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1~6)
말씀의 은혜와 실질적 신앙생활의 연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먼저 예수를 만나고 그리하여 영혼이 깨우침을 받고, 감격과 고백 속에서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전에도 성경을 읽지만 이런 커다란 확인 항복 은혜 위에 성경을 다시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종교성이 가지는 헌신 도덕성 종교성등 같은 열심이 더 하여져서 우리는 성경을 문맥 없이 읽는데 익숙합니다. 문맥 없이 읽는다라는 것은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전제를 가지고 읽게 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왜 여기에 쓰여져 있는지 앞뒤에 대조가 없고 역사적 배경이나 이 말씀이 나오게 된 경우와 같은 문맥이 무시된 채 옳으신 말씀에 줄을 그어서 외워서 언제나 필요할 때 고백과 권면으로 들이대는 이런 확고한 파편화된 교훈들로 우리의 확신과 책임이 발휘된 셈입니다.
그 말씀이 왜 나왔는가를 알면 그것이 현실화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하는 발언이나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 책임이 분별과 안목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외운 정답들이 현실의 정황 속에 손을 잡지 못하여 고백도 있고 헌신도 있고 간절함도 있지만 지금은 어떻게 연결해야 되는지 몰라서 절망과 비명이 한쪽에 있고, 한쪽에 기대와 소원이 있는 것이 연결되지 않은 채 따로 놀게 됩니다.
우리의 성경 읽은 법과 우리의 믿음 이해도 균일하고 담아낼 수 있는 문맥에서의 이해들이 부족해서 신앙생활의 현실적 도구 방법 지혜 같은 것들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꾸짖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꾸짖는 것을 반발한 무리가 자기 내 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역공을 취하여 사도바울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라는 공격으로 돌아선 일에 대한 사도바울의 꾸중입니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하는 문제는 율법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방식으로 판단한다. 율법은 잘 잘못의 기준이다.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는 회복하고 새롭게하고 살게하고 영광으로 더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최선 그가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어떻게 나타낼 것이냐는 것에서 그는 우리와 함께 수치와 죽음을 겪는 길로 우리 편을 들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냅니다.
우리는 사실 세상에서 우리를 비웃는 어떤 말들 ‘너는 쓸모없어, 너는 사람도 아니야’ 라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우리 믿음의 식구들과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그것을 비난으로 정죄로 쓸 필요가 없다 라고 사도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사도적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한 복음이 어떤것인가를 설명을 하고 그 일을 예수께서 열어 놓은 것 같이 이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여기 있다 함으로써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바로 그 방법 왜곡 수치 고난을 홀딱 뒤집어 써 이 답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최선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최선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마다 우리와 동일시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의 길 우리를 끌어 안으사 나의 자책과 회환을 반전시키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오늘의 실패도 오늘의 부끄러움도 그것으로 끝장내지 않고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매일 주어진 최선, 믿음이 하는 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런 믿음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공동체에서도 늘 위협과 시험을 받는 것이 세상적 가치관 쓸모 있고, 유능하고 잘난 사람을 칭찬하느라고
그런 자리까지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못난 자리 아무것도 아닌 자자리 부터 한 사람을 불러 그의 시행착오와 못남과 비겁과 회환을 끌고 가서 기어코 영웅을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업적을 남긴 후에야 보상하는 그런 자리로부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자신을 가지고 믿음에 식구를 대하는 ‘놀랍잖아 저 사람 예수를 믿고 교회에 와서 앉았어’그거면 충분하다 하는 눈빛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뭘 더 잘하고 싶습니까! 잘하고 싶은 것이 우리에게는 못난 사람을 째려 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데는 늘 우리를 실패께 하지 않습니까. 못난 자를 비난하므로서 간신히 채면을 유지하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신앙의 현실이라는 것은 대부분 자책속에 있고 원망속에 있죠 더 잘하고 싶은데 되지 않는 자책과 하나님 왜 내 진심을 받아주시지 않아서 오늘도 왜 가슴을 치게 만드싶니까,
그리고 왜 난 좀 더 좋은데 가서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고 인생을 살게 놔두시 않으시고 이상하게 왠수들만 만나게 하십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기도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좀 더 편안한 자리를 자책하지 않는 자리를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라는 간구가 최고의 간구인 현실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라. 누구 잘 하는 사람이 있거든 너도 그 길로 하나님이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것은 옛날 영웅과 전설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다 권능이다 이렇게 획인하는 것이지죠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됩니다. 가장 나쁜 것이 체념이 늘어가는 것입니다.신앙생활은 보기보다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가지는 기대보다 실천이 늦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그 기대와 이상이 앞질러가기 때문에
여러분이 신앙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계속 끌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퇴보하는 것 같고, 처음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 같아서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비난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만하지 마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서 나도 안하고 너도 하지마가 됩니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치기 만만하게 하시고 그보다 실력있게 하시고 그보다 더 실력있게 하십시요
최고의 실력은 해야하는 사람을 겪려하는 것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여러분을 붙잡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것 언제나 율법입니다. 율법이 무익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가장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기준 그것을 넘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위대함과 영광과 명예로 부르고 있다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거기에 열어놓은 이 기독교의 권능 말입니다. 거기로 들어오십시요
그것을 겪려하십시요 어떻게요 본인도 하시고 하시는 분을 칭찬하시고 넘어진 분을 일으키시고 여러분이 하신 자랑으로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하신 최선이요 예수께서 하신 자랑입니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내 옆구리에 내 손바닥에 손을 넣어보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것이 자랑입니다. 우리가 박은 못, 우리가 찌른 창자국 이것을 자랑하십니다.
우리의 최선과 우리의 자랑이 어디 있는 가를 보십시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편들어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겪려 하는 것 우리가 더 가진 것을 나누는 것 여기서 더 가진 것은 인생에 대한 이해입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 넉넉함을 나눌 줄 모른다면 어디다 쓰려고 남겨두시겠습니까.
한 교회의 공동체가 되어 실력 없는 사람을 혈육으로 운명으로 목숨을 나눌 동료로 대하는 이 일에 대한 움직임과 책임을 지지 않고 열심을 내지 않는 다면 모아두었다 어디가서 쓸 것입니까 무엇에 이것을 바꾸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가 자기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직장에서 우리의 사회와 후손들 앞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서서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분들에 주어진 여러분의 현장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5~15
하나님의 능력, 예수
고린도후서는 시작이 이렇게 시비와 원망으로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의 믿을 만하지 못하는 실력,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그의 잘못을 지적한 문제로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이해 해야 하는 하는 것으로 이 질문을 이 시비에 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파하는 것이라. 사심이 없다, 이기심이 없다라고 얘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는 사심이 없다 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다가 답이 아니고 예수가 답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 증거자인 자기 자신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예수를 부각하는 것입니다.
변덕스러운 내 안에 예수를 알리셨기에 너희가 비난하는 변덕 혹은 결함 못남을 가지고도 이 예수를 너희에게 전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 예수를 받아라. 내가 못났다는 말로 이 예수를 거절하지 말아라
특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를 분명하게 들어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내 몬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 뜨림을 당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 보배가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이지 우리가 그 껍질이 그릇이 보배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특별이 구별하신다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을 설명하려면 당연히 진심 열심 각오 간절함 같은 단어를 동원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나 자신의 도덕성이나 영웅성으로 예수를 소개하려는데 초점이 흐려지지 않고 예수라는 내용이 주인공이 부각되기 위하여 나 자신이 손해 되어 예수가 부각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라는 주인이 그 내용이 너무 커서 우리의 못난 것으로 그 내용을 손해 보게 할 수도, 방해할 수도 없고 그 빛이 얼마나 찬란한지 깨어진 바가지에 들어 있어도 그 빛을 감출 수가 없고 못 난자의 손에 그 복음이 들려있어도 그 능력을 방해할 수 없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을 예수로 증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초월과 자신의 신적 거룩한 정체성을 예수라는 한 인간으로 구체화 함으로서 그리고 그 인간된 예수의 역사적 지위가 오해 받고 배신 받고 버림받고 수치 속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언하십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죠
하나님은 우리 편을 드사 우리의 소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납득시키십니다. 여기가 우리 신앙의 한 고비를 넘는데 중요한 문턱이지요
빌립보서 4:10 ~ 13
너희가 찾아와 주고 위로해 주어 너무 고맙지만,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한 것에 인하여, 너희의 신앙이 자라난 것에 인하여 기뻐한다.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지 당할 수 있느니라.
고전 4:10~12 예수는 나에게 주시려는 복을 그의 죽으심으로 증언했다. 섬기는 하나님,
예수를 믿는다는 말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 왜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이지요, 예수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역사와 실존이였던 이름입니다. 그가 한계 속에 들어 오셔고 오해 받고 죽음으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과정, 하나님의 비하, 하나님의 낮추심, 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빌 3:10
손쉽게 살게 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 놓아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 도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며,거래가 되기 원치 않으시며, 기계적관계가 되기를 용납치 않으십니다. 너희 마음을 달라 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사랑해 다오 입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는 것 이 영광의 자리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자리까지 우리로 포기하지 못하게 타협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 인생에 고난으로 등장합니다.
골 1:24 예수의 영광
고린도후서 4:11~18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자리, 고난
성경이 거듭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바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고 그의 운명과 그의 의미와 내용이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사건 곧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기대나 상상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의 가장 넘어서야 하는 문턱이 기독교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도덕성이나 기대를 만족시키는데 쓰지 말고 성경이 얘기하는 데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무엇을 만들었는가, 어떠한 운명을 그가 목적하셨는가를 알아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혼란은 예수를 믿음으로 갖게 되고 알게 된 우리의 운명과 정체성이 현실이라는 적대자 방해물 그리고 의심과 불안을 도전 받고 있다는 사실들 때문에 성경의 약속을 믿고 지켜나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것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롬 8:18
고난과 고난으로 인한 탄식은 벌이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요구하시고 계시고 영광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성경이 즐겨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지은 죄와 우리가 자초한 재앙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는데 쓰신다라고 성경은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지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그 잘못이 우리에게 역전이 되어 기적을 이룬다고 얘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즐겨 영광을 고난과 묶고 있고 고난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다는 성경적 주장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열어야 하냐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어 그 아들을 우리가 죽이는 방식을 수용하셔서 십자가가로 승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 생애에 일어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과 내용을 방해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고전 1:18
우리는 단어의 개념을 바꾸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최선의 방책입니다. 제일 좋은 것 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실력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깊어지는 법이요, 짐이 많으면 책임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 아닌가요 여러분이 고통으로 느끼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요
체념도 절망도 하나님이 쓰시면 그 자체로는 부끄러움이고 실패인데 무덤에 부활이 담긴 것 처럼 그곳에 하나님이 은혜을 담으신다는 것입니다.
롬 5:15
은혜를 받았으니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낙관적인 생각과 책임있는 명예를 가지십시요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리, 하나님이 베푸신 능력이며, 그 능력이 온전한 결과를 갖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 고난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우리의 가치를 시험 합니다.
환난이 오면 내가 그것을 이길 만한 실력이 있는가, 그것이 의지에 싸움으로 돌려 보내는 바람에 모호한 결심과 각오를 되뇌이며 실제로는 훈련이 되지 않고 실제적인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법에 붙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생명을 가진 자 영광과 은혜의 운명을 가진 진 자로서의 넉넉함이 우리 인생을 위협하는 사망과 폭력 아래 있는 공포와 의심과 원망을 벗어난 증인으로 여러분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해보면 안되는 날들이 벌써 많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어떤 식으로 우리가 이 약속과 이 기회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께 묶을 수 있을까?
막 9:14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그래 내일 또 해보자. 우리의 결심과 정성과 인내와 충성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만큼씩 나를 끌고 오시는데 나는 매일 실패한 기억뿐이 없는데 어느 날 보니 문득 우리가 많이 자라있다는 것입니다.
해결책을 찾는 것에서 돌아섰고 나 좋은 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안심하지 않는 아직도 답은 없지만 우리는 처음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기도하여 해결을 받기를 원하지만 나에게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억울해하거나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적이 내게 나타나서 내가 찬송하고 기뻐하면 좋겠지만 내가 그리 못한다 해도 하나님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자랑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입다물고 야코죽어 살아야 되지만 괜찮습니다. 이게 센거입니다.
은혜가 일을 하고 있어서 우리가 늘 자책하며 민망해 하는 것들이 나를 실제적으로 승리와 해결과 자랑 이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수긍합니다. 나는 실력이 없지만 포기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도 아시고 나도 압니다. 면목없지만 아직 믿고 있습니다.
기도도 하다 말고 확신없이 할 때도 많고 중언부언하지만 하나님 제가 주를 믿고 은혜 아래 있고 십자가의 승리가 있다는 것을 저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상입니다.
모범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일하시고 그의 백성들이 크는 현실입니다. 절망하지 마시고 체념하지 마시고 조급해 하지 마시고 그리고 스스로를 빈정대지 마십시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부수적인 유익들이 있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인내심 겸손 변함없는 실력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인생에 나 자신에 쌓여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영원한 영광의 중 한 것을 이루는 줄 내가 확신하노라 라는 고백을 합니다.
지금은 결과가 보이지 않지만, 그 결과가 깊고 무겁고 위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이 방법을 쓰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힘을 내고 동료애를 발휘해야 합니다. 교회로 모이고 한 마음 한 소망 한 형제 된 묶어주신 믿음의 동지로써 겪려하고 위로하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서로의 힘이 되고 함께 가고 자랑하고 찬송하는 자리까지 함께 가는 교회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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