸으신 길로 부름을 받습니다. 복음으로 말이죠

 

l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고통스럽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걸을 길입니다. 고통을 면하고 죄아래서 이기적으로 살고 독선적이고,폭력적으로 사는 것은 복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생입니다.

 

l  사도바울은 너희들이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고 있는지 보라 이것입니다.

 

l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룩함으로 사는, 부르심의 거룩함의 승리로 만족해하는 그 기쁨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가 이땅에 온 이유이다. 나의 기쁨이니라 나의 양식이니라

 

l  실천적 차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인 이해로 신앙고백이 되어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놓치고 있다면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과 차이가 없습니다.

 

l  우리는 신앙을 주문처럼 쓰려하고, 이웃들 앞에서는 권력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주문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내 모든 소원이 이루어져서 내 이기심이 만족되어지길 바라고, 폭력적으로 쓴다는 것은 아무도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마음이 없이 상대방을 정죄하고, 책임을 떠 넘기고, 비난해서 자기 혼자 편하겠다고 하는 참으로 무책임한 발상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l  우리는 어느시대나 이 실수를 범해 왔습니다.그래서 갈라디아서가 이 성경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l  우리는 복음을 다른 것으로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병낫고, 가난을 면한 다는 것을 여러분의 기도가 열납받았다는 것에는 쓸수 있지만 복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l  복음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어 예수안에 있는 은혜로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삶과 채우시려 내용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가에 문제입니다.

 

l  실천적으로 완벽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이해하여 부르심에 자신을 순종시키려고 매일 자신을 쳐 복종하며,회개하며,아파하며,갈등하며 노력하는 가 하는 문제입니다.

 

l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여러분이 받으려고 만 하면, 사랑은 경험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하셔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누구 때문에 안돼는 없습니다.

 

l  당장에 변화되지는 않습니다.하지만 안목과 분별과 방향에 있어서만은 분명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여러분의 신앙고백에 전제되어 하는 말입니다.

 

l  예수안에서 주신 복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부르신 일을 떠나지 마십시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복음의 능력과 복음을 허락한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거의 분노로 쏫아져 나온 표현들입니다.

 

l  그의 진정어린 표현들이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되고,결과되고,누려지고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11~17

 

나의 죄성을 이기는 힘 복음  

 

l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들어온 율법주의에 대하여 사도바울이 복음과 다른 것에 대하여 분노하듯이 써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왜 복음이라고 불리우는가, 그리고 신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l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은 하나님을 누구인지를 안다 입니다. 예수안에서 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 입니다. 논리성이나 감동,경험으로 알지 않고  

 

l  신적기원을 은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내가 받을 만해서, 노력해서 받은게 아니라고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l  은혜가 아닌 것을 은혜라고 말하면, 은혜는 감사를 부르지 않고 자랑을 불러 냅니다. 윤리적 차원이 아닌 자랑은 근거가 자신에게 있는 것에 대한 숨길수 없는 증거입니다.

 

l  은혜는 내가 하지 않은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은혜는 늘 오해를 낳습니다. 기도했더니 응답되었다. 응답의 은혜가 기도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입니까

 

l  하나님이 이 일을 작정하셨고, 이 일을 하시겠다고 목적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l  1:3 - 6

 

l  하나님 자신 만이 기독교 신앙의 원인이시고,근거이시고,창조자이신 것을 성경이 강조합니다. 그래야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내용을 채울수 있습니다.

 

l  왜 예수그리스도가 기독교신앙의 근거이며,확증이며,기원으로 대표되야 하느냐, 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준것이기 때문에, 성부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구원과 약속들은 그 아들을 주시는 것으로 확증되고 계시된 사랑이라는 성품이 가장 강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l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신을 정죄할 수 없는 자리에 부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나의 못난 것으로 나를 내어 주지 않겠다 입니다. 절망과 자폭으로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 입니다

 

l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 예수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여러분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l  문득 내가 이러고도 신앙인이라는게 말이 되냐 하는 자책앞에 섭니다. 차마 저꼴은 못보겠다하는 말이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못 볼 꼴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에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시거든 못 넘어갈 것은 없습니다.

 

l  5:1-8

 

l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였을 때에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괴로운 현실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입은 자인 줄 알지만, 사랑으로 답할 실력이 없습니다.

 

l  그래서 이곳에 배우게 됩니다. 환란속에서, 자책과 절망 속에서 나에게는 나를 만족시킬 실력과 근거가 없다를 배웁니다. 환란이 만들어내는 인내와 연단입니다.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몰아 냅니다.

 

l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찾아오신 그리고 약속하신 관한 것이다. 잊지마라. 입니다. 그건 초대교회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일일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우리 인간이 가진 종교적 본성이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분명히 해야 합니다.

 

l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 때문에 들어오는 시험이나 협박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가지는 자존심과 자만을 위하여 들고 일어나는, 말하자면 자기고백 이요 자기 욕심입니다.

 

l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 될 때에 우리는 이 죄성을 극복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대하여 진정한 내용을 이해하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1:18~24

 

예수그리스도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

 

l  갈라디아교회는 율법주의로 돌아선 교회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율법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지적과 꾸중을 하는 장면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 본성상 쉽게 이해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l  우리는 쉽게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감격스럽고, 형통한 것이고, 소망에 관한 것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감격과 확신, 형통과 소망, 기쁨이라는 것들은 무엇을 근거하느냐, 어떻게 확인하느냐 할 때, 자신의 확인법이라는 것이 성경을 떠나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게 되는 것이 교회사 속에서의 교회들 안에 있는 위험이다 그런 지적입니다.

 

l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기가 사도 된 근거를 복음의 능력에 두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입니다. 내가 사도 된 정체성은 내 실력,의지,주장,이념의 연장 선상에 있지 않음에 있다.

 

l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닌 뭔가 나 외에 밖으로 부터의 신비로운 어떤 힘에 의하여 내가 이자리에 서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180도 방향을 돌리게 했느냐,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신 것이고 복음이 갖는 진리와 능력이라 이렇게 자신을 설명합니다.

 

l  왜 이런 설명을 하는 걸까요, 기독교 신앙은 늘 이 감정이라는 문제와 신앙적 헌신이라는 문제가 중요한 신자 된 정체성 확인에 기준으로 등장을 합니다.

 

l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 고백과 그 주변에서 보는 확인할 수 있는 신빙성있는 무슨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본인의 확신과 헌신이라는 것은 늘 기독교 신앙을 점검하는 일에 또는 신자 된 정체성을 점검 하는 일에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l  그러나 여기에 어떤 위험이 있냐면, 이게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를 믿었다. 내 헌신된 것을 보라, 이런 헌신을 해야 참다운 신앙고백이다 라는 나는 이런 헌신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라고 연결될 수 있습니다.

 

l  종교개혁 이 후에 기독교 교회사는 줄 곧 복음주의와 신학과 싸움을 합니다. 감동과 진리의 싸움, 감동과 사실의 싸움, 조금 더 성경적 표현을 쓰면 은혜와 진리가 싸움을 합니다.

 

l  생명력을 불어 넣자와 진리를 공고히 하자 라는 것은 교회사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 합니다.

 

l  이러한 이야기가 왜 필요하냐 하면, 우리는 종종 한 신앙 공동체 내에서 또는 개인의 경험 속에서 까지라도, 신앙을 확인하는 일이 이런 개인 체험이라는 것만으로는 다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본인과 주변에서 다 경험 하셨을 겁니다.

 

l  우리가 신앙의 생명력을 요구 했을 때와 진리됨을 요구 했을 때, 은혜와 진리라는 것이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끔 놓칩니다. 은혜가 진리를 공격하지 않고, 진리가 은혜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l  감동이 사실을 공격하지 않고, 사실이 감동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l  1:14

 

l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손을 잡는 정도가 아니라 충만하다. 은혜도 진리도 충만한데 한 육신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사의 증언은 우리가 은혜와 진리를 교회가 다 확보하지 못하고 늘 싸웠다는 것입니다.

 

l  복음이란 것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안에서 허락된 능력이라는 것을 놓치고 교회가 스스로가 감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리가 부족하다 던가 진리는 알고 있는데 실천을 못하는 왜 힘을 잊고 있나 하고 꾸짖고 있습니다.

 

l  진리로 감동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진리를 논할 때는 그 진리는 생명력을 가져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l  4:1~6

 

l  예수 안에서 허락된 믿음에 대한 헌신에 집중하고 있다. 한 예수안에 있다라고 받아내실,담아내실 신앙적인 이해가 있어야 되고, 한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편이라는 것을 놓치면 않됩니다.

 

l  우리는 사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성경대로 잘 정리하고 갖고 있어야 됩니다. 자신을 위하여 함께 부름받은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그렇습니다.

 

l  그리스도 안에서 다투고 있는 거라면 그건 그 싸움을 빨리 멈추셔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자와 밖으로 나가자는 싸움이면 끝까지 싸우셔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의 유일한 이유입니다.

 

l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신비를 위대함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되었지만 갖고 있는 것 그 중에 일부를 이해하고 있고, 그 중에 일부에 편중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l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싸움이냐 그리스도 없어도 되는 싸움이냐는 중대한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걸 점검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이 자신에게 요구하고,의심하는 ,절망하는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l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케 하셨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가치이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위로요 경고입니다. 우리와 함께 믿음 생활하는 모든 그 시대의 신자된 형제들과 우리를 쳐다보는 세상앞에 우리의 분별이고 분명함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