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1~6
교회의 사명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신앙상의 갈등입니다. 신앙을 잘못 이해 하면 그것이 시비를 만드는 비정한 무정한 규칙에 불과해 지고 신앙을 제대로 나누면 거기에는 은혜가 담기고 사람이 큽니다.
교회는 옳고 그른게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진리와 감사와 만족에 관한 것인데 잘 잘못이라는 비정하고 무정한 비인격적 주장들이 언제나 하나의 시험으로 진정한 신앙을 도전하는 방해꾼으로 등장 합니다.
그것은 없애버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받은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 인생이 무엇을 만드는 것인가라고 물어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경기를 내용 있게 만들기 위해서 제한이 아니라 예술을 만들기 위해 무대같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모두가 구원을 얻고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다는 진정한 목적과 내용이 이런 그것을 돕기 위한 어떤 원칙 규칙 규범 잣대들이 원래의 목적과 의도를 대신해서 날립할 수 있습니다. 고린교회는 그 문제로 인하여 분파가 생겼죠
교회 공동체,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행위 그 본질적 내용은 우리의 완성 충만한 은혜의 승리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요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우린 믿을 수 없습니다. 약속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시비를 걸려고 건거죠.
이 반대파가 자기네 주장의 근거와 명분을 담기 위해서 이 사소한 것을 건 것입니다 진정한 목적을 놓고 옆길로 빠지게 만드는 것이 다 그게 잘못입니다.
진정한 목적을 위하여 도전하는 것이죠 그 도전을 이겨내야 되고 그 도전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핵심과 본질을 다시 회복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잘잘못의 문제로 끝으로 가면 심판과 폭력만 남고 사람을 살리고 기르고 채워야 하는 것들은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가르치고 기르고 충만케 해야되는 것이지요 거기에 여러 시험과 장애와 우리의 실패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완성시킨다 하는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겁을 내게 됩니다. 겁을 내면 뭐죠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자가 되죠
기독교 신앙에는 공포가 없습니다. 바울이 3장에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사도가 맞다. 내가 하나님이 보낸 복음을 제대로 너희에게 전했다 내가 사도인 증거는 너희다. 너희는 세상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거 꼭 기억해라 그 이야기 입니다.
유진피터슨 고후 2장 16 ~ 3장 6절
갈라디아서 5장 16절이하
예수를 믿고 나면 무슨 시비가 걸리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처럼 잘 살고 싶다 그런데 잘 않된다에 걸립니다. 잘 안되는 것을 이런 각성된 새로운 영을 가지고 새로운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마음에 세상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성령의 열매들에 대한 갈증이 생기고 소원하게 된 것의 그 변화 그 변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되지 않는 것을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해서 만족시키려는 잘 못된 행동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회개를 하죠. 만족할 만한 신앙생활을 못했다고 회개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은 안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책할 후회할 긍정적인 가치와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대조 속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에게 소원과 새로운 요구와 책임과 각성으로 요구되고 있고 우리 각각 소원합니다. 잘 안되니까 어떻게 한다구요 그렇게 못하는 시비를 거는 것으로 자신의 자책을 변명하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후 2:10
자책을 만회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시 죽이는 일로 가버리는 것, 살리는 일, 사는 일, 채우는 일, 승리와 영광의 길을 떠나서 저주하고 정죄하고 분노하고 보복하는 일로 가는 것.
교회안에서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은 여기에 기준이 있어요 그 일이 은혜를 향한 것인가, 은혜란 무엇이죠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마음에 성령의 열매를 소원하며,갈망하는 것들이 얼마나 굉장한가 입니다. 교회공동체로 모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이후에 무슨 열매를 얻었는가.
이제는 누구를 섬기는 자랑이다. 무엇을 섬겼냐, 무엇을 용서했느냐 너희가 그 변화를 어디서 받았느냐 하나님만이 하신 것이다. 누가 기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 기적은 왜 동원 됬습니까. 살리려고 ,승리케하려고,복되게하려고, 영광을 주려고 하나님이 기적을 동원하셨습니다.
너희를 수단으로 쓰지 않았다. 너희라는 존재가 가치있고 복된 하나님의 예수안에서의 목적을 완성시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너희에게 전했다. 너희의 변화와 지금의 삶이 허락되었다.
하나님이 얼마만큼 큰 정성과 인내와 무한한 권능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모두를 각자의 형편에 맞게 찿아와 그 한사람한 전부인 것 같이 사랑을 베풀고 요구하실까요 그리고 무한히 기다려 주실까요
기독교의 위대함입니다. 획일화되라고 하지도 않고, 잘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을 받는자로서 사는 자로,살리는 자로 살아라. 나는 용서하기로 했다.
여러분이 교회에 모이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르사 나를 대접하시고 내 안에서 영광받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계신다는 넉넉함과 그 다양함과 충성함으로 쳐다 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면 여러분이 세상이 빛이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여러분에게만 빛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실패해도 하나님은 변치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불만과 원망이 있는 것은 여러분이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의 목적하신 것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그 아들을 주신 열심과 진심으로 지키고 계십니다.
여러분 철도 드시고 믿음도 느셔서 여러분의 신앙고백과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이 일이 가지는 굉장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누리시는 기쁨과 삶의 자신감이 생기시기를 권합니다.
고린도후서 3:7~18
영광되어가는 길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왔을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그 영광은 잠시 있을 영광이기 때문에 수건으로 덮은 것 같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을 받아오는 것 보다 영광되다. 은혜 받으면 성령의 임재와 은사가 나타나기도하고, 감동이 있기도 한데 그것이 감동이 아니라 변해야 하는 거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헌신한 사람이지만, 그가 떠난 후에 교회안에 어려움이 들어오고 그 어려움은 결국 사도바울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고린도 전서, 후서를 쓰게 되는데 전서에서는 그들에게 생긴 문제들에 대하여 신앙적 해석,잘못된 것을 개선하는 것에 대하여, 후서에서는 자신에 대한 비난, 내가 하나님의 종이 맞다 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느냐 하면 3장5절에서 내가 전해준 복음은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큰 것이다.
내가 전해 준 복음은 너희 각각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우리는 이 영광에 대해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극복해야 된다. 이렇게 풀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8절 드디어 율법에서는 만들 수 없었던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영광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잘한 것이지만 영광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광은 훨씬 더 적극적인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과 정직하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짖지 않은 것이지만 선한 것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선을 행할 책임을 지는 것, 누구를 사랑할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그렇게 실제로 사는 것 이것이 정직입니다.
갈 3:19 율법을 주신 이유
율법을 준 이유는 우리가 적극적인 선 가치 명예와 영광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율법이 옵니다. 우리는 그 선을 지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 선을 넘어선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만들 때 가졌던 뜻,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시는 그것을 이루시죠 그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사심이 없고 하는 소극적인 신앙을 넘어선 적극적인 신앙은 우리의 하루 중에 없습니다.
예수안에서의 회복,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려주려고 한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죠 그의 후손이 되는 거죠. 그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회복된 운명이며 지위이며 기회이지요
지금 죄가 많고, 유혹이 많고, 육체를 가지고 한계 속에 붙잡혀 있지만 이 약속 속에서 우리는 예수를 만난 이 후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날 이 후로 이 길을 향하여 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붙잡아 끌어내리는 만큼이나 대조되게 우리는 신앙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해 볼 수 있습니다. 흠을 지워버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 신앙행위가 아니라 허락된 적극적인 기회를 살려고 애쓰는 것이 하루 하루의 신앙생활이죠, 현실이어야지요 한번 해 봤습니다 를 해야죠
우리가 세상이 알고, 우리가 우리에게 요구했던 어떤 체념 어떤 의심 어떤 절망 들을 넘어선 일을 하게 하는 것이죠
롬 6:1
예수를 죽음에서 꺼내어 새 생명을 주신 것 같이 새로운 삶과 존재를 허락하셨다. 무슨 질문 끝에 나온 것이라고요.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뭐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단 말이냐 너희에게 준 것은 죄 짓고 절망하고 헛된 자리로부터 은혜로 인하여 영광과 명예와 자유와 권리와 기회로 불려준 자리인데 이거 다 안하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은혜는 우리에게 새로운 책임을 주는 것입니다. 이 책임은 명예인 것 입니다. 해 볼 수 있는 기회.예전에 죄 아래 있을 때는 해 볼 수 없었던 것을 해 볼 수 있는 자리에 온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으면, 은혜가 우리를 끌고 간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죠 그것은 도덕적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잘잘못의 문제를 더 넘는 너희 인생에서 벌어지는 현실 앞에서 무엇이 더 가치 있는가 너 스스로 경험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지나와 보라 그것이 신자들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경험이 더 많고, 세상의 위협이 현실적이고, 하나님의 약속들은 현실적으로 잘 안보입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믿음이 좋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선 눈에 보이는 데로 결정을 하죠 그렇게 하면 지죠 물론 그러나 지면서 배웁니다. 아무리 져봤자, 아무리 타협해 봤자 아무리 엎드려 봤자 소용이 없잖아 이것이 신자에게 허락한 시간이지요
그래서 어디로 간다고요 나 성경이 요구한데로 해볼래 나 더 이상은 이렇게 안 살래, 이렇게 나오는 것이 우리가 오래토록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울을 보십시요 우리는 다 긴장하고 있습니다. 의심하고 있습니다.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뚫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수한 날들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너를 죽이겠다고 덤비고, 비난하고, 너를 방해하고, 무너뜨리고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너는 뚫고 나갈 수 있는 약속 속에 있다는 것을 너는 아는가 비명 지르고 도망갈 필요없다.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과 사망속에 부활을 증언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입니다.
그건 너무 먼 얘기라고요? 그리로 우리는 떠 밀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있는 생명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이,예수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랑과 명예를 여러분이 살아 내는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인생이 그래야 맞습니다.
엡 5:8
우리의 신앙이 무엇에 붙잡혀 있는가,
우리 만이 화해를, 회복을, 용서를, 격려를, 칭찬을, 자랑을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인하여 복음이 가지는 진정한 힘을 고린도 후서에 이렇게 약속해 놓은 것입니다.
책임있는 신자로 살아나가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할 수 없는 정황에서 우리만이 해야 되는 말을 하는 것, 행동을 해야 되는 것, 책임을 져야 되는 것, 그 증인으로 서는 것이지요 아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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